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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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이란 이름은 예전에 한 번 들어본 경험이 있다. 문화평론이나 또는 문학비평이라든지 말이다. 그러나 이번에 본 수전 손택의 글은 마치 살아있는 양심적 지식인 중 하나인 노암 촘스키 교수를 보는 느낌이었다. 단지 노암 촘스키와 다른 점이라면 폭력과 죽음이 남성들에게 나오는 원인에 주목하는 점은 약간 마음에 걸렸다. 왜냐하면 나 같은 경우 마빈 해리스 교수와 같이 문화인류학적으로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물론 마빈 해리스 교수 역시 인류의 폭력, 억압, 착취에 대한 시스템과 여기에 대한 문제점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반복했다. 단지 관점만 다를 뿐이지 보고자 하는 것과 개선하고자 하는 것은 같아 보였다.

 

그래도 일단 여성학적으로 글을 적은 것이 아니지만 여성학자가 바라보는 인간의 폭력을 우리는 한 번 제대로 생각해봐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읽어본 책들이 내 머리 안에서 계속 흘러간 느낌이 들었다. 우선 보드리야르,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을 읽으면서 정말 재밌는 부분을 본 기억이 난다. 우리는 베트남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으나 TV에서 방영되는 베트남전쟁영화로 통해 더욱 우리는 베트남전쟁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사실 내가 어린 시절만 해도 미국에서 수입한 폭력적 드라마를 많이 보았다.

 

당시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흑백TV를 경험했고, 칼라TV를 보면서도 여전히 전쟁을 소재로 한 드라마물이 계속 나왔다. 그런데 그 드라마를 보면 항상 미군이 승리하는 모습을 본다. 제일 기억나는 영화나 드라마가 월남전에 대한 것이었다. “햄버거 힐”이란 것으로 미군이 1969년 아주 피를 흘린 대가로 얻은 성과이나, 1968년 테드 공세 이후 전쟁을 미화하기 위한 미디어의 영향이 커지고 있었다. 이미 미국 국방부에서 인정한 통킹만 사건이 전세계적으로 공표되고 있는 시점에서 베트남 전쟁이 아직까지 자유주의 도전이란 착각은 여전히 엉뚱한 파괴적 이상주의만 양성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보드리야르의 베트남전쟁이야기는 그야말로 정확한 답이다. 우리는 미디어에 의해 모든 사고를 좌지우지 당하는 열렬한 구경꾼이기 때문이다. 보드리야르의 이름이 나왔으니 그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 큰 기여를 한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스펙타클, 흔히 사람들이 뭔가 장황하고 거대한 것들을 보면 “참으로 스펙타클해!”라고 하나 사실 스펙타클은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이 스펙타클이 되는 게 아니라 그들 자체가 스펙타클의 하나에 불과한 존재인 것이다.

 

인간이 가진 이성이란 기관은 아주 자신이 이성적이라고 판단하기 쉽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성이 충만하고,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모든 불행과 저주 운명의 굴레가 시작된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정의로운 존재를 위해서는 그것에 대체되어야 할 존재가 필요하다. 나는 세상에 대해 이렇게 여긴다. “세상의 악(惡)은 정말 사악한 존재였기 때문에 악으로 된 것이 아니라 악으로 되기를 사람들은 원한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옆에서 내 글을 보는 순간 나에게 “당신은 세상을 보는 눈이 너무 비관적이고 회의적이며 또한 너무 부정적입니다. 세상을 그렇게 꼭 비딱하게 보는 것이 맞습니까?”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아니 그 사실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도 지나온 과거에서 보여준 상처들이다. 지난 우리 과거에서 죄 없는 사람들이 억지로 죄에 몰리거나 혹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시대적인 저항이 가득한 말을 남긴 사건도 있었다. 인간의 불평등은 여전히 재생산되었다는 점과 그 재생산에서 그 자체에 대한 의문과 문제점들을 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보이는 순간 적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으면 전기고문에 의해 파킨스씨 병에 걸리거나 혹은 의자에 앉아 있는 어느 대학생이 있었는데, 어느 누가 책상에 손바닥으로 탁! 하고 쳤는데 억! 하고 죽었다는 사실은 불과 전자는 1년 전, 후자는 25년 전의 인물이다.

