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애의 비극
제인 워드 지음, 노지양 옮김 / 라우더북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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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의 비극'이 아니고? 책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든 생각이다. 이런 생각이 이 책에서 비판하고 있는 이성애 중심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이 책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이성애에 대한 생각을 뒤집고 있다.


'앨라이(얼라이ally)'라는 말에서 이 뒤집힌 관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보통 앨라이는 이성애자들이 동성애자들에 동조한다는 의미로 쓴다. 다수가 소수와 함께 한다는 의미로...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로.


그런데 이 책에서는 '앨라이 관계'를 반대로 뒤집어 보는 일 안에는 어마어마한 가능성과 잠재력이 내포되어 있다. 퀴어들은 여성혐오의 역설 아래에서 고통받는 이성애자들에게 페미니스트로서 개입하고 퀴어 관점에서의 가이드를 제공해줄 수 있다.' (70쪽)고 하고 있다.


그간 이성애자들의 사랑은 여성 혐오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를 여성 혐오라고 하기가 그렇다면 여성 억압이라고 해도 좋겠다. 남성의 기준에 맞는 여성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 지금까지의 이성애적 사랑 아니었던가?


여성으로서 지녀야 할 자세, 행동, 외모, 말투 등등, 그리고 집 안에서 여성으로서 해야 할 일 등등... 그러한 것들이 이성애적 사랑으로 감춰진 여성 억압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인데... 이러한 억압에 바탕한 사랑이 과연 진정한 사랑이냐고...


오히려 남성의 욕망을 해소하는 대상으로서 여성을 필요로 한 것이지 동등한 인간으로서 사랑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이 책 '이성애의 비극'에 담겨 있는 뜻이다.


책의 앞부분을 보면 '이성애의 비극'은 여성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가부장적 폭력의 세계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삶을 잃어가는 여성들의 모습이 바로 '이성애의 비극'이란 이름으로 나타나니까.


그래서 '앨라이 관계'를 뒤집는다는 것은 퀴어들이 이성애적 사랑을 하는 여성들에게 동조하면서, 그들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사랑에 대해 알려주고 함께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데...


남성 욕망의 객체가 아니라 자기 사랑의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고, 그러한 사랑을 가르쳐줄 수 있는 존재가 퀴어들이라고... 특히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모델을 참고해야 한다고...


그럼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모델은 뭐지? 간단하다. '각자의 성적 욕망은 본인의 책임이라는 것'(295쪽). 이는 누구를 의식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에게 충실한 사랑이라는 것. 자신만큼 상대에게도 충실한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랑에서 에로틱은 '동일시이고 상호 인정이며 기쁨이 피어난 자리'(294쪽)라고 한다. 주체/객체의 분리가 아니라 서로가 주체가 되는, 존재 자체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 가부장적 권위가 끼어들 틈이 없다. 상대를 내 욕망의 객체로 삼는 것도 있을 수가 없다.


이런 점에서 퀴어들이 이성애자들의 '앨라이'가 될 수 있다고, 그간 사회의 통념을 뒤집는 주장을 한다. 


보통 퀴어들이 힘들게 사랑을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회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이고,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에 충만함과 기쁨을 느낀다고... 서로를 온전히 사랑하는 관계로 만들어간다고... 그럼에도 동성애 혐오가 사회에 있는 이유는 '이성애적 불행과 비참함이 외적으로 표현되는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217쪽)고 하는데, 


이것은 '반복되는 퀴어의 시련 서사는 그 고통에 동반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것을 상쇄해주는 퀴어로 사는 것의 심오한 기쁨을 무화하고 이성애적 삶은 젠더화된 폭력과 고통에서 자유롭다고 암시하면서 이성애 규범성을 더욱 공고하게 이 사회에 심어놓는다'(23쪽)는 말로 구체화하고 있다. 결국 동성애 억압은 이성애자들 또는 가부장적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불행이나 억압을 덮으려고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는 현상이라고 보면 된다.


