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사피엔스 - 문명의 대전환, 대한민국 대표 석학 6인이 신인류의 미래를 말한다 코로나 사피엔스
최재천 외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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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점이라고 하는 말이 있다. 기존의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변하게 하는 지점. 그 지점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정체되지 않고 발전할 수 있다.


이 책은 여섯 명의 학자와 대담한 내용을 정리해 놓았다. 그 학자들은 각 분야에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았고, 근대에 들어서 전세계를 두려움에 떨게한 코로나19에 대해서 자신들이 생각한 바를 대담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이들은 모두 코로나19를 전환점으로 삼는다. 우리 인류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조금씩 다르지만.


코로나19가 우리 사회의 전환점이라는 말에, 우리나라 가요에서 서태지가 나왔을 때가 떠올랐다. 우리나라 가요를 서태지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만큼 서태지 출현 이후로 우리나라 가요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그렇게 바뀌었다고 해서 기존에 있던 가요들이 모두 사라졌냐 하면 아니다. 기존 가요에 새로운 가요들이 더해졌을 뿐. 단순히 더해졌다기보다는 다양한 가요들이 함께 어울리는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다시 트롯이 유행하기도 하고, 발라드도 유행하고, 그렇다고 댄스 가요가 줄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다양한 가요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상태...


코로나19도 마찬가지다. 기존 우리 삶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오히려 기존 삶을 앞으로 우리 삶의 방향에 맞도록 조절해야 한다. 


이 책에서 대담한 여섯 명의 학자들도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던, 우리가 삶에서 지켜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일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런 이들의 주장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공존'이라고 할 수 있고, 구체적인 방법에서는 차이들이 있지만, 그 차이는 대동소이 하다고 할 수 있다.


큰 틀에서는 같은데, 세세한 부분에서는 차이가 있다. 당연한 일이지.. 어떻게 똑같은 방안이 나올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학자들이 모두 똑같은 방안을 제시할 수 있다면 코로나19가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최재천, 장하준, 최재붕, 홍기빈, 김누리, 김경일... 이렇게 여섯 명의 학자가 대담에 참여했다. 이들이 함께 이야기한 적은 없고, 정관용의 사회를 통해 한 명씩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식으로 참여했고, 그 내용이 정리되어 이 책에 정리되어 있다.


이 중에 최재천이 이야기한 화학백신보다는 생태백신, 행동백신이 더 필요하다는 말을 명심해야 한다. 이는 장하준이 경제 체제를 바꾸어서 함께 공존하는, 약자들이 살아갈 수 있는 경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과 또 홍기빈이나 김경일이 이야기하는 공존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최재붕은 이미 인류의 생활방식이 바뀌었으니 이제는 포노사피엔스로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 역시 직접적인 대면은 줄어들지 모르지만 온라인 공간에서 수많은 만남이 이루어질테니, 그런 만남에 대해서 준비해야 한다고 하니, 이 역시 공존이라고 할 수 있다.


공존이다. 사람들끼리, 나라끼리, 그리고 사람과 다른 생명체들, 또 생명체들과 생명이 없는 존재들까지도 함께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어느 하나가 사라지면 다른 존재들도 존재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코로나19는 지금까지 인류가 성장, 성장, 발전, 발전 하면서 다른 존재들과 공존하지 못했던 점을 깨닫게 하고 있다고 한다.


과거 인류가 지녀왔던 좋은 점들은 받아들이고, 다른 존재들과 공존하기 힘들게 했던 생활방식은 바꾸어야 한다고, 그런 전환점에 도달했다고... 코로나19가 알려주고 있다고.


그러니 코로나19는 벌써 두 해째 우리들 삶을 옭아매고 있지만, 이 코로나19를 통해서 인류가 지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안, 말 그대로 지속가능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생활방식, 행동방식을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고 이 책에서 대담한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이 책 후속편도 나왔다고 하는데, 나중에 읽어봐야겠지만, 교육에 관해서 석학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다.


사실, 교육은 과거와 미래를 잇는 역할을 하는 인류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코로나19로 인해서 교육에 관해서 고작해야 원격(온라인)이다, 등교 수업이다 하는 쪽으로만 이야기가 되고 있는데...


