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결실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떨어짐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떨어짐이 죽음을 의미한다면, 가을은 성숙의 계절이자, 죽음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가을에 떨어진다면 열매를 맺을 수도 있었을테라고 조금 위안을 하기도 합니다. 


  무릇 생명이란 나고-자라고-죽고를 반복하는, 그 개체는 유일한 존재로 이것을 반복하지 못하지만 생명이라고 하는 전체를 보면 이러한 반복이 계속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섭리라고 하지요. 그런 자연의 섭리에 따라 때가 되어 세상을 뜨게 되면 슬프지만 마음을 상하게까지는 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애이불상(哀而不傷)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런 죽음을 이 시집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아주 특별한 죽음의 의식'이라는 시인데요... 앨런 긴즈버그와 부크월드라는 사람. 자신의 죽음을 지인들에게 알리고 죽었다는 그 사람들. 시인은 그래서 이들은 가을을 만끽하고 드디어 떠났다고 할 수 있다고 여겼나 봅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으니까요.


'둘 다 인생을 마감하는 큰 행사의 하나인 죽음 앞에서 유머를 잃지 않는 모습이 위엄스럽고 또 유쾌해 보여 좋았다.' (이시영,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창비. 2007년. 119쪽)


하지만, 가을이 되기 전에 떨어지면 마음이 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의 섭리라고 할 수 없지요. 우리는 너무도 많은 이렇게 이른 죽음을 만났습니다. 최근에는 더욱 더 많은 죽음을 만나게 되었지요.


인생의 가을을 맞이하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겠지요.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의 책임으로,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우리는 진정한 애도를 표하고, 또 그런 죽음을 일으킨 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애도와 책임은 따로 갈 수가 없습니다. 책임을 지게 하지 않고는 진정한 애도라고 할 수 없지요. 그러니 애도를 하기 위해서라도 진상규명이 되어야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가을. 결실, 풍요로움을 만끽해야 할 때, 오히려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요즈음, '메멘토 모리'라고 할 수도 없겠지요. 죽음은 삶의 친구로서 늘 삶의 곁에 있지만, 죽음이 나타나는 때는 삶이 충분히 충족되었을 때여야 합니다.


그래야 슬퍼하지만, 마음을 상하지는 않게 되겠지요. 지금은 많은 사람들 마음이 상처로 패인 상태입니다. 좀 다독여야 하겠지요.


우연히 이시영 시집을 만났습니다. 제목이 나를 끌었지요.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제목처럼 이 시집에는 죽은 존재들이 많이 나옵니다. 박홍주 대령, 조용수 사장,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당사자들, 외국 사람으로는 아옌데 칠레 대통령 등등. 이들의 죽음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많은 죽음에 빚지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시들 중에 마음을 울리는 시가 있었습니다. 봄날에 활짝 핀 목련. 얼마나 화사한가요? 이제 막 봄을 맞아 인생을 꽃피우기 시작할 때. 그런 봄날, 그래서 이 시는 더 슬픕니다. 


봄날


  목련이 활짝 핀 봄날이었다. 인도네시아 출신의 불법 체류 노동자 누르 푸아르(30세)는 인천의 한 업체 기숙사 3층에서 모처럼 아내 리나와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목련이 활짝 핀 아침이었다. 우당탕거리는 구둣발 소리와 함께 갑자기 들이닥친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이 다자고짜 그와 아내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기 시작했다. 겉옷을 갈아입겠다며 잠시 수갑을 풀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푸아드는 창문을 통해 옆 건물 옥상으로 뛰어내리다 그만 발을 헛디뎌 바닥으로 떨어져 숨지고 말았다. 목련이 활짝 핀 눈부신 봄날 아침이었다.

 

(이시영,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창비. 2007년. 111쪽)


이렇게 좋은 날이 가장 좋지 않은 날, 축제의 날이 죽음의 날이 되면 사람들은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죽은 존재들을 가슴에 묻고 영원히 기억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결의를 다집니다.


그 결의가 사람들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 시인이 말한 '평화'란 시처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평화


  내가 만약 바람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미풍이 되어

  저 아기다람쥐의 졸리운 낮잠을 깨우지 않으리


(이시영,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창비. 2007년. 119쪽)


더 말이 필요없는 시입니다. 더 말을 할 수 없는 때입니다.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