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소송 민음사 모던 클래식 65
율리 체 지음, 장수미 옮김 / 민음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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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개인의 건강권을 나라개인의 건강권을 나라가 모두 관리한다면? 자신의 건강을 기록하기 위해서 팔뚝에 칩을 심고, 그 칩에 운동, 영양, 질병 등 모든 것들이 들어가는 것만이 아니라 기록을 늘 국가가 감시하고 있다면? 그래서 조금이라도 부족하다고 하면 법원에 가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내 건강을 나라가 챙겨주니 좋다고 할 것인가? 이것은 국민건강보험과 같은 종류인가? 아니다. 국민건강보험은 내 건강을 지키라고 권유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제도라면, 이 소설 [어떤 소송]에 나오는 '방법'은 건강에 관련된 모든 것을 나라가 관리하는 것이다. 관리하고 처벌하고...


미아 홀이라는 여성이 있다. 이 여성은 생물학자다. 그러니 건강에 관해서 과학적 지식을 지니고 있다. '방법'에 호의적이다. 반면 동생 모리츠 홀은 이렇게 건강을 관리하는 '방법'에 반대한다. 그는 자신만의 시간, 자신만의 공간, 그리고 건강하지 않을 권리까지도 자신에게 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살인죄로 기소되어 감옥에서 자살을 한다. 자살? 이 사회에 가장 큰 범죄다. '방법'에 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법'은 오류가 없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방법'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한다.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죽은 사람의 몸에서 채취된 DNA가 모리츠의 것으로 밝혀져 모리츠가 기소되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지만, 그 DNA가 모리츠의 것이 아님이 밝혀진다. '방법'에도 오류가 있다는 것이 법정에서 밝혀진 것.


이런 사실이 밝혀지자 '방법'이 주장하는 바와 동생의 죄없음 사이에서 고민하던 미아 홀은 동생이 옳았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방법'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즉, 개인의 건강을 모두 국가의 관리에 둘 필요가 없다는 것. 개인은 고통받기도 하고, 그 고통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도 해야 한다는 것.


이런 미아 홀을 선동하고 재판정에 세우는 크라머라는 기자가 나온다. 그는 '방법'의 대변자다. '방법'만이 진리라고 믿고 사는 사람. 그런 그와 미아 홀은 대립을 하지만, 미아 홀은 그를 배척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알리기도 하고, 또 마지막 판결 집행에도 그를 임석할 사람으로 지명한다.


여기까지 '방법'에 의해 재판을 받고 처벌을 받는 미아 홀을 보면, 개인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승리를 거둔다는 결말로 가는 것 같다. 하지만 아니다. 미아 홀은 사면된다.


이유? 국가는 희생자, 순교자를 만들지 않는다. 희생자나 순교자라는 개념이 나오는 순간 '방법'은 오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여 거대 권력은 그러한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다.


미아 홀의 승리로 끝날 것 같던 싸움이 결국은 거대 권력인 '방법'에 의해 진실이 가려지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이는 언론과 권력이 유착이 되었을 때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입을 막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송에서 명백한 증거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이용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거대 권력에 의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변질이 된다.


(미아 홀의 말이 어떻게 왜곡되어 증거로 채택이 되는지, 그러한 일을 하는 크라머라는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이 소설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판사들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의 관점에서 증거나 말을 판단하고 판결하는 모습들... 이거 과거의 일도 또 다른 나라의 일도 아니다.)


미아 홀의 싸움은 절대 권력으로부터 개인의 권리를 가져오기 위한 싸움이었지만, 그러한 싸움은 언론에 의해서 철저히 왜곡되며 권력이 미아 홀을 고립시킴으로써 - 순교자로 만들면 이는 미아 홀을 승리자로 만드는 것이니, 사면함으로써 미아 홀을 사람들에게서 잊혀지게 하는 방식으로 -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한다.


이렇게 소설은 행복한 결말이라 할 수 없는 방향으로 끝난다. 이런 일이 한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음을 생각하게 하고 있으니...


'방법'이라는 건강 독재...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개인 선택의 여지가 없이 개입을 하거나 강요를 하는 것은 좋을 수 없음을, 그러나 그러한 권력의 통제는 알게모르게 작동을 하거나 또는 언론을 통하여 사람들의 비판적 능력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작동됨을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경계에 서는 일 또는 경계에 서서 이곳과 저곳을 볼 수 있는 눈을 갖추는 일. 그것을 비판적 사고라고 해도 좋다. 그러한 능력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보여주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 그러한 것을 살필 수 있는 통찰력을 지녀야 한다.


