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교육 - 덜 너그러운 세대와 편협한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조너선 하이트.그레그 루키아노프 지음, 왕수민 옮김 / 프시케의숲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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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의도와 나쁜 생각이 만나 어떻게 한 세대를 망치고 있는가'라는 문장이 원래 부제라고 한다. 지금 미국 사회를 분석하고 있는 책인데, 2018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지금도 다시 트럼프 시대니, 지금이라고 해도 된다.


이때 저자들은 미국 대학에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강연을 취소하게끔 강제하는 일들이 빈번해지는 것을 보면서 어째서 이렇게 극단적인 배타적 사회가 되었는지 생각을 한다. 나와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 그런 사회가 행복할 수는 없다.


다양성이 사회를 더 풍요롭게 한다는 것에는 대부분 동의하지만 실제 사회에서는 다양성을 억압하고 자신들의 관점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문화, 관습, 제도라는 이름으로 그 속에 속하고 따르기를 바라는 경우, 그러한 것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을 배제시키는 모습들을 흔히 발견하곤 한다.


사회에서 이익 공동체에서는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겠지만 진리 탐구의 장이라고 하는 대학에서는 다르다는 이유로 배제하면 안 되는데, 현재 미국 사회에서는 그러한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어째서 그럴까?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서로를 용인하고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 편, 네 편을 확연하게 가르고 내 편이 아니면 배제해야 할 존재로 취급하는 문화를 지닌 나라가 과연 좋은 나라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관점을 번역자들은 '나쁜 교육'이라는 제목으로 달았다. 사람은 교육을 통해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존재하게 되니까. 이때 쓴 '교육'이라는 말은 학교 교육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정에서부터 사회까지 존재하는 사고방식, 행동방식들을 통해 의식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습득하게 되는 과정을 '교육'이라고 한 것이고, 그것이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나쁜 교육'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미국 사회를 분석한 책이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도 적용이 될 수 있다. 우리나라 역시 미국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양극화가 심하며 - 완전한 양당 체제라고 할 수 없지만, 미국도 민주당-공화당이 양당 체제를 구축하고 있지만 군소 정당들도 있으니- 다른 의견을 배척하는 경우도 무척 많다.


특히 대학에서 학문적 다양성은 말할 것도 없고 사상적 다양성도 잘 인정이 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지 않은가. 미국 대학의 교수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진보라고 생각한다는데, 우리나라 교수들은 어떤지?


보수든 진보든 대학은 다양한 사상들이 논쟁을 통하여 진리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데, 어느 한쪽의 사상만을 가르치는 대학이라면 그 대학은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지금 미국 사회는 세 가지 잘못된 신념으로 인해 위기에 빠졌다고 한다. 그 잘못된 신념은 


. 유약함의 비진실 : 죽지 않을 만큼 고된 일은 우리를 더 약해지게 한다.

. 감정적 추론의 비진실 : 늘 너의 느낌을 믿어라.

. '우리 대 그들'의 비진실 : 삶은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 사이의 투쟁이다. (17쪽)


이게 미국만의 일일까? 이런 사고 방식을 지닌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도 많지 않은가. 아이들에게 안전을 제공해야 한다는 말, 맞다. 아이들은 안전하게 자랄 권리가 있다. 하지만 안전과 모험을 구분하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모험할 기회조차도 주지 않으면, 아이들은 더 약해진다.


즉 헬리콥터 양육으로 인해 미국 아이들은 더더 불안감과 우울감에 휩싸이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어렸을 때 경험을 통해서 그러한 어려움들을 해결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대신 해결해주는 습관, 그것은 아이들을 더욱 나약하게 한다. 그러니 고된 일이 우리를 더 나약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고된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느낌을 믿으라는 것, 자신의 감정이 자신을 속일 때가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 않은가. 오히려  아이들에게는 감정대로 행동하기보다는 이성으로 그 상황을 한번 더 생각하도록 해야 하지 않은가.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줘야지, 자신의 감정이 이건 아냐 하면 그냥 아닌 것으로 취급하도록 해서는 안 되지 않는가. 그러니 이성을 통해서 상황을 파악하는 태도를 지니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고 감정을 무시하자는 말은 아니다. 자신의 감정을 소중히 여기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기본 전제로 깔고 하는 것이니.


