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은 오지 않는다 - 자동화 신화와 은폐된 인간 노동의 진실
안토니오 카실리 지음, 변정수 옮김 / 이상북스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로봇은 오지 않는다'가 아니다. 로봇은 온다. 오는데, 로봇이 온다고 해서 인간 노동이 줄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흔히 우리가 지금 하는 일들을 로봇이 하게 되면 우리는 그 시간에 다른 활동을 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우리 인간에게도 좋은 일이라고들 한다. (여기서는 로봇과 인공지능을 묶어서 하나의 개념으로 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인 카실리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한다. 로봇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로봇이 온다고 해도 인간 노동은 줄지 않는다고, 오히려 인간 노동은 작게 작게 쪼개져 노동이라고 판단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게 되어, 보상받지 않는 노동을 하게 된다고 한다.


지금 인공지능이 개발되고,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인공지능들이 속속 나오고 있는데, 그들이 그 정도 수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우리는 살피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냥 눈 앞에 보이는 현실에 열광하거나 두려움에 빠지거나 하는데, 카실리는 보이는 현실 너머, 그러한 현실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핀다. 지금 인공지능이 이 정도 능력을 발휘하게 되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이 있었다는 점. 또 지금도 그렇게 사람들의 노동이 뒤에 있다는 점을 수년 간의 조사를 통해서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노동은 노동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말이고,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말은 노동자들이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플랫폼들이 기를 쓰고 자신들에게 이윤을 창출해주는 사람들을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고 개인사업자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이윤은 챙기지만 그들을 보호하지는 않겠다는 방침인 것이다.


또 개인이 즐거워서 하는 일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면서 재미로 하는 활동이기에 노동이 아니라고, 자신들이 그에 대해 어떤 보상을 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재미로 하든 돈을 받고 하든 클릭을 하는 순간순간이 플랫폼들에게는 도움이 된다.


더욱더 빠르고 정확한 인공지능을 운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인데, 우리가 좋아요를 누르든 링크를 타고 들어가든 우리의 행위 하나하나가 모두 플랫폼들에게는 유용한 자료가 된다. 저자는 디지털이라는 말을 '손가락'이라는 뜻도 있다면서, 이 디지털 세상은 결국 우리들의 손가락에서 비롯된다고도 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주 적은 수입으로 라벨링을 하는 사람들, 그냥 플랫폼에 접속해 재미로 클릭하는 사람들 모두의 행위가 플랫폼의 이윤을 창출하는 일이 된다는 것. 그러므로 로봇이라는 현상 앞에서 사람들이 잊고 있는 노동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 노동은 사라지지 않고 또 줄지 않을 것이라고... 물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일들은 로봇(인공지능)으로 대체될 수 있다. 그것을 보고 인간 노동이 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는 일자리, 지금까지 인간이 하는 노동으로, 인간의 일자리였던 것이 로봇으로 대체된 것일 뿐.


로봇이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학습이 있어야 하는데, 학습하기 위해 필요한 데이터를 누가 만들어내는가 하면 그 데이터를 만들어내는 인간이 바로 인간이다. 즉 로봇이 일을 하면 할수록 인간이 해야 하는 일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로봇은 수많은 데이터, 새로운 데이터를 필요로 하고, 그러한 데이터를 창출해내는 존재는 인간이기 때문이라는 것. 그럼에도 그러한 인간들의 노동을 보지 못하고, 또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그러한 사회는 인간의 행복을 구현하는 사회가 아니라 소수 인간은 행복할지 몰라도 다수의 인간들은 불행한 사회가 된다고...


그런 사회가 되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노동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노동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카실리는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 표지에 있는 작은 제목 '자동화 신화와 은폐된 인간 노동의 진실'이라는 말이 다가온다. 자동화로 인간의 노동이 사라질 거라는 것은 허상이라고... 자동화 뒤에 오히려 잘게잘게 쪼개진 일들을 하는 인간이 있음을 파악해야 한다고...


이 책의 장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인공지능, 로봇, 자동화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숨겨진 인간 노동을 보게 하는 것. 그러한 인간 노동이 있기에 인공지능, 로봇, 자동화가 가능한 것이라고. 그러니 우리가 편리하게 살 수 있게 하는 이러한 구조를 지탱해주는 것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 또 그것이 노동인지 생각하지 않고 하는 우리 모두의 활동들이니 '보편 디지털 소득'을 도입해야 한다고 한다. 


