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 대우고전총서 21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박찬국 옮김 / 아카넷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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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탄생되지 않았으나 비극은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가?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읽다보면 비극이란 원래 우리 인간이 마음속에 지니던 세계다. 그것은 비극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그것이 비극이라 부르지 않았을 터이다. 그래서 나는 비극은 탄생한 것이 아니라 비극은 인간이 원래 지니고 세상에 나온 것이라 보았다. 하지만 이제 비극은 탄생해야만 한다. 그것은 잃어버린 인간의 영혼을 찾아, 그리고 인간의 고뇌에서 더 멀리 나아가 예술과 문화로서 세상을 아우르기 위해 말이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는 그런 논조가 아주 힘차게 흐른다. 니체의 문장력은 각각을 읽으면 하나의 공감이 될지 모르나 모두가 모이면 종잡기 어려운 큰 해일이 된다. 그런 것들이 바로 비극의 서열에서 1번째는 아폴론적인 이성, 2번째는 디오니소스적인 무절제이면서도 생명력, 3번째 이 2가지의 화해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인가? 우리 인간들은 이성을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 이성으로 볼 수 없는 자기 안의 심연세계가 존재한다. 그 심연세계는 우리는 지금 부정하는 형태를 자주 볼 수 있다.

 

니체는 오히려 그것을 열어두라고 하는 것이다. 니체가 아이러니하게 아버지가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독교에 대한 반기독교로 대항한다. 저 사티로스가 뛰어노는 그리스 신화 속에서 말이다. 현세에 대한 부정으로 가득한 기독교 관념에서 서구의 합리주의와 이성주의인 데카르트의 산물이 진득하게 남아있다. 인간이란 태어날 때부터 죄가 가진 존재, 그 죄를 사하기 위해서는 무조건으로 신에 대한 절대적 복종만 요구한다. 그런 상황에서 서구의 역사는 이상하게도 폭력과 더 잔혹한 역사를 반복했다.

 

그들이 부정하는 절대적인 이성, 이데아의 세계에서 도리어 더 혼란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혼란을 부정했고, 그 자체는 마녀의 장난으로 보았다. 마녀의 장난이 있기에 그 마녀에 대한 응징이 있기에 다시 평화와 안정이 온다고 믿었다. 오! 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속 편한 수법이란 말인가? 니체의 디오니소스에서는 그런 인간의 마음을 더 인정하고 가속화 하려고 한다. 인간 본성을 숨기지 말고 분출하는 디오니소스의 예술에서 니체는 즐거움도 괴로움도 나약함도 강함도 모두 드러내야 했다. 바로 비극으로 말이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숨겨두는 채로 살아간다. 그러나 비극에서 우리의 인간이 신화적으로 보는 대상으로 하여금 갖가지 상황과 묘사가 드러난다. 신이란 절대적이고 위대하고 한 치의 오류가 없는 존재라고 하나, 니체가 추구하는 디오니소스의 세계관에서 신이란 음탕하고 폭력적이고 정이 넘치고 게다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요소를 추구했는지 모른다. 저 디오니소스의 축제에서 모든 사람들이 정신적 쾌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아라. 주인은 노예가 되고 노예는 주인이 되며, 왕은 거지가 되고, 사형수는 왕이 된다. 미친 듯이 이 디오니소스의 축제는 인간에게 가려진 욕망의 해소가 된다. 그들에게 삶이란 무엇인가?

 

산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살아있었다는 증거다. 마치 실존적인 자아에 대한 증명과 더불어 니체는 디오니소스로 통한 죽음은 새로운 삶을 알린다. 대지의 축복과 은혜를 내리는 신들, 대지의 모신은 2가지의 얼굴을 가진다. 그들은 생명을 빼앗아가나 또 다시 생명을 내린다. 겨울에 모두 말라버린 대지의 황폐함에서 봄에 새로운 생명의 꽃이 피어난다. 인간도 그렇게 자연에 따라 그 이치를 따름이 정답이리라. 신화의 해체에서 과학이라는 것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과학 이전에 기독교라는 절대적인 종교가 도입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새로운 신화(억압과 폭력)가 되어 우리의 본성을 억압했다.

