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특히 들을 귀, 듣는 귀. 정말 중요하다. 말하기보다 듣기가 우리 생활에서 많지 않은가.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말들, 소리들, 또 듣고 싶은데 들리지 않는 말들, 소리들.


  귀가 막혔나라는 말은 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쓰는 말. 귀를 열어라는 말은 남의 말을 잘 들으라는 말, 남의 말을 잘 들으라는 말은 곧 남을 잘 이해하라는 말.


  이해하라는 말은 포용하라는 말. 그와 같아지라는 말이 아니라 밀어내려 하지 말고 함께 존재해야 한다는 말.


이렇게 중요한 귀. 하지만 평소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던 귀. 이대흠의 시집 [귀가 서럽다]는 이러한 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준다. 이 시집 제목이 된 시이기도 하지만... 제목이 된 이 시 말고, 귀에 대해서 참 잘 표현했다고 생각하는 시가 '어머니의 손바닥엔 천 개의 귀가 있다'라는 시다.


손바닥에 귀가 있을 리가! 하지만 이런 경험을 해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집에서 키우던 화초가 시들어 죽어갈 때 그것을 어머니에게 맡기면 이상하게도 그 화초가 싱싱하게 살아난 경험. 어떤 식물을 갖다 주어도, 그 집에 볕이, 빛이 잘 들어오지 않더라도 화초는 싱싱하게 살아난다.


왜 그럴까? 식물을 키우는 재주가 있어서라고 생각하기엔 무언가가 이상했는데... 이 시를 읽으며 그래 어머니의 손에 귀가 있었구나, 식물들의 말을 들어줄 귀가 있었기에, 식물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기에 다시 생생하게 살아날 수 있었구나.


이렇게 누군가가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죽음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명의 전화'를 통해서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어머니의 손에 귀가 있다는 말은, 식물들이나 다른 존재들의 말을, 마음을 들어주고 있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엄마 손은 약손, 할머니 손은 약손'이라는 말도 자신의 아픔을 들어주고 받아들여 주는 그런 마음을, 그렇게 아픔을 토해내고 나니 조금은 마음도 몸도 편해진 상태를 달리 말해주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


'이상하게도 내 집에서는 죽어가던 풀 나무 들이 / 어머니의 손에 닿으면 금방 싱싱해졌다/ ...... /어머니의 손에는 내 손에 없는 귀가 수백 개 / 수천 개 열려 있는 것이었다 / ...... / 검은 손바닥 그 한 많은 귀에 대고 / 제 말들을 마음껏 하면 / 그 말을 들은 천 개의 귀가 / 그것들의 아픔에 / 가만 가만히'('어머니의 손바닥엔 천 개의 귀가 있다' 중에서/ 44쪽)


이 시 구절에서 그러한 마음이 다 표현되고 있으니, 하지만 한 가지, 어머니의 손이 깨끗한 흰 손이 아니라 검은 손이다. 그것은 '바닥'이란 시를 보면 왜 검은 손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다.


'외가가 있는 강진 미산마을 사람들은 / 바다와 뻘을 바닥이라고 한다 / ...... / 바닥에서 태어난 어머니 시집올 때 / 질기고 끈끈한 그 바닥을 끄집고 왔다 / ...... / 저 낮은 곳에서 온갖 것 다 받아들였으니'('바닥' 중에서. 40쪽)


바다와 뻘(갯벌), 온갖 것을 배척하지 않고 다 받아들여 그것들을 다른 존재들이 살아갈 수 있게 바꾸어주지 않는가. 여기에 해설에서 한 말처럼, 바닥을 바다와 뻘과 더불어 인생의 바닥이라고 쓰듯이, 어려운 삶을 살아온 과정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은가.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 어려움을 겪는 존재의 고통을 이해하듯이, 그렇게 어머니는 다른 존재들의 아픔을 듣고 이해하고 어루만져주는 역할을 했던 것. 그것을 하는 것이 바로 '귀'였던 것.


그러면 '귀'는 세상에서 꼭 필요한 존재다. (청각장애인은 듣지 못한다고 하지 말자. 그들의 귀는 눈이다. 눈으로 그들은 듣는다. 그러니 신체의 특정한 기관을 귀라고 한다면, 이 시에서 어머니의 손바닥에 있는 수많은 귀들을 알지 못하는 것이 된다)


듣는다는 행위가 이토록 중요한데, 듣지는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존재들은 얼마나 위험한 존재들인가. 그들은 다른 사람을 껴안지 않고 오히려 밀어낸다. 자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이.


