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크리틱 - 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한길사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가라타니 고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명성을 듣고 있었다. 서구사회의 철학과 사상이 동양으로 유입되면서 현대사상과 철학은 거의 서구사회의 기준으로부터 시작된다고 가장된 표현이 아닐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동양에서 서구철학에 대한 명백한 판단력과 더불어 세심한 고찰과 정보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분명 가라타니 고진일 것이다. 그 정도로 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세계는 매우 심오하고 깊다는 점이다.

 

 

단지 문제는 그의 책을 읽으면 보통 고전처럼 읽고 거기에 충실히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고전을 가라타니 고진이 해석하여 그것을 새로운 관점과 대안으로 돌려놓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가타라니 고진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비판을 할 수 있는 여지까지 갇혀버린 셈이다. 혹은 가라타니 고진의 책 자체가 어렵고 난해할 수 있다. 그러나 문체 자체는 어렵지는 아니하나, 그가 가진 철학과 사유의 폭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넓고 넓다.

 

 

그가 트랜스크리틱에서 왜 비평의 전환이라는 것을 전하려 했는가? 다소 같은 단어의 사용이 반복적으로 나와 약간의 지루함이 오기도 했으나, 그가 보는 사실은 칸트와 마르크스를 어떻게 다시 해석하는가이다. 칸트가 평생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같은 도시에 80년 동안 눈 감는 그 날까지 머물렀다. 심지어 그는 베를린(대학교)에서 초빙 받아도 가지 않았다. 칸트는 자신이 학문적으로 자유롭기 바란 것이지, 그 이상을 원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베를린에 갔다면 그의 3대 비판서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 인류의 고전 중의 고전인 3대 비판서는 존재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칸트의 성과는 인간의 인식과 그 인식으로 통한 실체적 행위이다. 그는 인간을 대함에 있어서 수단이 아닌 항상 목적으로서 대하라고 한다. 그의 사상은 타인이란 제3의 존재를 인정하는 셈이다. 본래 책은 개인적 관점으로 서술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물론 객관적인 정보와 과학적인 자료로서 꾸미는 것은 분명하나, 그 모든 것은 개인으로부터 시작이다. 하지만 칸트는 개인의 영역보다는 제3자인 타자로서 보려한 것이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부분은 칸트의 시도는 항상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고방식이다. 모든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에서 신이란 절대적 존재로 인해 유럽은 지동설이란 천체운동을 신봉했는데,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지동설이어야말로 그의 발견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 중요성은 단순히 지구가 돌고 있다와 하늘이 돌고 있다 로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단순히 돌고 있음은 과학적인 법칙에서 다루는 1부분이나, 그 부분은 모든 사회와 인간들의 사고에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지동설이 아닌 천동설이 옳다고 하는 것은 지구는 절대적이고, 그 절대적인 지구는 결국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뒤받쳐주는 하나의 절대적인 권위라는 점이다. 중세 유럽의 과학적 사고는 그야말로 위험한 적이 아닐 수가 없었다. 절대적 존재가 만들어 놓은 지구야 말로 절대적이지 않은 변방의 별이라는 사실은 모든 종교의 부정이다. 종교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유럽사회는 대중을 신앙심을 부여함으로 만들어내는 정치적 도구와 같았다.

 

 

근대문학의 종언에서도 가라타니 고진은 현대 사회에서 종교에 대한 비판을 걸고 있는데, 그것은 종교가 종교적인 부분을 탈피해야 더 종교적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것은 국가와 결탁하고, 자본주의사회구조 이전부터 종교는 자본과 결탁했다는 의미이다. 그런 부분에서 트랜스크리틱에서 칸트를 이은 마르크스가 등장할 때 국가정치 이데올로기에 종교란 그저 착취를 합리적으로 보이기 위한 도구라는 것을 주장한다. 종교는 과거 신화를 단절시키고, 그 신화를 미개한 것으로 보아 파괴했으나, 사실 계몽이라고 하는 종교적인 계시는 결국 억압이란 새로운 신화로 탈바꿈 한 것처럼, 계몽은 처음부터 없을지도 모른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읽어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계몽이란 주변의 영향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깨우치고 나오는 것이야 말로 시작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트랜스크리틱에서 칸트의 계몽은 분명히 마르크스로 이전된 것은 분명하다. 마르크스는 다소 칸트와 다른 노선을 걸어가나, 그의 행동을 보면 계몽의 현실화를 노력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라타니 고진은 마르크스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다른 도서보다는 자본(資本) 즉 das kapital에 대해 고찰해야 하다고 했다.

 

 

그의 과학적이고 사회구조를 밝혀두는 하나의 체계도서야 말로 마르크스의 정신과 사상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은 현실의 문제와 그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규명한다. 고전경제학들이 공황을 부정했다고 하나, 마르크스가 살던 시절에는 분명 공황이 존재했었다. 따라서 자본은 그런 공황과 불황, 호황까지 모두 겪은 후에 저술한 것이고, 자본주의 이전인 중상주의 내지 절대왕정의 사회에 대한 부분까지 다루고 있었다.

 

 

어떻게 본다면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의 강령이나 지침보다는 오히려 현실적인 문제를 계속 되돌아보는 것과 같다. 그래서 가라타니 고진은 마르크스를 알기 위해서는 자본을 읽어야 하는 점이다. 사실 마르크스주의에서 마르크스는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이길 거부하고 코뮤니스트로 보기를 바랐다. 그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하나의 사상적 뿌리로 맺게 된 것은 그의 친구 엥겔스였다. 엥겔스가 마르크스주의를 만든 장본인이고, 엥겔스는 마르크스 자신부터 체계화하려 하지 않은 마르크스의 학문을 세분화한 것이다.