비록 권력이 이들을 마녀로 또는 범죄자로 낙인 찍을지 모르지만 단일한 체계에 균열을 내는 존재는 권력에게 그러한 취급을 당했던 사람들임을...


소설 속 대화를 인용하면서 마친다.


"마녀란 말은 울타리 타는 여자란 표현에서 나왔어...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 아웃사이더야. 아웃사이더는 위험하게 살아가. 권력이란 때때로 자기 힘을 증명해 줄 본보기를 필요로 하는 법이야. 특히 내부에서 믿음이 흔들릴 때에는 더 그렇지. 아웃사이더들은 여기 안성맞춤이야. 자기들이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거든. 굴러떨어진 과일이지." (145쪽)


이 작가의 다른 소설들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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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 기후위기, 기술봉건주의


  이번 호에서 핵심으로 삼을 수 있는 말이다.


  핵은 민주주의에 반한다. 핵 자체가 거대 자본과 결합될 수밖에 없으며, 다른 곳을 희생으로 삼기 때문이다. 핵발전소가 건설된 곳을 보라. 핵발전소가 안전하다고 주장하면서도 도심에는 짓지 않는다. 


  도심에서 먼 곳에 핵발전소를 짓고, 전기를 공급하느라 먼 거리를 송전선로를 건설한다. 무엇보다도 핵발전에 관해서 시민들이 관여할 수 있는 길이 별로 없다. 그러니 민주주의와 먼 것이 바로 핵발전이다.


체르노빌,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같은 사고를 겪었으면서도 다시 핵개발을 들고 나오고 있다. 비용이 저렴하다고? 세상에 핵폐기물을 처리하는데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러한 에너지 정책에도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하고,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기후위기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여러 정책들과 기후위기가 겹쳐 있기 때문인데, 반민주적일수록 기후 정책에 관심이 없다. 미래를 끌어 현재에서 소비해버리고 만다. 그런 점을 이번 호에서 잘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 '기술봉건주의'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났다. 봉건주의는 이미 지나간 시대라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영주로 등장한 것이 거대 플랫폼들과 아이티 기업들이라니... 그들이 영주가 되고 거기에 종사하는 기술자들은 기사가 되고, 그럼 시민들은? 자칫하면 농노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


열심히 소비하고 생산하지만 결국 이윤은 몇몇 소수에게 돌아가고, 오히려 청소년들의 정신적 위기가 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관점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녹색평론이 주장하는 것에 경청해야 한다. 지금 닥친 위기들이 갑자기 나타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경고해왔던 일들 아닌가. 그러한 경고에 눈 감고 발전, 성장만을 외친 결과가 양극화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냥 근본적인, 너무 급진적인 주장이라고 치부하지 말고, 왜 이런 주장을 녹색평론이 하는지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더 나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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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로 속에 들어간 기분. 앞으로 나아가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냥 앞에 보이는 대로 갈 뿐이지만, 제대로 가고 있는지, 결국 나갈 수는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오른쪽으로만 돌면 결국 출구가 나온다고 하던데... 시집에는 이러한 오른쪽이 없다. 오른쪽이라고 생각하면 왼쪽이 되고, 왼쪽인가 싶으면 오른쪽이다. 이런 끝없이 헤맬 수밖에 없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출구가 보이련만, 미로가 훤히 밝혀지련만, 미로를 내려다볼 위는 없다. 오로지 미로 속에 있을 뿐이다. 미로 밖은 보이지 않는다.


  내 눈 높이보다 높은 미로들, 내 이해 범위를 벗어난 시어들. 시들. 그러한 시를 쓴 시인(들)


이해하길 포기하고 그냥 간다. 언젠가는 나가겠지. 나가더라도 어떻게 나왔는지 알 수 없다. 논리로, 한 단계 한 단계를 밟으며, 기억하며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 


이래서 시집은 미로다. 시라는 미로 속에 우리를 들여보낸다. 그리고 출구를 찾으라고 한다. 하, 갑자기 다이달로스가 생각났다. 그는 미궁을 만들었다. 그런데 자신이 미궁에 갇혔다. 미궁 밖으로 만든 사람은 나갈 수 있을까?


