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에는 '갓생'이라는 말이 나온다. 무슨 뜻인지 몰라 찾아봤더니, 신의 뜻하는 '갓'과 인생을 뜻하는 '생'이 합쳐진 말이라고 한다.


  신의 인생? 그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삶이 갓생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좋은 삶, 또는 최선을 다하는 삶 정도 되지 않나 싶다.


  누구나 한 번 사는 인생, 우리는 두 번 살 수가 없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기에 지금 인생을 잘 살아야 한다. 충실하게. 그렇다면 갓생은 바로 자신의 인생을 충만하게 산다는 뜻이리라.


어떤 삶이 충만한 삶일까?


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자신이 만족하는 삶. 또는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삶을 살면 된다. 물론 여기에는 가치 판단이 전제되어 있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무조건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내 삶이 갓생이 되기 위해서는 남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 남도 나처럼 살려고 하는 마음을 지니도록 하는 것이 갓생일 수 있다.


이번 호에 갓생을 산다고 하는 사람들 글이 실려 있는데, 꼭 그대로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자신만의 삶을 충만하게 살라는 뜻이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사람은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 그런 환경에서도 자신이 할 일을 찾을 수 있다고 하고. 어떨 때는 고문이 되기도 하지만, 삶을 이어갈 수 있게 해주는 희망도 있다.


그런 희망이 바로 지금 삶을 더 충실하게 살도록 한다.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내가 만족하는 삶을 살도록 나를 부추기는 것.


험한 산을 오를 때 멀리 보기보다는 바로 발 앞을 보면서 한발 한발 내디디면 더 멀리,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현재를 사는 삶이 바로 '갓생'이 아닐까 한다. 


이제 봄이다. 그렇게 나도 갓생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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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3-09 09: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갓생!
입력!
 
빨강 머리 앤 (양장) TV애니메이션 원화로 읽는 더모던 감성 클래식 2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애니메이션 <빨강 머리 앤> 원화 그림, 박혜원 옮김 / 더모던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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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텔레비전에서 만화영화로 봤다. 정말 재미있게. 


앤의 천방지축인 모습이, 실수투성이인 그 행동들이, 상상에 빠져 다른 것들을 잊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고나 할까?


어쩌면 현실에서 하지 못하는 행동을 앤이 대신 해준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앤의 말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많은 말들 속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말들을 찾곤 하기도 했고.


그러다가 소설로 읽었다. 번역을 다시 했을테지만, 이 책의 특징은 만화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대략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만화의 그림들이 실려 있다.


과거를 되살려주기도 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을 상상하는데 제약을 주기도 한다. 가령 마릴라 같은 경우는 마른 사람으로 나온다. 소설에는 '마릴라는 큰 키에 몸에 굴곡이라고는 없이 꽤 마른 편이었다'(20쪽)고 되어 있다. 하지만 만화에서는 마릴라를 마른 몸에 큰 키라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뚱뚱한 편이라고나 할까?


아마 만화를 보지 않았다면 마릴라를 성마른 사람으로 상상하면서 읽었을테다. 하지만 만화가 먼저 뇌리에 박혀 있으니, 이 번역된 소설도 마찬가지다. 만화를 떠올리면서 읽게 된다. 이것이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과거를 불러내는 역할을 하기도 하니... 만화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번역본이라고나 할까.


소설은 만화와 같은 감동을 준다. 앤의 성장을 따라가면서 웃고 울고 하게 된다. 그만큼 앤은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아니,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전파하는 사람이다.


앤과 같이 지낸 매슈와 마릴라는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그들의 단조로운 삶, 흑백의 삶에 앤이 들어옴으로써 화려한 칼라로 바뀐다. 한꺼번에 바뀔 일은 없지만 조금씩 조금씩 그들은 사랑으로 변해간다.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된다. 앤으로 인해서 자기 의사를 좀더 강하게 표현하게 된 매슈, 그리고 탐탁하게 여기지는 않지만 앤에게 유행을 따르는 옷을 만들어주는 마릴라. 소설의 후반부에 가면 마릴라는 자신의 감정을 앤에게 표현한다. 무뚝뚝한 마릴라가 변한 것이다. 린드 부인이 마릴라가 부드러워졌다고 할 만큼. 그리고 앤이 만나는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사랑에 감싸이게 된다.


앤은 감수성과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다. 그런 감수성과 상상력을 억누르지 않아야 한다.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어린 시절의 감수성, 상상력은 권장되어야 하는데, 과연 지금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나 생각해 보게 된다.


