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세이건의 말 - 우주 그리고 그 너머에 관한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칼 세이건 지음, 김명남 옮김 / 마음산책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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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세이건. 그는 우리를 우주로 데리고 간다. 우주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우주의 광활함 속에 지구의 작고 여린 면을, 지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하여 서로 연대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우주 전체로 보면 거의 보이지도 않는 존재인 지구에서 살아가는 더 작은 존재인 인간. 그런 인간들이 서로 갈등하고 증오하고 없애려 하는 전쟁을 끊지 못하는 모습은 참 무어라 말할 수가 없다.


더 넓은 세상, 더 큰 존재들을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열려 있는 길이 무수히 많음을 생각하면, 작디작은 공간에서 아웅다웅 싸우기보다는 더 넓은 곳으로 힘을 합쳐 나가려는 자세를 지녀야 하는데...


그런데, 칼 세이건이 세상을 뜬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도 인간은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다. 돈이 많은 어느 나라 재벌은 화성에 인간을 보내겠다고 하는데... 칼 세이건의 이 말을 보면 참 가당치도 않다.


'우주에서 벌 돈이 있다면, 우리는 기업들이 우주에 못 가도록 뜯어말려야 할 겁니다.'(215쪽)


왜? 그것은 인류의 꿈과 생존과 상관없이 특정 재벌의 돈벌이에 이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주는 돈벌이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 바로 우리가 과학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과학은 특정 지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칼 세이건이 말하는 과학은 사고방식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 이 합리적이라는 말에는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인류의 이익이라는 개념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과학은 특정 전문가만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나와는 관계없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뛰어난 몇몇만이 참여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한다. 하긴 그러한 학생들을 모아 따로 교육하는 '과학고'가 많이 만들어진 나라이기도 하니까.


과학고가 많으면 과학에 관심이 더 많아질까? 아니다. 오히려 과학고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이 난 과학에 소질이 없어, 하고 과학을 도외시하게 된다. 과학고는 더 많은 학생들을 과학에서 멀어지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역할과 더불어 과학은 특정인만이 하는 분야로 고착되게 한다. 그러면 안 된다. 세이건의 말대로 과학은 사고방식이다. 과학적 사고방식은 우리 모두가 지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고, 세상일을 특정인들에게만 맡겨두게 된다.


좀 길지만 세이건의 이 말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과학기술에 바탕을 둔 사회를 만들었으면서도 동시에 아무도 과학기술에 대해서 모르는 사회를 구축했다는 것입니다. 무지와 힘이 이렇게 잘 타기 쉬운 연료처럼 뒤섞여 있다가는 조만간 우리 눈 앞에서 뻥 터지고 말 겁니다. ... 과학은 하나의 사고방식입니다. 인간이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이해한 채로 우주를 회의적으로 탐문하는 방식입니다. 만일 우리가 회의적인 질문을 던질 줄 모른다면, 우리에게 뭔가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제대로 심문할 줄 모른다면, 권위자들을 의심할 줄 모른다면 정치에서든 종교에서든 우리는 다음번에 어슬렁어슬렁 나타난 돌팔이에게 만만한 먹이가 될 겁니다.' (320-321쪽)


이 말은 예언이 아니다. 이토록 복잡해진 시대에 회의적으로 사고할 줄 모른다면, 권력을 쥔 자들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전체주의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오히려 사람들은 과학에서 멀어진다면, 그 다음 결과는 무지를 이용하는 자들에게 이용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에서도 그렇고.


세이건의 이 말은 그래서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더더욱 복잡해진 과학기술은 우리를 과학에서 더 멀어지게 했다. 그냥 전문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그런가보다 하고 따를 수밖에 없게 하고 있다.


정말 그런가? 그런 증거를 대! 증거를 대기 전에 따를 수 없어. 라고 말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아니다. 복잡한 시대일수록 더더욱 증거를 요구해야 한다. 전문가가 아니라고 입을 다물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가장 엄격한 수준의 증거를 요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일 때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331쪽)


과학에 무지하다고 해서 질문을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무지하기 때문에 질문을 해야 한다. 무지한 사람도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이 있은 다음에야 비로소 적용되어야 한다.