그가 갇힐 때 아리아드네의 실을 준비하지 못했을 텐데... 하지만 다이달로스는 미궁을 만든 사람. 탈출할 방법은 하늘을 나는 것. 그는 새의 깃털을 모아 날개를 만들어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이렇게 미궁은 아리아드네 미로 속에 들어간 기분. 앞으로 나아가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냥 앞에 보이는 대로 갈 뿐이지만, 제대로 가고 있는지, 결국 나갈 수는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시인을 다이달로스라고 하더라도 시인 자신도 시집이라는 미로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시인이 아리아드네의 실을 쥐고 있다면 모를까, 시인은 시를 쓰자마자 아리아드네의 실을 잃었을 테니. 시인 역시 시집이라는 미궁에 갇힌 존재가 아닐까. 아무리 시인 자신이 다이달로스라고 말한다 해도, 시인은 다이달로스처럼 날개를 달고 날아오를 수 없다.


시인이 다이달로스라고 해도 미궁에 갇힌다면 이 시집을 읽는 나는? 당연히 미궁 속에서 헤맨다. 헤매다 헤매다 그럼에도 계속 헤맨다. 오른쪽으로 찾으려고,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으려고 애쓴다.


애쓰면서 그렇게 시집의 끝에 다다른다. 시집의 끝. 출구인가? 아니다. 여전히 미궁 속이다. 에라, 이런... 황혜경 시집은 이렇게 나에게는 미궁이 된다. 나는 여전히 미궁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러다 이 시집 제목을 생각한다.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 어떻게? 과거가 되는 길이 바로 쓰는 것 아닐까 한다.


어떤 특검이 사초 쓰는 자세로 수사를 하겠다고 했다. 사초(史草) 역사의 기록이다. 쓰는 행위다. 그런데 사초는 현재가 아니다. 쓴다가 현재지만 이미 쓴다에는 과거가 포함되어 있다. 쓰는 행위는 과거로 가는 행위다. 적극적으로 과거로 가서 현재에 남겨 놓는다는 의미다.


결국 쓰는 것은 과거로 가서 과거를 현재로 끌어온다는 의미다. 사라질 것들, 잊혀질 것들을 붙들어 놓는 행위. 이것이 쓴다는 행위다. 쓰면 보게 된다. 언젠가는 보겠지. 황혜경이 쓴 이 시집의 출구를... '목도(目睹)'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을 기억하려 한다. 그 구절을 쓴다. 보기 위해서.


이렇게 쓰기는 보기다. 그리고 쓰기는 아리아드네의 실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오래 걸릴 수는 있지만.


'두 눈을 뜨고도 분별하지 못하던 것들이 보이는 때가 오고 있다

눈여겨보려고 한다'


황혜경,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 문학과지성사. 2018년 초판 2쇄. '목도' 중에서. 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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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5-07-05 2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같은 표현도 맥락에 따라 현저히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새삼 절감합니다. 과거에 얽매이는 것과 과거에는 분별하지 못한 것을 드디어 보기에 과거를 ˝눈여겨 보는 것˝과는 하늘과 땅차이겠죠~~~. 멋진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좀 난해한 시집같다는 느낌은 들지만 사유에서 배울 게 있어 보여요~~많은 시들이 그렇지만요

kinye91 2025-07-06 08:27   좋아요 0 | URL
저에게 시는 미로 속을 헤매는 기분을 느끼게 해줘요. 무언가 명확하지는 않는데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가게 해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미로를 나오듯이, 시를 이해하는 순간이 오겠지 하면서요.
 
판타지는 어떻게 현실을 바꾸는가
브라이언 애터버리 지음, 신솔잎 옮김 / 푸른숲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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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이름을 붙이기 나름이라고 해도 좋지만, 각 장르로 분화되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 장르 중에 사실주의 소설과 판타지 소설, 또는 SF소설도 있다. 


이 책은 판타지 소설과 SF소설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르 귄 같은 경우에는 SF작가로 더 알려져 있지만,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작가가 르 귄이기 때문에, 이 책에서 말하는 판타지에 SF소설도 포함시키면 된다.