차별은 결국 내 안의 결핍을 외부에게 전가하는 것인데, 내 안의 결핍이 결핍이 아니라 바로 자신일 수 있다는 것, 그러한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인다면 다른 존재들을 차별하려는 마음이 생길 수가 없다는 것을 이 책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저자는 그간의 통념을 뒤집는다. 동성애자들이 힘들다는 생각을, 이성애자들이 얼마나, 특히 여성 이성애자들의 비극에 대해서 여러 사례를 통해, 그것도 동성애자들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극이성애적인 남성 hyperstraight man'은 여성의 몸에 끌릴 뿐 아니라 여성이라는 종의 집단적 자유에 대해서도 끌린다. 여성을 좋아한다는 것은 여성을 위한다는 뜻이다. 진정으로 이성애적인 남성, 다시 말해 깊은 이성애자가 되고 싶다면 ... 그 사람은 반드시 페미니스트여야 한다.'(315-316쪽)


이보다 명확하게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사랑에 굳이 성별 구분을 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까지 성별 구분을 해왔다면 앞으로는 그러한 구분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냥 사람을 사람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그런 사랑을 해야 할 뿐이라는 것을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를 이 책의 해제를 쓴 한채윤의 말로 끝을 맺는다. 이보다 더 명확하게 사랑을 하려면 이렇게 해야한다고 정리할 수 있을까 싶다.


"같다고 하기엔 우리 모두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다. 그러니 평등한 관계를 상상하는 힘이 없다면, 그것이 이성 간이든 동성 간이든 사람 사이의 관계는 결국 '꽝'이 될 뿐"(329쪽)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이 책은 퀴어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하고, 사랑에 대해 더 깊은 생각을 하게 한다.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읽어보아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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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친밀한 살인자 - 강압적 통제는 어떻게 관계를 지배하는가
허민숙 지음 / 김영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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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불편하다. 목숨을 걸고 사귀어야 하다니... 세상에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만났는데, 그 만남이 죽음에 이르게 한다면? 도대체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하나?


특히 친밀한 관계, 부부나 연인 관계에서 벌어지는 폭력, 살인은 정말, 행복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불행, 죽음으로 가는 길이 되는 경우가 있으니, 그야말로 사랑을 목숨 걸고 해야 하는 판이다.


비유가 아니다. 목숨 걸고란 말을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는 사랑이라는 낭만적인 말로 미화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사랑을 한다는 말이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그런데 그 상대를 어떻게 알아보나. 처음부터 난 당신을 죽일 거야 하면서 접근하는 연인이 있을까? 당신을 사랑해, 당신에게 내 모든 것을 줄 수 있어.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게, 아니면 우리 행복하자 하면서 만남을 시작하지 않나.


그러던 관계가 어느 새 집착으로 변해 사사건건 간섭하게 되고, 그 간섭이 통하지 않으면 폭력을 휘두르고, 더 나아가 죽음에 이르게까지 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가정폭력, 교제폭력(살인)이라고 하는 범죄들 이야기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데 사람을 만나는데 목숨에 위협을 느끼게 되면 그런 만남은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도 상대가 따라줘야 가능하다.


가정폭력이나 교제폭력은 상대의 집착과 폭력으로 인해 벗어나기 힘들다. 그것도 친밀한 관계, 사적인 관계라고 해서 경찰이나 공권력이 잘 개입하려 하지 않는다. 


이 책에 나와 있는 통계를 보라. 무시무시하다. 무섭단 생각이 들 정도다. 우선 2024년 교제폭력 신고 건수는 8만 8,394건(17쪽)이라고 한다. 한 해 교제폭력으로 경찰에 신고된 건수만 8만 건이 넘는다. 이를 하루로 환산하면 하루에 242건의 신고가 있었다는 말이다. 약 6분마다 한 건의 신고가 들어온다는 얘기니...


신고하지 않은 교제폭력까지 합친다면 거의 매 순간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는 교제폭력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러한 신고가 사건으로 접수되는 건수는 대폭 준다는 사실.


신고하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자체 종결되는 건수가 반이 넘는다고 한다. 앞에서 든 2024년 통계를 보면 신고 건수 88.394건 중에서 4만 8,065건이 현장에서 종결되어 현장종결률 54.4 퍼센트를 기록(19쪽)했다고 한다.


이 통계를 봐도 신고도 많이 되지만 현장종결로 더이상 수사가 되지 않는 경우도 절반이 넘는다는 것인데, 이런 와중에 교제살인을 당하는 사람이 나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너무도 많은 교제폭력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통계인데, 이런 교제폭력을 막을 제도나 법은 아직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태라고. 이제 교제폭력을 규제하는 법이 발의되었다고 하는데...


