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공화국의 적은 누구인가 심용환 역사 상상력 아카이브 3
심용환 지음 / 사계절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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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눈을 갖는 것. 현상황을 파악하고 나아갈 길을 찾는 것.


탄핵 이후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새로운 정부가 출범(아직은 아니다. 대통령과 대통령실만 바뀌었다. 기존 국무위원들은 그대로다. 국무총리 인준이 끝나야 국무총리가 국무위원을 추천하고 그들이 청문회를 거쳐 임명이 되어야 새로운 정부가 출범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야 제왕적 대통령이란 소리를 안 들으니)했으니 끝인가?


촛불, 응원봉으로 대변되는 광장의 외침이 선거가 끝나면 끝나는 것인가? 아니, 광장의 외침은 지속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빛의 혁명'은 계속 되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광장의 외침은 민주공화국의 회복이다. 대통령이란 작자가 왕처럼 군림하는 나라가 아니라 국민이 주권을 가지고 행사할 수 있는 민주공화국. 그것이 광장의 외침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대통령과 국무위원을 바꾸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국민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민주공화국을 만들어가야 한다.


어떻게? 먼저 무엇이 민주공화국을 가로막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걸림돌을 찾아야 없앨 수 있다. 그러한 걸림돌을 찾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면 광장의 외침은 실현되지 않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게 된다.


이 책 제목에서 현 상황을 파악하는 단초를 발견한다. '민주공화국의 적은 누구인가' 그렇다. 민주공화국의 적을 먼저 찾아야 한다. 무엇이 민주공화국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지, 그것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어떻게 없앨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알게 되면 모른 척 할 수 없다. 이미 밝혀진 사실을 감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민주공화국의 적을 명확히 해야 한다. 저자가 무엇을 들고 있는지 살펴보자.


총 12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이 모두 민주공화국의 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명백하게 민주공화국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들이 있다.


비상계엄, 대통령, 군부, 공무원, 검찰, 사법부, 

국회, 기독교, 경제, 뉴라이트, 북한과 국제관계, 국민


이 열두 개 항목 중에 비상계엄은 말 그대로 민주공화국의 적이다. 민주와는 거리가 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비상계엄을 선포했던 역대 대통령을 다 살피지 않아도 독재정권이라 불리는 이승만, 박정희와 전두환이니, 민주라는 말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다들 인정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비상계엄을 '계몽'이라고 강변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세상에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행위를 어떻게 계몽이라고 할 수 있는지, 그런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대다수 국민'이라면 민주공화국은 이루어질 수 없다.


대통령이 다음에 나오는 것은 비상계엄을 선포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나라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왕적 권력을 가졌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 말 자체가 민주공화국과 양립할 수 없는 말이다. 제왕적 대통령이란 대통령 개인이 많은 권력을 쥐고 정치를 좌지우지 한다는 말이다. 여기에 공무원은 상명하복이라는 말을 실천하는 존재일 뿐이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공무원들이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다면, '민주공화국'은 될 수가 없다. 관료주의도 문제지만, 관료가 관료 역할도 못하고 대통령이나 권력자의 눈치나 보면서 업무를 처리한다면'공무원은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말이 법 조항으로만 존재하게 해서는 그런 공무원이야말로 민주공화국의 적이 될 수밖에 없다.  


군부와 검찰은 이야기할 것도 없다. 개혁의 대상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이미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고, 군부는 지속적으로 힘이 약화되었지만, 그럼에도 이번 비상계엄처럼 동원되어 시민들에게, 민주주의에 위협이 될 수 있으니 적절히 통제되지 않는 군부는 민주공화국의 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번에 망설이는 실질적인 태업을 하는 군인들이 있었다는 점, 이는 우리나라 군대가 어느 정도는 민주화 되었다는 말이다. 군대를 동원한 비상계엄이 일어날 수 없는 사회가 되도록 지금에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검찰과 사법부.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지닌 이들은 민주공화국에서 개혁의 대상이 된다. 견제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절대권력은 부패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검찰과 사법부, 경찰은 적절히 견제할 수 있는, 그것도 시민들이 견제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한다. 지금도 거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집단이 이들 아닌가. 이들을 그대로 놓아두고서는 민주공화국이라 하기는 힘들다.