판타지를 그냥 환상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상상으로 만들어 낸 세계라고 하는 편이 더 좋겠다.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고, 그러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소설을 사실주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러한 사실주의 소설도 엄밀히 말하면 사실이 아니다.


현실에서 일어남 직한 일을 형상화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사실주의 소설도 역시 상상의 산물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있음 직한 현실과 완전히 다르다고 여기면서 읽는 작품인 판타지 소설은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과연 판타지 소설이 현실을 바꿀 수 있을까? 그냥 상상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는데... 아니다. 상상이 현실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상상은 현실에서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것,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기에 그것을 채우려는 우리의 활동이다.


그렇다면 상상이 문학으로 표현된 것이 판타지 문학이고, 판타지 문학은 현실에서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무엇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판타지라고 생각하기에 거리를 두고 작품을 읽을 수 있고, 읽음으로써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점을 깨닫기도 한다. 그것이 판타지가 우리에게 주는 효과다.


그렇기 때문에 판타지는 현실을 바꿀 수가 있다. 판타지가 바꾸는 것이 아니라 판타지를 읽고 현실에서 부족한 점, 보완해야 할 점 등을 생각한 독자가 행동으로 나설 때 현실이 바뀌는 것이다. 문학의 힘.


소위 정통 문학이라고 하는 문학만이 아니라 문학은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그리고 판타지는 상상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내기에 현실과 비교할 수 있는 세상을 제공해 준다.


다른 세계를 보는 것. 우물 안의 개구리에서 벗어나는 것. 자신의 한계에 대해 생각하고 그 한계 너머를 보게 해주는 것이 판타지다. 그러므로 판타지는 현실의 쌍으로 현실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현실이 판타지에 영향을 주고, 다시 판타지는 현실에 영향을 준다. 이 책의 첫장에서 저자는 르 귄의 말을 인용한다.


"판타지는 물론 진실이다. 사실에 기반하지 않았을 뿐, 진실인 것은 맞다"(62-63쪽)


사실이라고 하지 않았다. 진실이라고 했다. 즉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일들을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진실이다. 진실로 가는 길이 하나가 아니지 않은가. 사실주의 문학이 사실적인 표현을 통해서 진실로 향해 간다면, 판타지는 상상을 통해서 진실로 간다.


경계 너머, 한계를 넘어서는 상상. 그러한 상상을 현실로 가져오기. 이것이 판타지가 하는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판타지 소설에는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 이야기가 있고,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마법의 세계가 펼쳐지기도 한다.


마법의 세계, 허황된 것 같지만, 그러한 마법은 우리의 사고를 극한까지 몰아갔을 때 만나게 되는 지점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불교의 화두에 있는 말,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와 같다고 할까.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절벽에 서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지 않으면 그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고, 자신이 살아온 현실을 벗어날 수가 없다. 나아가야 한다.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이 판타지라고 보면 된다.


저자는 이 책에서 판타지를 보는 아홉 가지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데, 제목만 이어 보아도 책의 내용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거짓말로 진실을 말하기, 마법이 현실 세계로 뻗어 나간다면, 화합을 추구하는 결말, 갈등보다 건설적인 각본, 여성을 억압하는 북 클럽에 저항하기, 더 나은 세계가 있다는 생각, 환상 동화 속 소년 찾기, 익숙한 과거를 재구성하는 공간, 두려움 너머의 진실을 보기


그렇다. 판타지는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법이 나오지만 마법은 상대를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화합을 향하고, 갈등보다는 변화를 추구하며,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다양한 성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기를 추구한다.


여기에 유토피아란 완성된 세계가 아니라 과정 중의 세계라는 점을 보여주며, 그래서 디스토피아에서도 유토피아를 찾을 수 있게 하고 있다. 이는 과거를 보여주더라도 현재를 재구성하기 위한 것이며 우리가 마주치는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함께 나아가야 함을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통해 죽음과 그에 대한 공포에 압도되거나 지배당하지 않는 법을, 다만 두려움에 이름과 얼굴을 부여하고 우리 삶의 한 공간을 내어주는 법을 배운다'(411쪽)고 한다.


