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우연들
김초엽 지음 / 열림원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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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글을 읽는 일은 즐겁고도 재미 있다. 특히 그 작가의 작품을 졸아한다면 더더욱. 작가가 어떻게 그 작품을 썼는지 엿볼 수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글을 쓴다고 그것을 그대로 따라가지는 않지만.


김초엽이 쓴 이 책은 자신이 소설가가 되기까지의 과정, SF소설에 대한 자신의 생각, 그리고 책과 글쓰기 작업에 얽힌 이야기들을 싣고 있다. 처음부터 책 이야기가 나오지는 않지만, 도대체 무엇을 SF소설이라고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굳이 장르를 나누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글을 쓰는 방식이 다르다는 점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으니, 이들이 굳이 장르를 나누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 차이를 느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책의 제목과 같이 이 책에는 많은 책들이 등장한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 읽어야 했던 책들, 그리고 우연히 만난 책들. 그런 책들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읽으면서 야, 나도 이 책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그 많은 책을 다 따라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내게 필요한 책들을, 우연히 만날 기회가 있겠지 하는 생각도 한다.


서점, 작은 서점, 그렇다. 우연히 들른 책방에서 만난 책들이 큰 기쁨을 주는 때가 있다. 어떤 책을 사야지 하고 목표를 정하지 않고 서점 이곳저곳을 서성이다가 발견한 책. 아니 눈에 띤 책. 그런 책들이 더 기쁘게 다가올 때가 있다. 


내가 가끔 헌책방을 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헌책방에서는 우연히 정말로 우연히 내 눈에 들어오는 책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의 기쁨이란... 김초엽도 이 책에서 그런 기쁨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좋았는데...


이런 수필집도 마찬가지다. 작가의 소설이 좋았다고 하더라도 작가가 쓴 수필까지 찾아 읽지는 않는다. 그런데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책과 우연들이라니... 그럼 책도 우연인가? 하는 생각.


꼭 정하지 않아도 읽어야 할 책들, 내가 관심을 갖지 않다가도 우연한 기회에 읽을 기회가 생긴 책들. 나는 김초엽 작가와는 반대로 과학 종류의 책은 잘 읽지 않다가 최근에 좀 읽는 편인데... 과학에 흥미를 가지고 그쪽 방면의 책을 읽었던 작가와는 반대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문학부터 읽다가 그러다가 SF소설을 읽고, 이거 과학을 모르면 잘 이해를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쉬운 과학책을 찾아 읽고, 그러면서 과학책들도 재미 있는 책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내가 읽은 책 중에 얼마나 많은 책들이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을까인데, 읽은 책을 또 읽는 경우도 있고, 분명 읽은 책인데 읽었단 생각도 들지 않는 책이 있어서, 그러면 왜 읽는가 회의도 들곤 했는데...


기억을 하지 못해도 내 몸, 내 마음 속 어딘가에는 남아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그리고 그때 읽은 책들이 지금의 나를 과거의 나와 또 미래의 나를 연결해 주고 있으며, 나를 다른 사람들, 다른 존재들과 연결해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비록 기억은 하지 못하지만, 그렇게 읽은 책들이 우연처럼 내게 다가와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는 생각.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작가는 책을 읽으면서 느꼈다고 하는데, 나 역시 마찬가지다.


책은 모든 존재를 연결지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공명, 함께 울림을 경험하게도 한다. 시공간을 넘어서. 그런 점에서 책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주고, 김초엽의 이 책 역시 다른 책들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


우연들,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라 관심 속에서 생겨난 우연들. 그런 우연은 공명을 이룬다. 함께 울린다. 이 책 역시 그렇게 마음을 울리고 있다.  


김초엽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예기치 못하게 만나는 책들이 우리의 세계를 이전보다 더 흥미롭고 복잡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나의 생각을 나누고 싶었다.

