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 버린 비밀 슈테판 츠바이크 소설 시리즈 2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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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에드거란 소년이 사건을 겪으면서 어린 시절을 벗어나는 과정을 그린 소설. 그 사건이란 바로 어른들의 일이다. 어른들의 일? 아마도 아이들은 잘 이해하지 못할 그런 감정들의 교류, 고민, 행동들.


열두 살의 에드거. 엄마와 함께 왔다가 엄마를 유혹하려는 남작의 꾀임에 빠지게 된다. 남작은 에드거에게 접근해 자연스레 에드거의 엄마를 유혹하려 한 것. 이제 중년의 여인이 되어가려는 에드거의 엄마에게는 선택지가 둘이다. 평생을 한 사람의 부인으로 한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든지, 사랑의 모험에 빠지든지.


이성보다 먼저 작동하는 것이 감정 아니던가. 자신에게 친절하게 접근해오는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는데, 이때 방해가 되는 것은 에드거. 이들은 에드거를 떼어놓기 위해 여러가지 일을 한다.


이 여러가지 일이 에드거에게는 낯설다. 어른들의 말과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다. 또한 자신에게 친구가 되어주었던 남작이 엄마와만 이야기하는 것에 불만이 생긴다. 그래서 에드거는 둘 사이에 어떻게든 끼려고 한다. 이러면 어른들은 더더욱 에드거를 떼어놓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이 거짓말, 에드거는 아직 이해할 수가 없다. 남작이 엄마를 유혹해 나쁜 짓을 하려 한다고 생각하고 복도에서 엄마를 껴안고 있던 남작을 공격한다. 이 공격에 놀란 엄마와 남작. 남작은 결국 휴양지를 떠나고 엄마는 에드거에게 남작에게 사과 편지를 쓰라고 하지만 거절하는 에드거. 결국 엄마와 갈등을 일으킨 에드거는 호텔을 나와 할머니의 집으로 향하고... 


결말이야 뭐, 성장 소설답게 행복한 결말이고, 이런 사건으로 인해서 에드거가 성장했다고 할 수 있지만.


어른들의 은밀한 세계를 아이가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면서 거기에 끼어들 때, 아이는 자신이 어른이 되었다고 여기지만 아직은 한참인 때. 이때 홀로 있어야 하는 시간이 더더욱 아이를 성장시킨다.


호텔에서 나와 할머니의 집까지 기차를 타고 가면서 에드거는 어린 시절과 이별하고 있음을 깨닫고, 부모의 보살핌 속에서 화초처럼 지내던 자신의 삶이 진정한 삶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가족의 사랑도.


이 소설에서 에드거가 겪는 일은 많은 아이들이 자라면서 어른들과 겪을 수 있는 갈등들이다. 그들의 세계는 아이들의 세계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어른들의 세계를 다 안다는 듯이 행동하는 아이의 비밀. 이 비밀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아이를 아이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그 점을 에드거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데...


읽으면서 열두 살이면 그때는 그렇게 순진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라는 생각. 하여 원문에 열두 살로 되어 있어도 번역할 때 현대 아이들의 수준에 맞게 조금 나이를 낮추는 것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하기도 했지만.


아이들은 어른들의 행동을 오해할 때가 많다. 또한 그들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을 때도 많고. 자신들만큼 어른들도 고민이 있고 괴로워할 때가 많다는 것을 모를 때가 많다. 그런 어른들의 감정에 조금 다가갈 때 그때부터 아이들은 자신의 어린 시절로부터 멀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엄마와 남작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어른들의 세계를 엿보고 어린 시절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에드거의 모습. 그리고 그런 일들을 통해서 에드거는 어른들의 세계를 조금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 누구도) 이해하게 되는데...


짧은 소설이다. 그럼에도 한 아이의 고민과 성장이 잘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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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로 가는 길 - 완역본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 5
L. 프랭크 바움 지음, 존 R. 닐 그림, 최인자 옮김 / 문학세계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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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이번에는 어떻게 도로시가 오즈에 가게 될까? 바람도 바다 폭풍우도 지진도 겪었으니, 이제 작가가 도로시를 어떤 방법으로 오즈로 보낼지 궁금해 진다. 또 새로운 등장인물들은 누구이고...


