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와 문명 - 프로이트 이론의 철학적 연구 나남신서 1065
허버트 마르쿠제 지음, 김인환 옮김 / 나남출판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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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자연 상태의 그대로 존재하는 것들을 인간의 노동으로 통해 잉여가치를 창출하고,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문명으로 이어진다. 결국 인간은 원천적으로 자연과 분리될 수 없었던 존재이다. 가령 자연의 세계에서 인간의 노동은 과일이나 야채를 찾아 먹거나 혹은 산짐승 내지 물고기를 잡아먹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본적인 열량, 비타민, 철분, 단백질 등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영양분들을 섭취한 것이다.

 

그리고 노동이란 과정은 예전처럼 수렵이나 채취가 아니라 농업국가 형성으로 인해 문명이 발생되고, 특히 불이라는 화학적 반응으로 통해 열을 내는 존재를 발견했다. 인간의 위대한 발견인 불은 프로메테우스가 주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하나, 더불어 불은 문명이고 그리고 문명이란 이름 아래 나날이 진행되던 대립과 분쟁의 산물이었다. 인간에게 문명이란 무엇인가?

 

나는 최근에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인간의 존재는 문명의 세계에 살아가는 존재이나 그 존재는 문명 속에 가까운 존재인지 혹은 그 이상의 너머에 있는 영역을 탐하는지 말이다. 적어도 인간은 언제나 도시사회와 문명기술 속에서 물질적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하나, 진심으로 그들은 행복함을 느낄 수 없다. 예전에 한국사회에 농업사회로 진입할 때는 인간에게 그런 정신적 억압이 있었을까?

 

물론 조선시대와 그 이전에는 농업국가와 더불어 중앙집권체계라는 봉건사회라는 한계점이 있었다. 문명의 발전은 조직사회로 통해 억압, 통제, 착취, 권력이 합법화 되었다. 물론 문화인류학자의 말에 의거하면 농업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물이라는 것이기에 치수와 이수의 관료화의 독점은 식량을 통제하는 방법이므로, 대부분의 대중들은 거기에 속박된다는 점이다. 모든 국가는 아니하나 적어도 동아시아국가인 중국을 비롯한 한국의 경우는 이와 많은 유사점이 보인다.

 

그래도 이때는 그나마 자연 상태에 놓인 땅을 경작하여 수확했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노동을 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적응력은 인간 본연으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욕망을 대체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타나토스, 즉 인간이 가진 중요한 욕망 중에 삶에 대한 욕망인 에로스와 죽음을 향하는 타나토스는 항상 대립되기도 하나 마주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간 사람들은 타나토스에 대한 본질적 욕망은 지금 현대인보다 덜 히스테리 할 것이다.

 

왜냐하면 농업을 하는 것은 곧 계절의 변화와 토지의 생산력에 우리가 따라가기 때문이다. 또한 지형적으로 농업을 하는데 있어서 배산임수(背山臨水)라는 지형적인 조건을 많이 따랐다. 뒤에 산이 있고, 강을 마주하고 있다는 점은 항상 자연과 일치하려고 하는 점이다. 한국의 신화에서는 이런 자연과의 관계에 대해 다루는 창세신화가 있다. 미륵과 석가라는 창세신화는 미륵이 우월하고 뛰어난 존재이나 석가가 속임수를 쓰는 바람에 인간세상을 통치하는 사람은 미륵이 아닌 석가가 된다.

 

미륵은 석가의 행위에 분노하여 인간 세상에 온갖 부정한 행위들이 생길 것이라며 심한 저주를 퍼붓고 사라진다. 후에 석가를 따르는 무리 수천 명 중에 2명이 석가가 알려준 화식을 이용하지 않은 채 굶어죽었는데, 후에 소나무와 바위가 되었다. 소나무와 바위는 변하지 않고 영원불멸의 세계를 의미한다. 그것은 영원불멸한 세상 즉 죽음에 대한 회귀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하면 자연에 대한 동경하는 인간의 심리이고, 그것이 곧 죽음에 대한 욕망일 것이다. 하지만 죽음이 죽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영원성의 삶일 것이다.

 

타나토스적인 한국인에 대한 모습에서 일생생활에서 흔히 사람이 죽게 되면, “하늘로 가셨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의 시체들은 산에 이장하여 묘소를 만든다. 최근에는 토지가격이나 관리문제, 환경적 여건에 따라 화장을 하는 추세이나, 전통적으로 한국의 문화적 요소를 본다면 이런 죽음에 대한 요소가 즉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이끌림은 분명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와 달리 현대는 어떠한가?