  결코 읽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눈길도 주지 않았던 책을 우연히 펼쳐드는 순간이 있다. 투덜거리며, 의심을 가득 품고, 순수하지 않은 목적으로. 그런 우연한 순간들이 때로는 나를 가장 기이하고 반짝이는 세상으로 데려가고는 했다.

  그 우연의 순간들을 여기에 조심스레 펼쳐놓는다.' (11쪽. '들어가며'에서)


자, 김초엽의 우연의 순간들을 만나고, 다시 자기 자신의 우연한 순간들을 만나게 된다면 그 또한 좋지 아니하겠는가. 우리도 책을 만나러 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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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순양함 무적호 민음사 스타니스와프 렘 소설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최정인.필리프 다네츠키 옮김 / 민음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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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니스와프 렘이 쓴 소설 읽기, 세 번째. 이번에는 우주 전함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이다. 우주를 가로지르는 모험이 나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렇지는 않다.


'우주 순양함 무적호'라는 제목만으로 보면 항공모함을 연상하게 하고, 우주를 가로지르면서 위용을 자랑하는 그런 소설일 거라 생각했는데,(제대로 보지는 않았지만 마치 스타트렉의 우주선처럼) 한 행성에서 실종된 또다른 우주선을 찾아가서 겪게 되는 내용이다.


즉, 낯선 행성에서 만나는 모험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행성에서 만나는 존재가 생명체라 아니라는데 이 소설의 특이점이 있다.


우주에서 우리는 진화는 생명들이 한다고 알고 있다. 무생물들은 진화를 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지금 연구하고 있는 로봇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인공지능이 스스로 학습에서 진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로봇들은 진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기계에도 있다고 한다면, 그때 세상은 어떤 세상이겠는가?


만약 그 기계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존재들을 없애고, 자신들만의 행성을 만들었다면? 그 행성에 인간이 가서 개입하는 것이 옳은가?


이 소설은 그런 점을 생각하게 한다. 60년대에 기계가 진화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점도 놀랍지만, 그런 기계도 하나의 존재로 인정해야 한다는 작가의 생각이 놀랍기도 하다. 


지금도 인공지능은 인간에게 종속된 존재로만 여기는 사람도 많은데... 인공지능이 아니더라도 복제인간을 어떻게 여길 것인가에 대한 논쟁도 많은데, 이 소설을 읽으면 인공지능이든 복제인간이든 인간의 손을 떠나서 자신들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다면, 거기에 인간이 개입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많은 일들을 그 행성에서 겪은 뒤, 주인공은 로한은 이렇게 생각한다.


'과학자들 중 누구도 자신과 공감하지 못하리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한은 실종자들의 비극을 알리기 위해서, 더불어 이 행성을 지금 상태 그대로 놓아두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기 위해서 함선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모든 것이, 모든 장소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야. 그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316쪽)


어떤 행성이든 인간의 지배 아래 둘 수는 없다. 그 행성들은 행성들 나름대로 존재할 의미가 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이 또다른 식민지로 다른 행성을 삼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여러 행성을 지구에 있는 다른 지역으로 바꾸어 말하면 지구에서 살아가는 각 존재들은 자신들의 삶을 꾸릴 권리가 있으므로, 그들의 삶을 자신들의 삶과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거나 또 자신들의 삶에 맞추려고 강제해서는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이성이 없는 기계가 진화해서 자신들의 행성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설정, 그리고 그 행성이 인간이 침입했을 때 벌어지는 일들. 그런 일들을 겪으며 인간이 깨달아 가는 과정. 이 과정이 이 소설에 잘 나타나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 속에 나타나는 알갱이와 같은 기계들, 그들은 하나의 개체로서는 약하지만 함께 뭉치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존재로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집단지성의 모습이기도 하고, 진화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쪽으로 소설이 전개되는데... 이 존재들이 영화 '빅 히어로'에 나오는 작은 자석같은 금속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것들도 하나의 개체는 독립적이지만 약한 존재인데, 결합하면 어떤 형태로든 변신이 가능하고 또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알갱이들도 그러하다. 마치 구름처럼 몰려다니며 위력을 발휘하는 존재들.