사람들을 내 편과 네 편으로 가르고 네 편은 내 편이 될 수 없다고 하면 끊임없는 갈등만이 일어날 뿐이다. 물론 당연히 내 편과 네 편이 있다. 그것마저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내 편과 네 편 사이에 공통으로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둘 다를 포함하는 더 큰 가치가 있음도 잊어서는 안 되고. 그래서 더 큰 가치를 실현하는데 나와 너가 다른 방법을 지니고 있다면 토론을 통해서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냥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하여 이런 비진실이 지금 우리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것에 휩쓸리지 않는 선택을 할 수가 있다. 따라서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이것이 내가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인가, 내 감정에 치우쳐 판단하고 있지 않은가. 나와 함께할 사람을 내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먼저 한다면 지금과 같은 극단적인 갈등 상황 속으로 빠져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밖에도 다양한 극복 방법이 나와 있지만, 관점의 전환이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적과 동지로 확연히 구분되지 않는다. 또한 무균실에서만 지낼 수 없듯이 편안함만을 추구해서도 안 된다. 그러니 이 점을 명심하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 가지 비진실이 있음을, 어쩌면 그 비진실 중 하나에 나도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는 습관을 지니자. 그러면 적어도 극단주의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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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을 생각한다.


  하나하나의 순간들이 모여 내 삶을 구성한다. 그러한 순간들은 독립적이면서도 나를 구성하는 일부분이 된다. 부분이 전체가 되고, 다시 전체가 부분이 되는 순환들. 순환들의 모둠. 그것이 바로 내 삶 아닌가.


  그럼 삶은 완성이 될까? 삶이 지속되는 한 순간들은 계속될 것이고, 그러한 순간들은 끊임없이 내 삶을 만들어갈 테니, 삶의 완성은 없다. 삶은 완성을 향해 가지만 결코 완성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그런 삶을 모자이크라고 할 수 있을까? 작은 조각들이 모여 하나를 이루는 모자이크. 이 모자이크도 여러 조각들을, 또다른 조각들을, 작고 큰 조각들을 계속 붙일 수가 있다. 완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완성됐다고 여기는 모자이크에 새로운 조각을 덧붙일 수 있으니, 모자이크 역시 계속 진행 중이다.


완성을 향해 가고 있으나 결코 완성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니 모자이크는 삶이다. 아니, 거꾸로다. 삶은 모자이크다.


오은 시집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것이 바로 삶이구나. 모자이크처럼 각 조각들이 나를 구성하고, 또 다른 조각들이 계속 채워질 수 있구나. 시를 보자.


 모자이크


거의 다 왔어


거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채울 것이 남아 있었는데

조각을 얻지 못한 틈에서

성토하듯 빛살이 쏟아졌는데


거의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말이다

완성이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한 조각만 더 모으면 되는데

그 조각만 뿌예서 잘 보이지 않는데

의도적으로 나를 어지럽히는 것 같은데


모아도 모아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모자이크처럼


거의는 가까워지기만 한다

도달하지 못한다


내일은 오늘의 미완성에 대하여

변명을 짜 맞춰야 한다 최대한

화려하게, 자연스럽게


거의 몰라볼 정도로


오 은, 왼손은 마음이 아파, 현대문학, 초판 2쇄. 2019년. 9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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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링키팅크 - 완역본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 10
L. 프랭크 바움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세계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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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등장 인물, 새로운 나라, 새로운 모험. 


오즈의 마법사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는 한, 새로운 인물과 새로운 나라 그리고 새로운 모험이 펼쳐질 수밖에 없다. 물론 전 편에 나왔던 오즈의 인물들이 나와야 하고.