왜냐 세이건의 말처럼 '과학의 핵심은 비판, 토론, 개방적인 탐구, 지식을 체계화하려는 태도, 설득력 있는 증거가 나올 때까지는 믿음을 미루는 태도, 비판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 태도'(299쪽)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를 지니고 있으면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 그리고 비합리적인 생각에 끌리지 않는다. 세이건이 과학에 대해서 일반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책을 쓰고, 또 각종 매체에 등장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들이 과학에서 멀어지면 안 된다. 과학에서 멀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모두가 과학자는 아닐지라도 과학적 사고방식은 지녀야 한다. 그것이 인류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다.


이 책은 칼 세이건이 인터뷰한 내용을 연대 순으로 엮어놓았다. 읽다보면 그가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말들이 나온다. 그는 과학을 자신만의 분야로 국한시키지 않았다. 과학을 다른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알리려고 했다. 그런 활동 때문인지, 1992년 미국 국립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된 후보자로 선정이 되었지만 몇몇의 반대로 가입이 부결되었다고 한다.


이런 모습, 과학계의 폐쇄적인 모습, 그것이 사람들을 과학에서 더 멀어지게 하는 이유 중 하나라 되기도 하겠는데, 나중에 명예회원으로 받아들였다는데, 참...


하지만 세이건이 과학아카데미의 회원이 되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론 가만 있는 그를 가입시키느냐 마느냐 하는 것에 상처를 받았겠지만, 그는 이미 전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과학자이지 않았는가. 무슨 회원이냐가 과학자임을 인정하는 자격증도 아니겠고.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보다도 칼 세이건이 우주를 관찰하면서 또 연구하면서 느끼는 행복함, 과학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는 과학을 하면서 행복해 했다. 또 과학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행복해 했다. 행복. 이것이다. 나만의 행복이 아니라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바랐던 사람.


그래서 그는 정치 문제에도 자신의 의견을 과감하게 냈다. 과학자가 왜 정치 발언을 하느냐고? 그는 과학자이기 때문에 한다고...


'당신이 스스로 어느 정도 전문가라 자처할 수 있는 과학 분야에 관련된 문제를 발견한다면, 인류의 지구적 문명에 닥친 위험에 관해서 발언하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자연스러운 일일 겁니다.'(269쪽)  


지구 온난화, 핵개발의 위험성 등에 대해서 그가 발언하고 행동에 나선 이유이기도 하다. 과학자이기에, 그것의 문제를 알기에 가만 있을 수 없다는 그의 말. 그것이 바로 전문가 아니겠는가.


하여 이 책에서는 과학에 대한 호기심, 그것을 추구하는 행복, 그리고 과학을 한 사람으로서 져야 하는 책임 등을 세이건의 말을 통해서 만날 수 있다.


이래서 칼 세이건을 과학을, 분야를 좁히면 천문학을 대변할 수 있는 세계 최고의 학자라고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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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3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지음, 정보라 옮김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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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 별로 긍정적인 느낌을 주는 말이 아니다. 사람이 빠지는 곳. 물이 고이는 곳. 그래서 정체되는 곳. 이 소설 제목인 구덩이는 그러한 의미도 있겠지만 우선은 건축을 위한 '터잡기'라는 의미도 있다.


즉 건물을 올리기 전에 땅을 파서 토대를 마련하는 것. 그것은 새로운 존재를 만들기 위한 기초 작업이기도 하다. 그런데 하다가 제대로 안 되면 어떻게 되는가? 구덩이를 터로 삼아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집, 자신들의 삶을 꾸려가는 생활 공간이 마련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을 빠뜨리는 함정으로 작동할 수가 있다.


이 정도로 제목은 이중적인 의미다. 번역자가 러시아 용어를 어떤 말로 번역을 할까 고민을 했다고 하는데, 충분히 이해가 된다. 우리는 우선 구덩이라는 낱말을 보면 함정을 먼저 생각하지 터를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프롤레타리아들이 살 곳을 마련하기 위해 터를 마련한다. 구덩이를 판다. 여기에 노동자들이 참여해서 그들의 미래를 꿈꾸며 일한다.


