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나 도쿄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한정현 지음 / 스위밍꿀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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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현의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읽으면서 이 작가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상처받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회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 속에 묻혀 있는 사람들.


그들은 성소수자이기도 하고, 여성이기도 하고, 남성이지만 대학을 나오지 못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들은 자신의 선택보다는 다른 사람의 선택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따라서 질문을 하지 못하고 그냥 따르는 그런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이런 삶이 계속 유지될 수는 없다.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없다는 말이 되니 말이다. (굳이 리베카 솔닛을 빌려올 필요도 없다.) 소설 속 인물인 한주와 유키노가 그러한 인물들이다.


말을 할 수 없는 사람들, 그러나 영원히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들에게도 자신의 말을 하는 순간이 온다. 그런 무대도 있다. 그것을 어떻게 찾느냐 하는 것? 지금까지 목소리를 내던 사람들이 찾아주는 것이 아니다. 소설 속 김추의 논문에서 클럽 줄리아나 도쿄와 대학생 운동조직이었던 전공투의 무대를 비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중에 전공투의 무대는 다른 위상을 지니고 있다고 보면, 이는 그동안 소리를 내던 사람들이 더 큰소리를 내기 위해 만든 무대와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사람들이 그나마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부대는 극명하게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목소리를 잃은 사람들이 함께 찾거나 또는 그러한 무대들을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다.


이 소설의 제목이 되는 줄리아나 도쿄가 바로 그런 곳이다. 힘들게 일하는 여자 노동자들이 돈을 조금만 더 내면 자신들을 무대 위로 올릴 수 있는 곳. 무대 위에서 그들은 남의 시선에 따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즉, 줄리아나 도쿄는 자기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무대다. 그런데 이런 무대 역시 힘 있는 자들, 기존에 목소리를 쉽고도 크게 내던 존재들에 의해 사라지게 된다. 약한 사람들, 상처받은 사람들의 무대는 쉽게 침해당할 수 있다.


그렇다고 무대에 올랐던 사람들의 삶까지 지울 수는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대에 섰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러한 것을 삶의 힘으로 이어나간다.


이 소설 속 유키노의 엄마가 그렇고, 김추의 어머니 역시 그렇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순간을 그들은 영원히 잊지 않는다. 그것이 삶 속에 남는다. (유키노의 어머니에게는 사진으로, 김추의 어머니에게는 기억으로 또는 칼로)


김추의 어머니가 자신은 선택을 바꾸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장면. 자신의 목소리를 낸 경험은 이렇게 표현된다.


"처음으로 제 마음대로 한 거라서 그런 걸까요? 행복하네요. 자금."

그러므로 내가 본 미래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붉어진 얼굴의 너는 쑥스러운 건지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나를 바라본다.

"저도 그럼 행복하네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를 잊지도 않을 것이다.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생에서 이 짧은 시간이 우리가 함께한 전부라고 해도. (286-287쪽)


이것은 이 소설의 주인공인 한주에게도 유키노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무대를 경험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 속에서 여전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힘들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한주가 "나, 이제 할말이 있어."(257쪽)라고 하는 장면. "한주, 너는 나의 의지야."(253쪽)라고 유키노가 말하는 장면에서 이제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감싸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삶을 살게 됨을 알 수 있다.


한주는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마친 사람이지만 사귀는 남자에게서 데이트 폭력을 당한다. 남자는 한주를 자신에게 미치지 못하는 사람, 자신의 말대로만 해야 하는 사람으로 대한다. 가스라이팅과 폭력이 합쳐진 상태.


그가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를 나오지 않는다. 아니 소설에서 그는 처벌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피해자인 한주가 한국어를 잃고 일본으로 올 수밖에 없게 된다. 가해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고, 피해자는 목소리를 잃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한주가 한국어를 잃게 만든 설정은 이래서 섬뜩하도록 현실적이고 슬프다. 그럼에도 연구자로서의 한주가 일본어를 잊지 않은 것. 하나의 소리(언어)를 잃고 다른 소리(언어)를 기억하는 일. 이것은 한주가 자신의 소리(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유키노 역시 마찬가지다. 성소수자인 유키노는 연인에게 폭행을 당한다. 연인은 툭하면 유키노가 자신을 오해했다고 하면서 폭력을 행사한다. 오해했다는 말, 이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바로잡을 때 쓰면 별 문제가 없지만,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쓸 때는 그 자체로 폭력이 된다. 즉, 너는 네 언어로 말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이런 공통점이 한주와 유키노를 엮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서로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니. 그렇게 서로 의지하게 된 이들이, 우여곡절을 거쳐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소설 속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매개하는 인물이 '정추'라는 음악가다. 유키노의 엄마, 그리고 학자인 김추의 엄마가 듣는 음악을 만든 사람. 정추. 그는 자신의 선택으로 삶을 살아간 사람. 그런 정추가 소설에서 끊이지 않고 나오는데, 이는 한주나 유키노 역시 정추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소설에서 김추의 어머니를 등장시켜 정리하고 있다. 앞에서 인용한 그 장면. 결국 자신의 선택으로 살아가야 함을.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함을.