이런 역할을 국회가 해야 한다. 국회는 대의기관 아니던가. 시민들의 의사를 대변해 법안을 마련하는 기구인데, 적절한 기능을 하지 않고 대통령의 친위 역할을 하는 국회는 민주공화국의 적이 된다. 그런 국회의원들을 소환할 방법이 없는 것이 문제다. 국회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국회의원 선거법부터 소환까지 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그래야 당선되고 난 뒤에 자신들을 선택한 국민들을 나 몰라라 하는 국회의원이 줄어들 수 있다. 또 당리당략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입법활동을 하는 국회의원으로 거듭나게 된다. 당리당략에만, 자신의 당선에만 관심이 있는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변인이 아니라 국민을 배반한 민주공화국의 적이다.


기독교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으련다. 다만 잘못된 활동을 하는 기독교는 비판받아야 하고, 종교는 정치와 철저히 분리되어야 함에도 종교를 가장해 정치에 간여하는 종교인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여기에 경제는 누구를 위한 경제인가를 생각해야 하고, 뉴라이트는 비판할 가치도 없다. 잘못된 주장을 펼치는 그들은 분명 민주공화국의 적이다. 학문을 표방하면서 제 욕심을 채우려는 집단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북한과 국제관계 역시 어떻게 풀어가느냐에 따라 민주공화국으로 가느냐 마느냐가 결정된다.


분단국가인 우리나라가 북한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 나갈 것인지, 북한을 이용해 독재 권력을 강화했던 역사에서 이제 북한은 그러한 역할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중국과 일본, 미국을 비롯한 국제 관계 역시 민주공화국이 지속되느냐 마느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니, 이들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하다.


마지막이 국민이다. 국민이 민주공화국의 적이라고? 아니다. 저자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국민을 언급하는 것은 이 책의 '들어가며'에서 한 말과 통한다. 민주공화국의 성공 여부는 국민에게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정 정치인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은 역사가가 국민에게 바치는 상소上疏 와 같은 글이다. 한국 현대사는 중요한 승리 이후 심각한 실수를 반복해 왔다. 첫 번째는 4.19혁명 이후였다. 두 번째는 6월민주화항쟁 이후였다. 세 번째는 박근혜 탄핵과 문재인 정권의 등장에서였다.'(4-5쪽) 


승리 이후 사회를 바꾸지 못하고 사람만 바꾸었던 역사적 경험. 그래서 지독하게도 계속 반복되는, 윤석열 탄핵 이후에는 이러한 역사적 사례들을 검토하고 재반복하지 않게 해야한다는 저자의 당부. 그래서 상소다. 국민에게 보내는. 


상소를 받은 국민이 상소를 받아들여 대책을 세우느냐 아니냐에 따라 민주공화국의 성패가 결정될 수 있다. 그러니 민주공화국의 열쇠를 쥐고 있는 국민이니, 국민을 이 책의 맨 뒤에 놓은 것이리라.


이렇게 저자는 역사를 살피면서 12개 항목을 통해 지금 현실을 바라보도록 하고 있다. 알아야 한다고.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거쳐왔다고... 또다시 실패를 해서는 안 된다고... 그래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한발 나아가야 한다. 저자의 상소를 받아들여야 한다. 상소를 받아들이는 주체는 대통령, 국무위원, 국회의원, 검찰, 경찰, 판사, 재벌 들이 아니다. 바로 우리 국민들이고, 이러한 상소를 받아들여 그것이 실현될 수 있게 주권을 행사해야 할 존재 역시 국민들이다. 저자는 그 점을 말하고 있다. 명심하자. 지금이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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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데모 - 데모하러 간다 아무튼 시리즈 63
정보라 지음 / 위고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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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라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환상소설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그 환상이 곧 우리 현실이라고 느끼곤 했다. 또한 작가의 말에서 대놓고 '복수'를 이야기하는데, 왜 그런가를 이 책을 통해서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이런 활동을 하는 작가라면 세상의 불의를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터. 불의에 항의하기 위해 직접 서명을 받고 행진을 하고 오체투지까지 한 작가니, 작품을 통해서 불의, 악을 응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데모라고 하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아야 하는 거창하고 위험한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아니다. 정보라 작가의 데모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하는 것뿐이다.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또 자신들이 가르쳤던 학생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정보라 작가는 데모 현장에 함께한다.