친밀한 관계이기 때문에 당신들의 문제니 당신들이 해결해 하는 것이 아니라, 친밀한 관계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위협을 받고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사회가,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점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제폭력이 일어나는 전조를 파악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 첫번째는 바로 과장된 자상함과 친절함이다. 물론 자상함과 친절함은 좋은데, 다만 남을 자신이 통제하기 위해 접근하는 위장된 자상함과 친절함이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이 자상함과 친절함을 처음부터 위장인지 진실인지 알 방법이 없다.


그렇지만 다음 단계, 의심과 질투로 상대의 행동을 통제하려는 것은 파악할 수 있다. 이런 모습이 보이면 이는 교제폭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조심해야 하고, 관계를 고민해야 한다고...


의심과 질투에서 교제폭력으로 넘어가는데 폭력을 넘어서 살인으로까지 나아가는 전조는 바로 '스토킹과 목조름'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스토킹에 관해서는 범죄로 다루고 있는데, 아직 교제폭력까지는 나아가지 않고 있다고 한다. 특히 목조름은 다른 나라에서는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엄한 처벌을 한다고... 그러한 엄한 처벌을 통해서 살인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그에 관한 법이 없다고 한다.


하여 저자는 우리나라도 교제폭력을 규제할 수 있는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하면서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연인, 배우자, 파트너 등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통제 행위'를 범죄화하는 법적조항을 마련해야 한다.(175쪽)


둘째,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통제 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처벌하기 위해서는 '친밀한 관계'에 대한 법적 정의가 필요하다. (176쪽) - 저자는 외국 사례를 검토하면서 친밀한 관계에는 현재의 관계만이 아니라 과거에 맺었던 관계도 포함된다고 하고 있다. 


셋째, '친밀성'이라는 관계의 특수성을 반영해 가해자 처벌을 규율하기 위해서는 '반의사불벌죄' 배제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177쪽)고 한다.


왜냐하면 친밀한 관계에서는 상대의 가족관계나 직장 또는 어디를 언제 가는지 등을 가해자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피해자는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이나 자신과 관계맺고 있는 다른 존재들이 위험에 처할까 봐 가해자를 신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또 자신에게 가까이 있는 가해자는 위협적인 존재이기에 그 앞에서 직접 처벌 의사를 밝히기도 힘들다고 한다. 그러니 반의사불벌죄를 폐지해 교제폭력은 현행범으로 그 자리에서 피해자와 격리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기술적 도입으로는 '스마트 워치'의 보급이 아니라 'GPS위치추적장치'를 도입해야 한다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스토킹 처벌법에 따라 이 위치추적장치가 반영되어 시행되고 있다(183쪽)고 하는데, 'GPS위치추적장치'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일정 거리 이내로 가까워지면 경보가 울리는 시스템(183쪽)이라고 하니, 피해자가 가해자를 피하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라고 한다.


무엇보다 지금 교제폭력을 당하는 존재가 여성들이 많으니 성적 차별, 무시를 금지하는 차별금지법이 (이는 여성만이 아니라 소수자 누구에게나 해당될 테고,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이러한 교제폭력이 다른 소수자들에게 가해지지 않고 있다는 말을 할 수 없다. 그들이 신고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테니, 어떤 성별이든 또 종교를 가졌든 아니면 여타 어떠한 이유에서든 차별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법이 차별금지법이니) 시행되어야 하고, 이런 법이 적용되지 않는, 실질적으로 차별이 없는 사회가 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단지 교제폭력을 방지하는 법률을 제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차별도 일어나지 않는 사회로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 저자 역시 그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읽으면서 서글펐다. 만남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만나면서 목숨이 위협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그것도 아주 많이. 하루빨리 이러한 일이 없어지도록 제도로 또 문화가 있는 나라가 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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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은 오지 않는다 - 자동화 신화와 은폐된 인간 노동의 진실
안토니오 카실리 지음, 변정수 옮김 / 이상북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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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은 오지 않는다'가 아니다. 로봇은 온다. 오는데, 로봇이 온다고 해서 인간 노동이 줄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흔히 우리가 지금 하는 일들을 로봇이 하게 되면 우리는 그 시간에 다른 활동을 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우리 인간에게도 좋은 일이라고들 한다. (여기서는 로봇과 인공지능을 묶어서 하나의 개념으로 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인 카실리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한다. 로봇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로봇이 온다고 해도 인간 노동은 줄지 않는다고, 오히려 인간 노동은 작게 작게 쪼개져 노동이라고 판단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게 되어, 보상받지 않는 노동을 하게 된다고 한다.


