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카프카 - 프란츠 카프카 타계 100주기 기념
김태환 외 지음 / 나남출판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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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카프카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는 사랑할 수 없는 작가다.'(206쪽)

'카프카는 위대하고, 카프카는 사랑할 수 없는 작가다.'(216쪽)


그런가? 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 카프카였기에. 그의 작품을 거의 읽었다고 자부하고 있었기에. 그러다 이 문장을 다시 곱씹었다. 과연 나는 카프카를 사랑하는가? 아니, 이해할 수 없으면서 사랑할 수 있나?


카프카 작품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면서. 그러면 사랑한다와 좋아한다는 다른 말이라고 할 수 있고, 그를 좋아하는 이유가 이해할 수 없지만 무언가 계속 생각하게 하는 작품을 써서라면, 그는 위대한 작가다. 언제 어디서도 그 시대, 그 장소에 맞게 해석이 될 수 있는 작품들을 썼으므로.


이렇게 사랑받는 작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카프카는 많은 문학자들에게 인용되거나 또는 영향을 준 작가다. 우리나라 작가들도 예외일 수 없다. 그러니 카프카가 세상을 뜬 지 100년이 지난 다음에도 그를 기리는 글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카프카 월드, 카프카에스크, 카프카의 밀실'이라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카프카 월드는 카프카 작품을 우리에게 소개해 준다. 그의 잠언과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이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카프카의 밀실'에서 박돈규가 쓴 '출구를 찾아서'에 다시 나온다. 물론 소설로가 아니라 연극으로. '빨간 피터의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공연된 추송웅의 모노 드라마.


어린 시절에 추송웅의 '빨간 피터의 고백'이란 작품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이 카프카 작품인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인지는 몰랐다.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었는데, 카프카 작품이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음을 이 작품이 잘 보여주고 있다.


카프카 잠언은 생각할거리를 많이 제공해 주는데... 잠언의 1번은 '참된 길은 밧줄 위에 나 있다. 그 밧줄은 허공이 아니라 땅바닥에서 약간 뜬 채 팽팽하게 뻗어 있다. 그것은 우리더러 지르밟고 걸으라기보다는 단연코 비틀거리면서 가라고 가로놓인 듯하다'(29쪽)이다.


이 말이 카프카 작품이 지닌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의 작품은 직선으로 가는 것이 없다. 무엇을 우리에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비틀거리면서 아주 조심조심해서 읽어야만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


그의 삶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그는 허공에 약간 떠 있는 밧줄 위에서 균형 잡으며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따라서 그는 천상의 존재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지상에 속한 존재도 아니다.


그는 지상을 벗어나고자 하는, 그러나 지상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그러한 삶을 살았고, 또 그러한 작품을 쓴 작가다. 그의 잠언을 읽으면서 그 점을 다시 생각한다. (아포리즘이라고 하는데, 그냥 잠언이라고 하겠다.)


'카프카에스크'는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세계를 드러내는 경향 또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시와 소설이 실려 있다. 카프카 소설과 같은 소설이 아니라 우리 현실에 맞는, 그러나 지상도 천상도 아닌, 직선이 아닌 이리저리 비틀린 길을 보여주는 소설. 그리고 시들이 실려 있으니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고.


'카프카의 밀실'은 카프카에 대한 생각이다. 그리 어렵지 않게 카프카를 우리에게 끌어오고 있다. 그가 영원히 우리 곁에 머물 수밖에 없음을... 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다시 신형철의 말로 돌아간다. 그는 사랑할 수 없는 작가일 수 있다. 하지만 위대한 작가이기 때문에, 늘 우리가 그의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다. 문학이든 삶이든.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나는 카프카를 이해하는가 질문을 한다. 이해할 수 없다. 내가 그를 이해할 수 없기에 카프카를 사랑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떠나지는 못한다. 계속 그의 작품을 생각하거나 또는 어떤 작품을 다시 읽곤 한다. 그때마다 다른 느낌을 받는다. 참, 이해할 수 없는 작품, 그러나 손에서 떼지 못하게 하는 작품.


이런 의미에서 나에게 카프카는 위대한 작가다. 어떤 작품을 가장 좋아할까 물으면 딱히 떠오르는 작품도 없으면서, 그냥 안개 속에서 흐느적 대면서 헤매다 작품 읽기를 끝냈으면서, 그럼에도 그에게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 바로 '카프카에스크'라고 해야겠지.


