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파란 눈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49
토니 모리슨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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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모리슨의 소설을 읽고 싶단 생각을 하다가도 선뜻 손에 잡지 못하는 이유는, 무언가 마음에 묵직하게 들어앉은 무거움 때문이다.


쉽지 않다. 편하게 읽기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비극이 마음에 남아 글을 읽기 힘들게 한다. [빌러비드]도 그러했고, [술라]도 그러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읽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어쩌면 '읽어야만 해'라는 당위가 나를 자꾸 토니 모리슨의 소설로 이끄는지도 모른다.


왜냐 토니 모리슨이 소설에서 펼쳐 보이는 세계가 지금도 진행 중이기 때문에... 소설 속 흑인들(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이 책에서도 흑인이라고 하니, 그냥 흑인이라고 하자)이 겪었던 일들을 지금 흑인들이 겪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 다른 나라의 인권 문제를 툭하면 걸고 넘어가는 나라에서 여전히 인종에 따른 차별이 있다는 사실. 그러한 사실을 외면하려 해도 외면할 수 없는 현실. 그러니 토니 모리슨의 소설을 읽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토니 모리슨의 소설에서는 흑인 중에서도 더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기 때문에.


속된 말로 하면 징글징글한 억압 속에서 그럼에도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 그런 모습들. 하지만 그 삶이 결코 녹록치 않음을 소설 속에서 만나게 된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가장 파란 눈'. 무엇일까 생각해 볼 필요 없이 백인들이 지닌 파란 눈을 의미한다. 흑인소녀 페콜라가 원하는 것은 '가장 파란 눈'.


당시 소녀들이 가지고 있던 인형들이 하얀(분홍빛 피부라고 나온다) 피부에 금발, 파란 눈을 했다고 하고, 인기 있던 소녀배우들이 그러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고 하니, 아름다움의 기준이 백인에 맞춰져 있었던 것.


이런 현실에서 아름다움이란 상대적인 것이라고, 너도 아름답다고 하는 말은 결코 그 사람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말이다. 직접적으로 또 간접적으로 아름다움의 기준을 강요당하는 사회에서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것도 한참 자랄 나이인 어린 시절에. 하여 토니 모리슨은 직간접적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 정해지고, 그것이 아니라면 아름답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 사회를 그리고 있다. 여기에 자신의 가치 기준을 백인의 기준에 맞추는 어른들의 모습도. 어린 시절의 흑인 소녀를 서술자로 하면서도, 페콜라의 엄마와 아빠도 역시 소설 속에 중요하게 등장시킴으로써, 그들이 왜 페콜라가 '파란 눈'을 원하게 되었는지, 또한 그것이 어떤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백인들의 기준을 자신의 기준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을 토니 모리슨은 '그녀는(페콜라의 엄마) 신체적 아름다움을 미덕과 동일시하면서 정신을 빈약하게 하고 구속하고 자기비하는 산더미처럼 쌓아올렸다. ... 영화를 통해 교육 받고 나니, 눈에 들어오는 얼굴마다 절대적 아름다움이라는 저울 위 특정한 범주에 넣는 일을 안 하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 저울은 은막에서 그녀가 오롯이 흡수한 것이었다.'(152쪽)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백인들의 가치를 자신의 가치로 내면화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을 자식들에게도 대물림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니야, 너는 너야." 라고 한다고 그 말이 먹힐 것인가.


이런 상황 속에서 소설 속 페콜라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자신이 파란 눈을 가지게 되었다고 믿지만, 그것은 미쳤기에 가능한 일이다. 즉 페콜라가 소망하는 일은 정신을 잃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한때 '검은 것이 아름답다'는 운동이 있었다. 이는 백인의 기준으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에는 기준이 여럿 있다는 것. 그러니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는 것. 즉 백인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너 미쳤구나, 너는 너 자체로도 아름다워라고 말하기 보다는 그런 인식을 강요하는(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사회를 인식하고, 사회의 기준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만드는 일도 함께해야 한다.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나라 현실을 생각했다. 성형천국이라는 말을 듣는 우리나라. 의사들이,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하는 의사들이 성형에 매진하는 경우가 많은, 성형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사회 현실이.