하여 60년대 상상력이 현대에 영화에도 반영이 되고, 과학기술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데, 그런 점보다도 인간 우선주의를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이 소설에서 읽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점이 바로 인용한 로한의 생각에 담겨 있다고 본다. 로한의 생각처럼 과학자들은 공감하지 않겠지만. 아니, 공감하는 과학자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 속 과학자들과는 다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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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민음사 스타니스와프 렘 소설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 민음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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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나온 소설. 1960년대 창작된 소설이라고 한다. 우주를 배경으로 상상력을 발휘한 소설인데... 


지금 읽어도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소설이다. 여전히 우리가 꿈꾸는 모습들이 소설 속에 나오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라는 제목으로 우주 여행을 하면서 겪은 일들을 서술하는 부분. '이욘 티히의 회고록'이라는 제목으로 그가 만난 사람들에 대한 회상이 실린 부분, 그리고 끝으로 이욘 티히의 청원서가 실려 있는데, 얼핏 잘못 읽으면 사실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소설이기 때문에 허구이고, 상상의 세계이긴 하지만, 이 상상의 세계가 허무맹랑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 실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우리가 여전히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우주를 여행하는 일은 아직도 멀다. 이 소설에서처럼 우주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상상을 넘어선 경험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말로 우주를 여행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알겠는가. 평행우주란 말이 있고, 시간의 뒤집힘이란 말도 있는데,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를 만나는 일이 생기지 않으란 법이 어디 있는가.


이 소설 첫번째 부분이 바로 이렇다. 한 편의 코미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소설인데, 우주선이 고장났다. 고쳐야 한다. 그런데 혼자서는 할 수가 없다. 누군가는 잡아주어야 너트를 조일 수가 있는데, 우주선에는 혼자만 타고 있다. 


우주선에는 나 혼자만이 있어야 하는데, 시간이 뒤집힌 세계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다. 또다른 나'들'이 우주선에 있다. 그들은 오늘이 월요일이라고 하면, 화요일의 나, 수요일의 나, 토요일의 나, 일요일의 나 등으로 미래의 '나'가 시간의 뒤틀림으로 우주선에 동시에 나타난다.


이거야 원. 이런 나'들'이 얽히고 설킨 관계를 유지하다가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소설 첫부분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소설은 이욘 티히의 우주 여행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 이욘 티히가 우주 여행을 하면서 겪게 되는 온갖 일들을 여러 일지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 중에는 지금 우리가 생각할 수도 있는 일들이 있는데... 역사적인 사건들을 교묘하게 비틀어서 소설 속에 등장시키기도 한다.


종교에 대한 비판도 있고, 정치체제에 대한 비판도 소설 속에서 찾을 수가 있다. 여기에 두 번째 부분이라 할 수 있는 회상 부분에서는 인공지능에 대해서, 영혼에 대해서 지금도 분명하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들을 소설을 통해서 고민하게 하고 있다.


인간이 달에도 가지 못한 때, 인공지능 로봇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때, 이 소설은 이미 지금 우리가 만들어가려고 하는 로봇들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러한 길로 가려는 과학자들을 보여주고 있고. 


현실에서 이루어지기 힘든 일들이라기보다는 우리들이 계속 추구해 나가는 일들이 이 소설 속에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소설의 끝에 실린 '우주를 구하자: 이욘 티히의 탄원'을 보면 우주 문제를 지구 문제로 국한시키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소설 속에 나온 문장을 보자. 이 문장이 어찌 과거의 문장이라 할 수 있겠는지...


