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에 몸서리쳐본 사람은 알리라. 자신의 마음을 자신도 주체하지 못해, 어쩌지 못하고 이리저리 도무지 마음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리움.


  이성의 힘으로 제어하려고 해도, 다른 일로 잊어보려고 해도 도통 잊을 수가 없는, 그냥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그 구석에서 온 마음으로 속속 뻗어나와 자신을 온통 사로잡아버리는 그리움.


  그런 그리움이 마음에 들어오면 어찌할 수 없다. 그냥 그렇게 내버려둘 수밖에. 그리움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서서히 작아져 가길 바라는 수밖에.


  하여 어느 순간, 그리움이 마음 자리에서 거의 사라졌다고 느끼는 순간, 그 순간 다른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음을.


장석남 시집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을 읽으며, '간신히'란 말에 공감이 됐다. 그리움은 간신히 잊혀진다. 내가 잊는 것이 아니라 잊혀지는 것이다. 그렇게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이면 이제 나에게는 무언가가 생겨 있다.


나는 그리움은 무언가를 내게 남겨준다. 그 무언가가 무엇일지는 사람마다 다르겠고... 그리움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향한다. 이미 내게는 없는 것, 그럼에도 내가 원하는 것. 하여 과거를 잊어야 하는데, 잊지 못하고 현재에 불러와 마음 아파하는 상태. 그리움.


시집 제목이 된 시 구절은 이 시집 첫번째 시에 나온다. 제목도 과거를 의미한다. 과거는 그냥 과거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의 나를 구성하게 된다. 


  옛 노트에서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장석남,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문학과지성사. 1995년 3쇄. 11쪽. 


앵두가 익을 무렵은 여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일생을 계절로 나누면 봄은 청춘에 해당한다. 봄 춘(春)자가 들어가니 봄은 청춘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름은 그 청춘을 지내고 무언가를 맺는 시기다. 청춘의 열정을 넘어서는 단계.


앵두가 익을 무렵, 무언가를 이룬 때. 그럼에도 과거 빛나던 날들을 완전히 잊을 수는 없다. 그 열정을 지니고 앞으로도 계속 살아가야 한다.


이 시에서 앵두가 익을 무렵이라고 한 표현은 서정주 시 '국화 옆에서'에 나오는 가을과 비교할 수 있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 가을은 이미 완숙의 단계라고 한다면, 여름은 완숙을 향해 나아가는, 그리움 속에 허우적 대는 않고 그리움을 바탕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때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리움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하다. 그러니 '간신히'란 말이 나온다. 간신히, 그렇게 한 과정 한 과정을 떨쳐내고, 이겨내고, 또는 받아들이며 우리의 인생을 살아간다.


장석남 시, 이 '옛 노트에서' 어떤 아련한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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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4
얼 C. 엘리스 지음, 김용진.박범순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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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인류세'가 등재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지질학적 시대. 인간의 활동이 기후와 환경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간주되는 시대'라고 (261쪽)


이 책은 이러한 '인류세'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있는 책이다. 언제 인류세라는 말이 나왔으며,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고, 어떤 분야의 학자들에게서 논의가 되었는지, 이 말이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있다.


따라서 '인류세'라는 개념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사람에게는 꽤 유용한 책이다. 다만, 여러 논점들이 다뤄지고 있기에, 이 인류세라는 개념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지금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야할지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해야 한다.


아마도 옥스퍼드 사전에 등재된 뜻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이 뜻에 부합하는 증거도 많다. 다만, 지질학적으로 인류세라는 지질시대 구분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논의 중이라고 한다.


지질학에서는 논의 중이지만, 사회학이나 정치학 또는 생태학에서는 '인류세'라는 개념은 인류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로 나아가고 있다. 왜냐하면 이대로 가면 인류가 지구에서 존재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구라는 별은 한계가 있고, 지금까지 무한증식을 해온 인류는 지구가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류세라는 개념은 학문적인 관점보다는 실천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우리 삶을 지속하기 위한 실천의 출발점으로 인류세를 삼아야 한다. 이 책 말미에서도 주장하지만 인류세란 개념을 좋은 인류세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가 살기 힘들어진 상태로 지구의 변화를 초래한 시기로 '인류세'가 자리매김할 수도 있다.


어쩌면 이 책에서 하나의 제목으로 삼고 있기도 한 것처럼, 우리 인류는 '이카루스'처럼 자기 교만에 빠져 파멸로 점점 다가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카루스처럼 추락하지 않으려면 이미 자신이 한계를 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 한계를 인식하게 하는 말이 바로 '인류세'란 말이다.