다시 카프카 작품을 읽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게 한 책이었다. 적어도 '변신'을 다시 읽든지, 아니면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는 '유형지에서'를 읽든지... 좀 시간을 두고 '소송'이나 '성'을 읽어도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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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 특이하다. 년도가 나왔다. 년도에 담긴 뜻이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 봐도 무엇인지 모르겠다. 1914년이란 시집 제목이 된 시를 읽어봐도 왜 1914년인지 모르겠다.


  그러니 그 년도에 일어난 사건을 검색하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다. 뭐,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는 둥, 어쨌다는 둥 하지는 말자. 그냥 우리가 지나온 시간이라고 생각하자.


  첫장을 넘기면서 만난 시. 그냥 충격이었다. 이 시 때문에 다시 1914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1914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백 년 뒤 2014년이 우리에게 중요하게 다가온다는 사실.


  한국 현대사를 통해 우리는 숱한 죽음을 마주했다. 그 죽음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죽음은 늘 뜻하지 않게 다가왔다.


많은 죽음들 사이에서 살아갔던 사람을 생각하게 한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죽음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첫시를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첫시의 제목은 '1914년 4월 16일'이다. 


 1914년 4월 16일


나의 생년월일입니다.

나는 아직 죽지 않은 사람으로서

죽은 친구들을 많이 가진 사람입니다.

죽은 친구들이 나를 홀로 21세기에 남겨두고 떠난 게 아니라

죽은 친구들을 내가 멀리 떠나온 것같이 느껴집니다.

오늘은 이 세상 끝까지 떠밀려 온 것같이

2014년 4월 16일입니다.


김행숙, 1914년. 한국문학. 2019년. 초판 2쇄. 9쪽.


태어난 날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태어난 날로부터 100년 뒤, 탄생이 아닌 죽음을 만나게 된다. 이토록 처연한 슬픔이라니...


백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죽음이 있었을까? 우리 사회에서 수많은 죽음들이 한 세기를 살아오는 동안 있었을 터.


친구들이 떠난 게 아니라, 내가 떠나온 것이라는 것은 용케 죽음을 피해 살아왔다는 것. 일제시대 많은 사람들의 죽음, 그리고 해방이 된 다음에 겪게 되는 4.3, 전쟁, 4.19, 광주민주화운동, 노동자 운동, 고문 등등.


이런 죽음과 함께하지 못하고 죽음에서 떠나온 삶을 살아왔는데, 그런 죽음들을 이제 21세기에는 만나지 않아야 하는데, 그런데...


다시 만난 죽음은 이 세상 끝까지 떠밀려 온 것같은 느낌을 준다. 더이상 어찌할 수 없는 이런 슬픔. 이런 죽음들. 다시는 만나지 않아야 할 죽음 앞에서, 화자는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죽음은 2014년 4월 16일에서 끝나지 않았다. 더 많은 죽음이 이어졌고, 우리는 또다시 이러한 죽음들에 떠밀렸다.


이젠 더이상 그러한 죽음이 없도록... 진정으로 그런 사회가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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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도살장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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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판이 나왔다. 번역자도 달라졌고. 새로운 판이 아니라 도서관에서 우연히 이 책을 만났다. 만날 책은 만나기 마련이라고 해야 하나. 읽어보고 싶다고 목록에 넣어두고, 계속 된 시간들. 그러다 커트 보니것이라는 이름으로 검색했을 때, 내가 다니던 도서관에는 이 책이 없었다.


그런데... 보니것의 다른 책을 읽어야지 하다가 책장에 가보니, 보네거트라는 이름으로 이 책이 있다. 이래서 못 찾았구나, 예전에는 보니것을 보네거트라고 번역을 했구나. 판본이 달라지면서 작가의 이름 표기도 바뀌었구나. 참.


제목은 소설의 인물인 빌리 필그림이 있었던 수용소 이름이다. 사실 제목을 보고서는 유대인을 학살했던 아우슈비츠와 같은 수용소를 생각했다. 사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여서 도살장이라고 했구나 그것도 한두 군데가 아니고 다섯 번째 수용소라고 제5도살장이라고 했구나. 독일 나치의 만행을 고발한 소설이구나 했는데...


이런, 읽어보니 아니다. 소설 제목이 된 제5도살장은, '그들의 주소는 이랬다. "슐라흐토프-퓐프" 슐라흐토프는 도살장이라는 뜻이었다. 퓐프는 바로 그 숫자 5였다'(180쪽)고 나온다.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맨 마지막으로 간 곳이 드레스덴의 수용소인데, 그들을 수용할 공간이 없으니 당시에 도살장으로 건축된 곳에 포로들을 수용한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 지하에 있는 그곳에 있다가 폭격에서 살아남는다. 제5도살장은 학살의 현장이 아니라, 학살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목격 현장인 것이다. 이름과 달리 생존을 하게 한 장소. 또 학살의 주체가 독일 나치가 아니라 연합군이었다는 점.