러시아 혁명. 세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고 하고 싶지만,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기 보다는 지식인 또는 혁명가들의 혁명 아니었나 싶은데... 러시아에서는 아직 진정한 프롤레타리아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을 깨우칠 필요가 있었으며, 대다수를 차지했던 농민들을 어떻게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동참하게 할 것인지도 과제였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노동자 집단과 농민 집단이 나온다. 구덩이는 노동자 집단의 이야기이고, 집단 농장은 농민 집단의 이야기다. 여기에 이 소설에서 주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보셰프와 치클린, 그리고 프루셉스키는 이 두 집단 모두와 관련되어 있다.


이들에 더해 이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소녀 나스탸를 언급해야 한다. 나스탸는 러시아 혁명의 미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나스탸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구덩이를 잘 파야 하고, 이 구덩이에 건물을 잘 올려야 한다. 단순히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 세대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기사인 프루셉스키는 여러 고민을 하지만 그럼에도 구덩이를 제대로 파서 미래 세대를 위한 좋은 건축을 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프롤레타리아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고민 속에서 헤맨다. 늘 죽음을 생각하지만 실행은 하지 못하는 관념에 빠져 허우적대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그가 그나마 긍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은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또 소설의 뒷부분으로 가면 소녀들을 가르치러 가는 장면에서이다. 지식인도 혁명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 있음을, 그러한 일을 해야함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이들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왜냐하면 다른 집단을 죽이거나 추방하는 것으로는 통합이 이루어질 수 없고, 그 갈등은 불안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안은 상대를 악마화하게 되고, 결코 화합할 수 없게 만든다. 전쟁 때 입은 부상으로 다리를 잃은 자체프는 일을 할 수가 없는데, 그는 자신의 정당성을 내세워서 다른 사람들에게서, 특히 부패한 관료들에게서 먹을 것이나 그밖의 필요한 물품들을 강탈한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 역시 사회가 통합되지 못하고 불안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과거의 행적으로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것은 현재가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고, 미래 역시 불안정하고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부유한 농민들을 쫓아내는 장면에서 농민들에 대한 정권의 태도, 그 과정에서 속절없이 죽어나가는 많은 동물들의 모습은 혁명이 순탄치 않음을, 하여 구덩이를 파던 노동자들이 집단 농장의 일에 관여하게 되고, 자신들이 원래 하려던 일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결국 나스탸가 죽고, 치클린은 나스탸를 묻을 구덩이를 파면서 소설이 끝나는데... 혁명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혁명 속에서 사색에 잠기던 보셰프는 생각을 많이 한다고 일터에서 쫓겨나고, 혁명 전에 부유했던 농민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추방당해야 한다. 지식인 역시 마찬가지다. 당의 방침에 맞지 않으면 언제든 숙청된다. 


그것은 집단 농장의 활동가가 당의 명령서 한 장으로 그 자리에 쫓겨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니 자율성을 가지고 또 그 상황에 맞게 일을 하기는 힘들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혁명이 추구했던 미래 세대를 위한 사회 건설이 이루어질까?


이미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신념이 있고 자신의 신념대로 일을 추진하던 치클린이 나중에 나스탸를 묻을 구덩이를 파면서 소설이 끝나는데, 이렇게 나스탸의 죽음이 그 결과를 알려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은 주도하는 자의 관점이 아니라 수행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풀어가고 있기에 혁명이 일어난 뒤 진행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일들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서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농민과 노동자에게 닥친 현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 과연 혁명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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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 우리는 왜 검열이 아닌 표현의 자유로 맞서야 하는가? Philos 시리즈 23
네이딘 스트로슨 지음, 홍성수.유민석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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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책을 읽은 사람은 저자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저자의 주장을 단순하게 정리하면 '혐오표현금지법'은 제정되어어서는 안 된다이니까.


혐오표현이 좋지 않은 표현을 넘어 폭력이 되는 현실에서, 그러한 혐오표현을 금지하는 법들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고, 또 혐오표현금지법을 제정한 나라도 꽤 있다.


법을 통해 국가가 직접 혐오표현은 범죄라고 명시하는 것, 이것이 혐오표현금지법인데, 이 법이 과연 혐오표현을 줄이거나 없애는데 기여를 했는가 하면 긍정적인 대답을 하기는 좀 힘들다.


