툴라예프 사건 빛소굴 세계문학전집 16
빅토르 세르주 지음, 조재룡 옮김 / 빛소굴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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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의 총성이 숙청으로,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발판이 된다. 정권이 사건을 조작하는 과정을 이토록 잘 그려낸 소설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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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설계자들 - 트랜스휴머니즘에서 바이오해킹까지, 실리콘밸리 영생 프로젝트를 추적하다
알렉스 크로토스키 지음, 최정숙 옮김 / 미래의창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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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에 대답을 해 보자.


불멸주의자 중 한 사람인 존슨이 한 말이라고 한다.


"인생 최고의 신체적-정신적-영적 건강을 주는 알고리즘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그 상태에 닿는 대가로 여러분은 알고리즘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알고리즘이 먹으라고 할 때 알고리즘이 짚어준 것을 먹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하겠습니까?" (337쪽)


죽음을 늦추는 방법. 그 대가는 자율성을 잃는 것이다. 알고리즘, 인공지능이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한다. 과연 그런 삶을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니... 이에 대한 대답은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겠지만...


두려운 죽음. 삶과 늘 함께하지만 그 존재를 의식하고 싶지 않은 죽음. 어떻게든 멀리 떨쳐버리고 싶은 죽음,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죽음. 하지만 아직까지는 피할 수 없는 죽음. 필멸의 존재, 인간.


필멸의 존재이기에 불멸을 꿈꾼다. 인간이 애초부터 불멸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신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러한 신이 불멸의 존재를 창조한다면 과연 그에게 생식 능력을 부여할까?


아마, 생식 능력을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불멸의 존재이기 때문에... 생식 능력이 있다면 불멸의 존재들이 한 없이 늘어날 텐데, 그것을 감당할 장소가 없게 될 것이기 때문에... 


또한 신을 믿지 않고 진화론을 믿는다면, 과연 불멸의 존재에게도 생식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을까? 신의 창조와 마찬가지로 진화의 관점에서도 불멸의 존재에게는 생식 능력은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진화란 적응과 생존인데, 불멸의 존재가 계속 생식을 한다면 적응과 생존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창조론과 진화론을 보아도 인간은 또 생물은 불멸의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필멸,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는 것이 바로 이 지구에서 인간이나 생물들이 살아가는 온당한 방식이다. 그것이 그들의 생존을 유지하는 비결이기도 할 것이고.


그런데 불멸을 추구하는 존재들이 있다. 바로 인간이다. 인간이 의식을 통해 죽음을 생각하면서, 또 주위 존재들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죽음에 대해서 두려움을 지니게 되었다. 


알지 못함이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다는 욕망을 낳는다. 그러한 욕망이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한다. 인류가 기록을 남긴 때부터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욕망들이 얼마나 많은 기록으로 남아 있는가?


하지만 성공한 사례가 있던가? 없다. 없으니 지구에서 인류가 계속 생식을 통해 지구 상에 존재했으리라. 이것이 지금까지의 과정이다. 그런데 다른 변수가 생겼다. 인간이 신의 자리에 오르려 하고, 오를 수 있다고 여기는 존재들이 나타났다.


범용인공지능, 그것을 통해서 인간은 불멸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기대를 한다. 지금까지 인간이 몰랐던 사실을 인공지능을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이고, 늙지 않는 법을 발견하고, 그를 실현할 수 있는 시대가 곧 올 것이라고 믿는 존재들... 이 책에서는 그들을 불멸주의자들이라고 부른다.


불멸주의자들(IMMORTALISTS). 최첨단 과학기술을 자랑하는 실리콘밸리에서 불멸을 추구하는 집단들이 나타났고, 이들은 그 가능성을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에게 접근하고 있다.


이런 이들의 사고를 지탱하는 것은 우선 인간은 기계라는 관념과 객관적이고 측정가능한 정보이론, 그리고 시스템 이론이라고 한다.


인간도 디지털처럼 0과 1로 나눌 수 있다는 것, 고도로 복잡한 기계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 인간의 신체를 이렇게 해체하고, 부분들로 나누어 그 부분들의 역할을 파악한다면 죽음을 극복할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다양한 관점을 지닌 불멸주의자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이론과 지금까지 해왔던 실험들을 살피고 있다.