따라서 인류세란 말에는 인간이 지금처럼 살면 안 된다는, 자신이 살아온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 담겨있다. 실천해야 한다는,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절박함이 담겨 있다.


단순히 지질학적 시대구분이 아니다. 우리들 생존이 걸린 문제다. 이 책에서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논의된 인류세란 개념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지만, 각 학문 분야에서도 지금처럼 나아가면 인류의 생존에 큰 위협을 받는다는 공통적인 위기의식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지금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류세에 도달한 인류가 다시 과학기술의 발달로만 인류세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 인류의 삶을 총체적으로 되돌아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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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 인간의 시대
최평순.EBS 다큐프라임 〈인류세〉 제작팀 지음 / 해나무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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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자연기금의 2016년 보고서에 따르면 지구 전체 인구가 한국인처럼 산다면 3.3개의 지구가 필요하다." (303쪽)


과연 우리나라는 선진국이다. 개발도상국이라고 선진국을 따라가느라 정신없이 달려 왔는데, 어느 순간 뒤돌아보니 개발도상국들이 저 뒤에 있다. 경제 능력만이 아니라 지구 자원을 소모하는 면에서도.


다른 나라 원조를 받던 우리나라가 이렇게 선진국이 되었는데, 그렇다면 선진국에서 떨어져 나간 나라가 있던가. 없다면 또는 있더라도 선진국에 진입하는 나라보다 적다면, 이 얘기는, 지구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자원이 더 많이 소모된다는 뜻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인류세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따.


인류세란 말이 많이 쓰이고, 이 말이 지구가 위험에 빠졌다는 신호의 말로 읽히는데, 인류세라는 말이 만들어진 이유는 바로 인류에 의해서 지구의 역사가 바뀔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단지 생각이 아니라, 인류는 지구를 바꿔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분야에서 인류세가 좋은 의미보다는 안 좋은 의미로 쓰이고 있음을 알게 되는데, 이는 지구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인류의 활동이 지구를 파괴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세라는 말에는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말이 포함된다. 공유지... 너나할 것 없이 함께 쓰는 공간. 그렇기 때문에 막 사용해서, 결국은 공유지를 파괴한다는 말. 공유지의 비극.


지구는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에게 공유지다. 공유지이기 때문에 함께 써야 함을 인식하고 함부로 남용해서는 안되는데, 오히려 공유지이기 때문에, 내것이 아니기 때문에 막 쓴 결과 지구가 견디기 힘든 상황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그래서 지구라는 공유지의 비극은 인류세라는 다른 이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책은 교육방송 팀이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인류세에 들어선 우리들의 모습을 취재한 결과다. 또 이 책에는 붕인섬이라는 지구를 1억분의 일로 축소한 곳을 대상으로 한 장이 끝날 때마다 정리해주고 있다.


지구를 우리 눈에 들어오게 축소해서,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떻게 변해왔으며, 그들이 생태계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지구라는 생태계가 인류에 의해 어떤 변화를 겪었고, 또 얼마나 위기에 처해 있는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지금, 인류에 대항할 생물이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생물로 넓혀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로 인해 팬데믹 상황에 빠져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지는 않는다. 오로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는 인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책 결말 부분에 있는 이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인간과 생존권을 두고 다투던 상위 포식자가 사라진 이 풍경에서 우리는 이제 동물이 아니라 자연과 싸워야 한다." (314쪽) 


아니다. 자연과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과 싸워야 한다. 더 많은 지구가 필요할 정도로 소비하는 인간과 싸우지 않으면 지구라는 공유지는 파괴되고 만다. 우리 삶터를 우리 스스로 파괴하게 된다.


그러니 이제 인간은 다른 동물, 식물, 바이러스 등이 아니라 바로 인간 자신들과 싸워야 한다. 공유지를 둘러싼 갈등은 이제 지구상의 다른 존재들과 인간에게 있지 않다. 지구라는 공유지는 인간들끼리의 갈등, 또는 인간들의 삶 자체에 비극이 내재되어 있다.


공유지의 비극... 극복할 수 있다. 함께 살아가야 할 공간이라는 인식을 하고, 그 공간이 파괴되었을 때 모두가 살 수 없게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지구라는 공유지에서 내 몫 이상을 소비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나만의 이기심으로 지구라는 공유지를 더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우리들 삶을 바꾸어야 한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가. 하여 에드위드 윌슨이 주장했듯이 지구라는 공유지의 절반을 보호 구역으로 지정할 수 있어야 한다. 더 많은 소비가 아니라 더 적은 소비, 더 많은 활동이 아니라 더 적은 활동. 더 빨리가 아니라 더 느리게... 여유 있게 우리 삶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지구의 절반을 보호하고서도 인류는 생활을 해 나갈 수 있다. 