이렇게 '귀'가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왜 시인은 귀가 서럽다고 했을까? 자신에게 들려오던 소리들이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둘러싸고, 자신에게 위안을 주던, 자신이 듣고자 노력했던 소리들이 하나둘 사라져 가는 것. 그러니 귀가 서러울 수밖에 없지 않을까.


제목이 된 시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 이것은 그리운 소리들이 하나둘 사라져 간다는 것. 그래서 더 작은 소리, 들리지 않을 것 같은 소리에도 집중해야 한다는 것. 


  귀가 서럽다


강물은 이미 지나온 곳으로 가지 않나니

또 한 해가 갈 것 같은 시월쯤이면

문득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네

사랑했던가 아팠던가

목숨을 걸고 고백했던 시절도 지나고

지금은 다만

세상으로 내가 아픈 시절

저녁은 빨리 오고

슬픔을 아는 자는 황혼을 보네

울혈 든 데 많은 하늘에서

가는 실 같은 바람이 불어오느니

국화꽃 그림자가 창에 어리고

향기는 번져 노을이 스네

꽃 같은 잎 같은 뿌리 같은

인연들을 생각하거니


귀가 서럽네


이대흠, 귀가 서럽다. 창비. 2010년. 초판 2쇄. 67쪽.


이밖에도 마음을 울리는 시들이 꽤 있다. 읽으면서 찡한 감동을 받게 되는 시. 전라도 사투리가 시에 고스란히 나오기도 하고... 그래서 더 정감이 가는 시들도 있지만, 그 내용 자체가 마음을 울리는 시들이다.


몇몇 시 제목을 보면 '오래된 편지, 동낭치 부자, 아름다운 거짓말, 아름다운 위반' 등이 특히 마음을 울렸다. 찾아서 읽어보면 좋을 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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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25-09-06 16: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대흠의 시 중에 어머니는 말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라고 시작하는 동그라미 라는 시를 좋아하는데요 ㅎ 옹가강가 남한테 해꼬지 한 번 안 하고 살았다는 어머니 처럼 참 동글동글하게 순하게 귀를 열고 살고 싶기도 합니다 ^^ 일생을 흙 속에서 산, ​ ㅇ 을 떠받친 어머니...

kinye91 2025-09-06 16:15   좋아요 0 | URL
네, 마음을 순하게 하는 시들이 많아서 좋았어요. 다른 것은 몰라도 남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지니려고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했어요. icaru님의 글을 보고 ‘동그라미‘를 비롯해, 이대흠 시인의 다른 시들도 읽어야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방치된 믿음 - 무속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생존해 왔는가?
이성원.손영하.이서현 지음 / 바다출판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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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무속이 우리 사회에서 큰 관심을 끈 적이 있었을까? 물론 무속은 우리 사회 전반에 존재해 왔다. 지금도 거리에 나가 보면 많은 곳에 점집 표시가 있다. 또 현수막에도 신내림을 받았다고 광고하는 것들도 있고.


일이 잘 안 풀리면 점을 보러 가야 하나 하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고, 타로점이 유행하기도 했다. 그만큼 무속은 우리 곁에 있는데... 


점집에 깃발이 달려 있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백기는 점을, 적기는 굿을, 둘 다 걸려 있으면 점과 굿을 모두 한다는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소에 점에 관심이 없었으니, 점집의 표시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이렇게 표시를 하는 점집도 있지만 서울 논현동에 있는 점집들은 대부분 점집 표시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임대인이 꺼리기도 하고, 또 지역 특성도 있다고... 여기에 요즘은 유튜브와 같은 방송으로도 무속에 관해 홍보를 하고 있다고 하니...


사회적 관심을 끌기 전에도 무속은 늘 우리 곁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사회적 관심을 끈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합리성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기존 상식에 반하는 것을 했을 때 사회적으로 관심을 끌게 된다.


특히 무속이나 특정 종교와 관련이 없어야 할 사람이 관계를 맺었음이, 그것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음이 드러날 때는 사회적 관심은 증폭된다. 이때 사회적 관심이 긍정적인 쪽이 아니라 부정적인 쪽으로 폭발하고.


