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한 스승 -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궁리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루뱅 대학 불문학 담당 외국인 강사 "조제프 자코토"라는 인물로서 이 서적은 모든 것을 시작한다. <무지한 스승>이란 서적 명에서 분명 무지라는 것에서 고대 그리스 플라톤이나 혹은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 또한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할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정답 중에서 일부는 해당되나, 정답 자체에는 근접하지 못했다. 오히려 <무지한 스승>에서 자크 랑시에르는 이들의 가르침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았던 것이다.

 

 

왜 조제프 자코토란 인물을 등장시켜 교육이란 인류의 과제를 문제 삼았을까? 그것도 그렇게 유명한 인물도 아니고, 그저 역사 속에서 등장한 의원이며 교육자인 그를 말이다. 교육적 부분에서 분명 탁월하나 세계사적인 영역에서 그렇게 큰 비중이 보이지 않았던 것 같았는데, 자크 랑시에르의 도서를 읽다보면 조제프 자코토란 인물이 이렇게도 대단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는 분명 불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였으나, 적어도 그가 프랑스 혁명 이후 계속되는 내분으로 네덜란드의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조제프 자코토는 네덜란어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네덜란드 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모르는 학생에게 불문학을 가르치는 행위는 아이러니하다. 그런데도 그는 학생들이 프랑스어를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학생들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낳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교육적인 부분에서 조제프 자코토의 교육방법은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는 전형적으로 교수직을 맡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학생들 스스로 무지를 알아 그 무지 자체가 모르는 것을 알아주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의 국가정체에서 소크라테스가 여러 인물과 대화하면서 그들이 소크라테스 자신에게 돌아오는 공격적 발언을 오히려 역으로 물어봄으로서 그들의 무지를 깨우치게 한다.

 

 

산파술을 사용하는 반론에서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대상에게 자신의 무지함을 알려주나, 그 무지함을 아는 것에서도 소크라테스가 지닌 고도의 언변술에 상대방이 넘어간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에 조제프 자코토는 처음부터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네덜란드어를 모르는 교수, 그리고 그 학생에게 프랑스어와 문학을 알리는 것은 그 중간지점의 전환소가 없었다.

 

 

조제프 자코토는 학생들에게 <텔레마코스의 모험>의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판으로 통해 그저 프랑스어 텍스트를 익히라고 했다. 1장부터 시작하여 끊임없이 학생들에게 그 과정을 되풀이하자. 기적은 날개처럼 날아올라왔다. 네덜란드어로 살아가던 학생들이 프랑스어를 쓰고 이해하고, 수준이상으로 어려운 단어와 내용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불가능한 교육상황에서 위와 같은 상황을 어떻게 우리는 봐야 하는 것일까?

 

 

현재 우리나라에서 이런 방법은 매우 위험하다고 나는 지적했다. 그것은 정말 위 방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한국의 교육사회는 그저 엘리트주의적 평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재능을 다르게 지니고, 거기에 누구는 우등하거나 열등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 좋다. 한국의 교육여건에서 가장 어려운 사실은 spec이란 능력치이다. 최근에 대학입학에서 고교수능에 대한 부담을 없앤다고 하나, 오히려 이것은 더욱 학생들에게 부담을 주고 있다.

 

 

이미 대학입시는 고교준비생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까지 포함된다. 최근 영유아의 영재교육 및 조기유학교육에서 우리는 교육이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조제프 자코토의 교육은 매우 전위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을까? 가령 존 롤즈의 <정의론>이란 서적을 참고하면 인간이 주어진 환경에서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인자는 오로지 교육이다. 교육으로 통해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인 상승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교육이란 조건에서 경제적 조건은 필수이다. 학교를 다니고 교재를 사야하며, 여기에 대한 노동의 상실(학생들 즉 미성년자들은 노동을 할 수 없는 나이이나 한편으로 노동의 실시는 교육의 미실시로 연계된다.)이 따르기에 교육을 받는 자들은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된다. 물론 할 수 있다고 해도 그의 육체적, 정신적, 심리적 활동력은 제한되어 있기에 교육과 노동은 동시에 하기에는 불가한 사항이 많다. 특히 교육의 기회에서 질적, 양적인 조건이 따라붙지 못함은 결국 교육의 기회가 박탈되면 될수록 그 사람은 성공할 확률이 매우 낮아지란 사실이다.