 

타인에 대한 고통에 대해 고통을 받은 이들이 아주 끔찍한 고통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 사회 역시 스펙타클로 가득한 사회였다. 아니 시뮬라크르의 세계라고 할까? 진실은 언제나 사실로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실로서 만들어질 것이라는 점은 분명 기억해야할 사실이다. 개인의 한 명은 그저 감시와 처벌로 육체와 영혼이 소멸되어가나 사회에서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불안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부 심리에 자리 잡은 불안 심리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 불안 심리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는 방법보다 일시적인 방법이 효율적이다.

 

그것은 폭력의 미학으로 통해 다른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함으로서 타인들은 그 폭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사고다. 아니면 감옥이란 제도가 정말 감옥이 평범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위험한 사람을 격리하기 위한 도구인지 아니면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가 감옥인데도, 그것이 감옥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만드는 방법인가? 이런 아이러니는 계속 진행된다. 예전에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폭력과 휴머니즘>이란 책을 보았다. 휴머니즘이란 인간주의인데, 인간이 인간중심이 되기 위해 이성이란 합리적 사고로 통해 살아야 하나, 오히려 그것이 더 폭력적이고 비합리적인 행태로 꼬여갔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의 말처럼 “평상시에 인민정부를 움직이는 동인이 미덕이라면, 혁명의 시기에 그 동인은 미덕과 공포 모두입니다. 덕이 없는 공포는 재난을 부르고, 공포가 없는 덕은 무력합니다.”라는 말은 틀린 것은 없다. 잘못된 세계에 대해 뭔가 방향을 바꾸기 위해서는 폭력의 수단만이 남았다는 점이다. 미국이 9·11 테러에 대한 조치로 반테러리즘을 위한 선언을 했지만, 문제는 그것 역시 테러에 대한 테러였다. 파시즘에 대한 안티 파시즘의 테제가 결국 파시즘으로 갈 수 있다는 아이러니는 계속 반복된다.

 

이런 역사적 비극은 타인의 고통을 하나의 구경거리라는 스펙타클이다. 수전 손택이 지적한 내용이 너무 인상 깊은 부분은 사진을 보는 사람의 관점이다. “사진의 먼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통을 우리 눈앞에 가져온다는 걸 알았다고 해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관음증적인 향략(그리고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는 않을 거다. 나는 아프지 않다. 나는 아직 죽지 않는다. 나는 전쟁터에 있지 않다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는 그럴싸한 만족감)을 보건대,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시련, 그것도 쉽사리 자신과의 일체감을 느낄 번한 타인의 시련에 관해서도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듯하다.”

 

이 구문을 보는 순간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는 것은 결국 무대 위에 행해지는 비극으로 통해 우리가 윤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과정을 발견한다. 하지만 사진이란 것은 비극처럼 실제가 아닌 가상도 아니고, 실제를 촬영한 것이 가상의 이미지로 온다. 정말 사진에서 사지가 절단된 아이들, 무차별로 폭격당하는 마을부락, 군인들에게 집단 강간당하는 여성을 본다고 하더라도 남의 일이 되어버린다. 우리도 이런 비극을 불과 60년 전에 겪었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고통이고, 그것과 직접적 관련이 없다면 단지 하나의 눈요기로 끝날 부분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박물관이나 퓰리처상에 올라가 있어서 한 번 궁금증으로 가득한 호기심이 그를 부를지도 모른다.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박물관에 찾아간 많은 사람들은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보기 위해 가는 것인가? 그림이 걸린 벽을 보러 가기 위해서인가?” 이런 의문은 바로 아방가르드 예술에서의 기존 예술과 미학에 대한 반예술과 반미학적인 저항으로 이동된다. 하지만 역설적인 현실에서 그런 반예술과 반미학 역시 예술과 미학으로 바뀌어 버린다.