코로나19로 우리 교육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그래야 미래세대에게 '공존'을 온몸으로 학습하게 할 수 있는지... 또한 대면, 비대면을 떠나 교육이 어떠해야 하는지, 교육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글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늘, 교육은 뒷전으로 처지고 있으니... 코로나19는 교육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하여간 이 책을 읽으면 코로나19는 우리를 불안에 빠뜨렸지만, 그럼에도 코로나19는 우리들 삶을 총체적으로 점검하고 앞으로 우리가 다른 존재들과 '공존'할 수 있어야 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었음을 알게 된다.


백신 만능주의에 빠지지 말고, 우리 삶을 변화시켜 코로나19만이 아니라 앞으로 인류에게 다가올 수많은 질병들을 예방할 수 있도록 하자는 제안이 이 책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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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세 아이 이야기 미래주니어노블 2
앨런 그라츠 지음, 공민희 옮김 / 밝은미래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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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다. 그러나 사실에 기반해서 쓴 소설이기 때문에 논픽션이라고 해도 된다. 논픽션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가 이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실제 사건들보다 더 밋밋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난민에 관한 뉴스에서 소설 속 사건보다 더한 사건들을 만나게 되니 말이다.


이렇듯 현대에도 세계 도처에서 난민이 발생하고 있다. 난민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우리나라에도 난민 신청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을 놓고 찬반 논쟁이 치열했던 일도 있었으니.


난민을 놓고 그들을 받아들이냐 받아들이지 마느냐로 토론을 한다? 이게 토론거리가 되나? 이건은 찬반을 나누는 문제가 아니라 인류애를 실현하느냐 마느냐, 즉 우리가 인간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선택을 하느냐, 아니면 나만 살면 된다는 약육강식의 세계를 선택하느냐가 아닌가 싶은데... 그러니 그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로 토론이 되어야 하는데...


나만 잘살면 돼라는 인식이 팽배해지면 세상에 난민은 존재하기 힘들어진다. 힘들게 온갖 고난을 뚫고 다른 나라에 도착한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그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말이다.


소설은 시대와 나라가 다른 십대가 된 세 아이를 주인공으로 삼아 난민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고 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탈출하려는 유대인 가족(주인공은 십대인 조셉. 조셉이라는 이름은 아마도 성경에 나오는 요셉일 터)과 쿠바를 벗어나 미국으로 가려는 가족(이자벨)과 내전 중인 시리아를 벗어나 독일로 가려는 가족(마흐무드)이 나온다.


이들은 그 나라에 살 수가 없다. 정치적인 이유든, 종교적인 이유든 또는 다른 사정이든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떠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 그러나 그들은 갈 곳이 없다.


살기 위해 독일을 벗어나 쿠바에 정착하려고 하지만 쿠바 정부는 이들의 상륙을 허가하지 않는다. 세인트루이스호... 이 배에 타고 있던 조셉의 가족을 비롯한 많은 유대인들. 이들은 결국 선장의 결단으로 유렵(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에 정착하게 된다.


생각해 보라.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쿠바 바로 앞까지 갔지만, 그곳에 정착할 수 없고, 그래서 미국에 상륙하려 했지만 허가를 받지 못해 다시 유럽으로, 독일 이웃나라로 올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운명을.


여기에 곧 2차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영국에 정착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유럽 다른 나라에 정착한 사람들은 나치의 박해를 또다시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조셉의 가족도 마찬가지다. 조셉의 여동생 루시만이 살아남게 된다.


이 루시가 나중에 마흐무드 가족을 받아들여주는 독일 가족이 된다.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이해할 수 있듯이... 유대인 국가인 이스라엘과 아랍인 자치정부인 팔레스타인 사이에 갈등이 있음에도 시리아를 탈출한 마흐무드 가족을 유대인인 루시의 가족이 보살펴주게 된다.


마흐무드의 가족이 시리아를 떠나 그리스에서 세르비아,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거쳐 독일까지 오는 과정. 배를 타고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조셉의 여정보다 훨씬 힘들고, 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게 된다. 1930-40년대 난민보다 2000년대 난민이 더 힘들게 자신들이 살아갈 나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소설적 상황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모두 아랍인들에게 적대적이지는 않고, 자신들이 도움을 받았듯이 남들에게 도움을 주는 유대인들 또한 많이 존재할 테니... 소설은 사실에 기반하고 있으면서도 소설적 구성을 십분 활용한다. 


이자벨의 가족이 쿠바를 벗어나 미국으로 갈 때 마이애미 해변을 코 앞에 두고 미국 경비정에게 추격을 당할 때 이자벨의 외할아버지는 과거 쿠바에 왔지만 상륙을 허가받지 못한 세인트루이스호를 떠올린다. 그때 자신은 경찰이었고, 명령에 따라 사람들이 하선하지 못하도록 결국 그들이 돌아가도록 했던 사실을.