'이런 변덕스러운 욕심을 충족시키고자 우리는 우주의 에너지를 낭비하고, 운석과 행성을 오염시키고, 대보호 구역의 재정을 텅 비게 하고, 우주에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오만 가지 쓰레기를 버리면서 전 우주를 거대한 쓰게리 폐기장으로 만들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지켜야 할 원칙을 기억하고, 적극적으로 실행할 때다. 단 한 순간도 지체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서, 나는 우주를 구하고자 경종을 울린다.' (563쪽)


과학적 지식과 더불어 역사, 철학, 문화적 지식이 있으면 이 소설을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단 생각을 한다. 소설 속에 나타난 비판의식을 찾아 읽는다면 더 재미가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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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결실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떨어짐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떨어짐이 죽음을 의미한다면, 가을은 성숙의 계절이자, 죽음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가을에 떨어진다면 열매를 맺을 수도 있었을테라고 조금 위안을 하기도 합니다. 


  무릇 생명이란 나고-자라고-죽고를 반복하는, 그 개체는 유일한 존재로 이것을 반복하지 못하지만 생명이라고 하는 전체를 보면 이러한 반복이 계속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섭리라고 하지요. 그런 자연의 섭리에 따라 때가 되어 세상을 뜨게 되면 슬프지만 마음을 상하게까지는 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애이불상(哀而不傷)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런 죽음을 이 시집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아주 특별한 죽음의 의식'이라는 시인데요... 앨런 긴즈버그와 부크월드라는 사람. 자신의 죽음을 지인들에게 알리고 죽었다는 그 사람들. 시인은 그래서 이들은 가을을 만끽하고 드디어 떠났다고 할 수 있다고 여겼나 봅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으니까요.


'둘 다 인생을 마감하는 큰 행사의 하나인 죽음 앞에서 유머를 잃지 않는 모습이 위엄스럽고 또 유쾌해 보여 좋았다.' (이시영,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창비. 2007년. 119쪽)


하지만, 가을이 되기 전에 떨어지면 마음이 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의 섭리라고 할 수 없지요. 우리는 너무도 많은 이렇게 이른 죽음을 만났습니다. 최근에는 더욱 더 많은 죽음을 만나게 되었지요.


인생의 가을을 맞이하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겠지요.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의 책임으로,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우리는 진정한 애도를 표하고, 또 그런 죽음을 일으킨 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애도와 책임은 따로 갈 수가 없습니다. 책임을 지게 하지 않고는 진정한 애도라고 할 수 없지요. 그러니 애도를 하기 위해서라도 진상규명이 되어야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가을. 결실, 풍요로움을 만끽해야 할 때, 오히려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요즈음, '메멘토 모리'라고 할 수도 없겠지요. 죽음은 삶의 친구로서 늘 삶의 곁에 있지만, 죽음이 나타나는 때는 삶이 충분히 충족되었을 때여야 합니다.


그래야 슬퍼하지만, 마음을 상하지는 않게 되겠지요. 지금은 많은 사람들 마음이 상처로 패인 상태입니다. 좀 다독여야 하겠지요.


우연히 이시영 시집을 만났습니다. 제목이 나를 끌었지요.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제목처럼 이 시집에는 죽은 존재들이 많이 나옵니다. 박홍주 대령, 조용수 사장,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당사자들, 외국 사람으로는 아옌데 칠레 대통령 등등. 이들의 죽음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많은 죽음에 빚지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시들 중에 마음을 울리는 시가 있었습니다. 봄날에 활짝 핀 목련. 얼마나 화사한가요? 이제 막 봄을 맞아 인생을 꽃피우기 시작할 때. 그런 봄날, 그래서 이 시는 더 슬픕니다. 


봄날


  목련이 활짝 핀 봄날이었다. 인도네시아 출신의 불법 체류 노동자 누르 푸아르(30세)는 인천의 한 업체 기숙사 3층에서 모처럼 아내 리나와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목련이 활짝 핀 아침이었다. 우당탕거리는 구둣발 소리와 함께 갑자기 들이닥친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이 다자고짜 그와 아내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기 시작했다. 겉옷을 갈아입겠다며 잠시 수갑을 풀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푸아드는 창문을 통해 옆 건물 옥상으로 뛰어내리다 그만 발을 헛디뎌 바닥으로 떨어져 숨지고 말았다. 목련이 활짝 핀 눈부신 봄날 아침이었다.