 

가령 기 드보르라는 상황주의자들은 잠자는데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에펠탑을 폭파하겠다는 협박전화와 자신의 책이 옆에 있는 책에 전시되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책 표지를 사포로 만들어버린다. 사포로 된 책표지가 옆에 책과 마찰하는 순간 그 책들은 상품적 가치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포로 된 책표지들이 다시 서점에 올라가는 순간 이들은 중지한다. 그들은 스펙타클에 대한 끊임없는 해체와 파괴, 분열과 훼방을 하지만 현실은 그것마저 스펙타클화한다. 그런 문제는 스승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스승이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대중적 현상이 여실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적어도 <앵무새 죽이기>라는 영미소설을 보면, 어린 시절 스카웃은 자신의 아버지가 변호사로서 흑인을 위해 변호하나 아버지는 마을주민들에게 온갖 횡패와 모욕을 당한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오빠는 죽을 고비를 맞이하고 팔 하나가 불편하게 된다. 당시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미국 전역에 깔린 심각한 문제였다. 신의 가르침과 정의의 수호자라 여기던 미국 백인들은 자신들이 강자가 되기 위해 정의의 수호자가 되기 위해 계속 악인을 생산하고, 그것은 사회적 약자로서 흑인이었다.

 

그것은 비단 미국만이 아니다. 전 세계적인 이야기다. 인간의 고통을 즐기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자신의 추악하고 더러운 얼굴을 찾아내지 못한다. 마치 남의 고통이 나의 즐거움 내지 정의감을 고취시키는 점이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루이15세에 대한 암살을 실패한 다미엥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고문과 사형집행에서 육체가 소멸한다. 그런데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에서 그것을 상징하는 사진이 나왔다. 몽골의 왕자를 죽인 범인이 200갈래로 찢어져 죽임을 당하는 모습이 나온다. 아직 살아있는지 동공의 검은자가 아직도 하늘을 보면서 뭔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그의 살점이 도려지고, 뼈가 보일 정도로 그의 몸은 낭자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육체적 고통을 신체적 처형이 아니라 신분에 합당한 상징적 죽음이 되었다. 그나마 그의 사진이 남은 까닭은 그가 상징적인 죽음을 남에게 가한 점과 받은 점이다. 단지 우리의 어두운 과거의 죽음은 그 상징적인 현실을 은폐하기 위한 도구였다는 것이 다르다. 이런 폭력을 보는 대중들의 시선 사진을 보면 왠지 사진관찰자는 이들에 대해 야만인이라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사실은 그 사진을 보는 자신 역시 야만인과 다를 바가 없다. 극단적인 문화우월주의, 인종주의, 지역주의에 맛을 들인 인간들은 자신이 그런 사고를 했다는 자체를 거부하려 한다. 자신의 정의감을 스스로 배반하려 하지 않기에 오히려 그들은 야만의 문명을 유지하는 도구가 된다.

 

유태인들을 그렇게도 몰살한 아이히만 아우슈비츠 나치수용소장의 일화는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는 평범한 중년 신사였고, 아내와 딸에게 매우 다정한 가장이었으며, 게다가 저녁을 먹기 전에 피아노의자에 앉아 아주 분위기가 좋은 음악을 연주했다는 사실이다. 수전 손택 역시 자신이 느낀 포로가 된 나치군은 무슨 괴물이나 악마와 같은 존재였을 터이나 오히려 그들은 인간적인 면도 지니고 있었고, 평화와 행복을 기원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왜 이들이 이렇게 악마처럼 되었나?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고 착각하게 만든 문화고, 그 문화는 현대사회에 오면서 스펙타클이 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계속 미디어로 통해 이미지의 과다수용으로 이미지가 매체로 된 사회로 살아가고 있다. TV공화국이란 말도 있듯이 이제는 스마트폰의 시대다. 인간의 실존성을 넘어 이제는 가상의 인간과 유대를 맺으며 자신들만의 영역을 완성해간다. 그리고 가상의 이야기가 마치 현실의 자신을 만드는 것처럼 되어 있다. TV를 보면 항상 우리는 정의로운 편이 우리 쪽이란 사실, 낭만적인(하지만 일반 소시민과 먼 부자들과 엘리트들의 이야기) 사랑을 하는 사람이 내가 바란 사람 등을 보면서 마치 그것이 자신인 것처럼 생각한다.