우리나라에서 명예훼손죄가 있는데, 이것이 혐오표현금지법이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혐오표현을 막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법을 생각해 보자. 이 법이 약자에게, 진정으로 인격을 존중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적용이 되는가? 이 생각을 하면 오히려 명예훼손죄는 약자를 옭아매는 역할을 더 많이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이라고 해서, 약자가 강자에게 당한 것을 폭로해도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걸어버린다. 그러면 돈과 시간, 권력이 없는 약자는 법망에 걸려 여러가지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된다. 강자에 의해서 또는 고의적으로 상대를 비하하는 표현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법의 취지와는 다르게 약자에게 족쇄를 채우는 역할을 한 경우가 꽤 있으니...


이렇게 명예훼손죄를 생각하면, 저자가 혐오표현금지법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도 이해가 되긴 한다. 이 혐오표현금지법이 소수자에게 더 가혹하게 다가온 경우가 있고, 또 차별을 하는 사람들을 누르기는 커녕, 그들이 지하로 들어가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고 행동하게 만듦으로써 혐오표현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기 힘들게 하기도 했다는 것.


또한 혐오표현금지법이 있는 나라에서 극단적인 정당이 계속 활동하고 있으며, 그들에 대한 지지도가 만만치 않음도, 혐오표현 금지법이 혐오표현을 막는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부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이 책에서 혐오표현금지법을 반대하는 주요 논거 중의 하나다.


여기에 혐오표현금지법이 없어도 현행법으로도 충분히 처벌이 가능한데도 혐오표현금지법을 제정한다면 그것은 '자유, 평등 및 민주주의의 보편 원칙을 훼손한다'(57쪽)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집단 간 갈등을 줄이거나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법전쟁lawfare이 아니라 협력적이고 화해적인 접근'(235쪽)라고 하고 있다. 즉 더 많은 대화를 통해서, 대항 표현을 통해서 혐오표현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개인과 사회에 해악을 끼칠 수 있는 표현의 잠재적 힘보다 더 나쁜 것은 혐오표현금지법을 시행함으로써 똑같이 해악을 끼칠 수 있는 정부의 잠재적 힘이다. 예상대로, 이 탄력적 힘은 반대 의견, 대중적이지 않은 발화자, 그리고 권력이 없는 집단을 침묵시키는 데 사용될 것이다'(45쪽)는 주장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명예훼손죄에 대한 법도 그 법의 취지와는 다르게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혐오표현금지법 역시 그러한 전철을 밟고 있거나 밟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저자는 차별금지법이 먼저 제정이 되어야 하고, 여기에 대해서는 반대를 하지 않는다.


아직 차별금지법이 없는 우리나라인데... 이 법이 먼저 제정이 되고 시행이 된 다음에, 현재 있는 법으로도 혐오표현을 처벌할 수 있으면 강력하게 처벌하되, 대항 표현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하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되 그것이 토론으로 나아가 서로의 생각을 수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분명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저자는 혐오표현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한다. 또한 처벌받아야 할 혐오표현은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한다. 이것을 잊으면 안 된다. 저자가 혐오표현금지법을 반대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지, 상대에게 해를 끼치는 표현을 그냥 놔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 역시 혐오표현이 일어나지 않도록 환경과 또한 대항 표현을 더 활발하고 강하게 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것을 법의 영역으로 보내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저자의 이 말을 곱씹어 보자. 


'폭력적 차별적 행동은 즉시 처벌해야 한다. 그리고 차별적, 혐오적 생각을 전파하는 표현은 강력하게 논박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혐오적이거나 차별적이라고 여기는 생각을 처벌하는 것은 위에서 소개했던 표현의 자유 근본 원칙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집단 내의 불신와 차별을 줄이는 게 아니라 증가시킬 수도 있다.' (35-36쪽)


그래서 저자는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는 두꺼운 피부를 발달시키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더 얇은 피부를 발달시켜야 한다'(268쪽)고 한다.