이번에는 잉가 왕자와 링키팅크 왕 그리고 염소 빌빌의 모험이다. 친구 나라로 신하들 몰래 도망쳐 온 링키팅크. 하지만 친구 나라인 핑가리 왕국이 레고스 왕국의 전사들에게 정복당하게 된다. 그들의 포로가 되는 것을 간신히 피한 잉가 왕자와 링키팅크, 빌빌이 잉가 왕자의 부모와 백성들을 찾으러 레고스 왕국으로 가서 겪는 모험.


전쟁을 좋아하는 전사들.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평화를 사랑하고 자신의 일에 충실한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는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사람, 옛 선인들이 안빈낙도, 안분지족(安貧樂道, 安分知足)이라고 한 삶을 사는 사람이 나온다.


바로 가난한 숯꾼인 니코보브.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생각할거리를 제공해 주는 인물이 바로 이 인물이다.


레고스 왕국을 정복한 잉가 왕자가 그에게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라고 하자, 그는 자신의 생활에 충분히 만족한다면서 거절을 한다. 그럼에도 잉가 왕자를 도와주고 또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롭게 사는 핑가리 왕국에 살기를 원한다. 그렇게 된 이후에도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니코보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이 아니겠는가. 모험담답게 왕과 왕자가 나오지만 그들이 만나는 사람 중에서 배워야 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나온다. 이번 편에서는 바로 이 니코보브가 그런 인물이다.


여기에 다시 놈 왕국. 놈 왕국의 왕이 된 칼리코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가 있다. 그는 레고스 왕(코레고스 여왕)과 핑가리 왕과 왕비를 포로로 잡고 있겠다고 약속을 한다. 옳지 못한 약속. 어떻게 해야 하나?


놈 왕은 약속을 핑계로 그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놓아줄 생각도 없다. 오히려 잉가 왕자와 링키팅크 왕을 위험에 빠뜨린다.


이런 사람을 신의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신의란 정의를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닐까? 조폭들이 의리를 지킨다고 하는 것들을 신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의리에는 정의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신의가 아니라 악에 동조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그 점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어떤 약속을 해야 하는가? 또는 어떤 약속을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하여 이번 편에는 어떤 삶, 과연 화려하고 풍족한 삶만을 추구해야 하는가와 지켜야 할 약속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물론 이런 이야기거리를 만들지 않아도 잉가 왕자와 링키팅크 왕, 그리고 염소 빌빌(나중에 마법에 걸린 왕자로 밝혀지는데)의 모험을 따라가는 재미가 있다.


다음 편에는 어떤 인물, 어떤 모험이 펼쳐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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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류 인구
엘리자베스 문 지음, 강선재 옮김 / 푸른숲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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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지구가 아닌 지구인들이 개척한 행성. 그러나 아직 외계 생명과 접촉하지 못한 인류가 등장한다. 


컴퍼니는 콜로니라고 개척한 행성에서 살기 힘들어지자 다시 이주를 결정한다. 이때 그곳에서 40여 년을 살아온 오필리아는 이주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이도 들었고 또 자신이 직접 땅을 만지고 재배할 수 있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몰래 홀로 남는다.


홀로 남은 오필리아는 자유를 만끽한다. 남들의 시선에, 자식들을 부양하는 일에, 공동체의 의무에 종속되어 있던 오필리아는 비로소 자신만의 세계를 갖게 된다. 이 세계에 다른 생물이 들어오게 되는데... 괴동물이라고 하기도 하고, 학자들은 객관적인 용어랍시고 '자생종'이라고 하기도 하는, 인간과는 다른 종족이 그곳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이 이동해서 오필리아가 지내고 있는 곳으로 오는데... 이들과 어떻게 지낼 것인가? 공존이냐 죽음이냐? 그들은 오필리아를 적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필리아 역시 두려움이 있지만 그들에게 생활공간을 내어주고 또 자신에게 필요한 것, 그들이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들을 알려준다. 자연스레 그들은 공존하게 되는데...