그는 가족들을 위해 자신이 희생이 되어 경비정을 따돌리고 가족이 무사히(?) 미국에 도착하게 한다. 이렇게 소설은 각자 다른 시기에 다른 나라에서 다른 이유로 제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 정착하려는 가족을 다루고 있지만, 이들은 하나로 연결되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지구인이다. 인류다. 굳이 땅덩어리에 금을 긋고 내 땅, 네 땅하면서 서로 오가지도 못하게 해서는 안 되는 존재다.


광활한 우주 한 귀퉁이, 지구라는 별에 사는 우리가 서로를 돕지 않으면서 어떻게 지속할 수 있겠는가. 소설은 우리에게 난민들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임을,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함을 그들이 겪는 사건을 통해서 보여준다.


다만, 그렇게 만든 거대한 정치권력에 대해서는 비판을 삼가고 있다. 쿠바인들이 미국으로 넘어가게 만든 가난은 미국의 봉쇄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는 것, 시리아에서나 또는 팔레스타인에서 아랍인들이 겪는 고난에 유럽이나 미국이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는데, 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오로지 난민이 된 소년(소녀)의 행동에만 중심을 두고 서술하고 있다.


이점이 무척 아쉽지만, 그럼에도 평범한 소년-소녀들이 겪는 아픔과 고통을 소설에서는 잘 느낄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또한 그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있음도. 그래서 우리가 난민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들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의 논쟁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들이 다시 우리와 같은 생활을 할 수 있게 도울 것인가로 논점이 옮겨가야 한다.


난민 문제 역시 우리나라와 관계가 없지 않다. 우리나라도 난민을 받아들여야 할 책임이 있는 나라 아니던가. 아니 난민을 받아들이는 책임에서는 세계 어느 나라도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지구인이라는 점,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지구에 금을 긋고 장벽을 세우는 일을 하기보다는,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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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지혜의 문화사전 몸
샤오 춘레이 지음, 유소영 옮김 / 푸른숲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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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과 육체라는 말을 쓰면서도 둘을 등가로 보지 않고 영혼에 비해 육체가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육체가 없으면 자신이 존재할 수 없음에도 육체는 드러내놓고 이야기하기가 좀 껄끄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만큼 밖으로 드러나 있는 이 육체에 대해 우리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감추려고 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육체, 우리 몸이다.


몸은 우리가 늘 보게 되고 만지게 되는 존재다. 그런 몸에 얽힌 이야기를 이 책은 풀어내고 있다. 우리 몸 부분 부분을 제목으로 삼아 그 몸과 관련된 동서양의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는데...


제목으로도 흥미롭지만 내용도 흥미진진하다. 한 장 한 장 그러니까 몸의 한 부분 한 부분을 틈을 내어 읽을 수 있어서 좋다. 어딘가로 조금 멀리 간다 싶을 때 지니고 다니면서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가령 이 책 처음은 머리로 시작한다. 우리 몸에서 가장 위에 있고, 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존재, 그리고 우리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존재가 바로 머리다. 그래서 머리는 하나의 우주다. 또다른 우주가 바로 머리라고 한다면, 아직도 우주 전체가 밝혀지지 않았듯이 우리 머리, 머리 속 뇌에 대해서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실들이 많다.


이런 머리를 인간에게서 분리를 하면 그 사람은 죽는다. 그런 분리의 과정을 문화적으로 이야기해주는데, 머리가 우리 몸에서 쉽게 잘려나가지 않는다는 사실, 그래서 옛날 망나니(회자수)라 불리던 사람들이 죄인의 목을 치더라도 한번에 자르기는 쉽지 않았다는 사실. 또 잘려나간 머리도 과연 살아있을까에 대한 이야기도 실려 있고, 단번에 자르기 위한 도구로 길로틴(기요틴)이 만들어졌는데, 이것을 설계하는데 루이16세도 관여했다고...