읽어가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나는 목소리를 내는 축에 들었을텐데, 그 목소리로 남의 목소리를 누르지 않았는가, 또 누구든 자신의 소리를 낼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하도록 노력했는가,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의지가 되는 삶을 살았는가 하는.


유키노가 한주가 김밥 끄트러미를 놓고 이야기했듯이. 


한주는 김밥을 썰었고, 맨 끄트머리를 하나 집어서 유키노의 앞접시 위애 올려주었다.

"이게 한국에서는 제일 맛있는 부분이라고. 그러니 유키노 네 거." (142쪽)


"한주 너는 나의," .... "내 끄트머리야." (142-143쪽)


슬프지만 아름다운, 마음을 울리는 소설이었다.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을 찾아 읽어야겠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명단에 한정현이라는 이름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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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야 베들레헴의 길고양이 모퉁이책방 (곰곰어린이) 38
데보라 엘리스 지음, 김배경 옮김 / 책속물고기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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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팔레스타인, 아직도 끝나지 않는 전쟁. 여전히 전쟁 중이다. 전쟁이라는 말보다는 일방적인 공격이라고 해야 하는 편이 맞겠지만.


팔레스타인이 차지하고 있는 땅이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들에게는 변변한 무기가 없고, 비록 무장투쟁을 한다고 하지만, 국가 대 국가로 전쟁을 할 여건은 안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공격하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지역까지도 공격한다고 하니, 팔레스타인에서 평화는 요원하다.


이 소설은 그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을 다루고 있다. 동화라고 할 수 있는데, 미국에서 살고 있던 아이가 죽어서 고양이가 되어 이름이 같은 베들레헴에서 지내게 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미국에서 클레어라는 이름으로 지내던 초등학생이 겪는 일들과 고양이가 되어 베들레헴에서 겪는 일들이 교차하고 있다. 고양이로서 겪는 일들을 통해서 자신이 초등학교 때 했던 행동들을 돌아보게 하고 있다.


클레어는 초등학교에서 집안 좋고, 공부도 잘하는, 그러나 교사들의 눈에 띠지 않게 말썽을 부리는, 요즘 말로 하면 상당히 영악한, 문제적인 학생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행동을 눈감아 주는 선생이 떠나고, 깐깐한 선생을 맞이하여 그 선생과 갈등을 일으킨다. 그러다 뜻하지 않는 교통사고로 죽음에 이른다.


죽음, 끝이 아니라 고양이로 태어난다. 그것도 베들레헴에서. 갈등 상황에 처해 있는 그곳에서 클레어 고양이는 이스라엘 군인과 팔레스타인 아이를 만난다. 이스라엘 군인이 정찰 목적으로 들어간 집에 부모를 잃고 홀로 있던 아이 오마르. 이들과 지내면서 클레어는 한 면만 볼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스라엘 군인이라고 해서 모두 팔레스타인인들을 적대적으로 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 그들도 인간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으며, 저항하는 팔레스타인인들도 모두가 같지는 않다는 사실. 


적대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도 딱 두 편으로 나눌 수가 없으며, 그 사이에 엄청나게 많은 편차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클레어라는 고양이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아이를 끝까지 보호하려는 이스라엘 군인들과 어떻게든 이스라엘 군인들을 죽이고 싶어하는 팔레스타인 사람, 그리고 이스라엘 군인에 무조건 적대적으로 대하면 안 된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있고.


클레어는 인간이었을 때 선생님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행동이 결코 잘한 짓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어떻게든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만 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을 고양이 몸으로 겪으면서. 


이렇게 소설은 어느 편도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쪽도 옳고 저쪽도 옳다는 양비론 또는 양시론을 주장하고 있지 않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갈등이 있지만, 그것을 단순하게 정리할 수 없음을.


전쟁에서도 인간이 있음을, 그 인간성을 지키는 사람들도 인해 세상이 조금씩 평화로운 쪽으로 가고 있음을.