 

예전에는 우리 사회나 혹은 유럽조차도 농업이었고, 또는 산, 바다, 강에서 수렵을 즐겼다. 인간에게 자연은 언제나 열린 공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인간에게 자연이란 낯선 존재가 되었다. 인간은 자연과 함께하는 존재가 아니라 착취의 존재다. 인간의 타나토스에 대한 욕망은 가로막히게 된 것이다. 자연에 대한 회귀성에서 더 이상 도시에 사는 수많은 문명인들은 타나토스의 욕망을 대체할 수 없다. 자본주의화 되던 문명국가 속에 인간들은 황폐한 거리 속에서 억압의 주체로 살아간다.

 

인간의 억압은 본디 태어나면서 아버지에 대한 거세공포로 억압이 시작되었으나 이제는 다른 억압이 시작된 것이다. 이 책의 40페이지에 그런 중점 단어가 정리되어 있었다.

 

(1) 개체발생 : 유아기 초기로부터 의식적이고 사회적인 존재로의 억압된 개인의 성장

(2) 계통발생 : 원시 유목부족으로부터 완전히 제도화된 문명 상태로의 억압된 문명의 성장

 

문명의 사회에서 인간에게 언어라는 것은 langue 즉 사회적 당언이다. 하지만 그 사회적 언어는 하나의 권력이고 하나의 상징이다. 언어를 배우는 것은 곧 사회에 순응해야 하고, 그들이 거세공포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된다. 물론 추후에 아버지라고 불리야 할 이 세계는 다시 그 자리를 자기 자신에게 부여하여 다시 그 후세들에게 거세공포로 사회의 일원으로서 살아가야할 것이다. 문제는 억압이란 것에서 인간의 해방구가 없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도 다루는 부분이겠지만, 우리는 놀이문화가 매우 절실하다. 놀이가 왜 중요한가? 놀이라는 것은 단순히 시간을 죽이기 식의 Killing-Time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억압의 형태를 승화하는 방법이다. 이 책을 보면서 최근 TV와 컴퓨터에 빠져 사는 현대인들에게 타나토스는 이상한 방향으로 전이된다. 즉 인간이 스스로 문명의 감옥에 빠져 더욱 더 자신을 억압하는 형태로 변질된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억압이 자유라는 것으로 오도되어 그 자유를 만끽하면 할수록 더욱 더 큰 공허감이 들어온다는 점이다.

 

삶에 대한 열정은 에로스로 표출되지 않은 채 단지 리비도의 성적무의식 본능에 충실하다. 인간에게 삶의 긍정에 대해 물어본다면 뭔가 자신에게 주어진 세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지금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타나토스라는 죽음의 욕망을 대체할 것들이 없다. 그런다고 하여 삶에 대한 욕망인 에로스 역시 충족되지 않는다. 문명에 의해 소외된 삶과 죽음에 대한 욕망이 다른 문명의 진보로서 채우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문명이 도래해도 결코 자신의 욕망의 귀착지점에 도달할 수 없다. 계속 억압된 심리를 표출할 수 없기에 새로운 세계를 열망하나 계속 제자리 형태다. 자연이 인간의 노동으로 인해 변해가는 문명이 아니라 이제 문명 안에서 자연이 없이 노동으로 채워지는 문명이다.

 

그 자연이란 대상이 존재하지 않기에 그 자연을 대체할 자연적인 존재는 바로 인간이다. 자연의 착취가 종점에 이르면 인간은 인간 스스로를 착취하기 시작한다. 그 착취에서 억압에서 벗어날 기회는 바로 놀이이나, 현대 자본주의체계로 통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그리고 획일화가 되어버린 문화정체성에서 인간에게 삶의 욕망인 에로스가 꽃 피우기가 좋은 것일까? 죽음의 욕구에서 그 죽음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죽음보다는 심리적, 정서적 죽음이 좋은 듯하다. 인간은 최초로 어머니의 뱃속에서 분리될 때부터 억압이 시작된다. 인간에게 어머니의 뱃속으로 다시 회귀하고픈 타나토스의 욕망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결코 이룰 수 없는 영원한 운명이다. 인간은 시간적으로 비가역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 비가역을 돌릴 방법이 없다. 오로지 자연이란 어머니의 세계만이 그를 충족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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