이런저런 사실들이 많이 실려 있는데, 우리 몸이 사회, 정치, 문화적으로 다양하게 표현되었고, 또 다양하게 해석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동양과 서양이 몸의 특정 부분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떻게 다른지도 알려주는데... 중국 사람이 쓴 책이라서 그런지 중국에 관한 내용이 많다. 중국과 우리나라가 문화적으로 가까운 관계에 있기 때문에, 단지 중국 문화에서 몸을 바라보는 시각을 알게 되는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에서도 몸을 그런 식으로 봐 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비슷한 점이 많은 중에도 확연하게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발에 관한 태도이다. 중국인들은 전족을 했는데, 우리는 전족을 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전족이라면 단순히 작은 발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이 아니다. 전족은 발을 비틀어 모양을 변형시키는 데까지 나아간다. 세 치 길이의 발을 가장 아름다운 발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세 치면 겨우 9센티미터가 조금 넘는 길이다. 사진을 보라.


사진만 보아도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알 수 있다. 이 발로 걸을 수 있다니, 잘 믿기지 않는다. 이 책에는 전족을 해서 잘 걷지 못해 남편이 밭에 데리고 갔다가 데리고 왔다는 기록도 나오니, 이건 아니다 싶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작아도 25센티미터가 넘는 발 크기를 지니고 있는데, 10센티미터라고 해도 이건 너무 했다. 게다가 그 발을 휘게 만들어야 한다니... 이런 발을 지닌 사람을 미인이라고 했다고 하더라도 이건 좀 심하다 싶다.


같은 동양이라도 발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사실을, 그것도 한 쪽 성에게는 지독한 고통을 유발하는 행위를 문화라는 이름으로 자행했다니... 참...


이런 저런 내용으로 몸에 대해서 그동안 인류가 지녀왔던 생각, 문화들을 알려주고 있어서 흥미도 있고, 또 우리 몸에 대한 역사적 태도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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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가족 - 가족의 눈으로 본 한국전쟁
권헌익 지음, 정소영 옮김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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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가족을 파괴한다. 더 설명이 필요없는, 전쟁하면 떠올릴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전쟁은 목숨을 앗아가는데, 가족 구성원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은 가족을 파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족 구성원이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의도하지 않는 재난으로 목숨을 잃었을 때 가족들은 충격에 빠진다. 전쟁을 통해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지니는 상실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가족을 잃었음에도 그 슬픔을 표현하지 못하게 강제된다면? 전쟁이 더욱 비극적인 이유는 어떤 사람이나 가족, 친족에게는 전쟁으로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행위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이방인이 되거나 박해받는 위치에 서게 된다는 데 있다.

 

우리나라가 특히 더 그랬다. 전쟁을 겪고 나서 극심한 이념대립. 그 이념대립으로 인한 가족의 해체, 친족의 해체.. 그리고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 책임지게 하는 정치권력.

 

하여 긴긴 세월동안 가슴에만 묻어두었던 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 슬픔들이 민주화가 되면서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고, 이제는 당당하게 추모할 수 있게 된 경우도 있지만, 아직도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전쟁 희생자들이 있다.

 

그런 희생자들의 가족, 친족에게는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끝나지 않았다. 물리력만으로 전쟁을 설명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자는 책의 끝부분에서 우리나라 전쟁 희생자들이 걸어왔던 길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코리아에서의 학살 이후 친족의 정치적 삶은 산 자가 죽은 자를 친근한 존재로 기억할 양도할 수 없는 권리, 뒤르켐이 영혼의 권리(the right of soul)라고 정의했던 그 권리를 다시 찾기 위한 길고 지난한 싸움이었다. 영혼의 권리란 죽은 이에게는 친족의 세계에 존재할 수 있는 권리의 회복이고, 살아 있는 이에게는 정치적 사회 내의 시민권의 회복과 동일한 의미이다.' (265쪽)

 

이런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제주 4.3사건을 예로 든다. 이제는 대통령도 추념식에서 공식적인 사과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친족들도 쉬쉬 하면서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난과 탄압이 있었는지.

 

가족이 해체되고, 친족이 붕괴되고, 마을 공동체가 파괴되어 버린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을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여기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공동체가 어떻게 회복되어 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오렌 세월동안 수많은 고통을 겪었지만, 지금은 그래도 많이 치유가 된 상태. 전쟁으로 인해 상대를 적으로 만들뿐만 아니라, 가족 구성원, 친족들, 마을 공동체원들 사이에서도 적이 되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죽고 죽임을 당했던 그런 역사 속에서 갈등이 지속되지 않도록, 이제는 화해와 치유를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 온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영혼의 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해 온 과정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3과 6.25로 인해 많은 가족, 친족, 마을 공동체가 파괴되었고, 그 중에는 아직도 회복되지 못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래도 조금씩 그 갈등으로부터 치유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물론 남북 관계가 잘 풀려야 이런 과정이 더욱 잘 진행될텐데... 아직까지는 그렇지 못한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전쟁에 참여한 당사자만이 아니라 그 후대 세대들이 겪어야 했던 일들, 가족 구성원으로 인해 가족들, 친족들이 겪어야 했던 일들... 근대는 개인주의가 확립된 사회라고 하지만, 전쟁은 그것이 허구임을 만천하에 보여주었고... 