 

 

물론 그 덕분에 20세기를 지나 21세기 지금도 마르크스의 도서들은 많은 학문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가 비판한 것은 정치경제학적인 관점이었다. 당시 마르크스가 자본을 저술할 때 공업화와 자본주의가 활성화하던 영국이었다. 영국의 경우 세계적인 식민지를 건설하고, 많은 무역이 존재했다. 마르크스가 살던 영국에 이미 고전경제학의 대부인 아담 스미스와 진보적인 경제학자인 데이비드 리카도의 서적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영국의 자본주의는 다른 자본주의와 달랐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자본주의는 국내경제만 보고 있을지 모르나, 사실 진정한 자본주의는 세계자본주의인 셈이다. 마르크스는 그런 상황을 잘 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다룬 부분에서 빵의 원료인 밀의 유통과정과 더불어 화폐가 중요한 자본주의의 도구로 상승한 원인 역시 무역에 의해서이다. 가령 화폐 G에서 상품 W로 이전되다가 다시 이윤인 G'가 돌아오는 과정에 W의 이동이나 생산에 따라 이윤이 증가된다.

 

 

대신 기존 무역에선 G-W-G' 과정은 무역의 차이로 빚어졌지만, 공업화와 대규모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G-W-G'는 상인인 자본가가 모든 과정을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임노동으로 통해 잉여가치를 낳음으로서 이익을 발생시키는 점이다. 문제는 노동자들이 노동을 하면할수록 이윤이 돌아오거나 삶의 질이 향상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수준은 낮아지고 피폐해져 가고 있던 것이다. 결국 비밀은 W의 과정에서 12시간 노동시간 중 6시간은 자신의 노동임금으로 대체될 시간이나 나머지 6시간은 착취로 통해 자본가들에게 돌아가는 점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이런 착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넘어가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우리가 인식하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는 일한 만큼 받아가나, 공산주의는 필요한 만큼 생산하는 것이다. 잉여가치가 발생할 경우 그만큼 누군가 착취당하는 점이다. 하지만 문제는 세계적으로 물자와 에너지, 토지와 인구는 골고루 분포되지 않은 점이다. 게다가 민족주의적인 요소가 쇼비니즘으로 변모되어 그 민족주의가 국가체계의 존립을 안정화한다.

 

 

가령 일본이 관동군을 일으켜서 대동아전쟁을 일으킬 때도, 그 민족주의적 근성은 천황을 위시한 군국주의라는 강력한 파시즘을 탄생했듯이 말이다. 그래서 네이션-스테이트-자본이란 3가지 구조가 단단히 얽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민족주의에 국가적인 통제력 거기에 자본력의 구조적 결합은 인간들을 거기에 갇히게 하기 좋은 함정일 수도 있다. 가령 나폴레옹의 조카로서 프랑스 왕으로 올라간 나폴레옹 3세는 투표로 인해 뽑힌 군주이나, 그 절대적 지지자는 농민이었다.

 

 

그리고 러시아 황제 차르의 경우, 그가 아무리 정치에 대한 점수가 0점이라 거기에 대한 불만으로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나서 혁명이 성공해도, 결국 러시아 농민의 쇼비니즘적인 요소로 레닌과 트로츠키는 10월 혁명만 성공했을 뿐, 그 이후에는 스탈린에 의해 농락당한다. 물론 레닌이 죽고 트로츠키가 추방된 후에 트로츠키를 궁지로 넣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외면한 쿨라크를 비롯한 농민 대부분은 모두 재산과 터전을 잃고, 강제노역에 시달린 채 인생을 마감한다.

 

 

생각해보면 국가에서 국민들의 정치적 참여가 과연 민주적이고,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공화주의냐는 의문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갈림길은 그다지 없는 것 같다. 예전에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란 책에서 밀은 자신의 철학적 자세에서 국민들의 정치보단 시민들의 의한 정치를 원했는데, 시민이란 단순히 시(市)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어느 일정한 기준 이상이 되는 지식인 내지 엘리트들이다. 물론 그들은 적정한 도덕심과 윤리성을 시험받아야 마땅하나, 사실 그 동안의 역사적인 현실로부터 고찰해보면 대중들의 정치적 권리는 정당한가? 라는 의문이 든다. 도리어 그들은 자유를 위해 자유를 파괴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민주주의를 파괴한 아이러니를 만들어낸 주체이기 때문이다. 물론 독재자들은 이것을 잘 이용한다.

 

 

그래서 칸트와 마르크스를 뛰어넘고 싶은 가라타니 고진의 욕망은 쉽사리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임은 분명하다. 그래도 그는 계속 이 책으로서 혹은 계속 그의 사유를 적어감은 어떻게 보면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란 현실이 아닌 이상이듯이 이상을 위해 가는 것이 철학자가 아닌가 하는 심정이다. 물론 마르크스는 플라톤에 반대되는 사상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도 칸트와 마르크스로 통해 현실을 돌아보려는 것은 현재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적 구조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아가는 것에서 중요하다. 인간 수명이 80살이란 요즘처럼 인간의 생명은 다른 생물에 비해 길기도 하나, 자신의 죽음을 관념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죽음과 삶은 언제나 손바닥 위와 아래와 같다.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고 있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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