털북숭이 할아버지를 만난다. 할아버지가 길을 묻는데 알려줘도 이해를 잘 하지 못하니 도로시가 할아버지에게 갈림길까지 직접 안내를 한다. 그런데! 갈림길에 갔더니 도로시가 알던 길이 아니다. 길이 더 있다. 또한 집에 돌아가는 길을 알 수가 없게 되었다. 할 수 없이 할아버지와 함께 길을 나설 수밖에 없게 된 도로시.


그렇군 이번에는 미로같은 길을 통해 오즈로 가게 하는군. 가다가 빛나는 단추를 만난다. 자신의 집이 어디인지 부모가 누구인지도 잊어버린 아이. 또 무지개 딸도 만나는데, 이 셋이 도로시의 새로운 친구가 된다.


이들과 함께 여러 모험을 거쳐 오즈에 도착해 오즈마 공주의 생일 잔치에 참석하는 도로시. 그 과정에서 여우 나라, 당나귀 나라를 비롯해 일행을 위협하는 곳을 거치게 되는데...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다양한 위험을 겪게 될 텐데, 그러한 위험을 위험하다는 이유로 모두 제거한다면 어떻게 될까? 흔히 온실 속의 화초처럼 아이를 키우지 말라고 하는데, 지금 어른들의 모습은 어떨까? 아이들이 스스로 모험을 하게 내버려두는가? 


아니라는 답이 더 맞을 듯하다. 조금만 눈에 띄지 않아도 안달복달하면서 잠시도 아이들이 혼자 있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핸드폰으로 위치를 알려고 하는 것만이 아니라 집에도 또 아이들이 있는 어린이집, 학교에도 감시카메라나 또 스마트폰과 연동이 되게 하고 있지 않은가.


조금이라도 아이에게 위험이 될 것 같은 요소는 아예 다 없애버리고 있지 않은가. '안전한 놀이터'라는 말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이 때, 오즈의 마법사는 그런 현대인이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와는 정반대라 할 수 있다.


여기저기 모험을 하면서 친구를 만나고 그것을 이겨내면서 더 많은 경험을 하는 것. 그래서 도로시는 낯선 존재를 만나도 거부하지 않고 그 존재의 장점을 보려고 한다. 친구가 되려 한다. 존재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으니 먼저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을 도로시가 보여주고 있다.


이 편에서는 다른 것을 떠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자신이 아름답다고 그것을 남에게 강요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여우 나라에서는 여우 머리가 가장 아름답고, 당나귀 나라에서는 당나귀 머리가 가장 아름답다. 그렇다고 다른 존재들에게 자신들의 머리를 선물이랍시고 달아주면 되는가. 그것이 아름답다고, 네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이 아니라고.


그러면 안 된다. 여우 머리를 달게 된 빛나는 단추도, 당나귀 머리를 달게 된 털북숭이 할아버지도 자신의 본래 머리를 좋아하지 새로 단 머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즉 내가 좋다고 남에게도 좋다는 생각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이 편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그런 것을 깨달아간다.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 그것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려고 노력해야지 남의 것을 가져와 아름다워지려고 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는 것.


오즈에 있는 '진실의 연못'에 들어가자 이들은 본래의 머리를 되찾는다. 그렇다. 본래 자신의 모습을 지니고, 그것을 가꾸는 것이 '진실'이다. 이렇게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찾은 사람은 다른 단계로 나갈 수가 있다.


털북숭이 할아버지가 오즈에 남을 수 있게 된 것도, 빛나는 단추가 자신의 부모 집으로 갈 수 있게 된 것도 이러한 진실의 힘인 것이다.


이 편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오즈로 가기까지의 모험과 오즈에 도착해서 친구들을 만나고 즐겁게 지내다 헤어지는 장면이다. 즉 즐거움, 행복을 위해서 기꺼이 모험을 해야 한다는 것. 모험을 회피해서는 그러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니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는 환상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은 현실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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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미에르 피플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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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제목에 있는 뤼미에르라는 말을 보고, 영화를 떠올렸다. 영화적 인간인가? 하는 생각. 뤼미에르 형제는 영화 역사에서 맨 처음에 나오는 사람들이니... 빛을 떠올리기 보다 영화를 먼저 떠올렸는데... 


