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으로서의 정의
존 롤즈 지음 / 서광사 / 198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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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던 황경식 교수님이 은퇴한 기사를 보았다. 서울대학교 출신에 박사과정을 마치고 미국 하버드대학교 철학과에서 직접 존 롤즈의 지도 아래 논문을 쓴 그의 행적으로 봐서는 한국의 철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한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활동상을 보면 롤즈의 철학과는 많이 격리된 느낌도 없지 않았다. 가령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수를 한 점과 저자 중에서 현직 육군사관학교 교수도 있었다. 이때 저술시기가 1988720일에 초판을 낸 점을 생각해보면 그들의 저술 시기는 1987년부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생활에서 한국의 엘리트로서 철학의 연구실적을 보면 분명 인정해야 하나, 그가 번역한 도서와 저술한 도서에서 정의, 공정, 윤리, 도덕의 원칙으로 보자면 조금 지식인으로서 활약은 저조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 책의 서문에 1980년대와 관련하여 롤즈와 맺은 오랫 동안의 인연으로 생긴 애착인지는 모르나 엮은이의 솔직한 심정은, 롤즈의 <사회정의론>이 한국 사회를 전면적으로 구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민주화를 지향하는 사회 개혁에 크게 보탬이 될 많은 시사점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마르크스주의적 좌익 이데올로기와의 한판의 대결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그런 한에서 한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모든 사회 철학도들의 보다 진지한 관심과 연구가 절실히 요망된다고 본다.”

 

솔직히 말하여 좌익과 우익의 경계에서 롤즈의 만민법에서는 진보라는 것은 역사적 인식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그 시작은 철학적 인식이라고 했다. 당시 군사정권 아래 지식인으로서 활동하던 이들에 대해 황경식 교수의 저 머리말은 모욕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면 롤즈의 <사회정의론>까지는 아니나, <정의론>을 읽어본 바에 의하면 과연 그 시대에 좌익에 반대되던 우익의 철학에서 롤즈의 철학 역시 당시 한국에서는 좌익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롤즈의 철학은 독일 관념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와 영국의 자유주의적 공리주의를 추구한 존 스튜어트 밀의 철학을 많이 계승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롤즈의 철학은 상당히 이성을 중시하는 점을 알 수 있다. 만민법에서 이루어지기 어려우나 유토피아적인 자유주의 혹은 칸트가 원한 구성주의적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많은 이들의 이성적 능력을 요구했다. 현재나 당시의 한국사회에서 이성의 정치라는 것은 무리가 많다. 이성의 정치라는 것은 합리주의적 이기성이 바탕으로 하는 전형적인 공리주의가 아니라, 타인의 이익과 입장을 고려하는 칸트의 정언명령이 바탕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황경식 교수의 머리말에서 롤즈의 철학은 20세기 말에 완성된 철학이나, 21세기 철학에 매우 어울린다. 정치적인 영역이나 사회적 영역에서 나는 롤즈의 철학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하나의 교과서다. 그러나 그 철학적 입장에 대해 번역하여 이 사회에 기여하려던 사람들이 당시 국민들이 당한 억압와 통제에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마르크스주의와의 한판의 대결을 외치는 점에서 오히려 한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모든 사회 철학도들을 걱정하기보단 본인 스스로가 더 걱정해보는 것이 어떤가 싶을 정도다.

 

물론 롤즈의 서적을 보면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개념과 정의에 대해 고민하던 나에게 황경식 교수가 번역하고 직접 롤즈로부터 시사 받음은 존경할 사항이다. 하지만 1988년의 번역본이 2010년에 다시 인쇄되어 나올 때 황경식 교수는 다시 머리말을 수정하여 지금의 한국과 앞으로의 한국에 대해 고민하는 글을 올려야 했다. 사실 1980년대나 2010년대의 마르크스주의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과 같은 민주주의의 역사가 매우 오래된 유럽국가에선 매우 중요한 학문적 위치다. 영국의 케임브리지대학이나, 프랑스의 콜라쥬 드 프랑스나,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대학교 같은 경우 세계의 석학들을 배출하는 명문으로서 그곳조차도 마르크스의 가르침은 유효하다.