이 함께함이 바로 유토피아로 나아가는 길이다. 유토피아가 저기 있다가 아니라 그렇게 함께 가는 길이 유토피아임을 작가는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세상이 바뀌지 않고, 또 나와 함께하는 사람이 있을 수가 없으니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함께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며, 내가 바라는 세상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길이다.


엄숙하고 무거울 것 같은, 데모라는 말에서 풍기는, 적어도 80년대 데모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그러한 행위가 이 책에서는 결코 무겁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리저리 잴 필요가 없이 그냥 해야 할 일을 할 뿐이기 때문에 무겁지 않다. 그렇다고 가볍다고 할 수 없다. 다만 발랄함, 그렇다.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고 불의를 없애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경쾌하고 발랄하게 참여한다.


데모가 축제가 되는 것. 그것은 정보라 작가의 이 책이 아니더라도 이미 작년 12월부터 우리는 경험하지 않았던가. 응원봉이 등장하는 데모라니... 데모는 우중충한 행위가 아니다.


우리가 만나야 할 세상을 미리 만나게 해주는 유토피아가 펼쳐지는 곳, 그곳에서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얻게 되는 행복하고 즐거운 장이 바로 데모 현장이어야 한다.


물론 슬프고 무겁고 어두운 데모 현장도 있다. 이 책에 나온 고공농성장이 그렇다. 땅에 발 붙이고 살아야 할 사람을 땅에서 가장 먼 곳으로 보내 자신의 주장을 듣게 하는 것. 그렇게 위험한 곳에서 자기 주장을 펼치다 내려오면 경찰이 출동해 병원으로 보내 치료를 하게 하기보다는 체포부터 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현장. 이런 현장이 결코 발랄할 수는 없다.


그래서 작가는 이런 현장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으면 한다. 데모를 하는 이유도 그렇다. 그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아직도 데모를 사회를 혼란시키는 이기적인 자기 주장만을 펼치는,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사람들, 이 책을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왜 데모를 하는지, 그리고 데모가 과연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인지...


가령 이런 것이 있다. 차별금지법을 생각해 보자. 왜 차별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자는데 반대를 하지?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고 이 책에 나온다.


'2020년 여름 국회 앞으로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오체투지를 하러 갔을 때 확성기를 든 어떤 사람이 차별은 꼭 필요하다며 "사람은 차별을 당해야만 노력해서 극복하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59쪽)


이런 사람들이 꼭 있다. 자신은 차별당한 적이 없기 때문. 차별이라는 말이 어떻게 삶을 왜곡하고 힘들게 하는지를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


정보라 작가는 '경험해보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 타인의 몸을 경험할 방법은 없으니까. 비장애인은 장애인이 경험하는 세상을 정말 전혀, 하나도, 결단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자기가 뭘 모르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배우거나 이해하려고 시도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81쪽)고 하고 있다.


이러니 차별이 뭔지, 그것이 삶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알지 못한다. 차별이 없다면 들지 않을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그 비용을 왜 약한 사람이, 차별을 당하는 사람이 지불해야 하는지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 차별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삶은 형벌이 아니다. 게다가 피부색이나 출신 국가나 가족 상황 등은 내가 노력해도 바꿀 수 없다. 아무리 노력해 봤자 바꿀 수 없는 걸 바꾸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만 기본적인 존중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노력이라기보다 차별로 인해 소모되는 비용일 뿐이다. 확성기 든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그런 주장을 하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남에게 그런 '차별 비용'을 요구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59-60쪽)고 작가는 말한다.


그러니 작가가 데모를 할 수밖에 없다. 데모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으므로.