그런데 영화라고 하면 옴니버스식 영화가 되어야 하나? 연작소설이니, 각 등장인물들이 서로 관계를 맺기보다는 독립적으로 등장하고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무언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일까?


제목에서 답을 얻어야 할 것 같은데... 뤼미에르를 빛이라고 하면 빛 사람들이다. 빛의 사람인지, 빛과 사람인지, 빛에 비춰지는 사람인지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사실 읽다보면 제목을 쉽게 정리할 수도 있다.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뤼미에르 빌딩이기 때문이고, 이 뤼미에르 빌딩 8층에 사는 사람들(? 사람이 아닌 쥐나 고양이가 주인공이 된 경우도 있는데, 이들을 그냥 동물의 의인화라고 생각한다면)의 이야기니, 뤼미에르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라고 하면 된다.


여러가지를 생각할 필요도 없이, 제목에 대한 고민을 하고 싶지 않다면 이 소설의 인물들이 뤼미에르 빌딩 8층에 살고 있으니 뤼미에르 피플이라고 하면 된다.


그럼에도 무언가 부족한 점이 있다. 왜 뤼미에르인가? 왜 빛인가? 이곳에 사는 사람들 결코 빛나는 삶을 살지 않는다. 빛나는 삶은커녕 중간보다도 못한 삶을 산다. 그런데 사는 곳 이름은 빛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대조가 된다.


대도시의 휘황찬란한 빛의 물결 속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 곳에 웅크리고 살아가는 길거리의 사람들보다는 낫다고 하겠지만, 이들 역시 대도시의 삶에서 소외된 사람들임에는 틀림없다.


이들을 통해서 작가는 대도시 삶의 이면을 보여주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빛을 보지만 빛에 가려 보이지 않는 삶들이 있다고. 그 삶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즉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빛 속에서 어둠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고. 그 눈을 지니고 그들에게 한발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고. 


이 소설집에서 그래도 가장 따스한 온기를 전해주는 소설이 마지막에 실린 '810호 I 되살아나는 섬'이다. 이 소설에서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작가가 하는 말, 어쩌면 이 소설 전체를 통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일지도 모른다.


"...저는 세상 모든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절대선이나 구원자 같은 게 있을까 의구심이 듭니다. 그보다는 체계는 없더라도 사람 사이의 인정이나 연민 같은 게 오히려 우리를 구원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 (328쪽) 


이것이다. 세계적인 종교보다도 우리는 우리 주변 사람들을 살피고 그들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 거창한 이념보다는 실제로 함께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우리를 구원할지도 모른다.


세계적인 종교가 빛이라면 그 빛에 가려져 있는 사람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너무도 강렬한 빛이기에 빛 뒤에 있는 것이 보이지 않게 되고, 오로지 빛만 향해 나아가게 할 수도 있음을... 


하여 작가는 이 빛의 뒤에 있는 존재들을 보여준다. 그들의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어둠 속의 삶에 대해 연민을 지니게 한다. 


가출 청소년, 혼전 임신, 일중독자, 미래를 잃어가는 청소년들, 빛의 굴레에 빠진 신용불량자, 돈으로 만족을 사는 사람들, 인터넷의 발달로 인한 문제 등등이 각 거주자들을 통해 보여지고 있는데... 이 중에는 장강명의 다른 소설에서 더 발전되는 것들도 있다.


그 소설은 '806호 I 삶어녀 죽이기'인데, 이 소설은 나중에 [댓글부대]로 더욱 범위가 확장된다. 인터넷 댓글, 조작, 그리고 매크로를 이용한 여론 조작까지, 그 전조를 이 소설이 잘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에 실린 810호의 이야기는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현수동이 등장하니 이 작가의 [아무튼, 현수동]과 관련이 있을 듯하고, 이런 모든 것들, 소설이 허구라고 하지만  804호 이야기에서 나오는 작가와 작품을 통해서 다른 작품들을 연결지을 수도 있다.