이 문장만 보아도 판타지가 현실을 바꿀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양한 판타지 작품과 자신이 설정한 아홉 가지 주제로 판타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판타지 작품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도 판타지는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보여주는 거울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관점에서 판타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해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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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5-07-05 2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울리지의 불신의 유보, 란 게 가장 적극적으로 반영되는 게 환타지겠지요. 그러려니 하는 거~. 해리 포터에 나오는 1과 2분의 1이란 승장강이 있다고 바로 믿어지는 것. 아니, 믿고 싶어하는 것! 전 판타지를 잘 읽게 되지는 않더라고요. 좀 사실적인 이야기를 좋아하긴 하는 것 같아요. 그치만 판타지에 정말 좋은 예술 작품이 많다는 건 압니다. 칼비노의 ‘반쪼가리 자작‘이라든가 아술러 르 귄의 모든 소설들....저도 이 책 읽고 있어요. 더 꼼꼼히 읽어야겠어요~. 덕분에요!

kinye91 2025-07-06 08:28   좋아요 0 | URL
판타지를 여러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어서 읽으면서 판타지를 좀더 이해할 수 있게 해준 책이에요. 그리고 저도 칼비노 소설과 르 귄의 소설을 좋아하는데, 이 책에서는 르 귄에 대한 글도 꽤 있어서 좋았어요.
 

  처음에 이 시집 제목을 읽었을 땐 즐거움이 넘치는 시들이 실려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시들다는 말이 좋지 않은 의미로 쓰이니까, 시들지 않는다는 말이 들어 있으므로, 젊고 건강하게 발랄하게 지내는 생활이 표현되어 있지 않을까 했는데...


  시집을 읽으면서 발랄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어둡다. 쓸쓸하다. 외롭다. 처연하다는 말이 먼저 떠올랐다. 왜 그럴까?


  시 구절을 이해하기 힘든데, 시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 힘든데... 마치 우주가 까만 어둠에 싸여 있듯이, 시인의 말들은 그냥 어둠 속을 배회하는 낱말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럼에도 이상하게 마음에 남는 시가 있고, 그 시들이 우주의 어둠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드무개 마을'이라는 시에서 '드무개'? 하다가 찾아보니 남해에 드무개 마을이 있단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마을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마을을 시로 표현하는데, 무언가 어둡다. 


'죽은 새끼 짐승, 어둠에 젖어, 늙은 여자의 빈 젖만 빨던, 목소리가 근심스러웠다 등등' 이런 시어들로 인해서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도 어두운 삶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여기에 '우체통'이라는 시도 그렇다. 우체통은 나와 다른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 마음을 나눠주는 역할, 그래서 설렘이 있는, 희망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하는데, 시인의 우체통이란 시를 읽으면 그렇지 않다. 쓸쓸하다. 그냥 홀로 외롭게 서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고 다 어둡지는 않다.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것. 시인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올리브 동산에서 만나요'라는 말. 그리고 날짜가 적혀 있는데 2020년 9월 10일이다. 잠깐 의문에 잠겼다. 시인은 불의의 사고로 2020년 7월 24일에 영면했다고 한다. 그런데 9월 10일이라니?


이 의문은 발문을 읽고 풀렸다. 시인의 49재 날이 바로 9월 10일. 올리브 동산은 시인이 쉬고 있는 곳, 우리는 그곳에 있는 시인을 시집을 통해서 만날 수밖에 없다. 이 구절이 어디에 있을까? 유고시집이니 시인이 시인의 말을 쓰지는 않았을 텐데...


읽다가 '환상통을 앓는 행성과 자발적으로 태어나는 다이달로스의 아이들'(62-64쪽)이라는 시 첫구절이 '올리브 동산에서 만나자'라는 것을 발견했다. 


다이달로스의 아들이 누구인가? 이카루스 아닌가. 이카루스의 날개라는 말은 많이 쓰는데, 그는 결국 추락하지 않았던가. 하늘로 날아오르기를 바랐으나 결국 땅으로 바다로 추락하고 만 이카루스. 


그렇다고 올리브 동산에서 만나자라는 말을 추락하자는 말로 이해하면 안 된다. 이 말은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잇어야 하고,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계와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사람들이 함께 지낼 수 있는 그런 장소를 만들고, 그 장소에서 서로 어울리자는 말로 해석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곳으로 어떻게 가는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진적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그때는 아이가 되지 않으니. 나이든다는 것, 그것은 어릴 적 순수함을 하나씩 잃어간다는 뜻. 즉 식물로 따지면 시들어간다는 뜻. 다르게는 익어간다고, 성숙해진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 뜻을 잠시 놓아두자.