지금 인공지능이 개발되고,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인공지능들이 속속 나오고 있는데, 그들이 그 정도 수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우리는 살피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냥 눈 앞에 보이는 현실에 열광하거나 두려움에 빠지거나 하는데, 카실리는 보이는 현실 너머, 그러한 현실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핀다. 지금 인공지능이 이 정도 능력을 발휘하게 되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이 있었다는 점. 또 지금도 그렇게 사람들의 노동이 뒤에 있다는 점을 수년 간의 조사를 통해서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노동은 노동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말이고,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말은 노동자들이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플랫폼들이 기를 쓰고 자신들에게 이윤을 창출해주는 사람들을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고 개인사업자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이윤은 챙기지만 그들을 보호하지는 않겠다는 방침인 것이다.


또 개인이 즐거워서 하는 일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면서 재미로 하는 활동이기에 노동이 아니라고, 자신들이 그에 대해 어떤 보상을 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재미로 하든 돈을 받고 하든 클릭을 하는 순간순간이 플랫폼들에게는 도움이 된다.


더욱더 빠르고 정확한 인공지능을 운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인데, 우리가 좋아요를 누르든 링크를 타고 들어가든 우리의 행위 하나하나가 모두 플랫폼들에게는 유용한 자료가 된다. 저자는 디지털이라는 말을 '손가락'이라는 뜻도 있다면서, 이 디지털 세상은 결국 우리들의 손가락에서 비롯된다고도 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주 적은 수입으로 라벨링을 하는 사람들, 그냥 플랫폼에 접속해 재미로 클릭하는 사람들 모두의 행위가 플랫폼의 이윤을 창출하는 일이 된다는 것. 그러므로 로봇이라는 현상 앞에서 사람들이 잊고 있는 노동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 노동은 사라지지 않고 또 줄지 않을 것이라고... 물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일들은 로봇(인공지능)으로 대체될 수 있다. 그것을 보고 인간 노동이 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는 일자리, 지금까지 인간이 하는 노동으로, 인간의 일자리였던 것이 로봇으로 대체된 것일 뿐.


로봇이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학습이 있어야 하는데, 학습하기 위해 필요한 데이터를 누가 만들어내는가 하면 그 데이터를 만들어내는 인간이 바로 인간이다. 즉 로봇이 일을 하면 할수록 인간이 해야 하는 일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로봇은 수많은 데이터, 새로운 데이터를 필요로 하고, 그러한 데이터를 창출해내는 존재는 인간이기 때문이라는 것. 그럼에도 그러한 인간들의 노동을 보지 못하고, 또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그러한 사회는 인간의 행복을 구현하는 사회가 아니라 소수 인간은 행복할지 몰라도 다수의 인간들은 불행한 사회가 된다고...


그런 사회가 되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노동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노동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카실리는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 표지에 있는 작은 제목 '자동화 신화와 은폐된 인간 노동의 진실'이라는 말이 다가온다. 자동화로 인간의 노동이 사라질 거라는 것은 허상이라고... 자동화 뒤에 오히려 잘게잘게 쪼개진 일들을 하는 인간이 있음을 파악해야 한다고...


이 책의 장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인공지능, 로봇, 자동화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숨겨진 인간 노동을 보게 하는 것. 그러한 인간 노동이 있기에 인공지능, 로봇, 자동화가 가능한 것이라고. 그러니 우리가 편리하게 살 수 있게 하는 이러한 구조를 지탱해주는 것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 또 그것이 노동인지 생각하지 않고 하는 우리 모두의 활동들이니 '보편 디지털 소득'을 도입해야 한다고 한다. 


카실리는 '나는 로봇이 노동자를 대체하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는, 로봇이 아니라 더 낮은 임금을 받는 다른 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보편적 기본소득은 실업을 보상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착취에 맞서기 위한 필수적인 수단'(439쪽)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사유재산은 사회적 재산으로, 종속된 노동은 자기결정적 노동으로, 데이터와 노동을 둘러싼 울타리는 진정한 공유 인프라로 대체되어야 한다'(443쪽)고 한다. 


이렇게 카실리는 인공지능으로 인해 인간의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노동과는 다른 노동으로 인간들이 계속 일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런 인간들의 노동이 인공지능(로봇, 자동화)을 이끌고 유지하게 하니, 그들이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도록 해야 한다는 것. 