다양한 기법이 이 소설집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그러한 기법은 채무자와 채권자(돈으로 채권을 샀겠지만)를 둘로 나누어 한 쪽에 나란히 병치한 '805호 I 돈다발로 때려라'에서 정점을 이루고 있다. 물론 804호의 이야기에서도 작가와 기자가 인터뷰한 내용이 중간 중간에 박스 형식으로 나오고 있어서 일반적인 소설과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고... 이 소설들을 읽다보면 황지우 시의 기법이 떠오르기도 한다.


다양한 기법과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현대 사회의 기술발전에 따른 문제점 등을 연작소설을 통해 담아내고 있으니 빛을 받아 반짝이는 삶들도 있지만 빛에 의해 가려진 삶들도 있음을 이 소설집이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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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검찰과 언론, 혐오와 낙인의 카르텔
송요훈.이도경.전지윤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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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만들기' 또는 '마녀 사냥'


중세에나 있었던 일들. 아니, 현대에서도 심심치 않게 이루어졌던 일들. 미국에서는 매커시즘이란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을 배제시켰고, 유럽에서는 유대인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핍박을 받았는지... 우리나라에서도 빨갱이라고 하면 모든 것을 박탈할 수 있는 사람으로 취급한 적도 있었으니...


이름만 바뀌었지 마녀 만들기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마녀 만들기가 이성과 합리를 떠나 맹목으로 가는 길이었다면 그러한 역사를 거쳐온 우리들은 이제는 '마녀 만들기'를 해서는 안 된다. 해서는 안 된다고 하기보다는 '할 수가 없다'고 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민주화된 세상에서 '마녀 만들기'라니... '마녀 만들기'는 곧 '마녀 사냥'이 된다. 그냥 만들고 끝나지 않는다. 만드는 것은 사냥하기 위해서다. 배제하기 위해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므로 '마녀 만들기 또는 마녀 사냥'에서 객관성은 필요 없다. 증거? 필요 없다. 그냥 마녀라고 하면 된다.


중세 시대에 마녀라고 의심이 되면 물 속에 던졌다고 한다. 물 속에서 죽으면 마녀이기 때문에 죽었다고 하면 되고, 살아서 나오면 마녀이기 때문에 살았으니 화형시켰다고. 어떻게든 '마녀'라는 낙인이 찍히면 '마녀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사회에서 배제되어야 할 존재일 뿐이다.


이런 '마녀 사냥'이 21세기에도 횡행한다고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러면서 내 태도를 생각하게 됐다. 나도 역시 이 '마녀 사냥'에 가담한 것은 아닌가.


내가 접할 수 있는 매체들에서 한 사람을, 한 집단을 마녀로 낙인 찍으면 그것에 따라서 나도 그들이 마녀구나 하고 말지 않았던가. 더 구체적인 사실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냥 침묵하거나, 동조하거나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떤 자료를 내가 찾을 수가 있지? 대부분의 언론이 - 이 책에서는 진보 언론조차도 - 거의 같은 소리를 내는데, 자료 접근이 쉽지 않은 내가 어떻게 객관적인 자료를 찾을 수 있지? 그것이 힘들다. 이런 핑계를 댄다.


하지만 언론이 제시한 근거를 판단할 수는 있지 않았던가. 그 근거들이 개관적인가? 사실로 밝혀졌는가. 아니면 언론사의 심증을, 추측을 기사로 내보내고 있는 건가를 판단할 수는 있지 않았을까? 


기사의 이면을 읽는 연습, 미디어 리터러시를 키우려는 노력을 했는가 하면 그것이 아니었다는 반성을 한다. 그러니 부끄럽지만 '마녀 사냥'에 나 역시 가담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는 결론. 이 책을 읽으면서 앞으로는 그런 자세를 지니지 말아야지, 언론에 실린 기사들을 꼼꼼하게 살피고, 사실인지 추측인지, 일방적인 주장인지 검증된 주장인지를 살펴야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저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반응을 하지 않고 조금 기다리는 자세, 즉 판단을 유보하고 더 살필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자세를 지녀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마녀 사냥'에는 가담하지 말아야지 하는 결심. 질문을 바꾸는 연습도 해야겠고. 이 시점에 왜 이런 기사를 썼을까? 의도하는 것이 무엇일까 등등.