개인이 어쩔 수 없다가 아니라 개인이라도 할 일을 해야 한다는 모습을 이스라엘 군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이 대치하고 있는 장면에서 고양이 클레어가 춤을 추어 양쪽이 더 심한 갈등으로 번지지 않게 한다. 이렇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도 있음을, 아니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함을 작가는 말하고 있다.


여전히 대치 중인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이 소설이 나온 지 꽤 됐는데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음에 암담한 마음이지만, 그럼에도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 


고양이 눈으로 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 결코 단순화할 수 없는 그 갈등 상황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평화로 가는 길이 쉽지는 않지만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됨을, 평화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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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브레드위너 세트 - 전4권
데보라 엘리스 지음, 권혁정 옮김 / 나무처럼(알펍)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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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다시 평범한 아이가 되고 싶어. 학교와 집을 오가며, 다른 사람이 일해 번 음식을 먹고 싶고, 아버지가 계셨으면 좋겠고. 난 그냥 그렇게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데보라 엘리스, 브레드 위너, 첫번째 이야기. 나무처럼. 2020년 첫판 2쇄. 136쪽)


이런 것이 소망일 수 있을까? 소망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소박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 처연하고 슬프다. 누군가는 당연하게 여기는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소원이 된다는 사실이. 그런 소원이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진행 중인 아프가니스탄의 이야기다.


소설은 몇년의 시간을 두고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다. 소설이라고 하기보다는 현실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르포나 다큐멘터리에서 다루기에는 너무도 처참해서 차마 다룰 수 없는 참담함. 비극을 소설은 다룰 수 있기에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겪는 참혹함을 이 소설보다 잘 드러낼 수는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소설이 무겁게 진행되지는 않는다. 어린 소녀가 주인공이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소녀의 시선과 행동을 따라가다 보니, 그렇게 어둡고 무거운 현실 속에서도 희망이, 웃음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이 문학의 힘인지도 모른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이라는 꽃을 피워내는.


총 4권이다. 작가의 말을 읽어보면 [브레드위너]라는 제목으로 3부작이 나왔고, 그 후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4편을 썼다고 한다. 번역은 '소녀 파수꾼'으로 했지만, 영어 제목은 '내 이름은 파바나(My Name Is Parvana')'다. 이 소설의 주인공 파바나.


1권은 아버지가 잡혀간 다음, 남자 없이는 외출이 금지당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삶을 다룬다. 세상에 남자 없이 밖으로 나갈 수 없다니... 그럼 남자가 없는 집은 그냥 집 안에서 굶어죽어야 한단 말인가? 이게 파바나가 남장을 하는 이유다. 파바나만이 아니다. 많은 소녀들이 남장을 하고 일을 하러 나온다.


당연한 일이다. 살아야 하기 때문에. 탈레반이 정권을 잡은 뒤, 외국 유학을 갔다온 아빠는 잡혀가고, 대학을 나온 엄마는 여자라는 이유로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현실. 파바나를 통해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의 모습이 펼쳐진다.


2권은 엄마와 언니가 떠나고, 그들을 찾아 떠나는 파바나의 여정이 그려져 있다. 파바나가 엄마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아이들. 그 아이들 역시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아이들이다. 


수많은 지뢰, 인간 대우를 받지 못하는 여성들, 특히 어린 여자들은 사람이 아닌 취급을 받는다. 그들은 재산일 뿐이다. 이것이 과연 사람 사는 세상인가? 우주로 인간을 보내려고 하는 이 시대에 그런 일이 용납된다는 사실 자체가 끔찍한 비극이다.


3권은 프랑스로 가고 싶어하지만 결국은 아프가니스탄에 남아 일을 하게 되는 파바나의 친구 샤우지아의 이야기다. 개인의 행복을 찾아 떠나고 싶지만, 개인은 행복해질지 몰라도 아프가니스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아니 여성들만의 삶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을 불문하고 많은 아이들이 지뢰로 발을 잃거나 죽임을 당한다. 또한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려는 남성들도 고난을 겪는다. 탈레반의 극단주의를 비판하는 지식인들 역시 고통을 받는다. 


탈레반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사회, 그런 사회를 두고 개인의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에펠탑에서 유럽의 풍경을, 안식을 누리고 있을 때 떠나온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샤우지아는 그래서 프랑스로 떠나지 못한다. 위라 아줌마를 도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돕는 활동을 하게 된다. 이렇게 탈레반 치하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녀들이 겪는 비극을 1,2,3권이 다루고 있다면 4권은 몇 년 뒤다. 