이것은 결국 무속인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무속인 개개인이 벌였던 범죄 행위나 또 다른 행위들을 넘어서 이는 무속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줄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무속에 대해서, 사실은 무속인에 대해서 심층 취재를 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기자 셋이 우리 사회에서 무속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등을 살펴보고 있는데, 먼저 무속인들의 일탈 행위(범죄라고 하고 싶지만,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경우도 꽤 있으니)를 취재하고, 무속인들을 인터뷰해서 그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무속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논의의 마무리로 삼고 있다.


무속인들이 범죄를 저지르면 당연히 처벌해야 한다. 그것은 어떤 종교인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범죄라고 판결을 할 수 있는 기준이 무속의 경우엔 명확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무속인들에 의해서 일탈행위가 자주 일어나고 있는 것인데...


'법원은 피해자가 위안을 받았다면 사기로 볼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53쪽)라고 하는데, 이는 피해자를 중심에 놓은 것이 아니라 가해자를 중심에 놓은 판결이 아닌가 한다. 이런 판결을 하는 기저에는 무속을 종교로 보는 관점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데...


종교로 본다면 종교가 지녀야 할 기본적인 윤리를 지키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데도 마음의 위안을 주었다는 이유로 처벌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까.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진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자 하는 무속인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도 명확한 판결이 있어야 하겠는데...


무속에 사람들이 빠져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완전히 빠지지 않고 재미 삼아 보는 사람도 있지만, 자신의 상태에 따라 무속에 심취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대개 '공통적으로 낮은 자존감과 높은 의존성, 수동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174쪽)다고 하는데, 이는 기존의 종교에 대한 믿음이 줄어들고, 또 사회가 안정적이지 않을 때 더 강하게 나타난다.


이렇게 나약해졌을 때 강하게 끌어주는 무속인들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무속을 개인의 문제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무속을 공론화하고 어디까지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지, 또 무속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공통의 기준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 점에 대해서 무속이 사회적 관심사가 된 지금 다양한 방면으로 공론화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냥 개인의 문제로 남겨두지 말고.


무속에 대하여 다방면으로 취재했는데, 이들이 말하고 있듯이 무속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의 수나 그들의 수입 등등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것들이 명확해져야 무속이 '방치된 믿음'으로 남겨지지 않을까 한다.


또한 적어도 공적인 자리에 무속을 끌어들이는 일은 하지 않게 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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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의 눈 - 포식자에서 먹이로의 전락
발 플럼우드 지음, 김지은 옮김 / yeondoo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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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통해서 다른 책을 만나게 된다. 책은 책을 이어줄 때 의미가 있다. 그 책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책은 다른 책과 이어져야 더 의미를 지니게 된다. 세상에 이어지지 않은 존재가 없다고 해야 하는데...

책이 책을 잇듯이, 생명은 생명을 잇는다. 자신의 생명으로 다른 생명을 이어주는 순환. 이 순환이 끊겼을 때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 지구에서 이러한 생명의 순환을 끊을 수 있는 존재는 누구인가? 

사나운 맹수들도 생명의 순환을 끊지는 못한다. 그들 역시 순환 속으로 들어간다. 돌고 도는 생명들의 원. 하여 그러한 생명들의 총합은 늘 같다. 형태만 변할 뿐이다. 그런데, 인간은?

인간은 이 생명의 순환을 끊을 수 있다. 지금 끊고 있다. 최상위 포식자로서, 자신들은 생명의 순환에 즉 먹이사슬에 포함되지 않게 행동하고 있다. 하여 인간들로 인해 지구에 있는 생명들의 총합이 변하고 있다. 

'제로섬'이어야 할 생명 순환이 엔트로피가 계속 증가하듯이 인간들로 인해 생명의 총합이 증가하고 있다. 왜? 인간이 생명의 순환 고리를 끊어버렸으니까. 하여 인간은 다른 생명의 생명으로 변하지 못하고, 그냥 인간으로, 한때 소멸하거나 가루가 되어 또는 탄소(다이아몬드)와 같은 형태로 변해서 계속 존재하고 있으니까.

이런 생명의 순환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주는 책을 만났다. 발 플럼우드가 쓴 [악어의 눈]이다. 작은 제목이 눈에 띈다. '포식자에서 먹이로의 전락'

번역자는 '전락'이라는 말을 썼지만 '전락'보다는 '전환'이라든지 또는 '깨달음' 정도의 말로 번역을 했으면 이 책의 취지에 더 잘 맞지 않았을까 한다.