카실리는 '나는 로봇이 노동자를 대체하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는, 로봇이 아니라 더 낮은 임금을 받는 다른 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보편적 기본소득은 실업을 보상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착취에 맞서기 위한 필수적인 수단'(439쪽)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사유재산은 사회적 재산으로, 종속된 노동은 자기결정적 노동으로, 데이터와 노동을 둘러싼 울타리는 진정한 공유 인프라로 대체되어야 한다'(443쪽)고 한다. 


이렇게 카실리는 인공지능으로 인해 인간의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노동과는 다른 노동으로 인간들이 계속 일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런 인간들의 노동이 인공지능(로봇, 자동화)을 이끌고 유지하게 하니, 그들이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도록 해야 한다는 것. 


인공지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라 카실리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인간과 인공지능이 공존하는 사회는 충분히 가능하고, 또 사회의 불평등을 줄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소수에게만 집중되는 부와 시간의 여유가 아니라 모두에게 분배되는 부와 시간의 여유,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저자인 카실리가 꿈꾸는 세상이고, 우리 역시 그러한 꿈을 꿔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덧글


참고로 나는 여기서 로봇, 인공지능, 자동화를 같은 의미로 썼고, 카실리가 이 책을 쓴 때가 2019년이라고 해서 인공지능이 한창 떠오르는 지금과는 좀 거리가 있지 않나 했는데, 영문판을 2025년에 냈다고 하고, 이 책의 번역은 주로 2025년을 기준으로 했다고 하니,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인공지능 논의와 동떨어져 있다고 할 수 없다. 그의 주장을 참조하는 것도, 특히 결론 부분에서 제시하고 있는 대안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예전에 받아보았던 잡지들이 하나둘 폐간이 되거나 휴간이 되더니... 그러더니 격주간에서 월간으로, 월간에서 격월간으로, 격월간에서 계간으로, 다시 계간에서 반연간으로 바뀌는 잡지들을 보게 된다.


  책이라는 물성을 지닌 존재가 우리 곁에 오기가 많이 힘들어졌구나 하는 생각.


  특히 돈이 되지 않는 잡지들은 발간을 지속하기가 힘든 상태가 되었음을 느끼게 하는데.


  [삶이보이는창]을 처음 만난 것은 격월간지였을 때였던가, 두 달에 한 번 만나다가, 계간지로 변경이 되어 세 달에 한 번 만나다가, 이번에 보니 일년에 두 번, 1월과 7월에 발간을 한다고 한다.


  그만큼 운영이 힘들어진 거겠지. 참 많은 잡지들이 계속 나오고 있는데, 이렇게 우리 일상의 삶을 다루는 잡지는 점점 더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니, 그 점이 안타깝다.


  그럼에도 아직 폐간은 아니다. 한 해에 두 번은 만날 수 있다. 우리 주변에 있지만, 주의해서 눈길을 주지 않던 삶들. 그런 삶들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세상을 보여주는 글들이 실려 있는 이 잡지를.


'살아가는 이야기'에서 화가나 그림에 대한 이야기, 새에 관한 이야기, 자신이 살고 있는 이야기, 부모님 이야기 등등이 실려 있어, 특별한 삶이 아니라 이런 보통의 삶들이 바로 우리의 삶임을 생각하게 해주고 있는데...


여기에 '문학' 부분이 있어서 시도, 시인에 대한 이야기도 가끔 소설도 읽을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이 잡지에는 온갖 삶들이 들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호에 실린 단편소설 '오븐이 켜지는 시간(이상무)'은 학교 급식실에서 일하는 조리종사원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아이들 밥을 해주기 위해서, 즉 아이들을 살게 하기 위해서 일을 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죽어가고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


그런데도 학습권 운운하면서 그들의 파업을 막으려 하는 학생의 모습에서, 몇 해 전에 모 대학에서 일어났던 학생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이 잡지가 어떤 잡지던가? '삶이 보이는 창' 아닌가. 학생들은 자신들의 점심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자신들에게 밥을 해주는 노동자들이 남이 아님도 안다. 그들의 노동으로 자신들이 맛있는 한 끼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을.