소설을 읽다보니 어쩌면 우리 교육은 앤보다는 다이애나를 원하고 있지 않나 싶다. 순종적이고 현실적인, 그래서 어른들에게 예쁨을 받는 아이. 하지만 다이애나처럼만 살면 변화와 성장은 없다.


순응만이 있을 뿐이다.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지 않는다. 어른들에게서 주어진 길만을 갈 뿐이다. 다른 길을 볼 생각도 없이. 과연 미래 세대에게 그런 길로만 가라고 해야 하나? 


소설은 아니라고 한다. 끝에 무엇이 나올지 모르지만 앤처럼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 주어진 길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길.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앤과 같이 감수성과 상상력을 잃지 않아야 한다.


감수성은 자신의 주변 모든 것을 사랑으로 볼 수 있게 하고, 그것들과 더불어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어가게 하는 힘이 된다. 마찬가지로 상상력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볼 수 있게 한다.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게 한다.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한다. 그렇게 앤은 성장해 가고, 그런 성장의 모습을 담고 있는 소설이 이 소설이다.


즐겁게, 재미있게, 감동받으면서 읽을 수 있는 소설. 그러다 문득, 앤의 나이가 몇 살이었더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양 나이로 16세하고도 몇 달이 지났다고 하니, 우리 나이로 치면 겨우 17세다. 고등학교 1학년이다. 1800년대 후반 또는 1900년대 초반의 일이라고는 하나, 11살에서 16살까지 앤이라는 고아가 겪은 일이다. 너무도 많은 일들, 그리고 이렇게 성숙할 수가 있나 싶은 그런 나이.


어쩌면 우리는 아이들을 너무도 어린 시절에 붙박아두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앤의 나이를 생각하면서.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상상하고,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도록 하기보다는, 그 아이들이 충분히 갈 수 있다고 어른들이 여기는 길이 만들어질 때까지 어디로도 가지 못하게 하고 학교에 잡아두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변화하고 성장할 기회를 빼앗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앤처럼 실수하고, 그 실수에서 하나하나 배워가는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 앤처럼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지 않나 하는 안타까움.


청소년들이 읽기보다는 어른들이 이 소설을 읽었으면 좋겠다. 모두들 앤과 같은 시절이 있었을 테니. 앤처럼 말하고 행동하지는 못해도, 앤과 같이 감수성이 뛰어나고, 상상력이 풍부했던 시절을 거쳤을 테니.


그 과거를 떠올리면서 현재 어른이 되어 앤처럼 자라나는 아이들을 속박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봐야 한다. 마릴라가 앤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지지해주면서 자신의 생각과는 맞지 않는 옷들을 앤에게 만들어주듯이 그렇게 어른들이 변해야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어른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소설이다. 물론 청소년들이 읽어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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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채봉.


  동화작가로 알고 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동화를 쓴 작가.


  돌아가신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니... 세월은 그렇게 갔구나.


  정채봉 작가가 원하던 사랑이 넘치는 세상이 아직 오지 않았는데.


  몇 해 전에 순천 여행을 할 때 김승옥과 정채봉 문학을 기념하는 곳이 있었다.


두 작가가 한 곳에 있는 모습. 서로 다른 문학 작품을 썼다고 하지만, 그렇게 문학으로 이름을 남긴 사람들.


이 시집은 정채봉 동화와 마찬가지로 따스하다. 그리고 순수와 사랑이 넘친다. 세상에 이런 순수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 일찍 세상을 뜨다니.


이런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더 많아지면 질수록 세상은 더욱 따뜻해질텐데.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고 다투는 일이 줄어들텐데. 사람만이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이 우주에 평화와 사랑이 넘칠텐데.


시집에 있는 시들이 모두 따스하고 좋지만, 특히 이 시. 이런 마음, 이런 행동. 허투루 살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


                들녘


  냉이 한 포기까지 들어찰 것은 다 들어찼구나

  네 잎 클로버 한 이파리를 발견했으나 차마 못 따겠구나

  지금 이 들녘에서 풀잎 하나라도 축을 낸다면

  들의 수평이 기울어질 것이므로


정채봉,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샘터. 2020년 개정증보판. 13쪽.


풀잎 하나도 생각하는 마음. 세상에 그냥 있는 존재, 쓸모 없는 존재는 없다는 생각. 모두가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마음, 그런 마음을 지닌 사람들.


세상에 내려온 천사다. 이 세상에 따스한 마음을 전해주려고 내려온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마음.