이런 만큼 소설은 나치의 만행이 아니라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을 다루고 있다. 제목에서 먼저 떠올린 것들을 내용이 뒤바꾸고 있다. 또 읽어보면 드레스덴 폭격의 과정이나 결과가 처참하게, 비극적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다.


전쟁의 참화를 사실적으로 그렸다기보다는 그러한 전쟁으로 인한 상처,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 등을 생각하게 한다. 내용의 처참함과는 다르게 소설 전개는 가볍다. 그리고 곳곳에서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다.


또 많은 죽음들에 후렴구처럼 "그렇게 가는 거지"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는데, 죽음으로 세상이, 삶이 끝나지 않고 다른 삶들은 다른 시공간에서 계속되고 있음을 시간 이동을 하는 빌리를 통해 보여준다.


드레스덴 폭격을 목격한 빌리는 어느 순간 시간 이동을 하게 된다. 그는 이 시간에서 저 시간으로 자신을 옮겨가게 된다. 그러니 이 소설은 전쟁 때였다가, 빌리가 막 자리를 잡았을 때였다가, 더 나이가 들었던 때였다가, 여기에 환상적으로 트랄파마도어인이라는 외계인까지 등장한다. 그들이 빌리를 데리고 가, 그들 행성에서 구경거리로 삼는다. 그럼에도 빌리는 이 모든 시간을 다 경험할 수 있다.


어쩌면 빌리의 이러한 시간 이동은 딸이 빌리를 판단하는 것처럼 제 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전쟁의 참화를 겪은 사람이 정신분열을 겪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으로 인해서 그 전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의 모습.


그러한 역사에 자신이 관여할 수 없음을,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깨닫는 일, 그것을 외계인인 트랄파마도어인들의 말을 통해서 알려주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도 빌리 필그림이 바꿀 수 없는 것에 속했다'(77쪽)고 나오는데, 이 말은 빌리의 사무실에 있던 기도문에 이어서 나오는 구절이다. 빌리의 사무실에 있던 이 기도문의 내용은 '하느님, 저에게 허락하소서 / 내가 바꾸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 평정심과 /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 용기와 / 늘 그 둘을 분별할 수 있는 / 지혜를' (76-77쪽)인데, 이는 트랄파마도어인들에게 납치당한 배우 몬태나 와일트핵의 목걸이에 있는 기도문의 내용과 같다. (243쪽)


역사를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작가는 좋은 일만 기억하자고 한다.외계인의 관점을 빌려서 알려주고 있는 것이기도 한데...


이는 불행한 역사에 대해서 우리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죽은 자들은 살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얼마나 힘든 고통을 받았는지 살아남은 자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침묵해야 한다. 이때 침묵은 잊으라는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우리가 할 말이 없지만 그렇다고 과연 그러한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지 않을까. 죽은 자들은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작가는 소설의 마지막에 "새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마리가 빌리 필그림에게 물었다. 짹짹?"(250쪽)이라는 말로 끝내는 것.


인간들은 왜 그래?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전쟁의 참화를 다루면서 이런 유머를 담은 것은 풍자다. 인간이 인간에게 초래한 비극, 그러한 비극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난감해하는 작가의 모습.


하여 소설에서는 드레스덴 폭격을 목격한 빌리인데, 그 아들인 로버트는 그린베레가 되어 베트남 전에 참전을 한다. 이런 대조적인 모습. 이것이 바로 풍자다. 작가는 전쟁의 비극을 겪었음에도 역사가 반복되고 있음을 이런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작가 역시 이러한 학살에 대해서 말하기 힘들었나 보다. 시간에서 해방된 빌리 필그림을 통해 전쟁으로 인한 비극을 보여주고 있으니... 하여 '그렇게 가는 거지'라는 말이 '그렇게 가게 하면 안 되지'라는 말로 들린다면 그것은 나만의 착각인가.


아무튼 작가의 내용 전개에 감탄하면서 읽었다. 그러면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학살들을 생각하고. 기도문의 앞부분이 아니라 중간부분을 생각한다.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라는 말을.