 

니체가 바란 비극의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신화에서 그 신화를 깨고, 본래의 신화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본래의 신화, 그리스라는 곳에서 디오니소스의 종마 사티로스들을 장난이 일상화되는 곳을 말이다. 예술이란 바로 그런 도취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아폴론의 세계에서는 생명력이 없는 조각이나 영웅서사시만 등장한다. 생명력이 없기에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생명력을 구하기 위해 그리고 없는 생명을 다시 또 구하기 위해 바닷물을 갈증해소로 여긴다. 소금이 가득한 물이 사람에 들어가면 더욱 더 갈증을 부추기게 되어 결국 자멸한다.

 

로마제국의 정복 욕구는 바로 아폴론적인 인간상의 말로다. 그리스로마의 연결을 생각하나 니체는 그리스와 로마를 분리했다. 그래서일까? 유럽의 르네상스시기를 그리스의 연결이 아니라 로마의 연결이다. 이성의 재탄생이 옳은 것이 아니라 이성은 그저 디오니소스와의 화해만이 해결이다. 예전에 <비극의 탄생>을 읽기 전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비극시가 젊은이들의 마음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자신의 제자에게 절대 비극시를 옆에 두지 않으려 했다. 이에 절대적인 형이상학적 미를 추구한 플라톤은 자신 스스로 비극시를 불을 태워 그 후에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었다.

 

소크라테스의 생명력을 죽이는 이 행동에 대해 니체는 처음에는 비판하나 후에 소크라테스도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그 음률의 세계에 찾아오는 것을 발견했다. 이성은 감정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조절하기 위한 스위치에 머물러야 하는가? 하기사 디오니소스의 분출된 자에겐 생명의 노래와 더불어 파괴의 욕구도 있다.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에겐 사람들에게 마성을 깃들게 한다. 술은 인간에게 삶을 행복하게 하는 활력소가 되나, 때로는 인간에게 독이 되어 정신병자가 되어 모든 것을 파괴해버린다. 술로서 모든 인간들을 지배할 수 있는 디오니소스의 권한에서 인간은 신의 운명 앞에 농락당한다.

 

하지만 디오니소스는 죽음까지도 삶을 위한 연속으로 보기에 포도주에 취한 자 대부분 죽음보단 디오니소스의 찬미에 노래한다. 바로 인간이 가진 원초적 세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모든 것을 뛰어넘어 생명력을 가진 자로 말이다. 니체는 그런 사람들이 아쉽게도 많지 않다고 했다. 니체는 당시 유럽에서 불어온 민주주의, 사회주의, 자유주의를 혐오했다. 인간 스스로가 약하기를 바라기에 강한 의지가 없기에 그렇게 된 것이라 보았다. 강자는 항상 존재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오만하고 교활한 자가 아니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힘에 대한 의지에서 강한 자는 동정으로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로서 대하기 때문에 강한 자라고 하는 것이다.

 

모든 무기와 권력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로서 뛰어넘은 초인 같은 존재로서 말이다. 안타깝게도 니체의 사상은 독일 나치에 오용되기도 하고, 그에 동조한 마르틴 하이데거와 같은 지식인들에 의해 오용되기도 했다. 결코 니체는 파시스트로 가득한 나치즘에 동조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리주의, 자유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이든 그 모든 것에 대한 얽매여 자신 스스로를 거기에 매달리게 하는 것을 우려했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은 바로 그 모든 것들로부터 탈피와 더불어 그리스 신화의 생명력을 노래한 것이다.

 

그런다고 하여 니체는 무조건적인 죽음을 좋아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 디오니소스적인 열광이 살아있을 것이라 생각한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전쟁, 그곳에 위생병으로 자원입대하나 거기에 보이는 것은 시체와 사지가 절단된 부상병이었다. 자신마저 전염병에 의해 제대했으니, 그가 바란 죽음은 영원한 생명을 향한 새로운 삶의 부여다. 하지만 니체가 바란 디오니소스적인 전쟁은 당시에 문명국가에서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신화가 숨 쉬고, 문명이 닿지 않은 원시사회야 말로 디오니소스가 살아있는 세계다. 그러나 거기는 아폴론은 없다. 물론 인도와 같이 불교가 강한 곳은 삶의 의지가 미약한 곳이기에 비극으로 한계성이 크다.

