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다는 것의 의미 동문선 현대신서 16
존 버거 지음, 박범수 옮김 / 동문선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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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본다는 것의 의미]다.


보이는 것을 보는 것. 보인다는 말, 수동적인 말이다. 의지가 개입하기 전에 눈에 들어오는 대로 인식하는 일. 그런데 보이는 것을 본다고 할 때는 의지가 개입한다. 


똑같은 존재라고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굉장히 다르게 보인다. 다르게 볼 수 있다. 그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 아는 만큼 보인다를 수동적으로 해석해서, 자신이 아는 만큼만 보인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신의 앎에 한계가 있다고 인식한다면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내가 보는 것에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다르게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는 말과 같다. 즉 자신이 놓치고 있는 면이 있다는 생각을 지니고, 그것을 찾으려는 노력을 한다는 말이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이 다른 사람 눈에도 똑같이 또는 비슷하게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착각일 수 있다. 엄청나게 다르게 보일 수 있다. 특히 예술에서는.


그래서 예술 감상에는 왕도가 없다고 하지 않나. 자신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는 것이 예술이다. 예술의 다양성은 이런 다양한 관점에서 나오지만, 다양한 관점은 곧 보기의 차이에서 온다.


그런데 어떻게 보아야 잘 봤다고 할 수 있나?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나? 단지 예술에 대한 지식뿐만이 아니라 사회, 문화적 지식이 총 망라되어 작동되어야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꽤나 많은 지식이 필요한데, 특히 사회와 동떨어져서 볼 수 없다는 점을 이 책에서 잘 지적하고 있다.


존 버거 책을 읽으면 관점의 다양함과 관점의 독특함을 느끼게 되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존 버거 역시 노력을 많이 했으리라. 


그는 어떤 것을 볼 때 그것을 따로 떼어서 보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따로 떼어서 볼 때도 있다. 하지만 곧 자신의 살고 있는 세상과 관련짓는다. 사회와 동떨어진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춰진 진실을 찾아낼 수가 있다. 그림이든, 사진이든 또는 동물이든 그는 보이는 존재들에게서 무엇인가를 더 보려고 한다. 그렇게 자신이 본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 역시 잘 보라고.


이런 점을 잘 나타내는 문장이 있다. 사진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한 말이다.


'사진이 동시에 개인적, 정치적, 경제적, 극적, 일상적, 그리고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여질 수 있도록 사진을 둘러싼 방사 체계가 구성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93쪽)


즉, 사진을 볼 때에도 다양한 관점을 작동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주어진 대로만 해석하지 않고,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일방통행은 없다. 일방통행은 보기가 아니다. 그것은 '본다'가 아니라 '보인다'다. 이런 보기에 대해서 동물, 사진, 미술을 통해서 그 실례를 들어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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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 그래픽 노블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르네 놀트 그림,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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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었다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소설은 상상을 통해서 장면을 떠올려야 한다면, 그래픽 노블은 그림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에 소설을 읽었다면 자신의 상상과 비교하면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내용의 전개를 그림에 따라서 따라가기 때문에 다른 맥락의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다.


길리어드라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 여성을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수단으로 대하는 세상.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그들이 했던 행위들.


한 순간에 경제적 무능자로 만들어버릴 수 있고, 그 다음에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오로지 수단으로서만 지낼 수 있게 만드는 그런 제도.


상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하지만,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이야기는 상상 속에만 있지 않다.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해버리는 사람들. 그렇지만 사람은 그런 상황에서도 벗어날 꿈을 꾼다. 노력을 한다.


메이데이. 그렇다. 구해달라고, 아님 약자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그런 의미가 암호로 통용이 된다. 그런 상황을 마냥 감내만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사람이 사는 세상이 아니므로.


소설로 읽었을 때도 좋았지만, 그래픽 노블로 보는 것도 좋았다. 오히려 더 섬뜩했다고 할까? 그런 세상이 오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 그리고 [시녀이야기]의 후속편인 [증언들]에 대한 그래픽 노블도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암흑인 세계를 벗어나는 모습을 우리는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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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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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이다. 잔잔하다. 특별한 갈등도 없다. 그렇다고 사건이 없지는 않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마치 물결의 흐름에서 겉으로는 잔잔해 보이지만, 속에서는 강한 물의 흐름이 있듯이, 이 소설 역시 그 잔잔함 속에서도 갈등이 있다. 다만 표면에 잘 드러나지 않을 뿐.