그런 맛 있는 한 끼에 노동자들의 목숨이 담보로 걸리면 안 된다는 사실도 안다. 함께 살기 위해서 밥을 하고 먹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조금 맛이 없더라도 남의 건강을 해치는 요리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 그 점을 이 소설 속 학생들은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조리종사원을 '이모'라고 부르는데, 이 '이모'는 시중의 음식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부르는 호칭의 의미가 아니라 자신들의 가족과 같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친밀한 관계를 뜻하는 말로 쓰고 있는 것이다.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병에 걸릴 위험이 있는 요리를 해달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할 테니... 그렇게, 학교라는 장소에서 함께 지내는 이들의 모습이,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이, 그것이 파업이라는 노동자들의 권리 행사를 통해서라도 이루어졌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이 소설을 통해서 다시 우리나라 학교 현장을 생각하게 된다. 학교 급식이 공공화 되었지만 과연 조리종사원들이 일하는 환경은 나아졌는지... 여전히 암에 걸리는 사람,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고, 하는 일에 비해 사람 수는 적은데, 학생수가 준다고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을 깎겠다고 할 것이 아니라, 그만큼 예산에 여유가 있다면 이러한 환경 개선에 우선 투자를 하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됐다.


우리나라 학교 환경은 여전히 좋지 않은데, 학교 급식실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환경은 더더욱 좋지 않으니... 학생수에 맞춰 주던 교부금을 학교 전체적인 교육 환경 개선에 쓰도록 한다면... 결코 많다는 소리를 하지 못할 텐데.


이런 삶. 또 다른 많은 삶들. 내가 살아보지 않지만 [삶창]을 통해서 다른 삶들을 만나고, 그 삶들이 함께 행복해지는 사회를 꿈꿀 수 있으니, 이것이 책을 읽는 보람 아닌가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우리의 노래가 - 흐르고 굽이치다 어우러진 아홉 곡의 인생 이야기
노회찬재단 구술생애사팀 지음, 노회찬재단 기획 / 후마니타스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회찬재단 구술생애사 팀이 낸 두 번째 책. 권력을 행사하지도, 남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지 않지만 자신들의 삶을 묵묵히 살아온 사람들. 그런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행복을 전하게 된 사람들 이야기.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 그리고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을 넘어 다른 이들에게 무언가를 주고자 하는 삶을 살고자 했다는 것.


그것이 노래든, 밥이든, 또는 점술이든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과 관계를 맺고, 그들이 조금이라도 행복한,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면서 살아왔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가 잘사는 사회. 성소수자나 이주민이라는 이유로, 또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바라며 살아온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 사회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구술생애사라는 것이 사람의 인생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다. 위대한 인물들의 이야기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남기는 일. 이것은 무척이나 소중한 일이다. 이들 역시 오롯이 자신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이렇게 다른 사람의 삶을 듣고 기록하는 일은 곧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일이기도 하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 것. 방향을 찾는 것. 그것이 구술생애사를 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읽는 우리들은 또다른 삶을 만나게 된다. 내가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구술되어 기록된 삶을 통해 다른 삶을 살아보게 된다. 그들이 살아온 험난한 세상. 또 그들이 보여준 희망들.


소위 민중가수라 불리는 최도은('불나비'로 잘 알려져 있다), 김원중('바위섬'으로 유명한 가수, 그가 '직녀에게'도 불렀다니)의 이야기, 민중가요를 부르는 단체인 '꽃다지' 기획자 민정연, 퀴어 무속인 박인, 퀴어 직장인 한열음, 그리고 하숙생들의 밥을 해주었던 하숙집 운영자 정경애, 여기에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서 노력하는 웨노웨 흐닌 쏘(강선우), 방글라데시에서 와 한국인으로 정년을 맞이하는 박지환(하비불), 서남아시아의 문화 행사를 기획하면서 지내는 자한길 알럼이 이 책의 주인들이다.


아니 이들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주인이라고 해야겠다. 이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삶 속에 녹여내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고. 하여 이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듣고 기록한 사람들에게도 고마움을 느낀다.


이런 작업이 없었다면 우리에게 다가오지 못했을 삶들을 만나게 해주었으니... 이런 삶을 만나 다양한 삶이 있고, 그러한 다양한 삶들이 우리 사회를 더 건강하게 만들고 있음을.


아마도 이 작업은 두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 우리가 주변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계속 나올 것이라 기대한다. 


제목이 된 '우리의 노래가'는 백창우의 노래 '우리의 노래가 이 그늘진 땅에 햇볕 한줌 될 수 있다면'에서 따왔다고 한다. 각 인물을 소개하는 장들도 이 노래에서 가사를 따와 '1부는 '이 그늘진 땅에', 2부는 '이름 없는 꽃들 다 이름을 얻고', 3부는 '움츠린 어깨들 다 펴겠네'이다.