그렇게 만드는 은막(텔레비전, 영화, 각종 인터넷 매체 등등)이 성행하는, 너무도 당당하게 '전과 후(before, after)'를 보여주는 광고들. 그러니 아름다움의 기준이 이미 정해져 있고, 너는 그런 기준에 미달하니 성형을 해서라도 거기에 도달해야 해라는 암묵적인 강요.


특히 연예인들을 통해 내면으로 파고드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에도 파고들어 있지 않은가. 우리 역시 소설 속 페콜라와 비슷한 경험, 생각을 하지 않는가.


추하다고 놀림을 받고, 성형을 하면 그것에서 벗어나 남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은가. 소설 속 페콜라는 파란 눈을 가질 성형을 하지 못한다. 가난한 흑인 집에서,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집에서 그러한 일은 할 수도 없다. 그러니 엉뚱한 사람을 찾아가 소원을 말하지. 하지만 이 소원을 듣는 사람도 백인이 아닌 백인성을 추구하는 혼혈인이다. 이렇게 사회 전체가 특정 기준을 따르려고 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자연스레 배제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성형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 역시 페콜라처럼 자신은 아름답지 않다는 생각에 좌절에 빠지지 않을까. 그러면 안 되는데... 라고 말을 하는 것은 쉽지만 소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것이 해결책은 아니다.


사회 분위기가 그러한데, 그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할 텐데...


토니 모리슨의 [가장 파란 눈]을 읽으면서 지금 우리 사회를 생각하게 되니... 쉽게 읽을 수 없는 소설임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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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 난 우주를 안고서 - 한국과학문학상 대표작가 앤솔러지
김초엽 외 지음 / 허블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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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가들의 작품을 모아 놓은 작품집이다. 다섯 작가의 소설을 엮었는데, 김초엽, 천선란, 김혜윤, 청예, 조서월이 참여했다.


과학문학상 작품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SF소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어떤 사람들은 장르 소설이라고 하는데, SF소설이라는 용어에 영어가 들어가 있다면, 과학문학상이라는 이름으로는 과학적인 상상력이 담긴 소설이라고 더 쉽게 이해할 수도 있겠다.


첫소설이 김초엽의 '비구름을 따라서'라는 소설인데, 이 소설에는 여러 우주가 나온다. 다른 우주에서 온 물건을 모으는 사람. 다른 우주를 상상하고, 그 우주로 가고 싶어하는 사람. 가끔 우리도 그런 상상을 하지 않나. 여기 사는 나 이외에도 다른 우주에 사는 내가 또 있다는.


같은 나일 수도 있지만 다른 나일 수도 있는데, 그런 우주를 상상한다면, 지구에 머물렀던 시선을 광활한 우주로 돌릴 수 있다. 또한 자신의 다양한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고. 그렇다. 나는 어떤 하나로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 여러 존재로 늘 변화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지금 지니고 있는 물건은 당연히 지구상에서 인간들 또는 다른 존재들이 만든 것이지만, 가끔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 있지 않은가. 그것들에 상상을 붙인다면, 다른 우주를 상상할 수 있고, 그렇게 다른 우주에서 넘어온 것들이 우리 곁에 있을 수도 있음을.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그렇게 넘어온 물건들은 사소한 것들이다. 흔한 것들, 그래서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들. 그렇다면 소중한 존재는 이 우주에서 다른 우주로 넘어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소중하다는 것은 자신이 잃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김초엽의 소설을 읽다가 이런 경우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 가끔 어떤 물건이 없어졌는데 도저히 찾을 수 없을 때, 어느 순간 어디에서 나오겠지 했는데, 끝까지 찾지 못하는 경우, 이런 경우를 다른 우주로 그 물건이 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한 물건들은 어느 순간 내게는 소중함이 아니라 무심함으로 대했던 것들이었을 것이고, 진짜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은 그렇게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하지만 그러한 것들을 모으는 사람, 다른 우주에서 온 것들을 발견하는 사람은, 익숙한 것에서도 낯섬을 찾고, 고정된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변화하는 자신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생각. 이것이 김초엽 소설을 읽으며 든 생각이었다.


