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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전혜린 에세이 1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끝까지 읽어보면서 나는 어느 가수의 이름과 그 가수의 노래가사가 생각났다. 가수 이름은 故 김현식이고, 그의 앨범 5집에 수록된 “넋두리”란 곡이다. 김현식 5집의 넋두리를 듣고 있는 순간 오로지 절규와 비명, 탄식과 한숨, 허무와 절망으로 메워진다. 그리고 그 속에서 김현식은 그 길을 가겠다고 한다. 절망 안에서 외치다가 정말 그는 간경화로 1990년 11월 1일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죽음은 이미 그 5집의 가사에서도 나와 있다. 그 노래는 김현식 자신이 작곡과 작사를 했다. (앨범 표지 후면에 보인 완전 떨어진 운동화가 인상적이다),

쓸쓸한 거리에서 나 홀로 앉아 있어 바람에 떨리는 소리를 들었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설레이는 이내 마음이여
꺼질듯 타오는 거리의 네온을 내 품에 안고서 헤매고 있었지
멀리로 떠나는 내님의 뒷모습 깨어진 꿈이었나
힘없는 내 발길에 다가선 님의 모습 인생을 몰랐던 나의 길고 긴 세월
갈테면 가라지 그렇게 힘이들면 가다가 지치면 또 일어나겠지...
꺼질듯 타오는 거리의 네온을 내 품에 안고서 헤매고 있었지
멀리로 떠나는 내님의 뒷모습 깨어진 꿈이었나
힘없는 내 발길에 다가선 님의 모습 인생을 몰랐던 나의 길고 긴 세월
갈 태면 가라지 그렇게 힘이 들면 가다가 지치면 또 일어나겠지...

절망 속에서 걸어가는 모습에서 왜 나는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로 통해 보는 것일까? 전혜린 교수에 대해 잘은 몰랐다. 단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문구는 들어보았다. 아주 어렴풋이 어디서인지 몰라도 말이다. 이 책을 읽는 순간 마치 니체의 서적들이 생각났다. <비극의 탄생>으로 아폴론적인 예술과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을 논하는 것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같이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 그 사회적인 통념과 한계를 넘어 보려는 의지를 전혜린의 글을 무섭게도 흘러갔다.
책을 보면서 그분의 독일 유학생활이 인상 깊었다. 이때까지 착한 딸로 아버지 말을 잘 따르던 엘렉트라적인 자신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일 뭔휀대학으로 간 것은 엄청난 도발적인 그녀의 도전이었다. 그런 모습은 후에 잘 나온다. 그녀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태어난 지식인의 딸이고, 그들은 러시아인과 중국인들이 보이는 한반도 북쪽에 있다가 한국전쟁으로 부산으로 대피한 것이다. 특히 부산으로 그것도 영도라는 애환이 담긴 곳에 온점은 매우 인상이 깊다. 왜냐하면 내가 부산 영도에 살기 때문이다.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영도, 그분은 부모님이 전쟁을 피해 왔지만, 나는 부모님이 가난에 의해 왔었다.
그분은 거기서 서울대학 법대에 입학했고,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았다. 그분은 문학과 예술을 좋아했고, 특히 니체와 니체에 빠진 작가를 좋아했다. 특히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지와 사랑>에서 그분의 진실한 니체에 대한 사랑을 인상 깊다. 하물며 부록에 나오는 아포리아는 니체의 <선악의 피안>에 나오는 점을 많이 닮아 있었다. 그리고 독일유학과 자신의 사랑하는 딸 정화가 보일 때면 허무한 심정에서 벗어나 인생의 가치를 찾은 느낌이었다. 그것은 마치 발터 벤야민이 러시아혁명 이후 아직 트로츠키가 추방되기 이전에 모스크바로 가서 그가 사랑하던 여성 아샤 라시스와의 만남이 생각난다. 처음에 벤야민은 기대감과 희망으로 갔으나 그녀와의 관계에서 좋지 않게 흘러가고, 권태와 허무 속에서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모스크바 시장에 돌면서 러시아인형과 각종 민속공예품에 대한 벤야민의 관심과 애정에서 상당한 관찰력이 인상 깊었다. 전혜린 교수의 글을 보면 니체와 벤야민의 조합인 것 같았다. 보통 니체와 벤야민은 우리의 손에 잡히기 전에 번역가의 손에 거치나, 이 책은 이미 본인의 손에 창조되었기에 그 문체의 감각이 직접적으로 느꼈다. 그분은 자유를 찾아 여기저기 헤매는 미아와 같았다. 어린 시절 정해진 공부 착한 아이로 산 그분에게 자유라는 것은 무엇인가? 법학에서 독문학자로 변신하면서 그분이 추구한 삶이란 무엇인가?