이 책에 소개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이 노래를 찾아 들으면 더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이 노래의 끝부분처럼 '이름 없는 꽃들 다 이름을 얻고 / 움츠린 어깨들 다 펴겠네 / 닫힌 가슴들 다 열리고 / 쓰러진 이들 다 일어나 아침을 맞겠네 /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 모두 하나될 그날이 오면 / 얼싸안고 춤을 추겠네 / 한판 대동의 춤을 추'는 우리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읽으면서 예전에 들었던 백창우의 노래가 머리 속에서 울리고 있었고, 최도은의 불나비, 김원중의 바위섬과 직녀에게가 떠다녔으니... 앞부분에서 만난 이들은 그래도 이름이라도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반가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왜 극우는 기후위기를 부정하는가
박지형 지음 / 이음 / 202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 세계에서 극우를 대표하는 사람이 누구일까? 유럽에서도 극우를 표방하는 정당이 많은 표를 얻고 있는 현실이지만, 전세계에서 극우를 대표하는 인물로 단 한 명을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트럼프를 뽑겠다.


그야말로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세계 평화고 뭐고 없는 사람.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고, 오로지 이익에만 눈이 먼 사람.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또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면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한다. 여기에 제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다른 나라 사람들을 미국 밖으로 내쫓고, 미국의 이익, 아니 자기 이익에 반하는 나라들을 침공한다. 그러면서 전쟁은 아니라고, 군사행동이라고 하고, 거기에 따른 민간인들의 피해는 부수적인 피해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항변한다.


여기에 부화뇌동, 아니 어쩌면 트럼프를 추동하는 인물이 하나 있으니 이스라엘의 네타냐후다. 이 둘이 이 책에 빈번하게 등장한다. 기후위기를 이야기하는 책에 트럼프와 네타냐후라니?


제목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왜 극우는 기후위기를 부정하는가'라는 이 제목 속에는 트럼프나 네타냐후가 등장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이 책에서는 기후위기는 현대에 들어서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그 배후에는 제국주의, 그것도 로마와 결합한 기독교의 제국주의가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데.


로마-기독교의 결합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트럼프와 네타냐후가 언급이 안 되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이들은 왜 기후위기를 부정할까? 그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제국주의 때문인데...자본과 화석연료에 기반한 성장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 이들에게는 이윤이 우선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익 기반인 화석연료 산업을 포기할 의향이 전혀 없다. 


(화석연료와는 다르지만 이들은 원자력발전도 계속 추진한다. 화석연료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와 원자력발전(핵발전이라고 하자)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비슷하다. 중앙집권적인 에너지 정책, 권력의 집중. 이런 것들...)


또한 자본의 기본 속성은 성장과 팽창인데, 그것을 멈추는 순간 자본은 제 존재 의미를 잃게 되기 때문에, 이 자본을 대리하는 자본가들은 국가권력과 결탁하여 자신들의 산업이 계속 팽창하도록 압력을 넣는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존재가 트럼프이기도 하고.


이런 그들이 기후위기를 인정할 수 없다. 인정하는 순간 자신들의 산업기반을 부정해야 하니까. 자신들의 이윤을 포기해야 하니까. 그리고 권력도 내려놓아야 하니까.


이들에게는 인류의 미래 이런 것은 관심이 없다. 오로지 이윤을 향해 나아가는 성장뿐이다. 그러한 성장을 방해하는 존재들은 사라져야 한다. 성장이 문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거짓말쟁이로 몰아가야 한다.


이렇게 그들은 기후위기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존립 기반이 바로 기후위기를 불러오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권력과 거기에 복무하는 지식인들을 동원해서 자신들은 문제가 없다고, 기후위기 역시 과장된 주장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들이 표방하고 있는 성장은 곧 자연의 정복이다. 그것을 기독교 성경, 창세기에 나와 있는 구절로 합리화한다. 자연은 공생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정복해야 할 대상이다. 이런 그들에겐 산이 방해가 되면 터널을 뚫든지, 깎아버리든지 해야 하고, 강은 이윤을 위해 댐을 만들거나 운하로 만들어야 한다. 자연 존재 자체로 두어서는 안 된다. 이윤을 위해 가공되어야 할 상품이다.


