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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극우는 기후위기를 부정하는가
박지형 지음 / 이음 / 2026년 2월
평점 :
지금 세계에서 극우를 대표하는 사람이 누구일까? 유럽에서도 극우를 표방하는 정당이 많은 표를 얻고 있는 현실이지만, 전세계에서 극우를 대표하는 인물로 단 한 명을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트럼프를 뽑겠다.
그야말로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세계 평화고 뭐고 없는 사람.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고, 오로지 이익에만 눈이 먼 사람.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또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면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한다. 여기에 제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다른 나라 사람들을 미국 밖으로 내쫓고, 미국의 이익, 아니 자기 이익에 반하는 나라들을 침공한다. 그러면서 전쟁은 아니라고, 군사행동이라고 하고, 거기에 따른 민간인들의 피해는 부수적인 피해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항변한다.
여기에 부화뇌동, 아니 어쩌면 트럼프를 추동하는 인물이 하나 있으니 이스라엘의 네타냐후다. 이 둘이 이 책에 빈번하게 등장한다. 기후위기를 이야기하는 책에 트럼프와 네타냐후라니?
제목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왜 극우는 기후위기를 부정하는가'라는 이 제목 속에는 트럼프나 네타냐후가 등장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이 책에서는 기후위기는 현대에 들어서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그 배후에는 제국주의, 그것도 로마와 결합한 기독교의 제국주의가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데.
로마-기독교의 결합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트럼프와 네타냐후가 언급이 안 되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이들은 왜 기후위기를 부정할까? 그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제국주의 때문인데...자본과 화석연료에 기반한 성장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 이들에게는 이윤이 우선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익 기반인 화석연료 산업을 포기할 의향이 전혀 없다.
(화석연료와는 다르지만 이들은 원자력발전도 계속 추진한다. 화석연료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와 원자력발전(핵발전이라고 하자)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비슷하다. 중앙집권적인 에너지 정책, 권력의 집중. 이런 것들...)
또한 자본의 기본 속성은 성장과 팽창인데, 그것을 멈추는 순간 자본은 제 존재 의미를 잃게 되기 때문에, 이 자본을 대리하는 자본가들은 국가권력과 결탁하여 자신들의 산업이 계속 팽창하도록 압력을 넣는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존재가 트럼프이기도 하고.
이런 그들이 기후위기를 인정할 수 없다. 인정하는 순간 자신들의 산업기반을 부정해야 하니까. 자신들의 이윤을 포기해야 하니까. 그리고 권력도 내려놓아야 하니까.
이들에게는 인류의 미래 이런 것은 관심이 없다. 오로지 이윤을 향해 나아가는 성장뿐이다. 그러한 성장을 방해하는 존재들은 사라져야 한다. 성장이 문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거짓말쟁이로 몰아가야 한다.
이렇게 그들은 기후위기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존립 기반이 바로 기후위기를 불러오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권력과 거기에 복무하는 지식인들을 동원해서 자신들은 문제가 없다고, 기후위기 역시 과장된 주장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들이 표방하고 있는 성장은 곧 자연의 정복이다. 그것을 기독교 성경, 창세기에 나와 있는 구절로 합리화한다. 자연은 공생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정복해야 할 대상이다. 이런 그들에겐 산이 방해가 되면 터널을 뚫든지, 깎아버리든지 해야 하고, 강은 이윤을 위해 댐을 만들거나 운하로 만들어야 한다. 자연 존재 자체로 두어서는 안 된다. 이윤을 위해 가공되어야 할 상품이다.
상품으로, 물건으로 자연을 대하니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자연은 이윤을 위해 변형, 가공되어야 할 존재일 뿐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자연재해는 내(자본) 일이 아니다.
자유,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약탈에 불과한데, 이러한 자연의 약탈에 대한 피해가 그들보다는 사회적 약자에게 직접적으로 가게 된다. 기후위기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대개 사회적 약자들이다.
기후불평등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대로 가다간 많은 사람들이 기후위기로 인해 생존에 위협을 받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생존에 위협을 받지 않더라도 지금 우리는 기후위기로 인해 생활에 많은 지장을 받고 있다.
예측할 수 없는 폭우, 폭설, 참을 수 없는 더위, 집을 날려버리는 바람. 지진 등등... 기후위기로 인해 예측을 훨씬 넘어서는 재난들이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도 기후위기를 부정한다?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이지 않을까? 굳이 이 책을 읽지 않더라도. 그것은 바로 권력을 쥐고 있는, 막대한 이윤을 얻고 있는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다.
그들이 어떻게 기후위기를 부정하면서 이윤을 추구하는지 그것이 어떤 역사를 지니고 있는지, 기후위기와 정치가 결코 분리되지 않고 있음을 이 책은 여러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결국은 피해자들이 나서야 한다고... 거대자본을 움직이는 기업가들이나 막대한 이윤을 거두어들이는 사업가들, 그들과 더불어 권력을 누리는 자들, 특히 트럼프와 같이 극우로 통칭할 수 있는 자들에게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이 현상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기후민주주의가 시급하다고 하는데, 이러한 기후민주주의는 세 가지 전환을 전제한다고 한다.
'무엇보다 인간과 비인간 존재자의 공존을 추구하는 '포스트-휴먼' 자연관으로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라는 인간중심주의를 대체해야 한다. 기후제국주의의 물적 기반을 대체할 '포스트-화석연료' 에너지 시스템과 인간과 자연을 착취하며 성장하는 자본주의 경제를 대체할 '포스트-자본주의'가 기후 민주주의 의 물적 토대를 이룬다.'(149쪽)
이렇게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은 정해졌다. 이 방향으로 기득권을 지닌 사람은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은 미래를 걱정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지금 힘들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피해자가 움직여야 하는 이유이다.
하여 저자는 이렇게 제안한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까지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그런 일. 쉬운 일이라 생각하지만 지금까지 정치 현실을 보면 무어라 말하기 힘든 실천. 한번 생각해보자. 그리고 미래를 위해, 아니 지금 우리를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자.
'기존의 대의제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로 우리 생명과 그 터전인 지구 커먼즈(공동자산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의 지속가능성을 보장받을 수 없다면, 각자의 방식으로 최선의 정치적 실천 방안을 찾아야 한다. 개인의 실천은 생명을 최우선적 가치로 존중하는 정당화 제도를 선택하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17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