이러한 정보라 작가의 모습, 데모에 관한 글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하게 해준다. 적어도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혹시 그동안 데모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면, 데모를 이제까지와는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리라. 정보라 작가가 데모에 대해서 경험하게 해주었으니까. 


소설을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작가를 발견했구나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이래서 이 작가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하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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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린 너무도 멀리 와버렸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 어디서 멀리 왔을까? 바로 흙에서다.


  흙에서라고? 흙은 바로 우리 곁에 있지 않은가. 지금도 우리 발 밑에...


  발 밑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겐.


  그들에겐 콘크리트나 아스팔트로 포장된 땅만 보인다. 땅은 있되, 흙은 없는 상태.


  그것이 현대 도시인들의 생활이다. 김기택 시인은 그래서 '그는 새보다도 적 게 땅을 밟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흙이라 하지 않았는데, 흙이 아니더라도 땅이라는 우리가 발 딛고 살아야 할 것에서도 멀어졌는데, 하물며 흙이랴!


시골에나 가야 아니면 등산을 가야 흙을 밟게 되는데, 그래서 흙의 소중함을 잃고 사는 것은 아닌지.


이러한 흙에 대한 애정을 담은 시집이 바로 이 [흙의 경전]이다. 흙을 경전처럼 소중히 여긴다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기후 재앙에 시달리지는 않았을 텐데.


흙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쫓겨나는 모습이 이 시집에 담겨 있다. 물론 흙과 멀어지는 사회만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역사적으로 우리가 겪은 개발, 독재, 분단 등이 이 시집에 실려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바로 '흙'이다. 땅이다. 무엇에 덮이지 않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러한 땅.


그래서 이 시집에 나오는 인물들은 땅에 살아가는 존재, 논이나 밭에 내려온 새들도 함께 살아야 할 소중한 존재로 여긴다. 이런 인물들에게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유흥이라는 이름으로 - 이 시집에 골프장 건설로 땅을 잃게 된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니, 골프장을 과연 땅이라고, 골프를 치는 사람들을 보고 땅을 밟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골프장에 깔린 잔디들은 도시에 깔린 아스팔트, 콘크리트와 별 다를 것이 없다- 사람들을 흙에서 멀어지게 한 역사가 과연 우리에게 행복을 주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시집의 뒤에는 연작시가 실려 있는데, 우리 개발의 역사 속에서 흙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개발로 인해 우리는 기후 재앙이라는 위기에 빠지게 되었으니, 흙, 땅. 그것은 우리의 생존에 필수임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날이 더워지고 있다. 흙과 멀어져 더더욱 더워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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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시간표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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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이야기는 곧 사람 이야기다. 귀신을 꼭 사람으로만 보지 않아도 결국 귀신 이야기는 사람 이야기로 귀결이 된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귀신을 보는 존재 역시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귀신이 존재한다고 해도 귀신을 보고 그것의 존재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사람뿐이다. (지금 현재로는. 우리는 둘리틀 박사가 아니기 때문에 동물들 말을 알아들을 수 없고, 또 외계 존재는 아직도 만나지 못했기에...)


이번 소설은 연작소설이다. 공간적 배경이 같다. 연구소다. 연구소 하면 먼저 감성보다는 이성을 생각한다. 이성이 작동하는 것, 인과관계를 명확히 밝히려 하는 곳이 연구소다. 따라서 연구소에는 비합리적인 것들이 들어서기 힘들다.


그런데도 연구소를 배경으로 삼은 것은 비합리적인 것은 어디에나 있다는 것, 또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인 것도 우리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해 살필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증명하기는 힘들지만 존재한다면 그것에 대해서 이성을 작동하는 것이 인간 아니겠는가. 그래서 대부분의 귀신 이야기는 인과 관계가 존재한다. 귀신은 그냥 귀신이 되지 않는다. 귀신에 홀리는 사람은 그냥 홀리지 않는다. 무엇인가가 있다. 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면 그것은 비합리, 비현실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현실적이 된다.


귀신 이야기가 사람 이야기가 되는 순간이다. 정보라 소설은 이렇게 비현실을 현실로 바꾸고, 귀신을 사람으로 바꾸어준다.