상품으로, 물건으로 자연을 대하니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자연은 이윤을 위해 변형, 가공되어야 할 존재일 뿐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자연재해는 내(자본) 일이 아니다.


자유,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약탈에 불과한데, 이러한 자연의 약탈에 대한 피해가 그들보다는 사회적 약자에게 직접적으로 가게 된다. 기후위기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대개 사회적 약자들이다.


기후불평등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대로 가다간 많은 사람들이 기후위기로 인해 생존에 위협을 받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생존에 위협을 받지 않더라도 지금 우리는 기후위기로 인해 생활에 많은 지장을 받고 있다.


예측할 수 없는 폭우, 폭설, 참을 수 없는 더위, 집을 날려버리는 바람. 지진 등등... 기후위기로 인해 예측을 훨씬 넘어서는 재난들이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도 기후위기를 부정한다?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이지 않을까? 굳이 이 책을 읽지 않더라도. 그것은 바로 권력을 쥐고 있는, 막대한 이윤을 얻고 있는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다.


그들이 어떻게 기후위기를 부정하면서 이윤을 추구하는지 그것이 어떤 역사를 지니고 있는지, 기후위기와 정치가 결코 분리되지 않고 있음을 이 책은 여러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결국은 피해자들이 나서야 한다고... 거대자본을 움직이는 기업가들이나 막대한 이윤을 거두어들이는 사업가들, 그들과 더불어 권력을 누리는 자들, 특히 트럼프와 같이 극우로 통칭할 수 있는 자들에게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이 현상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기후민주주의가 시급하다고 하는데, 이러한 기후민주주의는 세 가지 전환을 전제한다고 한다.


'무엇보다 인간과 비인간 존재자의 공존을 추구하는 '포스트-휴먼' 자연관으로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라는 인간중심주의를 대체해야 한다. 기후제국주의의 물적 기반을 대체할 '포스트-화석연료' 에너지 시스템과 인간과 자연을 착취하며 성장하는 자본주의 경제를 대체할 '포스트-자본주의'가 기후 민주주의 의 물적 토대를 이룬다.'(149쪽)  


이렇게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은 정해졌다. 이 방향으로 기득권을 지닌 사람은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은 미래를 걱정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지금 힘들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피해자가 움직여야 하는 이유이다.


하여 저자는 이렇게 제안한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까지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그런 일. 쉬운 일이라 생각하지만 지금까지 정치 현실을 보면 무어라 말하기 힘든 실천. 한번 생각해보자. 그리고 미래를 위해, 아니 지금 우리를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자.


'기존의 대의제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로 우리 생명과 그 터전인 지구 커먼즈(공동자산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의 지속가능성을 보장받을 수 없다면, 각자의 방식으로 최선의 정치적 실천 방안을 찾아야 한다. 개인의 실천은 생명을 최우선적 가치로 존중하는 정당화 제도를 선택하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17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시대예보: 경량문명의 탄생 (시리즈 30만부 기념 리커버 한정판) ㅣ 시대예보
송길영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기예보, 중요하다. 지금은 아니지만 곧 내게 닥칠 기후를 알려주고 준비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루, 또는 이틀, 사흘의 날씨 예보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살아갈 세상의 미래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할까?


지금의 삶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지금의 삶은 곧 바뀐다. 하지만 어떻게 바뀔지 예측하기 힘든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 예전의 자기만을 지킨다는 것은 곧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뒤떨어짐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일기예보를 살피듯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미래를 예측하려고 한다. 그러한 예측에 따라 준비하기도 한다.


이 책은 그렇게 미래 시대를 예보해주는 책이다. 지금을 기준으로 미래를 예측한다. 일기예보가 정확성을 더해갔듯이, 저자는 '시대예보'라는 주제로 세 번째 책을 냈다. '핵개인의 시대, 호명사회'에 이은 세 번째 책.


집단의 일원으로 살아가던 시대에서 이제는 개인이 중심이 된 사회, 그래서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사회로 접어들었고, 그러한 사회는 전체적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유동하는, 가벼운 사회로 가고 있다고.


경량문명의 시대라고 하는데, 이러한 경량문명의 시대는 예전처럼 한 직장 생활을 한다든지, 거대 기업의 일원으로 직장 생활을 한다든지,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의 정체성만 유지한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다 순간순간 변화하는 흐름에 자신을 맡기거나 또는 그러한 흐름을 자신이 만든다는 것이다.