즉 남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이성적으로 논박할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더 민감한 감수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혐오표현이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은 점점 더 없어질 테고...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모든 것을 법의 영역으로 넘기면 해결은 더욱 멀어진다는 점은 명심해야 한다. 자신의 문제를 남에게 넘기고 방관하게 되기 때문인데, 그러면 대항 표현은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혐오표현금지법에 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법 이전에 사회가 그러한 표현을 할 수 없도록 대항 표현을 비롯한 자유로운 토론 문화가 만들어지게 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을 했다.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 문제다. 이것은. 하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차별금지법이 제정되고 시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세상에 차별을 금지하자는데 반대하는 사람도 있나 싶지만, 이 법이 왜 제정이 안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생각이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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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카프카 - 프란츠 카프카 타계 100주기 기념
김태환 외 지음 / 나남출판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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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카프카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는 사랑할 수 없는 작가다.'(206쪽)

'카프카는 위대하고, 카프카는 사랑할 수 없는 작가다.'(216쪽)


그런가? 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 카프카였기에. 그의 작품을 거의 읽었다고 자부하고 있었기에. 그러다 이 문장을 다시 곱씹었다. 과연 나는 카프카를 사랑하는가? 아니, 이해할 수 없으면서 사랑할 수 있나?


카프카 작품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면서. 그러면 사랑한다와 좋아한다는 다른 말이라고 할 수 있고, 그를 좋아하는 이유가 이해할 수 없지만 무언가 계속 생각하게 하는 작품을 써서라면, 그는 위대한 작가다. 언제 어디서도 그 시대, 그 장소에 맞게 해석이 될 수 있는 작품들을 썼으므로.


이렇게 사랑받는 작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카프카는 많은 문학자들에게 인용되거나 또는 영향을 준 작가다. 우리나라 작가들도 예외일 수 없다. 그러니 카프카가 세상을 뜬 지 100년이 지난 다음에도 그를 기리는 글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카프카 월드, 카프카에스크, 카프카의 밀실'이라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카프카 월드는 카프카 작품을 우리에게 소개해 준다. 그의 잠언과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이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카프카의 밀실'에서 박돈규가 쓴 '출구를 찾아서'에 다시 나온다. 물론 소설로가 아니라 연극으로. '빨간 피터의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공연된 추송웅의 모노 드라마.


어린 시절에 추송웅의 '빨간 피터의 고백'이란 작품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이 카프카 작품인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인지는 몰랐다.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었는데, 카프카 작품이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음을 이 작품이 잘 보여주고 있다.


카프카 잠언은 생각할거리를 많이 제공해 주는데... 잠언의 1번은 '참된 길은 밧줄 위에 나 있다. 그 밧줄은 허공이 아니라 땅바닥에서 약간 뜬 채 팽팽하게 뻗어 있다. 그것은 우리더러 지르밟고 걸으라기보다는 단연코 비틀거리면서 가라고 가로놓인 듯하다'(29쪽)이다.


이 말이 카프카 작품이 지닌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의 작품은 직선으로 가는 것이 없다. 무엇을 우리에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비틀거리면서 아주 조심조심해서 읽어야만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


그의 삶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그는 허공에 약간 떠 있는 밧줄 위에서 균형 잡으며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따라서 그는 천상의 존재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지상에 속한 존재도 아니다.


그는 지상을 벗어나고자 하는, 그러나 지상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그러한 삶을 살았고, 또 그러한 작품을 쓴 작가다. 그의 잠언을 읽으면서 그 점을 다시 생각한다. (아포리즘이라고 하는데, 그냥 잠언이라고 하겠다.)


'카프카에스크'는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세계를 드러내는 경향 또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시와 소설이 실려 있다. 카프카 소설과 같은 소설이 아니라 우리 현실에 맞는, 그러나 지상도 천상도 아닌, 직선이 아닌 이리저리 비틀린 길을 보여주는 소설. 그리고 시들이 실려 있으니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고.