그분의 출산에서 정화의 탄생은 그녀에게 죽음의 의지인 타나토스의 맛을 보면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심정과 동시에 그 고비 후에 정화를 손에 직접 만졌을 때 새로운 삶의 의지인 에로스를 맛보았다. 글에서도 마치 정화가 자신의 분신인지 아니면 자신이 정화의 분신인지 그래서 정화로 통해 자신은 영원할 것이라 하는 기대감, 하지만 그분은 자살을 했다. 왜 자살할 수밖에 없었는가? 천재라는 명칭에서? 아니라면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것처럼 박제로 살아야 하는 자신의 절망에 저주했는가?
뮌헨대학에서 어려운 유학을 선택한 그분의 글에선 처음에 불안과 위기라는 심정에서 오히려 자유와 편안한 세상을 본 것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제일 부러운 사실은 그 당시 젊은이들이 동경하고 되고 싶은 존재가 루이 암스트롱이란 사실이다. 재즈음악을 하던 흑인 뮤지션, 거리에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고, 모두 이방인이어도 마치 그 속에 다 녹아들어가 자유분방함이 왠지 매력적이다. 집시와 같은 존재로서 보헤미안 세상을 떠나는 그 삶을 보는 것만으로 왠지 모르게 그녀는 자신의 고향이 한국보단 오히려 독일 슈바빙의 거리가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거친 삶을 사는 부산이 이성을 추구하는 서울보다 좋다고 한 점에서 말이다. 아니 어떻게 말하면 인간의 언어는 결국 사회적이면서도 하나의 권력을 지닌 억압이다. 그 억압에서 전혜린은 억압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서 표출한다. 이성의 세계인 서울의 생활에서 자본주의 가속화로 인해 그 언어의 가치는 물질의 가치로 대변된다.
“유일의 진실하고 엄숙한 문제는 회피하고 자그마한 일들, 물질, 사치스러운 생활, 남자에게 의존 또는 기계와 같은 나날의 틀 속에 안면하는 의식, 이러한 것들 속에 자기를 소외해 버리는 생활은 허위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생과 사에 자기를 똑바로 응시하고 산다는 것은 무서운 용기와 신경력을 요한다. 특히 이 사회의 구조와 한국적 풍토 속에서 너무나 신경이 긴장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 없이는 전생의 의의가 무로 화하는 것이니깐 그것을 회피하는 것은 일회적으로 주어진 우리 삶에의 죄인 것이다.”
이 문장은 마치 지금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 전혜린 교수의 남편을 보는 눈에서 단순히 아내는 남편만의 종속인가라는 의문에서 남성 역시 사회의 종속물이다. “10년 개근, 5시 퇴근, 석간, 취침” 왠지 모르게 톱니바퀴라는 굴레에 돌아가는 것은 정말 누구로 보이는 것인가? 그래서인지 전혜린 교수의 에세이는 단순히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혜린 교수가 보는 이 세상에 대한 의문이다. 자신이 광기에 빠져 니체처럼 글을 적는지 아니면 세상이 미쳤는지 모르고 돌아가고 있는지 말이다. 속박된 어린 시절, 거기에 대한 저항, 정화로 통한 삶의 의지, 그리고 자살로의 마감들.
왜 처음부터 작고한 김현식과 그의 노래 넋두리가 생각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녀의 인생이 마치 죽음에 대한 강한 충동에 자리 잡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허무로 채운 자신의 그 공백을 허무로서 되돌리는 타나토스의 열망은 글에서 끝까지 보여준 내용이었다. 아마 자신이 머물 수 있는 곳은 죽음이란 극단적 선택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증거를 자신 스스로 끝맺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너무 철저하다 자신의 딸에게 자신의 삶에서 금단현상을 일으키는 딸을 뒤로 한 채 죽음을 택한 전혜린, 죽음에서 진실한 삶을 찾아가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