인공지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라 카실리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인간과 인공지능이 공존하는 사회는 충분히 가능하고, 또 사회의 불평등을 줄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소수에게만 집중되는 부와 시간의 여유가 아니라 모두에게 분배되는 부와 시간의 여유,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저자인 카실리가 꿈꾸는 세상이고, 우리 역시 그러한 꿈을 꿔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덧글


참고로 나는 여기서 로봇, 인공지능, 자동화를 같은 의미로 썼고, 카실리가 이 책을 쓴 때가 2019년이라고 해서 인공지능이 한창 떠오르는 지금과는 좀 거리가 있지 않나 했는데, 영문판을 2025년에 냈다고 하고, 이 책의 번역은 주로 2025년을 기준으로 했다고 하니,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인공지능 논의와 동떨어져 있다고 할 수 없다. 그의 주장을 참조하는 것도, 특히 결론 부분에서 제시하고 있는 대안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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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받아보았던 잡지들이 하나둘 폐간이 되거나 휴간이 되더니... 그러더니 격주간에서 월간으로, 월간에서 격월간으로, 격월간에서 계간으로, 다시 계간에서 반연간으로 바뀌는 잡지들을 보게 된다.


  책이라는 물성을 지닌 존재가 우리 곁에 오기가 많이 힘들어졌구나 하는 생각.


  특히 돈이 되지 않는 잡지들은 발간을 지속하기가 힘든 상태가 되었음을 느끼게 하는데.


  [삶이보이는창]을 처음 만난 것은 격월간지였을 때였던가, 두 달에 한 번 만나다가, 계간지로 변경이 되어 세 달에 한 번 만나다가, 이번에 보니 일년에 두 번, 1월과 7월에 발간을 한다고 한다.


  그만큼 운영이 힘들어진 거겠지. 참 많은 잡지들이 계속 나오고 있는데, 이렇게 우리 일상의 삶을 다루는 잡지는 점점 더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니, 그 점이 안타깝다.


  그럼에도 아직 폐간은 아니다. 한 해에 두 번은 만날 수 있다. 우리 주변에 있지만, 주의해서 눈길을 주지 않던 삶들. 그런 삶들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세상을 보여주는 글들이 실려 있는 이 잡지를.


'살아가는 이야기'에서 화가나 그림에 대한 이야기, 새에 관한 이야기, 자신이 살고 있는 이야기, 부모님 이야기 등등이 실려 있어, 특별한 삶이 아니라 이런 보통의 삶들이 바로 우리의 삶임을 생각하게 해주고 있는데...


여기에 '문학' 부분이 있어서 시도, 시인에 대한 이야기도 가끔 소설도 읽을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이 잡지에는 온갖 삶들이 들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호에 실린 단편소설 '오븐이 켜지는 시간(이상무)'은 학교 급식실에서 일하는 조리종사원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아이들 밥을 해주기 위해서, 즉 아이들을 살게 하기 위해서 일을 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죽어가고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


그런데도 학습권 운운하면서 그들의 파업을 막으려 하는 학생의 모습에서, 몇 해 전에 모 대학에서 일어났던 학생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이 잡지가 어떤 잡지던가? '삶이 보이는 창' 아닌가. 학생들은 자신들의 점심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자신들에게 밥을 해주는 노동자들이 남이 아님도 안다. 그들의 노동으로 자신들이 맛있는 한 끼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을.


그런 맛 있는 한 끼에 노동자들의 목숨이 담보로 걸리면 안 된다는 사실도 안다. 함께 살기 위해서 밥을 하고 먹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조금 맛이 없더라도 남의 건강을 해치는 요리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 그 점을 이 소설 속 학생들은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조리종사원을 '이모'라고 부르는데, 이 '이모'는 시중의 음식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부르는 호칭의 의미가 아니라 자신들의 가족과 같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친밀한 관계를 뜻하는 말로 쓰고 있는 것이다.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병에 걸릴 위험이 있는 요리를 해달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할 테니... 그렇게, 학교라는 장소에서 함께 지내는 이들의 모습이,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이, 그것이 파업이라는 노동자들의 권리 행사를 통해서라도 이루어졌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이 소설을 통해서 다시 우리나라 학교 현장을 생각하게 된다. 학교 급식이 공공화 되었지만 과연 조리종사원들이 일하는 환경은 나아졌는지... 여전히 암에 걸리는 사람,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고, 하는 일에 비해 사람 수는 적은데, 학생수가 준다고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을 깎겠다고 할 것이 아니라, 그만큼 예산에 여유가 있다면 이러한 환경 개선에 우선 투자를 하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됐다.