천선란 소설에는 좀비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좀비들(?)을 통해서 이상하게 사랑을 느낀다. 너무도 사랑하는 존재들. 그래서 떠날 수 없는 좀비. 좀비가 되어 과거를 잊을 수 있기에 기록으로 남겨놓는 사람. 그런 사람과 끝까지 함께 하는 사람. 그들을 좀비라고 한다면... 참... 현실에서 살아가는 인간들 중에 좀비보다 더한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좀비하면 과거를 잊은, 오로지 피에만 반응하는 그런 감정이 없는 존재로 생각하는데... 그래서 서로 사랑했던 사람이라도 좀비가 되면 물어뜯으려 덤벼들기만 하는데... 이 소설은 그렇지 않다. 좀비에게서 사랑을 발견한다.


아무리 비극적 상황에 처했더라도 사랑은 그런 비극을 넘어설 수 있음을, 좀비에 대한 관점의 변화라고 해야할까. 여하튼 사랑을 느끼게 하는 좀비 이야기 '우리를 아십니까'


김혜윤의 '오름의 말들'은 과학소설이지만 우리 현실의 모습이 그대로 그려졌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존재들을 아무런 망설임없이 희생시키는 존재들. 그런 모습을 우리 사회에서도 보여준 이들이 있었는데...


이런 이들이 있다면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그것을 비록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으니... '오름'이라고 이름지은 외계생명체들과 대화하기 위한 노력, 그러한 노력이 일거에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지원이 끊기고 심지어는 그런 존재들을 구경거리로 삼으려는 존재들. 그런 존재와 정책에 맞서는 '오름'과 대화하려는 사람들. 


그래서 이 소설은 슬프다. 여전히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기에...


청예의 '아모 에르고 숨'은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진정한 사랑은 무엇일까를 복제인간과의 관계를 통해서 생각하게 한다. 그러면서도 결말에 반전이 있는데... 이것이 진정한 사랑일 수도 있음을... 진정한 사랑은 구속이 아니라 해방임을, 상대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할까를 생각하는 일일 수도 있음을.


여기에 한발 더 나아가면 복제인간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 과연 복제인간은 인간의 대용품인가? 복제인간을 폐기한다고 하는 말을 할 수가 있을까? 그런 용어를 쓰는 것 자체가 문제임을...


조서월의 'I'm Not a Robot'은 지금 이 시대에 인간임을 증명하게 하는 캡챠에서 비롯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제목이 된 이 문구를 인정받기 위해 숫자는 물론이고 사진 속에서 제시된 과제를 제대로 수행해야만 한다. 그런데 가끔 제시된 과제를 제대로 이해 못할 때가 있다. 여기서 착안한 소설이다.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싶지만 외진 곳에 홀로 떨어져 있기에 인터넷을 통해 자신이 쓴 소설을 보내야 하는데, 번번이 로봇이 아니라는 인증에 실패하는 사람. 오히려 그런 인증을 할 수 있는 로봇.


외진 곳에서 쓸쓸한 풍경 속에서 인간과 로봇이 소통하는 모습이 이 소설에 보이는데, 황혼녘 쓸쓸함 속에서 서로를 위하는 모습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그럼에도 앞으로 더 많은 기술이 발달하면 이렇게 인간임을 내가 입증하지 못하면 다른 일을 하지 못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는데...


예전에 나 자신임을 인증하기 위해 핸드폰이 꼭 필요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핸드폰을 지니지 않았는데, 핸드폰으로 문자 인증을 해야지만 나 자신임을 인증할 수 있다고... 세상에 나라에서 발행한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것으로는 안 된다고... 그래서 결국 나 자신임을 인증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런 경우가 바로 캡챠에서 발생할 수 있다. 하긴 어떤 사람들은 키오스크에서 주문을 하지 못해 결국 원하는 것을 사지(먹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으니, 이것이 과연 인간을 위한 기술발전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다섯 편의 소설들. 각자 다른 배경, 인물,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그럼에도 공통된 무엇을 찾으라고 하면 '소통'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소통'은 곧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임, 나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일. 그러면서 나의 일부분과 상대의 일부분이 함께 하는 일 아니겠는가.