어쩌면 우리는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기면서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새의 물음으로 소설을 끝낼 수밖에 없던 것인지. 우리가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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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 앤드 엔솔러지
이서수 외 지음 / &(앤드)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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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작가의 소설이 실려 있다. 공통된 소재는 '언니'다. '언니' 한때는 윗사람을 일컫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여성이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여성을 부를 때 쓰는 호칭으로 주로 쓰인다.


그러니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라는 제목으로 여성들의 이야기를 이 소설집의 주된 내용으로 삼고 있다. 성평등이라는 말을 쉽게 하는 지금 이 시대에, 진정한 성평등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이 성평등이 단지 생물학적인 남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스펙트럼의 성을 모두 포괄하고 있는지 논의해야 하지만, 아직도 여성이 살아가기는 만만치 않는 사회가 우리 사회다.


목숨을 걸고 사랑을 해야 하는 사회가, 그런데 목숨을 걸어야 하는 존재가 주로 여성인 사회가 과연 성평등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육아에 대한 부담을 나누고 있다고 하지만, 많은 부분 육아는 여성이 책임져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회, 육아에 대한 부담 때문에 하던 일을 멈출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존재하고 있는 사회.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먼데, 지금까지 온 길에도 많은 난관이 있었음을 생각해야 한다. 이 소설집은 그런 점에서 여성들이 걸어왔던 길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여성들이 등장하는, 이들보다 나이가 많은 진희 언니조차도 하던 카페를 접고 다른 일을 준비하는 모습. 이들의 관계. 서로가 마음 편히 만났지만, 나이 많은 언니를 보면서 저 나이가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떨까를 고민하는 사람들.


그래, 나이 들어서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다가 아니라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어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이 될지, 그런 사람을 과연 본받고 싶은지, 함께 지내면서도 그렇게 거리를 느끼게 되는 관계들. 한때는 서로 마음 편히 만났겠지만, 그런 관계가 끝나감을 보여주는 이서수의 '어느 한 시절'


엄혹했던 시절, 지방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면서 다방에서 만난 미쓰 윤과의 일들을 그리고 있는 한정현의 '그 언니, 사랑과 야망'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싶어했던 여성, 그러나 그러한 여성이 특별한 여성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만날 수 있는 보통의 사람임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어떠한 계기로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게 되는지, 여기서는 미쓰 윤으로 인해 고문까지 당하지만, 그것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 경험을 통해 자신의 길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회 속에서 여성이라는 조건으로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기 이전에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만의 사랑과 야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것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아마도 이 소설은 뒷이야기가 더 나올 듯하고.


박서련이 쓴 소설 '둘 중에 하나'는 경쾌하다. 자매 이야기. 아니 사랑 이야기. 사랑의 선택 이야기. 


이주혜가 쓴 '순영, 일월 육일 어때'는 이 소설집의 제목이 된 구절이 나온다. 대학 때 만났던 여성에 대한 이야기. 페미니즘에 대해서 공부했지만, 남편을 따라간 친구이자 언니 순영에 대한 마음. 


치열하게 공부하고 꿈을 꾸었음에도 현실에서 좌절하는 모습을 순영을 통해서 보여준다면, 그러한 순영과 함께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간 수은. 이러한 수은을 통해서 '언니'라는 말이 단지 나이 많은 사람을 의미하지 않고, 해야할 일을 강제하는 어떠한 틀로 작동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수은은 '언니'라는 말을 거부하는데, 이는 사회적인 통념에 갇혀 살지 않겠다는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아 밀이 쓴 '나를 다문화라 불렀다'는 다문화와 자매 간의 갈등을 다루고 있는데, 우리 사회는 이제 누가 뭐라고 해도 다문화 사회다. 이를 부정할 수 없다. 굳이 다문화 사회라는 말을 쓸 필요도 없는 것이 모든 사회는 다문화 사회 아닌가.


폐쇄된 사회에서 살 수 없기 때문에 모든 문화는 다문화다. 그럼에도 특정 국가에서 온 사람들, 그 자손들을 비하하는 의미로 다문화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그것이 어떤 상처로 남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동남아 사람의 모습과 비슷한 언니가 학교에서 놀림 당하는 것을 보고 자란 한국 아빠의 모습을 많이 닮은 동생이 작가가 되어 그런 내용을 소설로 썼다고 하는데...


언니는 다문화라고 놀림을 받고, 이런 언니를 본 동생은 어떻게든 다문화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가족을 아이들에게 알리지 않는다. 그렇게 작가가 되고, 이 과정에서 언니는 동생에게도 소외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데...