연구소에서 일하는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존재는 선배다. 그런데 선배는 앞을 볼 수 없는 인물로 나온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주로 예지력이 있는 사람에게 이런 경향이 있다. 즉 눈에 보이는 현실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존재가 된다. 선배 역시 연구소에서 오래 근무하면서 함께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주의 사항을 알려준다. 


또한 이 소설집에서 귀신에게 도움을 받는 존재들은 약자들이다. 사회에서 배제된 존재들, 그러나 남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은 존재들, 그런 존재들은 귀신이 해를 주지 않고 도움을 준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는 말이 현실에서 잘 이루어지지 않는데, 소설을 통해서 그러한 현실이 되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이 소설집을 읽으면 우선 재미있다. 귀신 이야기는 늘 흥미롭지 않은가. 오죽하면 21세기에도 '심야괴담회' 같은 방송이 인기를 끌겠는가. 영화에서도 공포물에 주로 귀신이 등장하기도 하니, 귀신 이야기는 우선 우리의 호기심을 끈다.


무서워하면서도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귀신 이야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과 비슷하지 않은가. 무서워하면서도 귀신에 끌리는 존재들... 그런 호기심을 지나면 이제 우리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도박에 빠져 가족을 내팽개치는 사람, 산재를 당했는데 그 산재로 인해 능력이 있음에도 일을 하지 못하게 된 사람(양의 침묵)이 나오는가 하면, 귀신을 단지 자신을 알리는 흥미거리로 삼는 사람(저주 양)도 나오고, 금기를 어겨 고난을 겪게 되는 사람(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자신의 욕심만을 추구하는 사람(손수건)과 다른 존재에 대한 배려가 없이 상대에게 폭력을 가하는 사람(푸른 새), 제 욕망에 빠져 허우적대면서 거기서 나오지 못하는 사람(고양이는 왜)도 나온다.


비현실적인 인물들이 아니라 우리가 주변에서 만나는 인물, 사건을 통해서 그런 인물이 있었다고 알고 있는 인물들이다. 그런 인물들이 잘 되거나 못 되는 모습을 이번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 귀신 이야기가 그렇듯이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양의 침묵'을 보라. 연구소 부소장 이야기인데,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이 사회에서 배제 당하지만 그럼에도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존재들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나온다. 약한 존재에 대한 연민, 삶에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반대로 '저주 양'에서는 약한 존재에 대한 연민이 아니다. 자신을 알리려는 수단으로 연구소를 이용하려는 사람에게 양은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같은 양이지만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다르게 반응한다. 귀신 역시 마찬가지라면 위안이 될까?)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고양이는 왜'에서 살인이 밝혀지지 않아 살인자로 잡혀가지 않지만 그에 대한 벌을 받는다) 모습이 이 소설집에 나오고 있다.


뭐,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그냥 여름에 이 소설을 읽으면 시원한 느낌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예전에 '전설의 고향'이란 방송이 한여름에 납량특집이라고 해서 방송되기도 했으니...


여름을 나는 방법으로 이 소설을 읽는 것도 좋지 않을까. 더위도 잊고, 또 나름 귀신과 사람을 생각하기도 하고. 적어도 이 소설을 읽으면 '귀신은 뭐 하고 있나? 저런 인간 잡아가지도 않고.'라는 말을 왜 옛날부터 했는지 이해할 수 있지 않나 한다.


정작 그러한 귀신도 시한이 있다는 것을 마지막 소설 '햇빛 쬐는 날'에서 보여주고 있지만, 이는 원한이라는 것은 반드시 풀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니, 우리 주변에 원한이 있는 존재, 무언가 풀지 못한 문제가 있는 존재가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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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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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 장기, 바둑이 있다면 서양엔 체스가 있다. 체스는 바둑보다는 장기와 더 비슷하다. 정해진 말들이 있고, 말들이 움직이는 규칙이 있으며 왕을 잡으면 경기가 끝난다는. 규칙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매우 비슷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기나 체스나 전쟁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장기나 체스는 상대의 말들을 없애는 쪽으로 운영을 하고, 최종적으로는 왕을 꼼짝 못하게 만들면 이기는 경기니까. 