저자인 발 플럼우드는 모든 생명체는 친족이라고, 이들은 생명의 순환 고리에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 하기 때문에.

하여 포식자와 먹이는 다른 존재가 아니라, 언제든지 포식자에서 먹이로, 먹이에서 포식자로 전환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 역시 죽으면 다른 동물의 고기가 되거나 미생물을 비롯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먹이가 되니,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 튼튼한 관과 돌로 다른 생명들의 침입을 막는 것을 발 플럼우드는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 자체가 생명 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이고, 인간은 절대로 먹이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의 발현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그렇게 생명을 바라보는 관점을 다룬 글들과 자신이 다른 생명과 함께 살던 모습을 쓴 글, 그리고 우리가 자연과 문화를 이분법적으로 보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함을 주장하는 글들이 실려 있다.

어렵지 않고 또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글들인데, 우리 역시 먹이가 될 수 있다는 생각, 그 점에 대해서 더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는 먹이이고 동시에 먹이 그 이상입니다.'(53쪽)라는 주장과 '우리는 인간의 멋진 삶에서 우리가 먹이로 만드는 이들과의 친족관계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먹이를 얻어야 합니다. 이 방식은 우리가 먹이 그 이상이라는 점을 망각하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을 다른 존재의 먹이로서 상호적으로 위치시킵니다.'(210쪽) 라고 하면서 '먹이 활동은 자연과 문화가 완전히 혼합된 활동입니다'(222쪽)고 자연과 문화를 가르는 이분법을 부정하고 있다.

인간도 생태계의 일부이고, 생명 순환의 고리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그래서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생명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생명이 생명을 잇는 모습인 것이다.

'생명을 순환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우리의 죽음을 다른 생명을 위한 기회로 이해한다면 특권적, 기술적 지배와 초월성으로 영원한 젊음을 움켜쥐려 하는 인간의 탐욕과 배은망덕을 저지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개체 수준에서 생명의 찰나성을 확정하지만, 생태적 수준에서는 지속적이고 탄력적인 순환 또는 과정을 보여줍니다.'(249쪽)

악어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경험을 통해서 자연과 문화가 분리되어서는 안 됨을, 또한 인간 역시 다른 생명의 먹이로 존재함을 깨닫게 되었다는 발 플럼우드. 그의 글을 읽으면서 인간 역시 생명의 순환 고리 속에 있음을, 그것을 깨어서는 결국 인간 자신의 생명이 위험해짐을 생각하게 됐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나희덕 시집 [시와 물질]을 읽고서다. 그 시집에 '누군가의 이빨 앞에서'라는 시가 있는데, 그 시에 발 플럼우드의 이야기가 나온다. 부분만 인용하면 이렇다.

 

발 플럼우드는 세 번이나 악어에게 잡아먹힐 뻔했다고 해요

 

우기의 강을 거슬러 가던 그녀는

카누를 타고 혼자서 너무 멀리 가버렸어요

악어의 눈을 마주하고 나서야 그녀는 깨달았지요

 

자신의 몸이 육즙 가득한 고기라는 사실을

 

눈꺼풀 속에서 빛나는 금색 눈동자,

악어의 눈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어요

악어는 그녀의 몸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자만과 환영까지 덮쳐버렸지요

 

악어에게 세 번이나 물어뜯긴 대가로 플럼우드는

먹이 그 이상의 존재가 되었어요

먹이로서의 인간에 대해 깨닫게 되었으니까요

 

- 나희덕, '누군가의 이빨 앞에서' 부분


이 책을 알게 해준 나희덕 시인에게 감사를 표한다. 시인을 통해서 다른 책과 이어지게 되었으니...


그리고 악어는 사냥할 때 탈진시키거나 익사시키기 위해 먹이를 입에 물고 물속으로 들어가 수차례 회전하는 것을 'death roll'이라고 하며, 국내에서는 '죽음의 소용돌이'로 번역한다고 한다. (9쪽, 옮긴이 주)


발 플럼우드는 악어에게 세 번의 소용돌이를 당했다고 하는데... 그 이후 바로 인간도 먹이가 될 수 있음을, 생명들은 모두 포식자도 먹이도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저자의 경험을 통해서 생태계에 자리한 인간의 위치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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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25-09-03 1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잘 읽었습니다. 저도 이 책을 여러 책에서 만났습니다. 방금 읽은 책에서도 이 책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희덕 시에 나왔는지는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저기 책장에서 제게 눈길을 보내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습니다. 언제쯤 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kinye91 2025-09-04 06:45   좋아요 0 | URL
서로 이어져 있는 책들, 반갑고 또 고맙더라고요. 그리고 언제가 되든 읽게 되더군요. 에로이카 님께도 이 책을 읽어야지 하는 때가 올 거라 생각합니다.
 