이렇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진적으로 가다가는 올리브 동산에서 만날 수가 없다. 하늘로 비상해야 한다. 비상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적어도... 우주를 가로질러, 다른 우주로 가려면 그냥 나아가서는 갈 수가 없다. 빛보다 빠른 속도로 가더라도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럴 때 우주를 가로지르는 길로 가야 한다. 


시인은 말한다. '아이는 불가피한 귀결로 자란다. 웜홀 웜홀'('환상통을 앓는 행성과 자발적으로 태어나는 다이달로스의 아이들'에서. 64쪽)


웜홀로 가면 시들지 않는다. 아이는 아이로 다른 세계로 간다. 이것이었구나, 시인이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이 시 구절은 '친애하는 언니'(66-67쪽)라는 시에 나온다.


그래, 웜홀을 통과해 가면 시들지 않지. 시들기 전에 다른 세계에 도달하지. 그렇게 만날 수 있지. 그러한 올리브 동산에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시인이 그렇게 웜홀을 통과했다고 믿으련다. 그는 그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기다리고 있겠지. 


그의 시 중에 '일랑일랑' 시를 읽으며 그가 이미 뿌리내리고 있는 올리브 동산을 나는 이 시집을 통해서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일랑일랑


  어린 묘목을 사왔다


  8월이 살찌고 햇살이 과수원으로 긴 숨을 불어넣던 날 줄무늬 수박이 계절의 한가운데를 가르면 눈물 많은 복숭아가 먼저 생겨 제 울음을 토해내던 날


  1,630마일을 건너 신부를 데려왔다


  늙은 삼촌은 새장가를 갔다 데려온 신부는 맨발이었다 뿌리 휑한 신부는 과수원에 자주 들락거렸다 발이 큰 삼촌이 무서웠는지 맨발인 자기 발이 부끄러웠는지 


  심장이 붉은 토마토가 온점을 찍는 날이 늘어갔다 낯선 곳에서 매미가 울었다 알 수 없는 곳으로 울음이 흘러가고 곳곳에 여름의 문장으로 환한 날이었다


  여물지 못한 안부가 이국의 단어로 속살거리는 저녁 어둠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며든다 신부는 설익은 잠을 잤다


  곯은 자두는 단내가 심했다 복숭아가 낙과하고 으깨진 과육은 개미굴의 낙원이었다 신부는 알이 작은 참외를 곧잘 깎아 먹었다


  껍질을 풀어 생애를 더듬는 이국의 당신


  우거진 넝쿨에서 포도가 자랐다 한여름 소화되지 못한 응어리가 초록으로 폭발하듯 신부는 막 깨어난 알맹이를 삼켰다 두번째 뿌리를 내릴 곳에 맨발이 닿고 온 마을에 묘목이 옮겨졌다


  또다른 지구가 태어나고 있었다


김희준,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문학동네. 2021년 1판 6쇄. 104-105쪽


일랑일랑을 찾아보니 동남아시아에서 자라는 나무에서 피는 꽃 이름이라고 한다. 향기가 좋다고 하는데... 향수의 원료가 된다고 하니.


동남아시아에서 온 꽃나무와 동남아시아에서 온 이주민이 연결되는 시. 그리고 두번째 뿌리를 내린다는 말에서, 올리브 동산은 특정한 어느 지역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사는 곳을 올리브 동산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시인이 올리브 동산으로 가자고 하고, 거기서 만나자고 한 것은 그곳을 시간이 지나서야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시간을 건너뛰어 또는 그럴 필요 없이 바로 여기를 올리브 동산으로 만들면 된다고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시가 꼭 어둡지는 않다. 우주를 채우고 있는 암흑물질(암흑에너지)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해서 암흑이지만, 그 어둠이 우주를 지탱하고 있으니, 이 시집에서 느꼈던 어둠을 우주의 어둠으로 생각하고 싶어졌다. 그러면 광활한 우주를 우리는 여행하고 있게 되니까.


김희준이라는 시인의 시집을 통해 이렇게 우주를 여행하고, 웜홀로 다른 세계로 곧장 나아가기도 한다. 그의 시에서 '일랑일랑'의 향기를 맡는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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