그렇다면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상대를 존중하는 싸움도 있지만, 어떻게든 상대를 파멸로 이끌 전략이 필요하다. 자신은 침착하면서 상대를 흥분시키는 전략과 전술. 또한 자신의 의도를 상대가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전술 등등.


이런 일들이 전쟁에서만 벌어지지는 않는다. 인간 관계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강자는 서두르지 않는다. 자신의 속내를 보이지도 않는다. 그냥 그는 천천히 상대를 관찰하면서 자신의 뜻대로 움직인다. 반면에 약자는 서두른다. 상대의 눈치를 살핀다. 그리고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면 안절부절못한다.


츠바이크 소설 '체스 이야기'가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배에서 일어나는 일. 우연히 체스 세계 챔피언이 탄 것을 알고 그와 체스를 둔다. 그를 이길 수 없음은 당연한데, 우연히 어떤 사람이 훈수를 둬 비기게 된다. 누군가? 세계 챔피언과 맞먹는 체스 실력을 가진 사람은? 서술자는 그를 찾아가 다시 한번 챔피언과 대결하라고 부추긴다. 이에 그가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해준다.


이 이야기가 바로 나치에 의해 감금되었을 때의 일이다. 아무 것도 없고, 어떤 할 일도 없는 상태. 우연히 체스 대결을 기록한 책을 얻고, 그것만을 외우다시피 한 인물. 외운 것에서 더 나아가 자신이 직접 체스를 두는 인물. 하지만 한 사람이 둘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분열된다는 이야기.


결국 나치가 원하는 것, 가장 심한 고문은 인간을 분열시키는 것. 자신들은 어떤 물리적 폭력을 가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정신이 붕괴되어 가게 하는 것. 그것이 고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한 나치의 잔인한 행위가 드러나는데, 챔피언과 체스를 두면서 챔피언의 태도에서 그는 나치의 모습을 발견한다.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상대가 스스로 무너지길 기다리는 그런 태도.


츠바이크는 나치가 멸망하기 전에 생을 마감했기에, 나치의 어둠이 사라질 것을 믿었지만, 사라지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나치의 행위는 바로 체스 챔피언의 태도와 같은 것. 오로지 하나만 알고 상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자신의 의도를 남에게 보이지 않는. 그러면서 상대가 스스로 무너지도록 하는 그러한 행위들.


소설에서 인물은 다행히 무너지지 않는다. 이야기를 듣고, 그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서술자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많이 일어나지 않는다. 


상대를 무너뜨리는 챔피언에게 감정이입하는 경우가 더 많다. 나도 저렇게 침착해야지. 나와 상관없는 일에는 신경쓰지 말아야지. 이기기 위해서 상대의 감정을 잘 이용해야지 하는 태도를 지닌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능력주의라는 이름으로 잘나가는 현실. 그런 사람들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사회. 그것이 지금 사회 아닌가. 


하여 이 소설은 나치 시대를 비판하고 있지만, 자신만을 알고 다른 존재들을 무시하는, 상대가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어가는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능력주의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사회.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면 자신을 비난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회. 그것이 자아를 분열시키는 사회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치는 사라졌지만 최근에 신나치주의자들이 발흥하는 이유도 지금 세상이 능력주의만을 숭상하는 사회로 가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당시에 나치가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파멸시켰다면 지금은 능력주의라는 허상으로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파멸에 이르게 하고 있으니... 


이 소설의 등장인물이 체스판을 떠나는 것과 같이 우리 역시 벗어날 수 있을 때 벗어날 수 있도록 지금 우리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념들을 살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분열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낯선 여인의 편지'도 잘 읽었다. 한 여인의 지고지순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은 지고지순한 사랑이 이미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음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여인의 그 사랑은 결코 남자에게 가 닿지 않는다. 왜? 남자는 강자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사람. 수많은 여인들을 만나는 사람. 그에게 사랑은 하룻밤 또는 한때 집중했던 감정. 지속되지 않는 순간의 사랑이었을 뿐.


그러니 여인의 죽음은 그러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남자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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