지금까지는 인간의 능력을 동원해 실험과 연구를 했다면, 이제는 인공지능을 통해 그것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다고...


하여 '실리콘밸리의 독실한 불멸주의자들은 ... 죽음을 정복하는 데 필요한 것은 그저 기계에 문제를 맡긴 후 답을 찾아내게 만드는 일 뿐이라고'(157쪽) 한다. 즉 '끊임없이 전진하는 기술이, 인간존재 자체를 포함해 우리가 직면한 모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리란 신념'(173쪽)을 지닌 이들이 바로 실리콘밸리의 불멸주의자들이라고 한다.


엄청난 규모의 자본을 투자하고, 네트워크 국가를 창설한다고 한다. 단지 네크워크 상에만 존재하는 국가가 아니라 국가로부터 땅을 사들여 그 나라의 법에서 자유로운 자신들의 이념을 자유롭게 실행할 수 있는 국가를 마련하고 있다고... 좀 섬뜩하기도 하다. 이들이 국가로부터 땅을 구입해 자신들의 네트워크 국가를 만들 때, 이미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쫒겨나고 말 뿐이니...


또한 이들이 불멸을 추구하는 사업을 하는데, 여기에 가난한 사람, 사회적 약자,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특히 무슬림)은 그들의 네트워크 국가에 들어갈 수도 없다. 또한 그들이 수명 연장을 위해서 하는 갖가지 방법들도 돈이 없는 사람들은 시도조차 해볼 수도 없다.


즉, 이들이 추구하는 네트워크 국가, 이 앞에 '불멸'을 붙이고 싶겠지만 이들 역시 아직 범용인공지능이 나오지 않았기에 '불멸'이란 말 대신 '장수'라는 말을 붙여 '장수 네트워크 국가'라고 하기도 한다는데... 그런 국가에는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이 자리할 수 있는 장소는 없다.


이 책의 저자는 많은 불멸주의자들을 인터뷰한 결과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과연 현재의 삶을 개선하는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가진 자들의 미래를 더욱 있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런 사회가 과연 바람직한가? 저자는 아니라고 한다. 저자는 '죽음은 결국 우리 모두에게 찾아온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것을 맞이하는 우리의 태도뿐이다.'(333쪽)라고 하고 있다.


이렇게 죽음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함께하는 삶을 인식하고, 어떤 삶을 살 것인가? 현재의 내가 만족스러운 삶,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죽음, 그것을 피하는 불멸. 하지만 인간에게 불멸은 생물학적으로 몸이 죽지 않음을 넘어서는 그 무엇일 수도 있음을, 그래서 인간과 다른 생물들에게 생식 능력이 존재함을, 나라는 개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는 집단으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불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실리콘밸리에서 추구하는 인간의 몸을 기계로 대하면서 고치려고 하는 모습과 더불어 먼 미래 기술을 바라면서 냉동하는 기술도 지금 쓰이고 있다고 하니, 인간에게 죽음이란 여전히 피하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물론 내게도.


그래서 더 많이 죽음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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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제국: 권력, 자본, 노동 - 샘 올트먼과 오픈AI의 빛과 그림자
카렌 하오 지음, 임보영 옮김 / 생각의힘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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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AI. 아마 이 회사는 이제 이름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이름에 있는 '오픈'이라는 말을 부정하기 시작했으니까.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기술을 함께 공유하자는 의미로 '오픈'이라는 말을 썼을 테고, 이 '오픈'이라는 말은 독점이 아니라 공유를 의미하는데, 그 동안 오픈AI가 걸어온 길을 보면 이들은 '오픈'과는 거리가 먼 행보를 보였다.


오픈AI의 최고경영자라 할 수 있는 샘 올트먼이 권력을 독점하고, 자신의 이윤을 위해서는 앞뒤 안 가리고 기술 개발을 해 온 결과, 또 그러한 기술 개발로 이윤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독점하기 위해서 '오픈'이라는 말을 부정하고 비밀로 하는 모습이 이 책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다.