 

 

바로 현대사회에서 엘리트주의 평등교육은 겉으로 평등이란 제한선을 맞추고 있으나, 그 내부에는 심각한 불평등을 합법적으로 맞추고 있다. 문제는 이런 잘못된 관념의 교육이 잘못된 것들이 아니라 오히려 학부모에게 묵언의 동의를 받는다. 어떻게 본다면 학생들의 교육은 이 나라의 미래를 결정하는 일이고, 그 결정에 따라 학생들의 갈 길이 달라진다. 왜 계속 우리는 이런 과정에서 살아가야 하는가? 따로 생각하면 정해진 틀에 의해 거기에 매달릴 경우 우리는 진실로 똑똑해 지는 것일까? 아니면 무엇이 되는 것일까?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에서는 그런 행위들이어야 말로 사람들을 바보로 만든다는 사실이다. 자주 나오는 단어인 “똑똑한 바보”라는 것을 말이다. 자신들은 그것 말고 아는 것이 없다는 점이나, 그 알고 있는 것만 지니고 있어도 충분히 똑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사회는 그런 것만 필요로 하고, 교육과정은 그런 사람들이 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진정 바보 만들기 과정은 바보들의 재생산과 연결되고, 그 바보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한편 그러면서 평등하게 교육받을 수 있는 자유라는 허무맹랑한 슬로건을 내세운다. 마치 이것은 신의 지배 아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논리와 뭐가 다르겠는가? 겉으로 평등이라 하나, 그 내면에 숨은 불평등을 마치 평등한 것이라고 주입하는 것과 같다. 오히려 불평등이 있기에 그 평등하지 못함에 대한 보완점 내지 유동성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평등함이 아닐까? 이 책에서 프롤레타리아라는 노동자들도 글을 알고 예술도 아며, 그들도 화가가 아니더라도 화가라고 할 수 있어야 했다.

 

 

그것은 일정한 차이로 두어 그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라도 언제든지 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인간의 불평등에서 삐에르 부르디외는 경제적 자본과 동시에 문화자본도 같이 추가했다. 곧 그말은 인간들은 태생적으로 불평등이 아니라 그 사람이 주어진 환경으로 통해 계속 불평등을 유지하는 것이다. 고급예술과 저급예술의 경계를 나누는 부분에서 고급예술은 재산이나 신분이 높고, 저급은 신분이 낮고 노동자계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문화의 공통적 영역에서 사람들의 분류가 일어나고 거기에 대한 계급성과 차별성이 발생된다. 얼마든지 저급이든 고급이든 넘나들 수 있는데도 말이다. 인간은 자신이 언제나 우월함을 제시하고 싶다.

 

 

따라서 집단적으로 누군가 구분할 필요성이 있고, 자신들에게 쏘일 수 있는 화살의 과녁을 다른 누군가의 광기로서 메우고 싶어 한다. 따라서 인간들의 존재는 매우 신화적이라고 볼 수 있다. 교육은 신화라고 자크 랑시에르는 말한다. 이분법적으로 보자면 알고 모르고의 차이를 교육학에서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그것으로 하여금 인간에게 이분법이 바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뭐든지 알기 위해 주입되어야 하는 억압의 욕망보단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를 용서하지 않음에서 말이다.

<무지한 스승>은 아무 것도 모르는 스승보다는 차라리 모르는 것으로 통해 모르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 소중한 교육관을 제시한다. 끊임없는 자기비판과 성찰 그리고 인간적 평등을 위한 교육으로서 첫 걸음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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