 

전쟁은 연대책임임을 뼛속 깊이 인식하도록 했음을, 전쟁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이 겪은 일을 통해서도 잘 알고 있다. 결국 전쟁은 가족, 친족을 배제할 수 없는, 개인 또는 국가의 문제만이 아니라 가족, 친족, 마을공동체의 문제가 됨을 이 책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이제는 치유와 화해가 정립되어갈 때다. 그래야 한다. 근대를 넘어서려 하는 이때 적어도 가족 구성원, 친족 구성원, 또는 마을 공동체 사람이 한 일로 인해 다른 구성원들이 어려움을 겪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리고 용서를 바탕으로 더 나은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적어도 '영혼의 권리'는 지켜줘야 하지 않겠는가. '영혼의 권리'를 지켜줘야 산 자들이 더 나은 세상에서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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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이슈]하면 집이 없는 사람을 떠올릴 수 있다. 그들이 재활하도록 돕는 잡지이기 때문이다.


  이번 호를 읽으면서 결핍이라는 말이 참 긍정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정문정이 쓴 글 '너에게는 내가 모르는 종류의 결핍을 주고 싶어'에 나오는 이 말을, 사랑으로 바꾸어도 된다는 생각을 했다.


  결핍은 곧 사랑이다. 왜냐 비워야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없음을 알아야 있음을 추구할 수 있다. 세상에 자신에게 채울 공간이 없는데 어떻게 무언가를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부모는 자신에게 결핍되어 있어 자신을 힘들게 하고, 그것만은 꼭 채우고 싶어하는 마음을 자식들이 겪게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에게 없었던 것들을 자식들에게는 있게 하려고 노력한다.


자신에게 있던 것이 자식에게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들이 살아오면서 결핍이라고 느낀 것들을 자식에게는 주지 않으려 한다.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내가 충분히 누릴 수 있었던 많은 일들이 바로 내 부모에게는 결핍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충분히 누린 일들은 부모들은 누리지 못했던 일이고, 내게 결핍되어 있는 무엇들은 부모들은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하는 그 무엇일 수 있음을...


이번 호에서 정문정이 쓴 글은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그리고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빅이슈]는 내게 결핍을 보여주고 있고, 그 빈공간을 무엇으로 채우게 하고 있다는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내게는 소위 교양이라고 하는 미술, 음악, 또 근사한 분위기의 음식점 등등은 저 멀리 있다. 내게 결핍된 것들이다.


이 결핍들을 [빅이슈]를 통해 조금씩 조금씩 채워가고 있다. 특히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또는 보고도 그냥 지나쳤던 사물들, 존재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번 호에서 다루고 있는 한복도, 서울 광화문 거리나 전주 한옥 마을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입고 다니지만 그냥 관광으로서 특정한 날에 특정한 장소에서나 입는 우리나라 옛날 옷이라는 생각을 하고 말았는데...


아닐 수 있음을,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도 또 패션으로서도 입을 수 있는 옷임을, 또한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또 캐릭터를 통해서 한복을 만날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결핍을 깨닫고, 결핍을 인식하는 순간, 이제는 어떻게든 채울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빅이슈]에는 유명인들이 표지 사진을 찍고,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린다. 이것 또한 전혀 유명하지 않은, 평범한 일상인인 내가 유명인을 만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일종의 결핍... 그러나 이건 내가 잘 의식하지 않는 결핍인데.. 그럼에도 이런 글을 만나, 그들의 삶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아가는 일도 내 삶에는 또다른 채움이 된다.


다양한 글들이 실려 있고, 다양한 분야에 대한 이야기를 실어주고 있어서 [빅이슈]는 내게 내 결핍을 인식하게 해주고, 어떻게든 결핍을 채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 


결핍의 잡지 [빅이슈]가 아니라 읽는 사람에게 자신의 결핍을 깨닫고, 그것을 채우게 하는 잡지, 삶의 충만함을 채우는 잡지가 바로 [빅이슈]다.


이번 호는 내게 그런 생각을 하도록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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