이 책을 쓴 저자는 기자다. AI 열풍이 불 때, 그것을 심층 취재한 사람이다. 특히 오픈AI에 대해서 직접 방문해서도, 또 관계자들을 만나고 다양한 학자들을 통해서, 여기에 오픈AI의 기술을 위해 일하는 세계 각국의 노동자들을 만나서 오픈AI라는 회사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재구성하고 있다.


처음부터 박진감 있게 시작한다. 


'2023년 1월 17일 금요일 ... 올트먼은 해고되었'다고. 


어라? 샘 올트먼이 우리나라에 온다고 하면 정치인들부터 기업인들까지 열광을 하는데, 그가 해고된 적이 있었다고? 무슨 스티브 잡스야?


모르던 사실, 관심이 없었으니... 미국의 한 회사 최고경영자가 해고되었든 말든 그것이 내 삶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하지만 아니다. 지금은 샘 올트먼이라는 사람이 해고되느냐 되지 않느냐는 내 삶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그가 오픈AI를 통해서 독점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으니까. 초창기에 그의 비전에 동의하고 함께했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가고 이제 남은 것은 이윤을 선점하기 위한 기술개발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그에게는 인류의 행복이라는 것은 이윤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니 그(또는 그와 같은 신념을 지닌 사람)가 오픈AI에서 계속 권한을 행사하면 우리 삶이 어떤 쪽으로 가게 될지 예측할 수가 없다.


바로 이 책의 제목에서 말한 것처럼 '빛과 그림자'인데, 이것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지 않으면 인류를 유토피아로 이끌지 않고 디스토피아로 몰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오픈AI라는 회사가 발전할 때 자신들의 기술이 초래할 위험을 인지하고, 그것을 막을 방법이 구체화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제품을 출시하자는 쪽과 다른 기업이 제품을 내기 전에 먼저 내야 한다는 쪽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좋은 기술이라고 여러 측면에서 검토를 해야 한다는 쪽이 오픈AI에 있었을 때, 샘 올트먼이 자신의 이윤을 위해서 그들을 기만하는 말을 하는 모습을 여러 취재를 통해서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도록 서술해주고 있다.


그러한 서술이 상상이 아니라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따라서 소설처럼 인물들의 갈등이 잘 드러나고 있지만 독자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한 표현기법이지 결코 허구가 아님을 주장하고 있다.


수차례 자신의 서술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르니 검토해 달라고 오픈AI쪽에도 글을 보냈다고 하니, 저자 역시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오픈AI 쪽에서 답변읋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은 침묵으로 무시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내용은 부풀려서 홍보하는 거대 기업의 모습이라고 보면 된다.


샘 올트먼이 해고되었다는 내용으로 시작해서 그러한 결론을 이사회가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이 방대한 분량으로 펼쳐지고 있는데, 결국 올트먼의 해고는 해프닝으로 끝나고, 그가 다시 복귀하고, 그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오픈AI를 떠나는 것으로 이 책은 끝나게 된다.


아니, 그들이 떠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기술이 사회적 책임, 인류의 행복에 대한 공헌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다른 방향에서 다시 시작하고 있음을, 또한 오픈AI와 정반대의 길을 걷는 사람들도 있음을 보여주면서 끝내고 있다.


그러니 이 책은 무조건 AI기술을 반대하는 책이 아니다. AI를 인류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고민하자는 책이다.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또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AI를 활용할 수 있다면 누가 반대하겠는가? 그렇지 않고 기술이 독점되고 권력이 집중되어 통제하기 힘들어졌을 때 어떤 일이 생길지 고민해야 한다.