이 공존이 인간들과 지낼 때 오필리아의 일거수일투족을 제어하게 만들던 것과는 다르게 오필리아의 자유를 존중해준다. 이렇게 오필리아가 잘 지내고 있을 때 떠난 콜로니에 생명체가 있다는 것을 안 인류가 탐사대를 파견하고...


탐사대와 만난 오필리아는 그들에게 자신과 함께 지내는 종족을 이해시키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오필리아는 인간과 그들을 잇는 존재로 살아가게 되는데...


주변부 인물이 중심 인물이 되는 과정.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존재는 권력을 휘두르는 존재가 아니라 남들을 보살피고 이끄는 사람이어야 함을, 오필리아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주부로서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최선을 다해 살았던 오필리아는 어떤 특정한 관념에 싸여 있지 않다. 외계 생물을 괴동물이라고 여기지만, 그것은 자신이 처음 본 생물이었기 때문이고, 이 용어를 비하나 적대적인 의미를 담아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공존의 지혜를 지니고 있는 오필리아. 또한 그들과 최선을 다해 소통을 하려고 한다.


소통이 바로 공존의 기본 아니겠는가. 말이 서로 다르지만 그들은 마음으로 어느 정도 통한다. 서로가 적이 아님을, 서로가 서로를 도울 수 있음을. 하여 다름을 조금씩 좁혀 나가는 노력을 한다. 이는 서로 교류를 하되 넘어서는 안 될 선은 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상대에 대한 평가를 하지 않는 것. 그냥 그렇게 지내는 것. 그들의 생활이 우리와 다르더라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우리의 생활이 그들이 보기에도 이상할 수 있다는 것. 존중이다. 이 존중이 꼭 상대를 따라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내 것을 지키되 상대의 것도 존중하는 것. 그것이 공존의 기술이고 소통의 원칙 아니겠는가. 그들 종족에게서 아이가 태어나고, 오필리아는 그들에 의해 아이를 돌보는 존재, 즉 둥지수호자로 인정받는다. 둥지수호자. 그렇다. 이는 미래 세대를 책임지는 역할을 하는 공동체의 지도자인 것이다.


이렇게 소설은 행성에 남겨진 오필리아가 다른 생명체와 만나 그들과 교류하고 그들의 둥지수호자가 되어 인간과 그들을 잇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동안 겪게 되는 오필리아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 사회에서 나이 들었다고, 여성이라고 그다지 존중받지 못했던 오필리아. 이는 우리 사회의 척도 아니겠는가. 지혜와 지식을 혼동하여 학위가 있으면 전문가고, 실생활에서 얻는 지혜를 지닌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현상.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그런 전문가들이 무슨 역할을 하는가? 책에서 본 내용을 읊조리기나 할 뿐, 실제 해결은 생활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이 나서서 하지 않는가. 그것도 사회에서 어리석고 쓸모없다고 제외시켰던 사람들이.


이는 쓸모없음의 쓸모라는 동양 고전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콜로니를 건설하는 사람에게 나이든 사람은 또 자신들이 추구하는 방향과 맞지 않는 사람은 비용만 드는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처음 겪는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그 위기를 넘어가게 하는 사람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이 쓸모없다고 여겼던 존재들.


이들은 사회에서 배척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남들을 쉽게 배척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이해받지 못하고 오해받은 경험이 있기에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 받아들이려는 마음, 소통하려는 마음. 그런 마음을 지닌 오필리아는 괴동물들과 함께할 수 있다.


그들을 내치려하지 않으니까. 물론 처음에는 힘이 없어서 받아들인다고 하지만 그들의 다른 면을 보게 되고, 서로가 잘 지낼 수 있는 경계를 설정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여야 하지 않을까.