 

20세기에 걸쳐 유럽의 민주주의가 마르크스주의와 같이 대립과 결탁 그리고 경쟁과 상호연구로 통해 발전한 사실을 생각할 때 황경식 교수가 적어놓은 <공정으로서의 정의>라는 도서 머리말은 상당히 구시대적 발상에 가깝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와 당대에 살아가던 존 스튜어트 밀은 아담 스미스, 제레미 벤담, 제임스 밀과 같은 영국 대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그런 사람조차도 마르크스의 과격한 행동에 대한 원인을 알고 있었고, 그도 역시 공감했다. 단지 그 과격함을 밀은 다소 토론과 대화로서 풀어나가려 했다. 밀이 지성의 성인이란 말이 붙은 이유는 바로 그러하다.

 

밀과 마르크스의 차이는 분명 존재하나, 그들이 공통적 사고방식은 가난하고 열악한 사람들에 대한 인간애적인 윤리의식이다. 단지 마르크스는 그 현실을 부정하려고 했고, 밀은 중용의 자세를 지키려 했다. 그런 점에서 밀과 칸트의 철학을 이어가는 롤즈의 철학에서 황경식 교수의 머리말은 당시 엘리트 철학자가 군사정권에서 살아가기 위한 방법론 중에 하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이나 다른 롤즈의 도서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상황이 있다. <공정으로서의 정의> 이 책의 본문 339쪽에 나와 있다.

 

각 개인은 모든 사람의 동일한 자유의 체계와 양립 가능한 평등한 기본적 자유의 가장 광범위한 체계에 대해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다음 두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즉 불평등은 (a) 사회의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 이익을 되어야 하며, (b) 공정한 기회 균등의 조건 아래에서 모두에게 개방된 직책과 직위에 관련된 불평등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다음 페이지 334쪽을 보면 롤즈가 주장하는 기본적 가치에 대해 다섯 가지의 항목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1) 첫째, 다음의 목록에 제시된 것 같은 기본적 자유들 사상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 결사의 자유, 인격체의 자유와 통합성 그리고 법에 의한 지배에 의해 규정된 자유, 끝으로 정치적 자유들.

(2) 둘째, 다양한 기회라는 조건 아래에서의 이주의 자유와 직업 선택의 자유.

(3) 셋째, 직책과 책임 있는 지위, 특히 주요한 정치적경제적 제도에서 그것들에 따르는 권력과 특권

(4) 넷째, 소득과 부.

(5) 끝으로, 자존감의 사회적 기반

 

롤즈는 <공정으로서의 정의>에서 최소 수혜자들에 대한 기본적인 보장을 주장했다. 그들의 보장을 원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언젠가 사회적으로 크게 이익이 될 것이란 점이다. 과연 나도 그렇게 생각하듯이, 최근 한국사회의 인구감소가 큰 문제로 이어진다. 앞으로 일할 사람들이 없어서 고령의 노인들이 계속 노동을 해야 하며, 노동이 불가한 노인에 대해서는 국가가 부양하는 연금이 점차 고갈되어간다는 점이다. 여기에 대한 자원 확보를 해야 하나 젊은 계층의 부족이 결국 재원의 부족으로 이어지고, 거기에 대해 국가전반적인 경제활동이나 특히 군사전략에 큰 영향이 간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대부분의 가정이 출산에 대한 부담과 출산 이후 교육에 대한 부담이 결국 우리 사회에 대한 갈등으로 연결되는 사항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롤즈는 불평등한 경제적사회적 위치는 인정하되, 그들이 충분히 사회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라는 것이다. 롤즈의 <정의론>에서 인간이 유일하게 자유주의국가에서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교육으로 통한 성장이다. 그러나 그 기회가 평등하지 않고 고르지 않을 시에는 최소 수혜자들로 하여금 삶의 목표를 상실하게 되는 점이다. 최소 수혜자들에 대한 배려로 통해 그 사회의 극대화된 이익을 목표로 하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 내에서 자유주의와 공리주의라는 2가지 테마의 조건일 것이다.