'토막 난 우주를 안고서'라는 제목이 그러하지 않은가. '토막 난'이라는 말에서 다름을, '안고서'라는 말에서 함께함을 생각할 수 있으니...


다섯 작가의 작품, 즐겁게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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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본색 박순찬의 장도리 카툰집
박순찬 지음 / 비아북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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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본색'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홍콩 영화가 한창 인기가 있을 때, 홍콩 느와르라고 할까,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악당을 물리치는 주윤발의 모습, 거기에 의로운 경찰 역할을 하는 장국영의 모습은 우리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하여 '본색'이라는 말의 뜻도 모르면서 그냥 영웅의 모습은 저러겠거니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니 '본색'이라는 말은 좋은 의미로 내게 다가왔는데...


이 책 제목은 '내란본색'이다. 어허, 이렇게 본색이라는 말을 내란에 갖다 붙여도 되나. 기분이 좋지 않다. 하지만 내란의 본질이라고 보면 '내란본색'이라고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게다가 '영웅본색'에서 주인공들이 멋있게 나와서 그랬지만, 사실 장국영을 제외하고 주윤발이나 추룡(적룡)은 갱단에 속하는 인물 아닌가.


그들이 배신을 용납하지 못하고, 의리를 지키는 모습을 영화로 보여줘서 멋있지, 현실에서는 갱단의 세력 싸움 정도라고 할 수 있을 테니, 피 튀기는 살벌한 장면이 결코 좋게 다가오지 않으리라.


그렇다. 내란본색은 바로 그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내란이라는 것이 어찌 좋을 수가 있겠는가. 계엄을 선포하는 조건이 비정상적인 상태일 때니까, 우리가 살고 있던 때를 비정상적인 때, 위기의 때라고 판단한 자들이니, 자신을 반대하는 상황을 그런 때라고 판단한 것이다.


비정상을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헌법을 위반한 행위를 헌법에 따라 정당한 권리를 행사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인간이 어떻게 그 지경까지 가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다.


카툰이니 부담없이 볼 수 있다. 그림도 보고, 글도 있으니... 다시 그 시대를 반추한다. 윤석열이 집권하고부터 계엄을 선포해 체포되기까지의 기간을.


떠올리고 싶지는 않지만 잊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 이 책에 나온 카툰 중에 '부활'(207쪽)이라는 만화가 있다.



그들이 우리에게 어떤 고통을 주었는지를 기억하려 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기에, 이들을 추앙하는 자들이 있었기에 다시 그러한 일이 반복되었던 것인데... 그런데 세상이 변해서, 이제는 그러한 계엄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되어서 큰 희생 없이 계엄이 끝나고 그를 대통령의 자리에서 끌어내렸지만, 그간 우리가 겪은 마음 고생을 포함해서 많은 것들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으니...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조짐을 보이는 인간을 알아보는 안목을 지녀야 한다. 이 카툰집을 보다보면 계엄이 어느 한 순간 충동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구나 하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미 집권한 몇 년 동안 계엄과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으니...


'영웅본색'은 재미있게 보기라도 했지, '내란본색'은 사후에 읽으니 그렇군 그래, 하면서 읽을 수 있지, 만약 진행 중이었다면 제대로 읽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내란본색'이라는 책이 나오지 않게 정치인들을 잘 선택해야겠지.


촌철살인. 이 말이 생각난다. 한 컷의 만화로 많은 것을 표현하고 있으니... 물론 이 책의 1부에는 이야기가 있는 만화가 실려 있다. 시리즈로 주욱 읽으면 짧은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인물과 사건이 있어서 이야기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으니... 내란이 끝났을까> 내란이 끝나는 시점은 내란 종사자들에게 책임을 물었을 때가 아닌가. 아직 책임을 묻지 못하고 있으니, 내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하여 이 책도 영화처럼 '내란본색2'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악당들을 철저하게 물리치는... 내란 종사들에게 제대로 된 책임을 지우는 결론이 나는 그러한 '내란본색2'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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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가지 낱말을 중심으로 이번 호를 생각한다.