  시인끼리는 사는 곳이 달라도, 나이가 달라도, 문화가 달라도 무언가 통하는 것이 있나 보다. 마거릿 애트우드가 쓴 시집을 읽으며 우리나라 시인인 나희덕이 쓴 최근 시집 [시와 물질]이 떠올랐으니.


  소설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물론 글에 관한 많은 책을 내기도 했지만, 주로 애트우드의 소설을 읽었는데, 시도 썼다니, 좀 생소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애트우드가 시를 먼저 쓰기 시작했다는 것. 꾸준히 시집을 냈다고 해서 열다섯 권이 넘는 시간을 출간했다고 하니, 어느 한쪽으로 애트우드를 규정하는 일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작가는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시나 소설 도는 수필의 형식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고 는 것을 새삼 느꼈다고나 할까.


애트우드는 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시라는 것은 인간 존재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를 다루지요. 삶, 죽음, 회복, 변화를. 공정함과 불공정함, 불평등과 드물게 평등을. 각양각색의 세계와 기후와 시간을. 슬픔과 기쁨을.' ('독자들에게'에서. 7쪽)


여기서 '시'를 문학(예술)'로 바꿔도 될 것이다. 그러니 작가들이 어느 한 분야에서만 활동해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작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도 시와 소설을 모두 쓰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애트우드가 시집에서 한 말은 소설에서도 다시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인데, 문제는 시가 독자에게 도착하는데 늦을 수 있다는 것이다. '늦은 시'(13-14쪽)에서 시인은 '시라는 건 십중팔구 / 대단히 늦기 마련이다,'('늦은 시' 중에서)라 하는데, 그러면서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늦었다, 너무 늦었다, / 춤을 추기에는 대단히 늦어버렸다. / 그래도, 당신이 할 수 있는 노래를 불러라. / 빛을 더 밝혀라. 계속 불러라. / 노래를, 영원히.'('늦은 시' 끝 부분)라는 표현을 통해 포기하면 안 된다 하고 있다. 이것은 시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애트우드가 보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누군가의 말처럼 브레이크가 없는 세상이다. 멈춤을 모르는 사회, 성장이 아니면 망한다고 생각하는 세상. 그래서 끊임없이 성장, 성장을 외치는 사회. 성장하기 위해서는 온갖 물질들을 이 지구에 토해내야 하는 세계. 그런 세계다.


이런 세계가 멈추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에게 미래가 있을까? 하여 시인은 제발 멈추라고, 힘들지만 멈춤을 알아야 한다고 시 '플라스틱기 모음곡'(123쪽-136쪽) 중에 '6.마법사의 견습생'(129-130쪽)이라는 시에서 '마법사의 견습생 / 그것도 같은 이야기. '나아가기'는 쉽다, / 진짜 어려운 건 '멈추기' / 처음에는 아무도 그걸 생각하지 않는다. / 그러고 나면 '기다리기'는 너무 늦다.'고 하고 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아니다. 시가 늦을 수 있지만, 포기하고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다. 시는 '인간 존재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 다음 세대들이 살아갈 세상은 어떨까? 그런 세상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미래를 바꿔가도록 하는 것, 그것이 문학(예술)이 하는 역할 아니겠는가. 최근에 많은 디스토피아 소설이 나오는 이유도 그런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여 '아이들아'(139-140쪽)라는 시에서 시인은 그런 세상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표현하고 있다. 미래 세대들이 그런 세상에 살게 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우리가 무슨 권리로 미래 세대가 살아갈 세상을 파괴할 수 있단 말인가.


