소유냐 삶이냐 홍신사상신서 24
에리히 프롬 지음, 정성환 옮김 / 홍신문화사 / 1991년 11월
평점 :
절판


인상 깊은 문구 : 그들에게는 자신의 철학은 상식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뿐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개념이 일반적으로 인정된 좌표계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이란 이름은 예전에 기다 겐이라는 일본 철학자가 저술한 <현대사상지도>에서 처음 보았다. 그의 학문적인 사상에서는 프랑크푸르트학파라는 독일의 지식인 집단이었다. 당시 1920~1930년대에 활성화하였으나, 독일의 히틀러와 나치에 의해 핍박을 받자 외국으로 망명가거나 혹은 전쟁이 끝난 직후 다시 독일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들은 20세기 중반 전후로 세계의 학문과 사상, 철학의 중심이던 프랑스의 구조주의와 더불어 활발한 연구를 한 집단이다.

 

때마침 세계 2차 대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인권을 위한 자유가 아니라 오로지 자본의 자유만을 추구한 자유주의와 스탈린이 추구하던 파시스트적인 공산주의, 기존 유럽사회 만행하던 파시스트이나 겉으로는 사회주의로 둔갑한 사회파시스트들, 이 모든 것이 어지러운 유럽과 전 세계적으로 퍼진 현상이었다. 지식인이란 그저 독재자와 탐욕의 얼룩에 물들인 자들에겐 방해꾼에 불과했다. 그런 사람 중에 발터 벤야민은 나치를 피해 도망치려고 했으나, 그것이 좌절되어 독약을 먹고 자살을 한 지식인이다.

 

그런 세계 속에서 전쟁도 끝이 나고, 냉전사회가 왔고, 인간은 다시 평화로 향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막상 그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에리히 프롬은 그런 복잡하고 난해한 세계 속에서 어떻게 인간이 그렇게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의 서적 <소유냐 삶이냐>는 말 그대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을 어떻게 보고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를 고찰하고 비판하고 생각해보려 하는 철학도서인 것이다.

 

예전에 내가 알던 블로그 이웃이 자신의 블로그 화면에 에리히 프롬의 사진을 올려놓고, 그의 글귀를 적은 놓은 것을 보았다. 당시에 <소유냐 존재냐>이란 것이었는데, 원문이 <To Have or To Be>라는 제목이었다. 이렇게 보아나 저렇게 보아도 가질 것이냐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위에 있었던 많은 사건들을 겪고 난 뒤에 그가 낸 서적 중의 당연히 명작이 되어버린 이 도서에서 우리는 무엇을 소유하려고 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흔히 우리들은 쉽게 이렇게 말하거나 생각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만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므로 함께 살아야 한다. 물론 이런 말은 매우 깨끗하고 아름답고 누가 보더라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문구일 것이다. 그러나 막상 현실은 더 반대로 가고 있었다. 오히려 그렇게 여기려 하는 사람일수록 더 심한 존재의 위험성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삶이냐>에서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을 만큼의 이상을 원하고 노리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이다. 특히나 우리의 일상을 능동적인 동사형으로 언어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이고 명사적인 언어로 채우는 것이었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사랑하는 생겼다고 가장하자. 그러면 보통 우리는 “나는 애인을 가지게 되었다.” 내지 “나는 애인을 가졌다.”라고 한다. 즉 목적의 대상이 하나의 존재인 주체가 아니라 하나의 소유물인 객체로서 보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말을 어떠한가?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물론 의미적으로 애인이 생긴 점은 같으나 이것은 소유와 존재로서 분리되어 보인다. 전자는 사랑하는 사람이란 존재가 자신의 소유물이고, 후자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소유물이 아니라 그 사람만의 소유물이란 점이다. 즉 내가 가지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인지 아니면 그 사람과 유대감인지에서 판가름이 나는 셈이다. 솔직히 이런 사소한 단어와 언어에서 우리는 어느 순간 소유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하다. 이런 일상적인 흐름에서 우리 인간들은 쉽게 놓치고 만다.