 

비극은 삶과 죽음의 굴레에서 합리와 비합리가 어지럽게 돌아가는 것이다. 니체가 그토록 목청을 높여 부른 이 차라투스트라에 대해 <비극의 탄생>의 한 부분을 읊어보자.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가슴을 펴라, 활짝, 더 활짝! 그리고 그대들의 다리도 잊지 마라! 그대들의 다리도 들어 올려라. 그대들 훌륭한 무용가들이여, 그대들이 물구나무를 선다면 더욱 좋으려만!

웃는 자의 이 왕관, 장미로 엮은 이 왕관을 스스로 내 머리에 썼노라. 그리고 나 자신이 나의 웃음을 신성한 것이라고 말했노라. 그렇게 해줄 만큼 강한 자를 나는 타인들 중에서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춤추는 저 차라투스트라여. 날개로 신호하는 가벼운 자 차라투스트라. 모든 새들에게 신호하면서 날아오를 준비가 끝난 자, 지복에 가득 찬 가벼운 자.

예언자 차라투스트라, 진정으로 웃는 자 차라투스트라, 성급하지 않은 자, 절대자가 아닌 자, 높이 뛰어오르기와 옆으로 튀기를 좋아하는 자, 나는 스스로 왕관을 썼노라!

웃는 자의 왕관, 장미꽃으로 엮은 이 왕관, 나의 형제들이여, 나는 이 왕관을 그대들에게 던진다! 나는 웃음을 신성하다고 말했노라. 그대들 높은 인간들이여, 나에게서 배울지어다 - 웃는 것을!“

 

 

있는 그대로 자신을 보여주며, 스스로 왕이 되어 그 왕관조차 누군가에게 주고선 자신의 자유로움을 맛보라는 차라투스트라, 그는 자신과 같은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느낄 수 있는 것을 스스로 느껴보라고 한다. 권태로운 자들에게 그는 그저 미친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 권태의 늪에 빠져 평생 그 늪이 자기 세상인 것만 생각하면 오히려 미친 사람이 정상일 것이다.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서 도리어 광기가 예술과 학문 그리고 예언의 시작이라고 했다. 광기에 빠진 자들이어야 말로 우리가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시와 처벌>이 이루어진 공간에서 광인들은 그저 갇혀 사는 죄수가 되었다. 이성의 세계는 자신의 비이성을 광인으로 하여금 수용소에 가두어 이성의 세계가 오히려 광기에 찼다는 사실을 은폐한 것처럼 말이다. 니체는 그 광기의 주체, 디오니소스의 열정을 아폴론적인 세계와 결합과 충돌로서 예술을 그리고 그 절정인 비극을 탄생시키려 한다. 인간 본성을 향하여 말이다. 문명이란 존재는 결국 자연의 세계를 노동으로 통해 이룩한 것이다. 그것은 결국 자연의 파괴와 인간 본성의 파괴로서 존재된 파괴의 습작물이다.

 

숲에는 님프가 춤을 추고, 여신들은 호숫가에서 목욕하며 서로를 바라보면 능욕과 생식력을 자극하는 생명력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우리의 디오니소스는 안타깝게도 아폴론적인 회화와 조각으로 통해 본다. 아니 이 역시 비극인가? 디오니소스의 열정이 아폴론적인 세계와 조우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관찰자가 아니라 서로가 관찰될 수 있을 만큼 모두가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다. 그 신은 권태와 부정의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한 신, 하지만 디오니소스는 죽음과 삶이 함께 하고, 개인적으로 자연주의적인 요소가 있는 나로서도 인간이 가진 4계절은 죽음과 삶의 반복이다. 죽음이 없다면 삶 역시 없으니, 물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도 한편으로 그 “달콤한 죽음이여 나에게 와라”라는 타나토스가 있기에 에로스의 세계가 존재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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