자매 사이라도 다르게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다. 그러나 대개 언니가 먼저 경험하기에, 언니를 보고 자란 동생은 언니가 겪은 어려움을 피해갈 수 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자매들의 모습.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이 지내온 삶의 모습 아니었을까? 먼저 난 여성들이 겪었던 일들이 뒤에 난 여성들이 좀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오지 않았을까?


그들을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라고 물으면, 그것은 그들에게 우리를 돌봐주세요라는 의무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로 인해 지금의 우리가 존재한다는 감사의 말로 이해해야 한다.


언니들, 무수한 언니들이 있었기에 성평등이 이루어지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언니라는 말을 이 사회의 현실을 먼저 깨닫고,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말 그대로 먼저 깨어난(태어났다는 의미를 깨어났다고 할 수도 있으니... 선생이란 먼저 난 사람인데, 이때 먼저 태어났다는 말은 먼저 깨우쳤다는 뜻으로 쓸 수 있다고 읽은 기억이 있으니) 사람이라는 뜻으로 쓴다고 생각하자.


그러면 우리는 그들에게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라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담아 '언니'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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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열렸다
정보라 지음 /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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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귀신 그러면 공포를 느껴야 하는데, 이 소설은 공포보다는 달달한 사랑 이야기 느낌을 준다. 귀신 이야기라고 했지만 꼭 귀신은 아니다. 현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변신을 하는 것 뿐. 그러니 변신 이야기라고 해야 하나.


이런 종류의 변신 이야기는 많이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슈퍼맨이나 배트맨, 스파이더맨도 변신 이야기 아닌가. 이들 역시 인간으로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다른 존재로 바뀌게 된다. 물론 이들은 좋은 역할을 맡지만.


이 소설에는 늑대인간과 달걀귀신이 나온다. 어느 순간 늑대인간이 되어 자신을 통제할 수 없고, 기억도 할 수 없는 남자와 달걀귀신이 된 여자. 


이들은 만화가와 카페 주인으로 평범하게 살아간다. 그러다 우연히 만나게 되고... 늑대인간으로 변신한 남성(진혁)이 달걀귀신이 된 여성(연주)를 공격(?)해 - 이상하게 이 변신한 늑대인간은 기억이 없어 아무나 공격한다, 하다못해 처음 변신 때는 자신의 아버지를 공격했다고 하니 - 경찰서에 끌려가게 된다. 물론 여자는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


여자의 전 남편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그들을 방해하고, 이 방해에는 다양한 귀신들이 나오는데, 그래서 문이 열렸다라는 제목은 다른 세계의 존재들을 만나는 문이 열린 것.


현실의 단단함이 어떤 순간 깨지는 때가 있는데 작가는 그것을 이러한 귀신 이야기를 통해서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안전하다고,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삶에도 이러한 기이한 일들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까.


귀신들이 나오지만 그렇게 괴기스럽지는 않다. 아마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진혁과 연주의 격의 없는 티격태격이 달달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주로 어려움을 겪는 존재는 진혁이지만, 진혁이 어려움을 겪을수록 연주와의 사이는 더욱 가까워진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일을 경험한다는 공통점이 그들을 가까이 하게 했는지도 모르지만, 이때 평범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평범에서 벗어난 것은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인가. 그것은 다르다는 이유로 비난받아야 하는가. 물론 남에게 해를 끼치면 비난이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다름 자체로 비난을 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그것을 감추고 산다. 알려지면 제대로 사회생활을 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 그것은 아버지가 진혁이에게 하는 말에서 나타난다. 결코 티내지 않는다면 남들과 같이 살 수 있으리라는.


하지만 다른 존재가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또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일로 그 다름이 표출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그런 다름의 표출이 그들을 사회에서 밀어내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데...


그러니 진혁이나 연주는 자신들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서로 알고 있으니 그들의 관계는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긴장하지 않고 만날 수 있는 관계, 그것 아니겠는가.


하여 소설은 행복한 결말로 가는데... 여기에 이해해주는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진혁의 동생 진경과 결혼하게 되는 사람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누군가에게 이해받는다는 것, 그것은 계속 살아갈 힘을 주고,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한다.


뭐, 이렇게 특이한 존재의 사랑 이야기로 이 소설을 읽어도 된다. 공포보다는 사랑스러움이 더 많이 드러나고 있으니까. 또한 무섭고 힘든 상황에서도 작가 특유의 재치 있는 표현, 또는 가볍게 툭 치듯이 하는 표현들이 있어서 손에 땀을 쥐는 공포를 느낄 수는 없다.


가볍고 경쾌하고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작가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에 소설의 사건을 그냥 따라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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