집단 속에 녹아들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했던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 지금은 개인이 중요한 시대인데, 이런 시대를 이끈 것은 '지능의 범용화'와 '협력의 경량화'(21쪽)라고 한다.


이제는 거스를 수 없는 인공지능. 이 인공지능으로 인해서 지능은, 지식은 쉽게 만나고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한 번의 만남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하는 일들이 반복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


왜 협력이 가벼워질까 했더니, ''관계의 경량화'와 '협업의 거리 단축'이, 바로 협력이 가벼워지는 세계의 핵심'(85쪽)이라고 한다. 이는 '필요에 따라 빠르게 뭉치고 흩어질 수 있는, 변화에 즉각 반응할 수 있는 힘'(93쪽)이 작동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량문명의 시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저자는 '빠르게 잊고 늘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호기심을 잃지 않는 어린아이와 같은 태도가 새로운 문명의 참여자들이 가져야 할 역량이 된다'(180쪽)고 한다.


과거에 매이지 말고 미래를 보면서 나아가야 하고, 새로움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그러면서도 자기 것을 잃지 않고 만들어가야 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자기 것을 지닌 인간들이 대등하게 협력하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 이것이 바로 경량문명 시대라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여기서 '교육'이 문제가 된다.


과거의 공부가 아니라, 경량문명의 시대에 맞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 새로운 공부는 '첫째 학령기의 공부가 아닌 평생의 공부가 일반화되며 공부의 기간이 인생만큼 길어질 것입니다.  둘째, 모든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것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공부하는 대상이 좁아지게 될 것입니다. 셋째, 이미 누군가가 발견한 것을 알려주는 게 아닌, 아무도 모르는 것을 스스로 찾는 방향으로 깊어질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경쟁자와 비교해 등수를 내는 것이 아닌, 나만의 것을 오롯이 해내는 것으로 바뀌며 공부를 하는 이들의 마음은 평온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210-212쪽) 고 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서는 배움의 주체가 달라질 수 있다고. 즉 지금까지는 나이든 사람이 어린 사람을 가르쳤다면, 이 경량문명의 시대로 접어드는 때에는 어린 사람이 나이든 사람을 가르쳐야 한다고. 나이든 사람이 어린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배우려 해야 한다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이 살아왔던 중량문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말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저자는 미래를 예보해주고 있다. 다가올 경량문명의 시대는 이러한 특징을 지니고 있으니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일기예보가 특정 나이 대의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듯이, 저자의 시대예보 역시 특정 세대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경량문명이 특정 세대에게만 해당하지 않고 모두에게 해당하듯이 우리는 다가올 시대를 미리미리 준비해야 한다. 그러한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일기예보가 늘 맞을 수는 없다. 하지만 준비해서 나쁠 것은 없다. 오히려 예보를 듣고서 준비하지 않았을 때 더 큰 낭패를 볼 수가 있다. 시대예보 역시 마찬가지다. 저자의 시대예보가 정확히 맞는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준비를 하지 않을 수도 없다.


분명 저자의 말대로 경량문명으로, 유동적인 문명으로 가고 있는 흐름은 모두가 인정하고 있으므로... 그래서 저자가 말한 '경량문명의 개인은 날아오르고 혼자 헤쳐나가는 스스로 비행하는 자유인'(353쪽)이라는 말이 마음에 다가온다.


새들이 먼 길을 날아갈 때 갈 수 있는 능력과 힘을 기르듯이, 그럼에도 홀로가 아니라 함께 날아가듯이 앞으로 다가올 시대를 살아갈 우리들도 그렇게 홀로 또 함께 해야 함을 저자의 이 세 문장이 압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경량문명의 그라운드 룰


   1. 우리는 지금 만납니다, 준비가 되신 분만.

   2. 우리는 잠시 만납니다, 전력을 다할 분만.

   3. 우리는 다시 만납니다, 마음이 맞는 분만.  (338쪽)


그래, 결국 준비가 되고 최선을 다하고 상대를 배려할 수 있는 그런 개인들이 미래 시대를 살아갈, 경량문명의 시대를 살아갈 존재들이라는 것.


구체적인 실천 방법이야 개인이 마련해야 하겠지. 그것까지 예보에서 알려줄 수는 없으니. 미래 세계의 윤곽을 보여주었으니, 그에 맞는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은 이제 그 시대를 살아갈 우리들의 몫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