우리나라 학교 환경은 여전히 좋지 않은데, 학교 급식실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환경은 더더욱 좋지 않으니... 학생수에 맞춰 주던 교부금을 학교 전체적인 교육 환경 개선에 쓰도록 한다면... 결코 많다는 소리를 하지 못할 텐데.


이런 삶. 또 다른 많은 삶들. 내가 살아보지 않지만 [삶창]을 통해서 다른 삶들을 만나고, 그 삶들이 함께 행복해지는 사회를 꿈꿀 수 있으니, 이것이 책을 읽는 보람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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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노래가 - 흐르고 굽이치다 어우러진 아홉 곡의 인생 이야기
노회찬재단 구술생애사팀 지음, 노회찬재단 기획 / 후마니타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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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재단 구술생애사 팀이 낸 두 번째 책. 권력을 행사하지도, 남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지 않지만 자신들의 삶을 묵묵히 살아온 사람들. 그런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행복을 전하게 된 사람들 이야기.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 그리고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을 넘어 다른 이들에게 무언가를 주고자 하는 삶을 살고자 했다는 것.


그것이 노래든, 밥이든, 또는 점술이든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과 관계를 맺고, 그들이 조금이라도 행복한,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면서 살아왔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가 잘사는 사회. 성소수자나 이주민이라는 이유로, 또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바라며 살아온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 사회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구술생애사라는 것이 사람의 인생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다. 위대한 인물들의 이야기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남기는 일. 이것은 무척이나 소중한 일이다. 이들 역시 오롯이 자신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이렇게 다른 사람의 삶을 듣고 기록하는 일은 곧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일이기도 하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 것. 방향을 찾는 것. 그것이 구술생애사를 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읽는 우리들은 또다른 삶을 만나게 된다. 내가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구술되어 기록된 삶을 통해 다른 삶을 살아보게 된다. 그들이 살아온 험난한 세상. 또 그들이 보여준 희망들.


소위 민중가수라 불리는 최도은('불나비'로 잘 알려져 있다), 김원중('바위섬'으로 유명한 가수, 그가 '직녀에게'도 불렀다니)의 이야기, 민중가요를 부르는 단체인 '꽃다지' 기획자 민정연, 퀴어 무속인 박인, 퀴어 직장인 한열음, 그리고 하숙생들의 밥을 해주었던 하숙집 운영자 정경애, 여기에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서 노력하는 웨노웨 흐닌 쏘(강선우), 방글라데시에서 와 한국인으로 정년을 맞이하는 박지환(하비불), 서남아시아의 문화 행사를 기획하면서 지내는 자한길 알럼이 이 책의 주인들이다.


아니 이들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주인이라고 해야겠다. 이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삶 속에 녹여내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고. 하여 이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듣고 기록한 사람들에게도 고마움을 느낀다.


이런 작업이 없었다면 우리에게 다가오지 못했을 삶들을 만나게 해주었으니... 이런 삶을 만나 다양한 삶이 있고, 그러한 다양한 삶들이 우리 사회를 더 건강하게 만들고 있음을.


아마도 이 작업은 두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 우리가 주변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계속 나올 것이라 기대한다. 


제목이 된 '우리의 노래가'는 백창우의 노래 '우리의 노래가 이 그늘진 땅에 햇볕 한줌 될 수 있다면'에서 따왔다고 한다. 각 인물을 소개하는 장들도 이 노래에서 가사를 따와 '1부는 '이 그늘진 땅에', 2부는 '이름 없는 꽃들 다 이름을 얻고', 3부는 '움츠린 어깨들 다 펴겠네'이다.


이 책에 소개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이 노래를 찾아 들으면 더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이 노래의 끝부분처럼 '이름 없는 꽃들 다 이름을 얻고 / 움츠린 어깨들 다 펴겠네 / 닫힌 가슴들 다 열리고 / 쓰러진 이들 다 일어나 아침을 맞겠네 /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 모두 하나될 그날이 오면 / 얼싸안고 춤을 추겠네 / 한판 대동의 춤을 추'는 우리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읽으면서 예전에 들었던 백창우의 노래가 머리 속에서 울리고 있었고, 최도은의 불나비, 김원중의 바위섬과 직녀에게가 떠다녔으니... 앞부분에서 만난 이들은 그래도 이름이라도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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