그 마음이 바로 시로 나타났다. 이 시집이다.


이제 곧 봄이다. 입춘이 지났으니, 봄이라고 해야 하나. 세상은 아직도 겨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렇게 봄이 왔으면 좋겠다. '차마'라는 마음. 그런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넘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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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의 이야기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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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소설이다.


'거리의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거리의 이야기. 집을 잃고 버려진 땅에 자신들의 거처를 만들고 생활하는 사람들 이야기다.


소설은 단 하루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하루라는 시간에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생이 담겨 있다. 처절히 파괴되어 가는 그들의 삶이.


킹은 개 이름이다. 개를 서술자로 삼아 소설을 전개한다. 킹은 떠돌이 개다. 어떻게 이곳으로 왔는지를 말해주지 않지만, 부두에서 비코를 만난 이후 이들과 함께 지낸다. 일정한 거처가 없는 개가 함께 살 수 있는 사람을 만나 지내면서 그들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해준다. 


즉 가장 낮은 시선에서 낮은 곳에서 사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없는 사람끼리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가면 좋겠지만, 버려진 땅이 언제까지나 버려진 땅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자본은 그런 땅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개발을 해야 한다. 그래서 개발이라는 이름에는 쫓겨남이라는 이름이 늘 함께 한다.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개발을 통해 그곳에서 삶을 이어나가지 못한다. 그들은 그곳에 남을 만한 여력이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우선 되는 능력은 바로 지불할 능력이 있느냐다. 지불할 능력이 없으면 나가야 한다. 


하지만 나갈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은 버틸 수밖에 없다. 결국 개발은 강제 철거와 연결이 된다. 돈이 있는 사람이 살기 위해서 없는 사람들을 쫓아내야 하는 현실. 그런 현실을 존 버거는 소설을 통해서 고발하고 있다.


킹은 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 사이에도 갈등이 있고, 또 돈이 개입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를 인정하고 의지하면서 살아간다. 킹 역시 마찬가지다. 떠돌이 개를 서술자로 등장시켰기 때문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 역시 정착되지 못하고 또다시 떠돌 수밖에 없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렇게 남기 위해서 저항하려 해도 결국은 쫓겨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들이 최루탄에 쫓겨 모여 있던 곳에서 외치는 말은 '우리 여기 있어!'(204쪽)다. 그렇다. 그들은 거기에 있다. 그곳에도 사람이 있다.


사람이 있는데, 보여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사라져야 한다. 보이지 않아야 한다. 철거되어야 한다. 그것도 그들에게 다른 삶터를 마련해주는 오랜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그냥 집행할 뿐이다.


오래 전에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상계동 올림픽'을 본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어 세계에서 많은 손님들이 오는데, 그 손님들에게 보여서는 안 될 것들이 있다고 했다. 판자촌, 노숙인, 노점상 등등. 선진국임을 과시하기 위해 좋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게 밀어붙였다.


어떻게 했는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쫓겨났다. 아무리 저항해도 강한 힘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쫓겨난 그들이 다시 또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쫓겨났다. 그 영화는 그런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을. 지금도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거처를 잃는 사람들이 있으니...


존 버거의 이 소설은 그때 일, 또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 떠오르게 했다. 여전히 자본은 이윤을 위해서라면 사람을 보지 않는다. 자본은 사람을 가린다. 사람을 보이지 않게 한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외친다.


"우리 여기 있어요!"라고... 바로 여기에 우리가 있다고. 우리도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하지만, 그 외침은 자본에게까지 가 닿지 않는다. 자본에 가 닿기 전에 공권력이라는 이름 앞에서 산산히 흩어진다. 소멸해버리고 만다. 이 소설에서처럼.


너무도 슬픈 모습.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저려온다. 소설을 읽으면서 자꾸 우리나라 현실이 겹쳐져서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그럼에도 이런 소설을 통해서 우리는 보이지 않게 하려는 사람들을 삶을 볼 수 있게 된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조세희 작가가 생각난다. 그의 작품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공'도 생각이 나고. 고인의 명목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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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 선언문 - 인간과 동물과 사이보그에 관한 전복적 사유
도나 해러웨이 지음, 황희선 옮김 / 책세상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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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자꾸 손이 가는 사람이 있다. 이해하려면 그 사람만 집중적으로 읽어도 될까 말까 한데, 그렇게 하기는 힘들고, 그렇다고 읽지 않으면 무언가 마음이 찜찜하고...


