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법서설 (성찰.세계론) -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철학자의 학문 연구 방법 고전으로 미래를 읽는다 15
르네 데카르트 지음, 권오석 옮김 / 홍신문화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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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o, ergo sum.”이라고 하면 당연히 사람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 명언을 남긴 르네 데카르트 철학에서 실제 그의 서적인 방법서설을 읽는 순간, 그렇게 데카르트라는 철학자가 나와 스타일이 맞지 않은 점은 분명함을 느꼈다. 왜냐하면 그는 전형적인 서구의 사상을 기반 되었던 사람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시작한 “cogito, ergo sum” 대신 “je pense, done je suis.”가 오히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이 책에서 말한다.

 

어째든 합리주의 시작인 데카르트의 서적을 보면서 느낌은 점은 뭔가 차가운 물이 내 입에서 들어와 그 물만의 독특한 맛을 주기보단 그저 맹맹한 느낌이라고 할까? 기본적으로 이 서적은 윤리학적인 형이상학보다는 관념과 인식, 그리고 물리학에 대한 부분으로 서술한다. 당시 중세에서 교회의 정치적 압력이 너무 강했을까? 갈릴레이가 그래도 지구는 돌고있다 라는 지동설을 발표하고 교회로부터 큰 죄인이 되어야만 했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읽으면 분명히 수학과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적인 요소가 나온다. 지금의 과학에선 다소 어긋난 점은 많은 수학에 대해 생각해보면 정말 치밀할 정도다.

 

수학에 대해 지식수준이 엉터리인 공대전공자로도 대충 수학에 대한 명제를 들으면 그렇구나 하는 정도다. 수학의 공식은 논리적으로 풀어가니 말이다. 그런다고 수학적 지식이 없다고 논리적인 지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학의 논리에 모든 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비논리적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논리가 논리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윤리가 선행되어야 논리가 가능하다고 했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은 그런 윤리적인 부분에 대한 논리보단 단지 사회적인 기준, 도덕적인 영향에 의해 이 책을 저술했다는 점이 의미가 크다.

 

그는 분명 과학적인 논리로 전개하고 있으나, 그 당시 사람이듯이 신학에 대한 지나친 편중으로 인해 모든 것을 신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점이 안타까웠다. 스콜라철학자 내지 혹은 그 이전에 존재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생각해보면 기원전에 그리스와 그 주변에 기거한 아리스토텔레스 쪽이 훨씬 나에게 납득이 된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meta-physics)에 대한 부분이 종교적인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해부학이나 기계기술은 분명 후대에 발전했으나, 인식과 관념에 대한 세계는 오히려 막혔는지 모르겠다. 그 막힌 상태에서의 데카르트의 논리는 자기의 주장은 강력하게 끌고 가기보단 이것에 대한 설명이 아닐 수가 없음을 말하고 싶으며, 반드시 이것을 대해 여러분들은 통찰해주기 바라는 듯한 문체였다. 그런 상태에서 정신과 육체에 대한 언급에서 육체와 정신은 분리되어 있는 점, 정신이 절대적인 영역으로 남겨두었으며, 그것은 마치 신이 이미 만들어놓았고, 그것에 대한 의심을 할 이유는 없어 보이는 것은 방법서설이 논리학적인 내용이 담고 있으나 그런 요소가 논리로부터 크게 벗어난 점이다.

 

서구 합리주의 모델로 본다면 오리엔탈리즘적인 요소가 책 내용 안에서 드문드문 보인다는 점이다. 서구사회 특히 프랑스 주변으로 하는 국가와 민족에서 그는 동양권 문화를 낮추어 보았다. 식인종과 중국인에 대해 같이 묶어 설명하려는 점과 그들 중에서 물론 지식인이 있다는 점은 인정하는 바이나, 기본적으로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에게 그들만의 구조화되어있는 무의식의 체계가 있을 뿐이지 윤리적인 이성에서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 그런데도 식인종과 중국인들에 대해 같은 취급을 하고도 그들 사이에 지식인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기만하는 행동이었다.

 

오로지 이성이란 관념은 자신들의 합리에만 찾는 방법서설로는 엄청난 오만과 편견이 녹아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분명 데카르트 자신은 이지적인 인간은 분명하나, 물질에 대한 부분을 모조리 부정하고 그 물질조차 관념이란 존재가 있기에 가능한 것은 18세기까지 절대적 논변이었을 것이다. 유럽의 역사가 전쟁이란 큰 소용돌이에서 그 합리성을 찾아본다는 사실에서 아이러니하다. 단지 데카르트 그 자신과 그 자신이 살던 시절이 합리적이라고 믿고 싶다는 강렬한 의미만 느껴질 뿐이다.

 

자고로 철학이라 함은 비판적 의식이다. 그 비판은 시작은 자신에 대해서부터 자신이 가진 이성과 그 이성에 대한 의문이다. 관념으로 이루어진 사유의 세계에서 모든 것이 정신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회의 강력한 흐름만 대변할 뿐이었다. 관념으로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위험천만하다. 단지 이 부분은 매우 동의한다. 데카르트는 일부러 군대에 자원하는 부분에서 부상당한 군인을 예로서 인간의 신체손실에 대한 관념적 고통을 나열한 부분이다.

 

이것은 마치 신체가 절단되어 의식에 의해 느낄 수 없으나 무의식적으로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점을 말이다. 가령 손이 절단된 사람은 이미 절단되어 없는 부분에서 격렬한 통증이 온다고 한다. 하지만 육체적으로 손실되었기에 그 통증은 분명 심리적인 통증이다.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은 트라우마가 하나의 통각으로서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째든 전반적으로 데카르트의 서적을 처음 읽어본 나에게 이 책은 읽기가 참으로 거북했다. 읽는 내내 마음 속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거부감이 나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자연의 법칙에서 신이 창조한 것보다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고 보는 나의 신화에 대한 비판이 그렇게 판단하게 만든 것일까?

 

신에 대한 부분에서 충분히 경건하게 상대방의 의지와 의미를 존중한 준비는 되어 있다. 하지만 그 신에 대한 존재성에 대한 과학적 증명이 이루어지지 않은 선에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비판이 있더라도 그 자체가 신에 의해서라면 합리적인 요소가 비합리적인 부분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관념론과 유물론은 계속 끊임없이 대립하여 충돌하여 변증법적인 결론이 멈추지 않고 생산하는 것이 20세기 사상을 지배적으로 다룬 마르크스주의적 구조주의 발상이다. 아니라면 오히려 이미지가 매개로 되어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구조에서 관념은 우리 인간이 스스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인간을 지배당하도록 하는 착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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