 

반대로 거기와 상반된 존재는 강제로 부정한다. 현실의 직시에서 외면의 환상에 눈을 돌리면서 타인에 대한 입장은 점점 낯선 존재가 된다. 그것은 2012년 총선이나 대선 과정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서민과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노력하겠다고 하나, 막상 그런 사람들이 출마해도 아무도 편을 들어주거나 혹은 편을 들어주지 못할망정 소통과 대화를 하려 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은 그렇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나 실제적인 행동을 전혀 상반된 점들이 많다는 점이다. 그 후보들만 아니라 그 후보들을 지지하거나 혹은 반대하거나 스스로 공평한 시점을 가진 사람인양 행동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부분만 보려한다. 그것이 결국 fact, 사실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시뮬라크르의 세계인 이미지에서 fact는 사진사의 사진기 각도나, 줌의 영역, 햇빛과 그림자에 따라 상당히 달라진다. 어느 포로를 머리가 아래로 하여 경사지게 눕게 하여 거기에 주전자를 입에 갖다 댄다. 하지만 카메라의 각을 정방향이 아니라 90도로 회전하면 편하게 포로를 눕게 한 상태에서 갈증을 해소시키려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알고 보면 물에는 고춧가루나 소금이 가득 들어갈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리고 이들의 희생은 누군가에게 트라우마로 누군가에는 위대한 전쟁영웅으로 만든다. <타인의 상처>를 읽으면서 어디서 왠지 익숙한 그림이 보였다. 그것은 에릭 홉스봄의 <아방가르드의 쇠퇴와 몰락>에서 나온 프란시스코 고야의 “전쟁의 참회”다.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 이후 테르미도르반동으로 인해 혁명이 와해되자 포병장교로 있던 그가 무력으로서 프랑스 황제가 된다. 이때 그는 여러 나라를 침공하고 그 나라에는 스페인이 있었다. 나폴레옹의 모습을 연상하면, 그는 큰 말에 앉아 있고, 손가락으로 돌격하자는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가 침범한 나라에 사람들은 무참하게 죽였다. 고야가 실제 목격한 시체를 그린 그림을 보면 기가 막힌다.

 

벌거벗은 남자들이 나무에 매달려져 있는데, 한 사람은 남성의 성기가 잘린 채, 한 사람은 목이 나무 가지에 올려져있고, 두 손은 가지 아래 묶여져 있으며 성기 역시 절단되어 있다. 단순히 참수형 내지 교수형으로 죽이면 될 부분을 그들을 알몸에 부분적 절단은 폭력으로 통한 광기의 표출이다. 그 이전에 자크 칼로의 그림은 더욱 기가 막힌다. 어느 죄수가 무슨 처형인지 고문을 당하는지 몰라도, 그의 몸부림과 울부짖음에 어느 사제가 십자가를 들고 죄를 용서하는지 혹은 묻는지 알 수 없는 행동을 한다. 신이라면 정말 이들을 용서할까?

 

진짜 느껴야 할 가치는 이들의 고통과 아픔이 아닌가? 그나마 이 고통도 상징적인 아픔일지 모른다.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은 이미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했다. 어린이, 여자, 늙은이만 사는 마을에 폭탄을 투하하고 무자비하게 총을 갈기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정의를 수행한다는 정의의 사도가 되어있다. 그들은 아폴론이 되어 피리시합에서 패배한 마르시아스를 강제로 피부를 베끼어 죽음과 고통, 그리고 잔악함의 미를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 인간 역시 아폴론의 존재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나오는 아폴론, 그리고 사티로스인 마르시아스, 사티로스는 디오니소스의 종이다.

 

우리의 본연적인 존재 디오니소스의 생명을 아폴론적인 자신들만의 형이상학적 미에 의해 찢기고 발리고 산산조각을 낸다. 타인의 고통은 그들만의 이성, 즉 광기의 합리화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을 고발하는 것이 사진인데, 그 사진을 보면 죄 없는 희생양이 된 사람이 죽었는데도 마치 기뻐하고 기념 촬영하는 이들은 통시적으로 우리가 분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현재도 숨 쉬는 공시적인 존재다. 타인의 고통이 가중되어 파괴되어갈 때 그에게 고통을 가하는 단체의 명분을 보장되어 간다. 타인의 고통으로 이루어진 문명사회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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