일본 사람들의 특징으로 드는 말 중에 겉으로는 잘 드러내지 않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들은 직선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남들이 알아차릴 수 있게만 말하고 행동한다고 한다. 지금은 달라졌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대등하다고 여기는 상대에게는 이런 태도가 여전히 유지된다고 볼 수 있다.


이 소서에서도 마찬가지다. 감정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별로 없다. 말투로 눈짓으로, 행동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그것을 알아채는 쪽으로 서술이 된다.


건축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으면서 이런 일본인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인물로 소설의 중심인물인 무라이 슌스케를 들고 있다.


건축가로서 명성을 얻은 그는 사무소를 차린다. 이 사무소에 직원을 뽑지 않다가 소설의 서술자가 직원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여름, 별장으로 가서 국립현대도서관 설계 경합을 준비한다.


이 여름에 겪었던 일들이 소설의 중심이다. 그런데 사건의 갈등보다는 건축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서술된다.


어떤 건축을 하려고 하는지, 건축은 사용자 중심이어야 한다는 무라이의 사상을 중심으로 국립현대도서관을 어떻게 설계하는지, 그리고 그동안 무라이가 설계하고 건축한 집들이 어떤지를 보여주고 있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자연과 배치되는 건축이 아닌 자연 속에 녹아들어가는 건축, 그렇다고 자연의 일부가 아닌, 건축은 인위적인 결과물이니까, 인위적이되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을 하려고 한다.


또한 건축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편리하게 쓸 수 있는 건축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건축하는 사람은 반드시 요리를 해야 한다고 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무소 직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요리를 한다. 요리를 해야 집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을 이해하고, 그에 합당한 건축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위압적이지 않은, 그렇다고 너무 구태의연하지도 않은 그런 건축. 서술자는 여름 별장에서 그런 건축의 묘미에 푹 빠져들게 된다.


무라이 선생이 짚어주는 것들을 스케치하면서 느끼게 되는 건축의 아름다움, 그리고 자연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이 소설에 잘 표현되어 있다.


읽으면서 숲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나 할까? 또 건축이 어떠해야 하는지도 생각할 수 있어서 좋았고.


국립현대도서관 경합을 위한 설계를 할 때 소설 속에서 표현된 이용자들이 어떻게 느끼고 활용할지를 고민하면서 설계하는 장면을 보면서,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기적의 도서관'을 설계할 때도 이런 고민을 하면서 설계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정기용 건축가가 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점들을 이 소설을 통해서 느낄 수 있었다고나 할까. 마음이 잔잔해지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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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 시집을 읽으면 주인공이 청소년이라서 그런지 잊고 지냈던 과거를 생각하게 된다.


  그때 나도 저런 생각을 했었지, 저런 행동을 했었는데... 그 시절이 까마득한 과거가 되어버린 듯, 아예 기억에서 지우고, 나날을 살아가는데 허덕허덕거렸던 지금.


  이 지금이 과거를 잊고 살아가는 현재가 아니라, 과거와 함께 하는 현재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청소년 시집이다.


  우리는 한때 청소년시기를 거쳤으므로. 


  아직 청소년 시기를 거치지 않은 사람이 이런 시집을 읽는다면 현재에서 미래를 만나는 경험을 할 테고, 현재를 살아가는 청소년이라면 자신의 삶을 시를 통해서 만나게 될 테니.


청소년 시집은 누구에게나 현재를 풍요롭게 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이 시집의 시인은 교사의 역할을 한다고 한다. 