마녀 사냥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고 한다. 이런 구조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 마녀 사냥에 가담하지 않도록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한번쯤은 의심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테니까.


'언론과 정치인의 문제 제기 -> 전문가와 논객의 유죄 단정 -> 극우, 보수 단체의 시위와 고발 -> 검찰의 수사 -> 언론 보도의 확대' (254쪽)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재판 과정과 결과에 대한 철저한 무시. 이미 마녀 사냥은 끝났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집단을 마녀로 낙인 찍기에 성공했기 때문에 결과에 대해서는 무시한다.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는 없다. 정정보도는 보이지 않는 지면에 작게 할 뿐이고, 무죄 판결이 나도 사과문 하나 없다.


그러니 마녀 사냥의 구조에서 한 단계를 더 첨가해야 한다. 바로 '재판 결과의 무시'를.


이 책은 윤미향과 정의연을 대상으로 어떻게 이들이 마녀로 낙인 찍혔으며, 그러한 과정에 참여한 정치인, 언론, 자칭 진보지식인, 검찰이 어떤 방식으로 이들을 마녀로 낙인 찍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온 정의연과 그 대표를 역임한 윤미향이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일어날 파장을 우려하면서, 그것을 막기 위해 수구세력과 일본 또 검찰과 언론이 어떻게 결탁해서 마녀를 만들어내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정말 누구나 마녀가 될 수 있음을 이 책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데, 이것을 막지 않으면 앞으로도 이런 일이 반복될 수 있음을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윤미향과 정의연 마녀 사냥 이전에 조국에 대한 사냥이 있었고, 그 이전에는 유우성 간첩 조작 사건이 있었으며, 또한 건설노조를 건폭이라고 몰아가며 분신 자살 사주 운운하는 사건(이 사건은 유서 대필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과 더 이전에 온갖 조작 사건들이 있었으니... 역사를 통해서 한두 번이 아니었음을... 이를 제대로 처벌하고 막지 않으면 또 일어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 책에서는 크게 언론과 검찰을 개혁한다고 하는데, 하긴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무어라 떠들든 언론에서 안 다뤄주면 되니 그것은 문제가 안 되고, 보수 단체가 시위를 하고 고발을 하는 것은 검찰 단계에서 해결이 될 수 있으니, '마녀 사냥'을 막는데 가장 중요한 열쇠는 언론과 검찰 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대략 언론 개혁으로는 '징벌적 손해 배상, 명예훼손법 중에 사실적시 명예훼손 법 폐지, 좋은 미디어에 시민들이 후원할 수 있게 정책적으로 지원해 주는 미디어 바우처 제도 도입, 그리고 공공 시민 공론장 확보, 미디어 리터러시 강화'등을 들고 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개혁 방안인데, 문제는 의지다.


검찰 개혁으로는 '억지 표적 기소의 방지와 검찰발 언론 조작을 막는 방법을 마련'하는 것이라 하는데, 이는 수사권과 기소권의 완전 분리와 피의 사실 공표 금지로 어느 정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또한 검찰의 투명성을 확보해야 하는데...


결국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 피의 사실 공표 금지, 투명한 정보 공개가 이루어지면 검찰과 언론 카르텔이 주도하는 마녀 사냥을 효과적으로 예방할 수 있다'(281쪽)고 주장하고 있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미 검찰 개혁에 대 당위성은 국민 거의 모두가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실행하느냐만 남아 있는데...


특정 정치권과 언론, 검찰의 유착 관계를 끊고 그들이 각자 자신들의 자리에서 자신들의 책임을 다하는 구조가 정착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감시가 필요하다. 


마녀 사냥을 완성하는 데는 '시민'들의 동조 또는 침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침묵하지 않는 시민, 동조하지 않는 시민이 되도록 개인은 자기 성찰의 자세를 지녀야 하고 정치권을 비롯한 거대 권력을 감시하는 눈을 감지 말아야 한다.