'아이들아, 너희는 새가 없는 세상에서 자라게 될까? / 귀뚜라미가 있을까, 너희들이 사는 곳에? / 과꽃이 있을까? / 적어도, 조개는 있겠지. / 조개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 ...... / 아이들아, 너희는 얼음 없는 세상에서 자라게 될까? / 쥐도 없고, 곰팡이도 없을까? // 아이들아, 너희는 자라기나 할까?'('아이들아'에서)


정말, 이런 미래를 물려주면 안 된다. 멈춤을 아는 지혜, 그것을 우리 조상들은 지학(止學)이라고 했다. 멈춰야 할 때를 아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배워야 할 지혜 아닐까. 시인은 나이로 보면 저물어가는 때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릴케의 말인 '시는 우리 마음에서 터져 나오는 과거이다'(84쪽)를 인용한 시 '좀비'(84-86쪽)의 내용과는 일대일 대응이 되지는 않겠지만, 애트우드의 이 시는 '좀비'가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에서 터져 나오는 과거, 우리의 현재를 만들고 또 미래를 만들어갈 버려서는 안 될 것들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함을 알려주는 '시'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애트우드의 시가 바로 그렇다. 우리 곁에서 사라지지 않겠다는, 계속 우리 곁에 머물면서 생각하게 만들겠다는 그런 시. 


애트우드의 시집을 읽으면서 소설도 생각하게 됐으니, 다만 책의 분량을 고려할 수밖에 없겠지만, 영어 원문이 실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러면 300쪽이 훨씬 넘어 문제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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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착한 마녀 글린다 - 완역본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 14
L. 프랭크 바움 지음, 존 R. 닐 그림, 최인자 옮김 / 문학세계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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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바움이 쓴 오즈의 마법사 마지막 편. 이번에는 전쟁을 막으려 하다가 위기에 빠진 오즈마와 도로시를 구하는 이야기다.


제목에는 글린다라고 나오지만, 다른 편과 마찬가지로 글린다가 등장하는 장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글린다가 가장 큰 역할을 하지만 다른 인물들의 도움이 펼쳐진다. 위기에 빠졌을 때, 홀로가 아니라 함께 해결하는 모습, 집단 지성의 모습이 여기서 드러나는데, 요정도 아니고 마법사도 아닌 누더기 소녀가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마법의 주문은 도로시가 찾아낸다.


이는 특정한 사람들만이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생각을 한다면, 또 그동안 인정받지 못했던 존재들이 한 말이라도 의미가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어려운 문제라고 하더라도 해결책은 의외로 단순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도 하고. 또 옳음을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도 해주고.


단순한 동화라고 할 수도 있지만, 동화에는 알게모르게 익히게 되는 것들이 있다. 어린 시절에 읽은 동화가 자신의 내면을 형성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 등을 인용하지 않아도 우리가 직관으로 알고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자신들이 이야기를 만들어서 읽게 하기도 하지 않는가. 이는 아이의 성장에 이야기가 주는 힘, 이야기를 통해 간접 경험을 하면서 삶의 방향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번 호에서 오즈마를 보라. 그냥 모른 척하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수도 있다. 정말 그런가? 법에 '부작위에 의한'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법 조항이 있는 걸로 알고 있다.


해야 하는 데도 하지 않는 것. 오즈마는 오즈의 통치자다. 그런 통치자가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에 문제가 생겼는데, 가만히 있어도 자신에게는 어떤 피해도 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용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부작위인 것이다.


오즈마에게는 문제가 없을 수 있겠지만 - 사실 지도자는 것은 자신의 부작위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힘들어진다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해야만 하는 일, 옳다고 여기는 일, 다른 존재가 힘들어하는 일을 개선하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 - 오즈에 속한 나라 사람들 (여기서는 납작머리들과 스키저들)은 전쟁이라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것은 제대로 된 통치자에게는 문제다.


이 문제를 해결하러 떠난 도로시와 오즈마. 하지만 이들은 위기에 처하고...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글린다와 도로시와 오즈마의 친구들이 함께해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온다.


물론 스키저들과 납작머리들도 자신들의 통치자를 새롭게 뽑고 또 평화롭게 지내게 되고.


이 편에서는 협동과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 그리고 자신의 머리를 나쁜 쪽으로 쓰는 사람들의 문제 등을 생각할 수 있다.


남보다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있다고 남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봉사하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이것으로 '오즈 시리즈'가 끝났다. 14권에 걸친 긴 여행이었다. 즐거운 여행이었다고, 그들의 모험에 함께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오즈의 마법사' 1권만이 아니라 나머지 권들도 사랑받을 수 있는 작품임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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