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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 앤드 엔솔러지
이서수 외 지음 / &(앤드) / 2025년 6월
평점 :
다섯 작가의 소설이 실려 있다. 공통된 소재는 '언니'다. '언니' 한때는 윗사람을 일컫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여성이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여성을 부를 때 쓰는 호칭으로 주로 쓰인다.
그러니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라는 제목으로 여성들의 이야기를 이 소설집의 주된 내용으로 삼고 있다. 성평등이라는 말을 쉽게 하는 지금 이 시대에, 진정한 성평등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이 성평등이 단지 생물학적인 남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스펙트럼의 성을 모두 포괄하고 있는지 논의해야 하지만, 아직도 여성이 살아가기는 만만치 않는 사회가 우리 사회다.
목숨을 걸고 사랑을 해야 하는 사회가, 그런데 목숨을 걸어야 하는 존재가 주로 여성인 사회가 과연 성평등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육아에 대한 부담을 나누고 있다고 하지만, 많은 부분 육아는 여성이 책임져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회, 육아에 대한 부담 때문에 하던 일을 멈출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존재하고 있는 사회.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먼데, 지금까지 온 길에도 많은 난관이 있었음을 생각해야 한다. 이 소설집은 그런 점에서 여성들이 걸어왔던 길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여성들이 등장하는, 이들보다 나이가 많은 진희 언니조차도 하던 카페를 접고 다른 일을 준비하는 모습. 이들의 관계. 서로가 마음 편히 만났지만, 나이 많은 언니를 보면서 저 나이가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떨까를 고민하는 사람들.
그래, 나이 들어서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다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어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이 될지, 그런 사람을 과연 본받고 싶은지, 함께 지내면서도 그렇게 거리를 느끼게 되는 관계들. 한때는 서로 마음 편히 만났겠지만, 그런 관계가 끝나감을 보여주는 이서수의 '어느 한 시절'
엄혹했던 시절, 지방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면서 다방에서 만난 미쓰 윤과의 일들을 그리고 있는 한정현의 '그 언니, 사랑과 야망'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싶어했던 여성, 그러나 그러한 여성이 특별한 여성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만날 수 있는 보통의 사람임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어떠한 계기로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게 되는지, 여기서는 미쓰 윤으로 인해 고문까지 당하지만, 그것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 경험을 통해 자신의 길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회 속에서 여성이라는 조건으로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기 이전에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만의 사랑과 야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것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아마도 이 소설은 뒷이야기가 더 나올 듯하고.
박서련이 쓴 소설 '둘 중에 하나'는 경쾌하다. 자매 이야기. 아니 사랑 이야기. 사랑의 선택 이야기.
이주혜가 쓴 '순영, 일월 육일 어때'는 이 소설집의 제목이 된 구절이 나온다. 대학 때 만났던 여성에 대한 이야기. 페미니즘에 대해서 공부했지만, 남편을 따라간 친구이자 언니 순영에 대한 마음.
치열하게 공부하고 꿈을 꾸었음에도 현실에서 좌절하는 모습을 순영을 통해서 보여준다면, 그러한 순영과 함께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간 수은. 이러한 수은을 통해서 '언니'라는 말이 단지 나이 많은 사람을 의미하지 않고, 해야할 일을 강제하는 어떠한 틀로 작동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수은은 '언니'라는 말을 거부하는데, 이는 사회적인 통념에 갇혀 살지 않겠다는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아 밀이 쓴 '나를 다문화라 불렀다'는 다문화와 자매 간의 갈등을 다루고 있는데, 우리 사회는 이제 누가 뭐라고 해도 다문화 사회다. 이를 부정할 수 없다. 굳이 다문화 사회라는 말을 쓸 필요도 없는 것이 모든 사회는 다문화 사회 아닌가.
폐쇄된 사회에서 살 수 없기 때문에 모든 문화는 다문화다. 그럼에도 특정 국가에서 온 사람들, 그 자손들을 비하하는 의미로 다문화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그것이 어떤 상처로 남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동남아 사람의 모습과 비슷한 언니가 학교에서 놀림 당하는 것을 보고 자란 한국 아빠의 모습을 많이 닮은 동생이 작가가 되어 그런 내용을 소설로 썼다고 하는데...
언니는 다문화라고 놀림을 받고, 이런 언니를 본 동생은 어떻게든 다문화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가족을 아이들에게 알리지 않는다. 그렇게 작가가 되고, 이 과정에서 언니는 동생에게도 소외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데...
자매 사이라도 다르게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다. 그러나 대개 언니가 먼저 경험하기에, 언니를 보고 자란 동생은 언니가 겪은 어려움을 피해갈 수 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자매들의 모습.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이 지내온 삶의 모습 아니었을까? 먼저 난 여성들이 겪었던 일들이 뒤에 난 여성들이 좀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오지 않았을까?
그들을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라고 물으면, 그것은 그들에게 우리를 돌봐주세요라는 의무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로 인해 지금의 우리가 존재한다는 감사의 말로 이해해야 한다.
언니들, 무수한 언니들이 있었기에 성평등이 이루어지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언니라는 말을 이 사회의 현실을 먼저 깨닫고,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말 그대로 먼저 깨어난(태어났다는 의미를 깨어났다고 할 수도 있으니... 선생이란 먼저 난 사람인데, 이때 먼저 태어났다는 말은 먼저 깨우쳤다는 뜻으로 쓸 수 있다고 읽은 기억이 있으니) 사람이라는 뜻으로 쓴다고 생각하자.
그러면 우리는 그들에게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라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담아 '언니'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