소설을 읽으면서 앞 부분과 뒷 부분의 갈등 상황이 달라지는데, 홀로 남아 괴동물을 만나 함께하는 장면과 여기에 다시 본사(지구)에서 파견한 탐사대가 와서 겪게 되는 일로, 앞부분이 오필리아의 공존기라면 뒷부분은 오필리아가 당당하게 자신의 자리를 잡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진진하게 읽은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명심하고 싶은 구절이다.


'좋은 둥지수호자는, 파란 망토는 말했다. 새끼들이 모든 것에 관해 최대한 많이 배우기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태세를 갖추기를, -열광하기를- 바란다. 나쁜 둥지수호자는 새끼들이 계속 같은 것에 만족하게 만들어 그들이 안온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368쪽)


우리 역시 둥지수호자가 된다. 어떤 둥지수호자가 될 것인가. 오필리아는 전자를 선택했다. 자, 지금 우리의 모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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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허수아비 - 완역본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 9
L. 프랭크 바움 지음, 존 R. 닐 그림, 최인자 옮김 / 문학세계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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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되는 이야기. 오즈라는 환상의 나라에서만 일이 펼쳐진다면 소재가 끝이 보일 텐데... 오즈는 그만큼 갈등이 거의 없는 나라. 평화와 공존, 행복의 나라. 


이야기는 갈등이 있어야 한다. 무언가 사건이 있어야 이야기로서 흥미를 끌지 않겠는가. 모두 천사인 나라에서는 별다른 이야기가 없다. 오즈 역시 마찬가지다. 천사들과 같은 존재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곳.


그렇다면 이야기는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바로 오즈의 바깥에서다. 오즈라고 해도 잘 알려지지 않은 교류가 없는 곳이다. 이곳으로 낯선 존재들이 와야 한다.


낯섬.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발단이다. 낯섬은 우리에게 그동안 익숙해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하기 때문이다. 하여 낯섬을 마주쳤을 때 우리는 다른 세계를 만나고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이번에는 트라트와 빌 선장이다. 이들은 소용돌이에 휘말려 오즈로 가게 된다. 오즈로 가는 다양한 방법이 제시되고 있는데, 다음 번엔 어떤 방법으로 갈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모험을 하고, 위험에 처하기도 하고, 도와주는 존재도 있지만 위협을 가하는 존재도 있고, 여기서 또 친구들을 만나고, 이번에는 오크라는 (톨킨이 쓴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오크가 아니다. 하늘을 나는 꼬리에 프로펠러가 달린 새라고 할 수 있는 존재다) 친구를 만나게 된다.


사랑의 위기에 빠진, 폰과 글로리아 공주를 구하고, 허수아비를 만나 - 그렇다. 이제 도로시가 다시 오즈를 모험하는 일이 없으니, 외부 세계에서 온 존재는 그동안 오즈의 마법사에 나왔던 인물들 중 하나와 만나야 한다. 틱톡이 그랬듯이, 이번에는 허수아비다 - 나쁜 왕과 사악한 마녀를 물리치고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 그리고 이들은 오즈마 공주와 도로시 일행을 만난다.


모험은 낯섬을 경험하는 것이다. 여기에 다시 나오는 '빛나는 단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번 편에서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지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존재는 트라트와 빌 선장이다 - 그가 하는 역할은 길 잃기다. 


길 잃기.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것들을 쫓다가 길을 잃는다. 수시로,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길을 잃는 것은 잠시고, 그는 다시 돌아갈 것을 믿는다. 그러니 길을 잃는 것은 불행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행복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빛나는 단추'를 보면, 낯섬이 새로움이라는 것. 그것은 자신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해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낯섬을 마주하는 마음가짐. '빛나는 단추'에게서 그 점을 배울 수 있다면, 낯섬은 곧 모험이 되니, 이것은 제거해야 할 것이 아니라 권장해야 할 것임을 알 수 있다.


오즈의 마법사를 통해서 아이들은 모험을 생각하게 되고, 낯선 것들을 만났을 때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들과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자세를 익힐 수 있게 된다.


간접 경험의 좋은 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다음 편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무엇을 생각하면 좋을지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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