 

따라서 이런 부분들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과 많은 연계점을 두고 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도 다루듯이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돈과 지위보다는 그 사람이 어느 사회에서 가장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라는 점이다. 물론 고대 그리스 아테네 폴리스라는 도시국가에 살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소수의 남성이 직접 참여하는 귀족적 민주주의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인간의 능력을 펼칠 수 없이 자신의 능력이 아닌 위치적 한계에 가로 막힌다면 그 당사자들은 많은 상실감을 느낄 것이다.

 

밀의 경우, <자유론>에서 언급했듯이 분명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해 엄중한 판결로 통해 그 죄에 해당되는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 사람이 1번의 죄로 모든 인생을 파괴당할 부당함까지 받으면 안되는 것이고, 그 사람이 죄의 대가를 치룬 후에는 다시 사회에 복귀하여 그가 제대로 인간사회에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또한 그런 사람이 다시 재발되지 않기 위해서는 치안의 힘도 필요했으나, 왜 그 사람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제대로 알고자 했다. 롤즈의 <공정으로서의 정의> 역시 그런 부분을 인정하고 있었다. 최소 수혜자들의 박탈감은 결국 사회적으로 비합리적인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롤즈는 <정의론>에서 인간이 부정의를 실행할 경우는 오로지 더 큰 부정의가 생기지 전에 방지해야 할 경우만 그렇다는 점이다. 결국 최악의 상황을 피할 때만 가능하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그런 극단적인 부정의를 피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더더욱 부정의를 저지르는 상황을 볼 때가 있다. 롤즈는 인간의 합리성은 오로지 합리적인 이성에서만 찾는 것이지 합리주의적 이기성에서 찾으려 한 것은 아니다. 정치적 참여에서 자신의 이익보단 공공선을 추구하나, 투표의 현실은 그런 이성적 판단은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그래도 롤즈는 자유에 대한 인간의 이성을 매우 중시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그의 자유에 대한 기본적 자세는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신체의 자유, 정치적 자유였다. 당시 민주화 운동아래 자유라는 이름은 모두 존재할 수 있었던가? 그래서 나는 자유에 대한 롤즈의 철학에서 페이지 99쪽에 나온 자유의 원칙과 그 99쪽인 3장 최소 극대화 기준을 옹호하는 몇 가지 근거라는 편의 번역자가 황경식 교수라는 점에서 모순을 느낄 수밖에 없던 것이다. 지금의 롤즈의 철학이 통하는 사회라면 나는 절대적으로 찬성하고 그것을 위해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정녕 그것을 이론화하여 번역한 사람이 그런 책임을 외면한 점은 분명 비판받아야 할 점은 분명하다.

 

이 책에서 분명히 주장하고 있다. “공정으로서의 정의에서 사회적 통합성의 개념은 자유롭고 평등한 인격체들 사이의 협동 체계로서의 사회라는 개념으로부터 출발한다. 사회적 통합성과 공공 제도에 대한 시민들의 성실한 참여는 그들 모두가 동일한 가치관을 채택한다는 사실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기본 구조를 통제하는 정치적 정의관을 그들이 공공적으로 채택한다는 사실에 의해서 보장될 수 있다.”

 

롤즈의 모든 서적에서 시민불복종이란 주제가 있다. 국가기관이나 어느 특정세력이 부당한 권력으로 통해 부정의를 일으킨다면 시민들은 거기에 대해 저항해야 하며, 그들은 이성적으로 대하여 그런 부조리한 요소를 바꾸어야 하는 점이다. 롤즈의 민주적 자유주의는 결국 시민사회의 이성의 실천이다. 그래서 칸트와 밀의 철학이 계속 겹쳐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충분히 그럴 능력이나 여유가 되면서도 혹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조건이 못된 사람도 많을 것이다. 롤즈의 최소 수혜자의 배려는 그런 이성이 통하는 공정으로서의 정의 세계를 추구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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