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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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哲學)이란 언제나 우리에게 필요한 인간의 사유적 행위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대사회에서는 철학이란 사유의 힘은 언제나 뒤로 밀리기 마련이다. 인간이란 이성의 동물이면서 한편으로 감정을 가진 동물이다. 그 이성과 감정에서 우리의 이성은 언제나 마비되어 가고 있고, 감정 역시 메말라 가고 있다. 어찌 슬프지 않을 수가 있으랴?

 

언제나 TV뉴스와 신문기사를 보면 가난한 사람들의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막상 그 모습은 우리 일상생활의 주변에 널려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알아채지 못한다. 우리에게 그토록 그들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이성과 그들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따뜻한 가슴은 없는가? 그래서 현대사회는 철학이란 학문적 영역에서 발전해오고 있지만, 철학 그 자체에서는 큰 실용성이 보이지 않는다.

 

철학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학문은 배우고 정진하는 것이기에 그것을 곧 누구를 위한 것인가? 사람이 사람을 위해서가 아닌가? 그 대상은 본인일 수도 있으며 가족, 친구, 연인, 심지어는 나와 동고가 없는 자도 가능하지 않는가? 그런 점에서 나는 아직 철학적으로 미숙한 것 같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사람은 주변의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 이외의 사람을 사랑하라고 했다.

 

그리고 <선악의 저편>에서도 사람은 사랑하는데 있어서 그것은 측은이라는 마음보다 마치 대장부의 풍모처럼 그것 자체에 대하여 자선을 베풀고 있다고 생각하기보단 그 자체가 당연하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큼 말처럼 쉽고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가는 것, 사람이 사람에게 어느 감정과 이성으로서 대하는 것, 이 모든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일이다.

 

살다보면 이런 말이 있다. 세상을 사는 것에서 그냥 평범하게 살아라. 그 평범한 삶이란 어떤 것인가? 그 평범한 인생 중에서 한 번이라도 위기의 폭풍이 비켜갈 수 있으랴? 하물며 그 폭풍이 나만 온다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지나간다. 이번에 우연한 기회로 읽어보게 된 강신주 교수님의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이란 책에서는 그런 고민에 대해 진실한 심정을 담은 시와 그 시에 대한 강신주 교수님의 철학적 깊이를 반영했다.

 

()는 총 21명의 시인 중에서 각각 1개의 시를 뽑아 놓았다. 물론 친절하게도 어느 chapter가 끝나는 마지막 부분에 그 시인에 대한 시집까지 소개해주었다. 평소 시를 읽지 않은 사람인지라 시를 읽고 난 뒤에 강신주 교수님의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과연 그 시와 그 시에 대해 연결한 철학자의 사유가 뭔가 모르게 매치가 되는 것 같았다. 시라는 것은 감정적인 어조로 노래할 수 있으나, 그것 역시 우리 인간이 보편적으로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다.

 

철학이란 시처럼 감정적 영역보단 이성적 영역에 가까우나, 철학은 보편적 사유에 대한 추구함이 있다. 단지 개인에서 보편적 영역으로 흘러가기에 그 개인에 대한 사유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평범한 사람들에게 낯선 공간으로 보이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래도 분명 시라는 것에서 감정의 흐름으로 통해 철학적 사유도 추구할 수 있었다. 예전에 한 번 도종환 시인을 초빙한 강연회에 가보았다.

 

시를 낭독하고, 그 시가 주는 의미를 관객에게 알려주고, 그 시의 의미로 통해 인생이란 어떤 가치로 봐야하는 것까지 이야기해주었다. 그냥 시를 볼 때면 그 시에서는 어려운 낱말이나 내용은 없었고, 누구라도 그 시를 보면 이해가 가능했다. 그러나 그 시를 보면서 많은 이들이 힘을 냈고, 어느 방황한 청소년은 도종환 시인의 시를 보고 마음을 새롭게 굳혔다고 한다. 아직 자신은 흔들리고 있으니, 그 흔들림이 멈추면 새롭게 성숙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대신 조금 안타까운 심정이나, 이 책에서는 도종환 시인의 시는 가구라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우리가 집에서 사용하는 의자, 책상, 탁자 등의 소재로 사용한 시다. 그 시에서는 도종환 시인이 아내와 사별 이후 다른 아내를 결합해도 가구라는 시처럼 새로운 아내는 마치 집안에 놓인 하나의 가구처럼 느낀 것이다. 사람이란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에 혼자가 아닌 둘이서 사랑한다고 했던가? 도종환 시인의 마음은 그렇게 안타까운 심정으로 읊어만 볼 수밖에 없었다.

 

도종환 시인의 안타까운 마음과 달리 다른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다. 철학이란 인간을 생각해야 하는 학문이다. 어려운 현학적 연구도 좋으나, 결국 그것이 인간에게 윤택한 삶의 질을 부여하는 점에서 철학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철학은 너무나도 치열한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닐까? 어느 강가에 난간을 부수고 차가 아래로 떨어지면 물이 오염된다고 한다. 사실 차에 사람이 있는데, 강가에 떨어지면 그 사람의 목숨은 무엇일까? 자연의 환경도 소중하나 사람의 목숨도 중요하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도구로 보는 이 현실 속에서 인간의 소외에 대해 시로서 노래하고, 그것을 극복해 보려하는 시도 있다. 그 시에서 철학적 사유로 인간사를 이해하는 것은 분명 즐거우나, 한편으로 즐겁기보단 괴로운 마음도 든다. 물질만능주의에 젖어 가난한 자들이 소외되어 인간적 존중조차 받지 못하는 세상에 살아있는 육체가 있어도 살아있지 않은 죽은 자로 배척당한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하나의 생명을 가진 존재인데, 그 생명의 존재마저 부정당하는 일도 있다. 시로서 그것을 노래하는데, 어떻게 내가 그 시를 보며 즐겁다고 생각할 수만 있을까? 어떻게 보면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은 매우 이중적인 서적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느끼는 내 심정을 잘 파악했는지 강신주 교수님은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이란 서적도 있었다. 그것을 읽으면 얼마나 내 마음은 괴로워야 할까?

 

충분히 즐거움을 찾고자 하는 책에서도 그렇게 즐거움을 찾아내기보단 한편의 어두운 현실을 엿보는 기분이 드는지라 즐겁다고 말할 수 없다. 단지 그런 것으로 통해 나와 주변을 돌아봄으로서 내 자신에 대한 인식의 전환으로서 즐거움을 얻었다고 볼 수 있을까? 차라리 그 시에서 나타난 주제로 철학적 사고로 통해 우리가 목표로 해야 하는 삶을 찾아가는 편이 더 즐겁지 아니할까? 물론 인간이란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싶고, 다른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소통과 대화의 동물이다.

 

내가 생각을 하기 때문에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을 하고 싶기 때문에 생각을 한다는 것처럼 그 소통과 대화는 우리 인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사회적 동물 내지 정치적 동물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누군가 내 옆에 있어야 하고, 내가 누군가 옆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단지 있다고 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있음으로서 존재하는지가 더욱 중요하다.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그것은 시라는 보편적 노래로 통해 인간의 세상사를 보고자 하는 하나의 대화 도구다. 그 중간지점으로 하여 우리는 오늘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정말 살아있는 존재인지 생각해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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