 

왜 그럴까? 너무 당연한 것에 대하여 의문과 비판, 그리고 자아고찰이 부족하거나 필요 없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소유라는 것은 자기가 항상 가지면 가질수록 계속 부족함을 느끼게 되는 물이 빠진 항아리이다. 물론 항아리 안에 물이 차있지 않으면 그것은 항아리의 활용가치가 상실하게 되어 그것은 물리적으로 항아리독이라도 실질적으로 아무 필요 없는 존재일 것이다. 따라서 최소한의 항아리가 가진 기능을 사용해야 하는 점이다. 그러나 항아리에 필요 이상으로 물을 붇게 되면 물은 항아리는 넘칠 것이고, 그 수압이 강할수록 항아리의 어딘가에는 물이 새게 될 것이다.

 

그 물은 새더라도 결국 그 물을 부은 인간의 경계 안에 있는 것이고,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들어가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그 넘칠 물 이상으로 물을 더 집어넣으려고 한다. 오늘날 이런 모습을 우리 주변과 동시에 세계적으로 볼 수 있다. 자신에게 충분한 재산이나 금전적 능력이 있어도 타인의 재산을 가로채거나 약자들을 갈취하거나 착취하는 이들, 충분히 세계적으로 안정화할 수 있는데도, 무기와 병력을 늘려 전쟁의 위협을 야기하는 존재들, 이 모든 존재들이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삶이냐>에서 지적하는 인간의 모순적인 현상일 것이다.

 

자기가 가지려고 하면 할수록 더 많은 것을 남에게 빼앗아하고, 그 빼앗기 위해 준비하고 소모한 자신의 소유물을 대체하기 위해 또 자신의 욕망에 이끌린다. 자기의 소유만이 오로지 정의이고, 그 외의 존재들은 의미가 없다. 인간에게 과연 삶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많은 난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관과 목표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의 물질만능주의적인 요소는 인간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인간이란 통계적으로 나누어 일부 10% 내외의 존재들은 수치적으로 사라진다.

 

인간의 존재가 언제부터 수치로서 대하여 그렇게 실행해야 하는 것일까? 인간에게 확률의 숫자로서 그들의 삶을 결정하고, 그들에게 삶의 기회를 박탈하여 그들에게 충분히 줄 수 있는 인간으로서 가치는 소실된다면 점점 세상은 각박해 보일 수밖에 없다. 에리히 프롬의 그런 비판은 자본주의와 관료주의로 통해 인간의 가치가 돈으로서 결정되고, 관료주의로 통해 인간의 양심은 맹인처럼 변했다. 과거 독일 나치에서 가스실을 보낸 어떤 사람이 자신은 단순히 상부의 지시를 따르기만 바빴다.

 

그는 집에서는 평범한 가장이고,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양심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을 가스실로 직행했다. 그는 그 일에 대해 양심에 가책도 없었고, 그저 시키는데로 하는 기계적인 삶을 살았다. 결국 그는 그것에 대하여 아무런 감상도 느끼지 못함에 따라 전범재판소에서 유죄를 확정 받았다. 에리히 프롬은 그렇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한 채 남을 괴롭히는 것보다, 차라리 사디스트처럼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자가 오히려 인간적으로 여겼다. 그는 고통을 주더라도 그 고통에 대해 타인과 공유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타인과의 공유에서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가 이 책의 궁극적 목표다. 또한 위대한 성인인 붓다, 그리스도 같은 사람들은 자기가 스스로 소유하지 않으려 했고, 그 소유를 남과 공유하려 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큰 존경을 받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 존경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성인을 존경하고 떠받들어도 결코 그 성인들처럼 자신의 소유를 나누어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성인들의 행위를 한 것을 보고 그들을 동조하는 것으로 모든 성스러운 행위를 했다고 믿어버리는 어리석음에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이 모이고 모여 그 성스러운 존재를 이름삼아 자신들만의 소유를 기획하고, 그들은 거기에 매달리는 삶을 살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삶을 창조하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파괴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그는 인간의 윤리관에서 자신이 가진 것을 남에게 베풀어 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가치라고 했다. 하지만 현대사회로 갈수록 인간들은 니체가 비판하는 “자신만의 사람”에게만 친절하고 그 이상으로는 배타적이다. 자신의 주변사람에게 친절한 것은 결국 인간은 자신의 주변사람이 결국 자기의 소유물이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계속 상승 중이고, 그 대상은 한계가 있다. 어느덧 그것이 범접하는 순간이 온다면 우리는 그 무엇이라도 소유할 기회라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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