아니, 생활할 수 있도록 인류가 힘을 합쳐 지구라는 공유지를 보호해야 한다. 공유지의 비극은 특정한 장소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이제 지구라는 공유지가 위기에 처해 있다. 그리고 그 위기를 우리는 기후 위기로, 각종 감염병으로, 사라지지 않는 미세 플라스틱, 또 우리 건강을 위협하는 미세 먼지 등으로 겪고 있다.


위기가 닥쳤을 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 또 극복하려는 활동을 하는 존재, 그 존재가 바로 '호모 사피엔스'다. 우리가 사피엔스, '지혜로운 인간'이라는 소리를 들으려면 지금 당장, 이 위기에 대처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 


이 책은 그 점을 여러 자료를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인류세라는 말이 부정적인 뜻에서 긍정적인 뜻으로 바꾸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 인류의 다음 활동에 달려 있다.


인류세라는 말이 공유지의 비극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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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창이 오면 처음 삶창을 만났을 때를 생각한다. 아이엠에프가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났지. 노동자들이 해고되어 삶이 힘들어졌을 때 그래도 그들의 삶에 희망을 주는 잡지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땐 삶창이 격월간지였는데, 두 달에 한 번 나오면서 우리들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이야기가 많이 실렸었는데...


  그러다 삶창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는지, 아니 노동자 조직률이 계속 떨어지고, 노동조합에 가입한 노동자 숫자가 계속 줄어들고, 노동자들의 삶이 더 나아지지 않고 있는 상황.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이 대다수 노동자가 된 시대에 삶창도 격월간지에서 계간지로 바뀌었다. 유지하기가 힘들어지고 있단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데...


이번 호 표지를 보면서 삶창이 힘들어지는 것만큼 노동자들의 삶이 이렇게 흐릿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산업재해는 많고, 월급은 오르지 않고 있으며, 버젓한 직장을 갖지 못한 노동자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삶창이 주려던 희망은 어디 있는가?


이번 호에서 노동을 다루고 있는데, 노동이 의무가 아니라 권리임을, 행복하게 노동을 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데... 뒤에 실린 이인휘의 산문 '공장의 불빛'을 보면 또다시 좌절할 수밖에 없다.


여전한 노동현실. 노동자들을 이윤을 위한 도구로밖에는 여기지 않는 자본가들. 그들에게 그나마 직장을 잃으면 생계를 유지하기가 힘들기에 항의조차 제대로 못하는 노동자들.


아, 삶창을 보아온 지 이십 년이 넘었는데, 왜 노동현실은 이다지도 암울할까? 왜 노동자들은 여전히 먹고살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노동이 자아실현이라는 말은 교과서에나 존재하는지, 노동은 먹고 살기 위한 생계 수단으로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해야할 일이 되어버린 현실.


이번 호 표지에 나온 사람들, 노동자들, 그들이 이렇게 실루엣으로만 여겨지고 있는 사회라는 생각에 씁쓸한 마음만 든다.


코로나10로 가뜩이나 힘든데, 사람들이 이제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너나 없이 고통받고 있는데, 삶창을 읽으면서 받았던 위안이, 이번 호에는 우리 현실을 직시하게 하면서 도대체 무엇이 변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한다.


기본소득을 생각한다. 기본소득이라고 하지 말고, 기본배당이라고 하자. 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받아야 할 배당. 노동자 없는 사장이 어디 있겠는가? 사회 구성원은 모두가 사회를 이루는 필수 요원이다. 그러니 그들은 그에 해당하는 배당을 받아야 한다.


그런 인식을 해야 한다. 그들이 기본배당을 받는다면 사장들이 저지르는 부당한 행위에 순응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생계는 해결될테니. 그러니 기본배당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일하는 일터를 행복한 공간으로 바꾸기 위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적어도 기본배당이 실시된다면, 지금 코로나19를 맞이하여 재난지원금을 주는데, 88%에게만 준다는 이상한 정책은 나오지 않게 되겠지.


삶이보이는창 126호를 읽으며, 다음 호에서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이렇게 실루엣이 아닌 또렷한 모습으로 나오기를 기대한다. 우리들 삶이 최소한의 생활은 보장받고, 그 위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한 여러 제도들이 갖춰지기를 기대하면서...