  에너지전환, 시민의회, 농업 등등


  이번 호에 이런 제목이 있다. '에너지전환은 몽상에 불과하다'.


  왜? 에너지전환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지 않은가. 화석연료에서 재생에너지로, 친환경 에너지에 대한 개발과 도입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에너지전환에 문제를 제기하다니, 도대체 이유가 뭘까? 이런 의문을 가진다. 지금 세계는 에너지전환에 힘을 쏟고 있는데, 생뚱맞게 에너지전환이 몽상에 불과하다니...


그럼 에너지가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작동시키는 원료라고 간단하게 정의하면, 우리의 생활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것들이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지 않나? '전기'만 예로 들어도 우리는 전기 없이 살기 힘든 세상에 살고 있다. 전기는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필수요소라고 할 수 있다. 지금으로서는... 예전에는 전기 없이도 살았지만, 한번 편리함을 맛본 사람은 그 편리함을 쉽게 떨치지 못한다. 


게다가 현대 사회에서 전기로 굴러가는 것들이 워낙 많고, 우리들 삶을 지탱해주고 있으니... 전기만 놓고 생각해 보자. 전기를 무엇으로 생산하는가? 화석연료, 수력, 풍력, 원자력, 태양력 등등이 있다.


화석연료가 기후 위기를 일으킨다고 친환경 에너지라고 할 수 있는 풍력이나 태양열(광) 등을 이용하지고 하는데, 이를 에너지전환이라고 해도 좋다. 그런데 전기를 생산하는 원료를 바꾼다고 해서 과연 환경 파괴가 멈춰지는가?


풍력만 해도 풍차를 만드는데 또다른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고, 태양열(광)을 이용하더라도 그것을 개발하는데 또다른 에너지가 많이 소모된다. 그러니 에너지전환이라고 하지만 현재의 생활형태를 유지하는 한 환경을 파괴할 위험은 계속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에너지전환에 앞서 생활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 생활의 전환이 쉽지 않다. 오랜 시간을 두고 논의하고 살펴보고 다양한 방법을 고려하고 도입해야 하는데, 이를 대의정치에 맡겨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대의정치에서 '대의'를 하기 위해서는 선출되어야 하는데, 당장의 불편을 초래하는 정책을 추구하는 사람이 선출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의정치도 필요하지만 시민의회와 같은 시민들의 숙의가 이루어지는 의회를 통해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


녹색평론이 지속적으로 '시민의회'에 관한 논의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시민의회가 활성화되고, 강제력을 지니게 된다면, 특정 집단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일을 방지할 수 있다.


무엇보다 녹색평론이 강조하는 것은 소농중심의 농업 개혁 아니던가. 기후위기, 기후 재앙으로 무엇보다도 농업에 큰 위기가 닥치고 있는데, 농업을 소홀히 했다가는 그 후과를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번 호에서 대농, 기업농보다는 소농 중심의 농업을 장려해서 다품종 소량생산체제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글들이 실려 있다.


다양성, 그것이 생존에 더 유리함은 지구의 역사를 통해서 이미 증명이 되었으니... 그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밖에도 다양한 논의가 있어 여러가지를 생각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이번 호에 소개된 이 상징 기억하고 싶다. 생명평화무늬라고 한다. 무늬라는 말이 낯설면 로고라고 하면 된다.



'평화는 서로 싸우지 않고 어울려 사는 것을 말한다. 각각의 생명이 어울려 사는 모습을 형상화하기 위해 동서남북으로 배치하고 가운데 원을 통해 '하나'로 연결했다. 생명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을 때 비로소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생명은 홀로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  아래에 사람, 오른쪽에 네발 짐승, 왼쪽에 새와 물고기, 그리고 위에 해와 달과 초목을 배치했다.'(195-196쪽) 


이런 뜻을 지닌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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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칼
정보라 지음 / 아작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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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공간적 배경은 외계 행성. 지구인으로 추정되지만, 읽다 보면 복제인간으로 밝혀지고. 자신의 행성이 아니라 복제인간을 무한 제조해 다른 행성을 침략하는 제국의 모습.