그런 사람들 중에 해러웨이가 있다. 언젠가 해러웨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꼭 읽어봐야지 했었는데, [한 장의 잎사귀처럼]을 읽고는 잠시 뒤로 미뤄뒀다. 아직은 해러웨이를 읽을 때가 아니구나.


그러다가 해러웨이 선언문 중에 [사이보그 선언]이 자꾸 언급되는 책을 읽게 됐다. 이거 한번 읽어봐야지 하고 구입했다가, 미루다 미루다 읽다가 또 손을 뗐다가 다시 읽다가.


그럼에도 잘 이해가 안 된다. 나중에 좀더 시간이 지난 다음에 읽어봐야겠다. 그럼에도 사이보그나, 반려종 선언에 들어있는 의미를 내 나름대로 추측한다.


해러웨이의 주장을 이해했다기보다는 읽으면서 문득 든 생각.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외쳤는데, 해러웨이는 '인간은 죽었다'고 외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신이 죽으면 그 자리에 인간이 들어서야 한다. 유발 하라리 말대로 '호모 사피엔스'에서 '호모 데우스'가 되어가고 있는 인간이다. 벌써 인간은 신의 자리에 올라섰다. 니체가 19세기에 외쳤던 신은 죽었다가 21세기에 와서는 현실이 되었다고 할까.


니체식의 초인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겠지만, 이미 인간은 지구에서 군림하는 유일한 종이 되지 않았는가. 지구를 좌지우지하는 인간. 


아직 공식 명칭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인류세'라는 지구 역사에서 한 지층을 형성하고 있는 인간 아닌가.


이렇게 인간이 신의 자리에 올라섰다면, 이제는 '신은 죽었다'가 아니라 '인간은 죽었다'고 외쳐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을 죽이지 않고는 인간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해러웨이가 쓴 두 선언문을 나는 '인간은 죽었다'는 외침으로 읽었다.


인간이라고 할 때는 주로 남성을 지칭했는데, 해러웨이는 그를 부정한다. 이제는 남성만이 인간이 아니다. 여성을 비롯해서 성소수자들뿐만 아니라, 사이보그까지도 인간의 대열에 합류한다.


여기에 반려종까지 합세해서 이 지구라는 장소에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 인간은 죽었다. 해러웨이가 대담에서 '아기 대신 친족을 만들자'가 다음 선언이 될 것이라고 하는데, 이때 친족엔 인간만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사이보그를 비롯해서 다양한 종들이 포함된다. 그렇게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를 인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 얼마 전에 읽은 [빅이슈]에서 뜨개질에 관한 글을 생각나게 했다. 해러웨이 역시 다양한 종들이 뜨개질처럼 서로 엮어서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그 과정이 결코 단순하지도, 단일하지도, 또 쉽지도 않겠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나는 종 안팎에서 맺어진 모든 윤리적 관계는 관계-속의-타자성에 대한 지속적 관심이라는 가늘고 섬세하며 질긴 실로 뜨개질한 편직물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하나가 아니며, 함께 살아감으로써 존재한다. 누가 있으며 누가 생겨나고 있는지 묻는 것이 의무다.' (178쪽) 


'다른 이와 나누는 애정, 헌신, 솜씨에 대한 열망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191쪽)


이런 해러웨이 글을 읽다보면, 같은 인간들끼리도 잡아먹지 못해서, 또 같은 정당 안에서도 제 권력만을 위해서 상대를 비방하고, 상대가 무너지기를 바라는 말과 행동을 하는 존재들을 보면 이들은 도대체 어떤 종일까 한다.


그렇다고 이들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 이들을 배척하더라도 그들과 함께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해러웨이는 할 수 있는 일부터 하자고 한다.


진화론을 믿지 않는 창조론자들에게 '진화'라는 말을 빼고 이런 식으로 말을 하면 어떤가 제안한다.


'"창조/보살핌"파의 사람들은 기독교인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는 윤리적인 자연 관리의 실패에 정말 화가 나 있어서, 동물을 더 잘 보살피고 기후를 망치지 않으려 대단히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화"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문을 열고 나가버리겠지만, 좋은 관리란 어떤 것인지 물으면 실용적인 대화를 할 수가 있지요.' (355쪽)


이렇게 함께 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같은 종에서도 같은 관점을 지니고 있다는 사람들끼리도 소통이 안 되는 사회에서는 더욱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인간만이 사는 세상이 아니기때문이다. 인간과 다른 존재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시대다. 그래서 해러웨이는 아이보다는 친족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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