자신의 시를 통해서 수업 시간에 많은 문학적 용어들을 설명한다고 한다. 시인이자 교사, 교사이자 시인이니 학생들을 통해서 청소년들의 삶을 자주 또 깊게 만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만남을 시를 통해서 표현했다. 자신만이 아니라 누구나 시를 읽으면서 현재를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그래서 이 시집에는 어려운 말이 하나도 없다. 내용도 어렵지 않다. 그냥 청소년의 마음, 행동을 일상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일상이 시로 다가온다고 해야 할까? 이 점을 다른 말로 하면 청소년들의 삶을 어려운 언어로 표현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들의 말은 쉽다. 간결하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삶도 간결하다. 그것을 공연히 어려운 말로 번역할 필요가 없다.


난해한 말로 가릴 필요도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온전한 존재. 그렇게 오롯한 존재로 청소년을 받아들이면 그들은 자신들의 꿈을 찾아 간다.


이 시집에 나온 시들 중에 '뜬구름'이란 시. 청소년기에 뜬구름을 잡으려고 하지 않으면 언제 할까? 청소년 시절 엉뚱한 상상을 하던 때를 떠올리게 하는 시다. 그러나 엉뚱한 상상이 필요없을까? 아니다. 엉뚱한 상상은 필요하다. 그것들이 우리들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하니까.


  뜬구름


뜬구름 잡는 얘기 좀

그만 하란다


비누 거품 비행선

고양이 말 통역기

하늘을 걷는 신발

몸이 커졌다 작아지는 알약

양치질을 해 주는 사탕

시험 문제 답이 보이는 안경

눈물을 멈추게 하는 향수

웃음이 나오는 껌

       .

      .

      .


뜬구름도 쌓이면

비가 되어 내릴 거다

그럼, 잡을 수 있다


이장근, 나는 지금 꽃이다. 푸른책들. 2013년. 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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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 - 생존과 저항에 관한 긴급 보고서
존 버거 지음, 김우룡 옮김 / 열화당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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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에 있는 작은 제목을 그대로 따왔다. 이보다 더 이 책의 내용을 잘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존 버거는 다양한 활동을 했지만, 그 다양한 활동의 중심에는 늘 약자들에 대한 관심이 있다. 약자들과의 연대가 있다. 정의를 향한 그의 목소리. 존 버거의 어떤 책에서든 그것을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존 버거의 생각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는 말한다. '장소에 관한 열 가지 보고서'(123-134쪽 )라는 글에서.


'누군가 내게 묻는다. 아직까지 마르크스주의자냐고.'(123쪽)로 시작해 '그래, 나는 누가 뭐라 해도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다'(134쪽)라고 맺는다.


마르크스주의라고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한물간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공산주의권이 붕괴되었는데 무슨 마르크스주의?


하지만 굳이 주의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사회적 약자들을 생각하고, 그들과 연대하고 함께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있다. 그들은 사회의 기득권에 녹아들지 않는다.


공산주의는 망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잘못된 주의다. 이것은 단순화다. 이 단순화는 강자의 논리다. 생각을 하지 못하게, 질문을 하지 못하게 한다. 그것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


존 버거는 단순함과 단순화를 구분한다.


'단순함이란 필수적인 것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후자의 단순화란 권력 투쟁에서의 여러 책략 중 하나를 말한다. 단순화는 스스로의 이익만을 위한다.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들은 어떤 사안을 단순화시킨다. 하지만 권력 없는 일반 사람들은 일어난 일을 단순함으로 받아들인다. 그 둘 사이에는 종종 깊은 심연이 가로 놓인다.'(140쪽)


간단하다. 더 생각하지 않게 한다. 생각함이란 곧 단순화에 반하는 일이 되니까. 계속해서 말한다.


'우리는, 단순화와 꼬리표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권력을 쥐고 휘두르는 자들의 이익에만 봉사할 뿐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들의 권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단순화의 필요성 역시 커져 간다. 반면에 이런 맹목적인 권력 아래에서 고통받고 또 그 권력에 대항해 투쟁하는 사람들의 이익은 다양성과 차별성, 복합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지켜질 수 있다. 오늘은 물론 머나먼 미래를 위해서도 그렇다.'(149쪽)


그러니 마르크스주의자냐 아니냐라는 질문도 단순화한 질문이다. 그러나 존 버거는 이 질문에 단순함으로 대답한다. 자신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왜냐하면 그것이 '권력 아래에서 고통받고 또 그 권력에 대항해 투장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니까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이제 논의가 잘 되지 않는다. 서울대학교에서도 정치경제학을 전공한 교수가 없다(?김수행 교수가 정년 퇴직한 이후 정치경제학 전공자를 뽑지 않았나는 기사를 보았는데, 그동안 뽑아서 가르치고 있어서 이 문장이 취소되었으면 좋겠다)고 했었는데... 이보다 더 단순화해서 마르크스주의자는 공산주의자, 공산주의자는 빨갱이, 빨갱이면 종북좌파, 종북좌파면 이 나라에서 있어서는 안 될 존재.