'카프카의 밀실'은 카프카에 대한 생각이다. 그리 어렵지 않게 카프카를 우리에게 끌어오고 있다. 그가 영원히 우리 곁에 머물 수밖에 없음을... 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다시 신형철의 말로 돌아간다. 그는 사랑할 수 없는 작가일 수 있다. 하지만 위대한 작가이기 때문에, 늘 우리가 그의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다. 문학이든 삶이든.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나는 카프카를 이해하는가 질문을 한다. 이해할 수 없다. 내가 그를 이해할 수 없기에 카프카를 사랑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떠나지는 못한다. 계속 그의 작품을 생각하거나 또는 어떤 작품을 다시 읽곤 한다. 그때마다 다른 느낌을 받는다. 참, 이해할 수 없는 작품, 그러나 손에서 떼지 못하게 하는 작품.


이런 의미에서 나에게 카프카는 위대한 작가다. 어떤 작품을 가장 좋아할까 물으면 딱히 떠오르는 작품도 없으면서, 그냥 안개 속에서 흐느적 대면서 헤매다 작품 읽기를 끝냈으면서, 그럼에도 그에게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 바로 '카프카에스크'라고 해야겠지.


다시 카프카 작품을 읽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게 한 책이었다. 적어도 '변신'을 다시 읽든지, 아니면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는 '유형지에서'를 읽든지... 좀 시간을 두고 '소송'이나 '성'을 읽어도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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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9-22 15: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왜 못봤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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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ye91 2025-09-22 15:17   좋아요 1 | URL
카프카란 작가 참 매혹적인 작가예요. 저에겐... 이 책, 그런 작가에게 매혹된 우리나라 작가-비평가들의 글이 실렸으니, 읽어볼 만할 거예요.
 

  제목이 특이하다. 년도가 나왔다. 년도에 담긴 뜻이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 봐도 무엇인지 모르겠다. 1914년이란 시집 제목이 된 시를 읽어봐도 왜 1914년인지 모르겠다.


  그러니 그 년도에 일어난 사건을 검색하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다. 뭐,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는 둥, 어쨌다는 둥 하지는 말자. 그냥 우리가 지나온 시간이라고 생각하자.


  첫장을 넘기면서 만난 시. 그냥 충격이었다. 이 시 때문에 다시 1914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1914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백 년 뒤 2014년이 우리에게 중요하게 다가온다는 사실.


  한국 현대사를 통해 우리는 숱한 죽음을 마주했다. 그 죽음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죽음은 늘 뜻하지 않게 다가왔다.


많은 죽음들 사이에서 살아갔던 사람을 생각하게 한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죽음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첫시를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첫시의 제목은 '1914년 4월 16일'이다. 


 1914년 4월 16일


나의 생년월일입니다.

나는 아직 죽지 않은 사람으로서

죽은 친구들을 많이 가진 사람입니다.

죽은 친구들이 나를 홀로 21세기에 남겨두고 떠난 게 아니라

죽은 친구들을 내가 멀리 떠나온 것같이 느껴집니다.

오늘은 이 세상 끝까지 떠밀려 온 것같이

2014년 4월 16일입니다.


김행숙, 1914년. 한국문학. 2019년. 초판 2쇄. 9쪽.


태어난 날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태어난 날로부터 100년 뒤, 탄생이 아닌 죽음을 만나게 된다. 이토록 처연한 슬픔이라니...


백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죽음이 있었을까? 우리 사회에서 수많은 죽음들이 한 세기를 살아오는 동안 있었을 터.


친구들이 떠난 게 아니라, 내가 떠나온 것이라는 것은 용케 죽음을 피해 살아왔다는 것. 일제시대 많은 사람들의 죽음, 그리고 해방이 된 다음에 겪게 되는 4.3, 전쟁, 4.19, 광주민주화운동, 노동자 운동, 고문 등등.


이런 죽음과 함께하지 못하고 죽음에서 떠나온 삶을 살아왔는데, 그런 죽음들을 이제 21세기에는 만나지 않아야 하는데, 그런데...


다시 만난 죽음은 이 세상 끝까지 떠밀려 온 것같은 느낌을 준다. 더이상 어찌할 수 없는 이런 슬픔. 이런 죽음들. 다시는 만나지 않아야 할 죽음 앞에서, 화자는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죽음은 2014년 4월 16일에서 끝나지 않았다. 더 많은 죽음이 이어졌고, 우리는 또다시 이러한 죽음들에 떠밀렸다.


이젠 더이상 그러한 죽음이 없도록... 진정으로 그런 사회가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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