또 AI의 뒤에 가려져 있는 최소한의 임금으로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이 있음을, 또한 자원을 수탈하는 거대 기업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거대 기술은 독점으로 나아가기 쉽다. 왜냐하면 그것은 엄청난 규모의 자본이 필요하고, 그러한 자본을 조달할 수 있으려면 거대 기업이 되어야 하고, 그 투자 기금을 회수하기 위해서는 기술을 독점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 점을 샘 올트먼과 오픈AI라는 기업을 통해서 저자가 잘 보여주고 있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는 책인데, AI라는 기술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을 이용한 기업의 행태를 보여주고, 인류를 위해서 과연 그러한 기술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AI에 열광하는 사람, 또 비판적인 사람 모두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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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 살아내고 말하고 저항하는 몸들의 인류학
김관욱 지음 / 현암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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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관한 책이다. 생물학이 아니다. 몸이 무슨 기능을 하느냐를 알려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질병에 관해서, 그 질병의 치유에 관해서 알려주는 책도 아니다.


처음부터 몸에 대한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들어가며'에서 세 개의 몸을 이야기하는데, 그 몸들은 '지하철 속 무거운 몸, 멈출 수 없는 택배기사의 몸, 빨간 조끼 속 몸'이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몸'에 관한 책이 아닌 것이다. 의료인류학이라고 하는데, 몸을 인류학적 관점에서 살피고 있다고 보면 된다.


즉, 생물학적인 몸에 국한하지 않고, 생물학적인 몸에 영향을 주는 사회-문화를 살피고 있다고 보면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몸이 사회-문화적으로 규정되고 있음을, 그래서 몸에 대한 이해나 반응이 상황에 따라 달라짐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몸'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지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말한 '몸의 가장 큰 특징은 보인다라는 사실'(193쪽)에 그렇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 우리 몸은 내 몸이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다. 몸은 보이는 것이다.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몸에는 수동성과 능동성이 모두 들어가 있다. 남을 의식해서 자신의 몸을 그들의 시선에 맞추려는 노력을 하기도 하고, 그런 시선을 의식해서 오히려 반대로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바로 몸이다.


이런 몸을 저자는 '문화가 사람들의 몸을 통제하는 머리 위 양동이 속 물과 같다'(195쪽)고 사유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몸이 생물학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몸은 보이기-보여주기 때문에 오히려 문화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한 문화에 자신의 몸을 맞추려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 그 문화에 맞지 않는 몸은 위축될 수밖에 없음을 여러 사례를 통해서 보여주기도 하고.


하지만 몸은 이렇게 보여지기에 문화라는 통제에 어느 정도 따르기도 하지만, 보여주기에 문화를 바꾸려는 능동성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개인의 몸이 다른 개인의 몸과 만나 함께하는 순간, 변화의 지점으로 나아가게 된다. 즉 기존에 몸을 규정짓던 틀을 벗어날 수 있고, 새로운 틀을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나의 몸이 타인의 몸과 마주칠 때 새로운 시공간의 궤도가 형성될 수 있다'(242쪽)고 표현하고 있다. 몸은 이렇게 규정당하기도 하지만 규정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몸이고, 몸을 생물학적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여 저자는 사람의 변화가 의식(이성)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도 많이 의존하고 있음을 3부에서 다르고 있다. 바로 몸이 변해야 하는 것이다. 몸이 기억한다는 말이 있듯이, 몸은 기억을 통해서 경계를 넘어설 수 있다.


'몸'이 경계를 넘어설 수 있도록 한다는 것. 이러한 몸에는 사회-문화가 담겨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 이러한 관계는 추상적 관계가 아니라 직접 몸을 맞대는 관계일 때 더 좋다는 것을 '포옹'의 예를 들어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우리 사회는 '보여지는 몸'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나, 그런 사회-문화적 분위기를 만들어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과 그럼에도 '보여주는 몸'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회-문화적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 그렇게 우리는 몸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경계를 인식할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몸'에 관해서 다양한 방향에서 설명하고 있어서 새로운 관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저자는 끝부분에서 문화적 시공간을 넘어선 세 몸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장애, 퀴어, 애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들어가며'에서 만난 몸과 연결이 될 수 있는데, 이러한 몸들을 통해서 경계에 대해 생각하고, 그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몸에 대해서, 꼭 자신이 그러한 몸이 아니더라도 그 몸들에 대한 편견을 걷어내고 함께할 수 있어야 함을 생각하게 된다.