이렇게 가고 있지 않나. 이념의 단순화, 사상의 단순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권력자들. 그러니 존 버거가 '모든 것을 소중히하라'고 했을 때 그는 우리에게 권력자들에 의해 가려진 진실을 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자세와 더불어 존 버거의 글에서 요즘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본다. 언어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그것 자체도 바로 단순화다. 단순함이 아니라.


'제발 끝났으면 싶은, 그 끝없이 반복되는 연설, 발표문, 언론 회견과 위협에서 쓰이는 용어들이란 민주주의, 정의, 인권, 테러리즘 등이다. 저들의 맥락에서 그 용어들은 그 말들이 한때 지시했던 뜻과는 완전히 반대의 뜻을 가리키고 있다.'(53쪽)


왜 이 말들이 반대로 쓰이고 있는지를 그 다음 단락에서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의사 결정을 위해 제시된 한 방편이다. (실행되는 일은 드물지만) 선거운동과는 별 연관성이 없다. 민주주의는 지배받는 사람과의 협의를 거친 후에 그 협의에 따라 정치적 결정이 내려짐을 약속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배받는 사람들에게 쟁점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제공되어야 하고, 또 정책 결정자들에게는 자신들이 들은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숙고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양자택일의 '자유'와 혼동되어서는 안 되며, 여론조사 공표 행위나 사람들을 통계수치로 몰아가는 행위와 혼동되어서도 안 된다. 그것들은 민주주의를 빙자한 사기 행위다.'(53쪽)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 인권, 정의를 원한다. 또 그런 세상에서 살기를 바란다. 누구도 자유, 민주, 인권, 정의가 박탈된 사회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말이 왜곡된 사회에서는, 자신의 자유, 정의, 인권, 민주주의가 박탈되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게 된다. 


그것을 존 버거는 '살(殺)윤리제'란 표현으로 말하고 있다. 살충제가 아니라 살윤리제다.


'인간의 성품에는, 살충제 대신 윤리를 죽이고 역사와 정의에 대한 모든 개념을 죽이는 살윤리제(ethicides)가 조직적으로 살포되고 있다. 

  나눔과 물려줌과 위로, 애도와 희망, 이런 것들에 대한 인류의 기본적 요청으로부터 진화해 온 중요한 인간적 성품들이 특히 과녁이 되어 있다. 대중매체들로부터 이런 살윤리제가 밤낮없이 살포되고 있다.

  살윤리제는 조작자들이 원하는 것보다야 효과가 덜하고 또 그 파급 속도가 더딜지 모른다. 하지만 반드시 있어야 할 공개토론의 장을, 그런 토론의 장에 의해 표현될 상상의 공간, 꼭 필요한 그 상상의 공간을, 땅 밑에 묻고 덮어 버리는 데는 성공하고 있다.'(94-95쪽)


이런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서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관심을 지니고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 존 버거는 2000년대 초반 그러한 사람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들을 우리가 없는 존재로 여길 수 없음을.


'모든 것을 소중히하라' 그러기 위해서는 낮은 곳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가려진 부분을 들출 수 있어야 하며, 감춰진 것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과연 이 문장이 과거의 문장인가? 우리와는 상관없는 몇몇 나라들에만 해당하는 말인가? 독재국가에서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아니다.


그래서 존 버거의 이 책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에만 머물지 않는 시선, 귀 기울임, 행동하기. 어쩌면 지금 우리도 살윤리제의 살포를 온몸으로 맞고 있지는 않은지... 그렇다면 그런 살윤리제의 살포를 반대해야 한다. 막아야 한다. 이 점을 존 버거가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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