적어도 그런 논의가 사회적 논제로 자리잡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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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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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인 예이츠의 '비잔티움으로의 항해'에서 따온 구절이라고 한다. 제목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데... 노인들이 살기 힘든 나라를 연상하겠지만, 소설을 읽어보면 왜 이런 제목을 붙였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이 소설을 시작하기 전에 예이츠 시가 인용되어 있는데, 인용된 첫구절에 '저것은 늙은 사람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세대 차이를 다룬 소설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그래서 노인들이 소외되고 무시되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데, 소설 첫부분부터 그런 생각을 깨버리고 만다.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많은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소설은 그런 참혹한 광경을 어떤 감정을 담지 않고 표현하고 있다. 피가 사방으로 터지는 모습, 사람을 죽이면서도 감정의 동요가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 시거라는 인물. 


스릴러다. 쫓고 쫓기는 자. 살인자와 그를 잡기 위한 보안관. 그렇게 소설은 거의 끝부분까지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보안관인 벨의 이야기로 끝맺는다. 벨이 보안관직을 그만두는 장면으로 소설은 끝난다. 젊은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벨의 말에는 소설 제목이 어울린다. 


무례를 용납하게 될 때 모든 게 시작됩니다. 더 이상 존칭과 경어를 듣지 못하는 순간 눈앞에 종말이 보이는 거지요.(334쪽)


그런데 이 말은 왜 보안관이 있는 지역에 범죄 사건이 더 많을까요라는 질문에 대한 벨의 대답이다. 과연 이 말이 이 소설이 전개와 어울릴까? 


이 말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 소설은 어떤 과정을 거쳤어야 할까? 시거라는 희대의 살인마가 이렇게 어른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말일까? 이 말로는 시거라는 인물의 살인을 이야기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시거는 그런 사회적 규범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있는 인물로 보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시거가 왜 살인마가 되었는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또한 시거가 죽이는 대상이 노인들만도 아니다. 시거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죽인다. 그것도 어떤 땐 동전 던지기를 해서 운에 맡기기도 한다. 여기에 노인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제목과 연관짓고 싶어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데... 소설은 세 인물을 축으로 전개된다. 우연히 살인현장을 발견하고 돈을 가져간 모스, 모스에게서 돈을 찾으려는 시거, 그리고 그 지역의 보안관인 벨.


모스와 시거는 노인이라고 할 수 없다. 30대 정도 되는 인물로 나온다. 이들이 사회 주축세력이라면 이들을 통해서 노인들이 존중받지 않는 사회임을 찾아내야 한다. 우선 모스는 돈을 발견하고 가져간다. 돈, 이제는 돈이 우선되는 사회다. 모스가 피해다닐 때도 돈으로 대부분을 해결한다. 그렇다면 돈이 사랑을 대신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모스는 자기 부인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부인의 엄마와 함께 하지 못하고, 또 돈을 가졌을 때 부인과도 떨어져 행동하게 된다.


벨이 지닌 가치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문제다. 벨은 자신의 아내와 떨어져 지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노인인 벨에게는 가정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지닌 대상이 굳건하게 존재하고 있다. 다만, 이런 가치가 다음 세대들에게 전해지지 않고 무시당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시거는? 그는 오로지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만 행동한다. 다른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다. 공동체라는 개념은 시거에게는 없다. 노인들에게는 개인보다는 공동체가 중요했고, 벨이 그러한 공동체 의식을 배반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괴로워하는 장면이 뒤에 나오지만, 시거에게는 애초부터 그런 개념이 없다. 그러니 그에게는 노인이건 젊은이이건 상관이 없다. 자신의 눈에 거슬리면 무조건 제거할 뿐이다.


즉 가정과 공동체의 가치가 파괴된 사회에서 노인이 된 벨이 물러나는 장면으로 소설은 끝나고 있다. 이렇게 한 세대의 가치가 후대 세대로 전승되지 못하고 단절되었을 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을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은 살인 사건을 끝맺지 않는다. 악이 징계를 당하는 권선징악이 노인들 세대의 가치관이라면 이제 새로운 세상은 권선징악이 더이상 통하지 않는 사회다. 강자가 살아남는 시대. 그런 시대의 모습을 살인 사건이 해결되지 않는 결말로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등장인물들의 역할이 초반에 명확하게 설정되어 있음에도 소설은 중후반까지 긴박하게 전개된다. 모스와 시거, 그리고 벨로 나뉘어 소설이 전개되어 빠르게, 흥미진진하게 읽어갈 수 있다. 이것이 매카시 소설의 장점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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