하지만 복제인간은 인간이 아닌가. 원본과 복제인간? 둘은 같은 존재인가, 다른 존재인가. 다른 존재라면 복제인간도 인간이니 존중받아야 하고, 같은 존재라면 같은 존재이기에 존중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현실에서 복제인간은 본래 인간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게 말이 되나? 원래 인간의 기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고, 생체정보도 같은 존재인데, 그런 존재를 수단으로 삼는다고? 


다른 나라 다른 행성을 침략하지 않아도 인간의 몸을 침략했다는 이유로 그것은 제국주의라고 할 수 있다. 제국주의를 거시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무한한 팽창을 위해 다른 존재들을 수단으로 삼는 행위, 이것이 제국주의 아닌가.


하여 외계 행성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지구에서 벌어졌던 제국주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다른 종족 - 사실 읽다 보면 다들 지구인들의 변종에 불과하다 - 과의 전쟁뿐만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복제와의 문제도 발생한다.


복제인간을 무한 증식하는 것, 이것 역시 제국주의임이 확실한데, 이를 소설에서는 '그녀'와 '녹색 옷'의 여자가 잘 보여준다. 이들 역시 복제인간으로 추정되지만, 이들은 그들 자체로 독립된 존재이다.


독립된 존재로 사랑을 하고 또 살아가려고 하고 있으니, 하지만 제국은 이들을 가만 놔두지 않는다. 복제인간을 여전히 수단으로, 도구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국주의를 쉽게 물리치지 못한다. 그렇다고 제국주의에 굴복할 수도 없다. 저항, 이것이 바로 인간의 조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결말은 그래서 여운을 길게 남긴다. 마지막 장면이 영화의 한 장면을 멈춘 것처럼 머리 속에 그려진다. 이러한 장면 때문인지 이 소설을 가지고 웹툰으로 재창작하면 좋겠단 엉뚱한 생각도 한다.


웹소설들을 웹툰으로 재창작하듯이, 이 소설, 웹툰으로 그려지면 환상적이면서도 인간적인, 그러면서 장면 장면마다 갈등이 잘 나타나는 모습을 보일 것이다.


그만큼 소설은 전투 장면이 많고, 또 박진감 넘치게 진행이 된다. 복제인간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기도 하고, 팽창만을 추구하는 제국주의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또한 작가의 말을 통해 우리 역사에서 '나선 정벌'이라는 외국에 나가 전쟁을, 대리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전쟁을 한 때를 떠올려도 되는데, 소설에서 포로들이 하얀 외계인과 전쟁을 하러 가서 싸우는 장면에서 청나라의 요청으로 러시아 군대와 싸웠던 조선인들을 생각하게도 된다.


힘이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뜻이 아니라 제국의 뜻에 의해 전쟁터로 끌려가 희생당하는 모습. 그런 점을 '그녀'를 비롯한 사람들이 제국의 포로로 전쟁에 동원되는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고, 또한 전쟁이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여기는지를, 전쟁터에 보내지만 치마를 입혀 보낸다는 설정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쟁은 제국주의의 기본 모습이며, 전쟁으로 인해 여성들이 성적으로 학대당하는 모습이 빈번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굳이 역사적 사건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사실 작가의 말에 '나선 정벌' 이야기가 없으면, 이 소설은 외계에서 벌어지는 자신들이 복제인간임을 모르는 복제인간들과 외계 다른 종족의 전쟁으로 읽게 된다 - 흥미로운 소설이다. 


'그녀'가 첨단 무기들이 있는 시대에 칼을 지니고 다니고, 그 칼을 끝까지 간직하고자 하는 것은, 칼이 바로 자신의 과거, 자신이 살아온 경험들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칼을 지니고 있는 한 '그녀'는 복제인간이건 아니건 독립적인 개인으로서의 '그녀'인 것이다. 


이러한 독립적인 '그녀'는 자유인으로 살아가야 하고, 단지 생명의 유지를 위해 자유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바로 자유인으로서의 그녀가 선택한 삶이다. 이러한 삶에 제국주의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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