'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어서 좋았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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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묻는 사회 - 한국형 연령차별주의와 멸칭 문화
정회옥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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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묻는 사회'


우리 사회에 딱 맞는 말이다. "너 몇 살이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이!" 이런 말을 많이 쓰는 사회 아니던가.


이 책에서도 언급하지만 쌍둥이에게도 위아래를 정하는 나라가 이 나라니, 한 해, 두 해 이상 차이가 나면 어떻겠는가.


나이에 따라 철저한 위계를 따지던 나라에서 이제는 그것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최근에 듣기로는 대학가에서도 학번에 따라서 너나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를 따져서 형-누나 한다고 하던데... 적어도 예전에는 너무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으면 같은 학번은 그냥 친구였는데...


이렇게 같은 학년에서도 나이를 따지는 사회이고, 학년이 다르면 철저하게 위-아래를 구분하는 사회가 바로 우리 사회니, 나이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초중고등학교에서 학년은 넘을 수 없는 벽이 되는 사회, 고작 한 해 먼저 학교에 입학했다고 마치 윗사람이 된 양 행세하게 하는 학교라니... 학교의 이런 위계질서를 12년 받고 나면 자연스레 나이에 따른 위계가 고착되지 않겠는가.


단지 나이가 많은 사람을 존중하면 그것은 좋다. 그런데 존중을 넘어서 위-아래를 구분지으려 하니 문제다. 또 그 나이 대가 누려야 할 권리라고 생각하면 다른 나이 대의 사람들이 그것을 침해할 수 없다고도 여기기도 하고.


대표적인 예가 저자도 언급하고 있지만 교통약자석 아닌가. 말 그대로 교통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좌석인데, 예전에 '노약자석'이라고 노인들의 전용 좌석이라고 착각해 다른 사람들이 앉으면 무슨 큰일이 나는 것처럼 얘기한 때가 있었다.


노약자라는 말에도 노인이라는 말과 약자라는 말이 합쳐져 있는데, 몸이 불편한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인데, 노인만의 자리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어서 이제는 '교통약자'라는 말로 바꾸었는데도 여전히 편견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편견이 언어에 반영이 되면 멸칭이 된다. 특정 세대를 비하하는 말이 쓰이게 되는데, 이것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세대 간에 담을 쌓는 결과는 낳는다. 저자는 이 책에서 각 세대를 비하하는 멸칭을 보여주고 있는데, 어떤 세대도 이러한 멸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이런 멸칭들이 버젓이 쓰인다면 세대 갈등이 내면화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하게 된다.


그래서 저자는 이러한 멸칭을 쓰지 않아야 한다고, 이 멸칭이 특정 세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대에 쓰이고 있다고 하니, 이것 참 문제다.


세대가 무엇인가? 누구나 한번은 거쳐야 하는 시기 아닌가. 사람이라면 모두가 겪어야 할 그런 시기들을 비하하면 결국 자신을 비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니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세대라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고 함께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함께 무언가를 해야 한다. 관계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서로 부대끼면서 만들어 갈 수밖에 없다.


만나야 이해든 뭐든 할 수 있으니, 세대를 가르거나 또는 특정 세대를 배제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 하여 저자는 '노 키즈 존'이나 '노 시니어 존'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당연한 말이다. 어떤 공간에서 특정 세대를 배제하는 것은 연령 차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인권을 무시하는 행위고, 이런 행위가 일어나면 다른 차별도 우리 삶에 들어오게 된다.


따라서 이렇게 특정 세대를 배제하는 행위는 해서는 안 된다. 다양함이 사회를 풍요롭게 하듯이 각기 다른 세대가 어울리면서 살아가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이렇게 서로가 어울리는 사회라면 늙지 않으려는, 젊음을 유지하지 않으면 사회에서 도태될 것 같은 느낌은 사라질 것이다. 오히려 자신들의 나이를 받아들이고, 그 지점에서 다른 세대들과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려 할 것이다.


연령차별주의가 낳은 멸칭 문화. 이것은 하루바삐 사라져야 한다. 지금은 많이 순화가 되고 있지만, 여전히 특정 세대를 겨냥해 쓰고 있는 멸칭들, 쓰지 않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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