 

(이시영,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창비. 2007년. 111쪽)


이렇게 좋은 날이 가장 좋지 않은 날, 축제의 날이 죽음의 날이 되면 사람들은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죽은 존재들을 가슴에 묻고 영원히 기억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결의를 다집니다.


그 결의가 사람들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 시인이 말한 '평화'란 시처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평화


  내가 만약 바람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미풍이 되어

  저 아기다람쥐의 졸리운 낮잠을 깨우지 않으리


(이시영,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창비. 2007년. 119쪽)


더 말이 필요없는 시입니다. 더 말을 할 수 없는 때입니다.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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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미, 칠월의 솔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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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좀 성향이 다른 소설들이 실려 있다. 성향이 다르다고 해도 공통점을 찾으라고 하면 찾지 못할 것도 없다. 어차피 우리네 인생이란 거기서 거기 아니던가. 다 다른 인생이지만 다 비슷한 인생이기도 하다.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인생을 글로 표현한 예술이 소설이니, 소설들도 공통점을 지닐 수밖에 없다. 물론 공통점을 통한 다른점을 보여주는 소설이 좋은 소설일테지만.


사람이 사람을 만나 얼만큼 이해할 수 있을까? 사실 잘 이해할 수 없다. 첫소설에서 그런 미끄러짐이 잘 나온다. 미끄러짐이라기보다는 자신들에게 최고의 순간이었던 때, 그때는 비록 그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자꾸만 마음에 남아 있던 장면. 그런 장면들을 보여준다. 두번째 소설 '깊은 밤, 기린의 말'에서도 마찬가지다. 


말을 잘 못하는 아이, 그러나 기린이라는 소리에 웃음을 짓는 아이. 이 아이에게는 기린이라는 말이 최고의 순간일 수 있다. 남들은 몰라도 자신에게는 최고의 순간. 그 순간은 영원히 간직된다. 삶에서 언제든지 불러낼 수 있는 순간이 되니.


소설집 제목이 된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이 그렇다. 이모, 미국에 간 이모. 엄마와 이모의 말이 다르지만, 그래서 이모를 잘 모르지만, 이모에게도 한창 때가 있었음을. 그때가 이모 인생에서 가장 아름웠던 순간이었음을.


빗소리를 들으며 음계의 미에서 솔까지... 도에서 시도 아니고, 미에서 솔이다. 짧은 순간이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이 바로 인생에서 정점에 이른 때일 수 있다.


어쩌면 짧아서 더 아쉬운, 그런 한창 때. 그런 순간을 작가는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이라고 표현했다. 그런 순간을 남들이 알 수 있을까?


그 순간을 겪은 사람이 이야기해줘도 사실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할 뿐이다. 그렇지만 당사자에게는 가장 좋은 시절, 마음 속에서 영원히 지우지 못할 그런 순간이 된다. 그러니 남의 인생을 안다고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알 수 있다.


제목도 특이한'주쌩뚜디피니를 듣던 터널의 밤'이라는 소설을 보면 엄마에게 어떤 순간이 가장 좋았던 순간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남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최고의 순간. 그 한창 때. 그런 순간으로 돌아가기는 힘들겠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모두들 자신에게 최고였던 순간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그런 사실로 인해서 인생은 조금 더 풍요로워질 수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김연수 소설을 읽으면서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의 어려움보다는, 누구나 다 자신의 인생에서 한창 때가 있었음을 느꼈다.


비록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자신에게는 최고의 순간이었음을, 그 한창 때가 누구나에게 다 있음을 이 소설집을 통해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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