시민들의 깨어있는 눈, 그것이 궁극적으로 제도 개혁을 이끌어내어 '마녀 만들기와 마녀 사냥'을 막을 수 있다.


마녀 사냥에 관한 문학 작품으로 아서 밀러의 [시련]이 있으니 그 작품을 이 책과 함께 읽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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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와 오즈의 마법사 - 완역본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 4
L. 프랭크 바움 지음, 존 R. 닐 그림, 최인자 옮김 / 문학세계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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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이번에는 지하세계다. 지하세계에서 탈출해 다시 오즈로 간다. 1권에서 사라졌던 오즈의 마법사와 함께.


작가는 독자의 바람을 실현하기 위해서 처음에 등장했던 인물들을 다시 등장시키고, 또 이들이 서로 만나서 행복한 시간을 지내게 한다. 모험을 통한 행복 추구. 이것을 읽는 독자들도 행복에 빠지리라.


지하세계. 식물의 세계와 나무의 세계를 거쳐 용들의 나라에 도착. 이들 세계는 결코 도로시 일행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자신들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


하지만 현실에서 식물과 나무는 우리에게 도움을 많이 주는 것 아닌가. 이런 식물들을 어렵게 하는 것이 인간인데, 이 소설(동화)이 쓰일 당시에는 식물에 대한 관심이 크지는 않았을 테니.


이번 편에는 도로시와 함께 모험하는 존재들로 유레카라는 고양이와 젭이라는 농장 소년, 짐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그리고 지하세계에서 오즈의 마법사도 만나고. 이들이 겪는 모험이 잘 그려져 있는데, 물론 이들은 모험에서 위험에 처하더라도 현명하게 또는 운이 좋게 잘 벗어난다.


그리고 오즈마 공주의 도움으로 다시 오즈로 가서 시간을 보내다 현실 세계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번 호에서 무엇을 생각할까 했더니 고양이 유레카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겠다. 본능과 이성.


배고픈 호랑이는 이성의 힘으로 자신의 식욕을 억제한다. 호랑이는 살생을 가능하면 피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고양이는 어떻게든 마법사가 데리고 있는 새끼 돼지를 먹으려고 한다. 다른 먹이가 있음에도 자신의 본능을 누르기 힘들다.


무조건 본능을 누르라고, 이성으로 제어하라고 할 수 있을까? 배고픈 호랑이는 그것이 가능하다. 그는 많은 일을 겪었기에 자신의 본능을 이성으로 누를 수가 있다. 하지만 성장기에 있는 고양이는?


배워야 한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을 수도 있다. 그것들을 거치고 난 뒤 본능에 충실한 삶이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런 깨달음 뒤에 이성으로 본능을 제어하게 된다.


고양이는 새끼 돼지를 먹으러 간다. 우연으로 결국 먹지는 못하지만 이로 인해 재판을 받는다. 이 재판 과정이 지금도 참조할 만하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는 상태. 증거를 내 놓으라고 주장하는 피고인.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검사 측. 그럼에도 상황 증거가 명확하기에 돼지를 죽인 죄로 사형을 선고한다.


자, 이 과정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본능에 충실하면 위험에 처한다? 이것을 넘어서야 한다. 재판, 특히 한 생명의 목숨을 빼앗는 판결을 하기 위해서는 명확한 증거가 필요함을, 고양이의 증거 요구가 무례하고 건방지고 어처구니 없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그것은 중요하다.


상황적 증거, 심증으로 사형까지 갈 수는 없다. 물론 이 소설(동화)는 그것까지는 안 간다. 고양이는 새끼 돼지를 먹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먹지 못한 것이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성으로 본능을 누르지 못했다. 다만 재판 과정을 통해 본능에 따르기만 하는 것이 좋지 않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하여 이 편에서는 이성과 본능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고, 재판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도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그냥 재미있게 읽지만 무의식의 한 편에서는 이런 것들을 쌓아두고 있을 것. 이것이 어린이들에게 이 작품이 인기를 끄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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