그 후의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탈레반을 축출하는 미군이 등장하면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삶은 행복해질까? 아니다. 행복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마치 신동엽 시인이 노래한 '봄은'이라는 시처럼 말이다.


봄은 - 신동엽


봄은 / 남해에서도 북녘에서도 / 오지 않는다. // 너그럽고 / 빛나는 / 봄의 그 눈짓은, / 제주에서 두만까지 / 우리가 디딘 / 아름다운 논밭에서 움튼다. // 겨울은, / 바다와 대륙 밖에서 / 그 매운 눈보라 몰고 왔지만 / 이제 올 / 너그러운 봄은, 삼천리 마을마다 / 우리들 가슴 속에서 / 움트리라. // 움터서, / 강산을 덮은 그 미움의 쇠붙이들 / 눈 녹이듯 흐물흐물 /녹여 버리겠지.


신동엽 전집, 창박과비평사. 1985년 3판. 71-72쪽.


별로 나아지지 않는다. 내부에서 변화가 오기는 하지만, 아직은 너무도 미약한 변화이기 때문이다. 파바나의 엄마는 여학생을 위한 학교를 세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살해의 이유가 된다. 여전하다. 소련과의 전쟁이 끝나도, 탈레반의 통치가 끝나도, 그리고 미군이 들어와도...


미군이 들어오지만 과연 달라졌을까? 현실에서는 미국 역시 소련과 마찬가지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다시 아프가니스탄은 탈레반의 통치를 받는다. 여성들은 여전히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남자의 예속물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 제목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해피엔딩이라도?'라는 제목. 그럴 수가 없다. 아무리 소설에서 희망을 주려 해도 희망의 처음이 보이지 않으니.


이 소설이 아프가니스탄이 아닌 외국 작가가 썼기 때문에 이렇게 적나라하게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을 표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에게 '봄'이 와야 하는데, 소련이나 미국과 같은 외부에서가 아니라 또 탈레반이 신봉하고 있는 종교라는 힘이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에서 살아온 사람들에 의해, 그들이 서로 존중하고 더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움직임을 보일 때, 남성과 여성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람임을 인정하고 함께 나아가려 할 때 '봄은' 그때 비로소 온다.


파바나나 샤우지아가 그런 봄을 촉발시킬 사람들이다. 그들은 비록 해피엔딩을 꿈꾸지 않지만 좌절하지 않는다. 다른 나라로 피해가지도 않는다. 자신들이 해야할 일을 해나갈 뿐이다. 봄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


파바나와 샤우지아. 그들에게는 아직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이 냉랭한 겨울이겠지만, 그들에게는 이미 봄이 와 있다. 남들과 함께 누릴 봄을 예비하고 있는 그들이다.


여기에 꼭 탈레반이 추종하는 이슬람 극단주의만이 아니더라도, 종교는 사람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사람이 종교를 위해서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서양의 역사를 보면 종교를 위해 사람이 존재해야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 유대교 등등. 지금도 종교로 인해 일어나는 수많은 분쟁들.


이렇게 이 소설은 종교와 사람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도 한다. 4권으로 나뉘어 있지만, 한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는 아주 흥미진진한 소설이다. 여전히 진행 중인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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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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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이다. 한 권이지만 단편소설에 가깝다. 그럼에도 결말을 통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먼 친척집에 맡겨진 소녀 이야기.


얼핏 단순하다. 집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던 아이가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여주는 사람 사이에서 점차 성장해가는 이야기.


아이를 키우는데 연습이 필요하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연습을 하기 위해서는 준비를 해야 한다. 준비 없는 연습은 없으니까.


그런데 부모가 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연습을 할 수는 없다. 아이는 연습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늘 아이는 실전이다. 따라서 연습이나 준비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아이 없이 하는 행위일 뿐이다.


다만, 아이 없이 하지만 아이가 있을 때 어떻게 하겠다는 마음가짐을 지니게 되니, 그런 연습은 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도움이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부모는 연습 없이 부모가 된다. 어느 날 아이가 부모에게 온다. 선물처럼 왔다는 말은 아이와 함께 지낼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는 뜻이지만, 느닷없이 부모가 된 사람들에게는 아이는 선물이 아니라 짐일 수 있다.


짐이 되는 아이. 그런 아이를 부모는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준비도 연습도 없었지만 마음가짐 또한 아이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는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다. 하나의 실수를 하면 부모는 화를 내고, 그러면 아이는 주눅이 들어 또 다른 실수를 하고.


이런 실수가 반복되면 부모는 이 아이는 어쩔 수 없는 아이라고 여기게 되고, 그런 마음으로 아이를 대하게 된다. 부모의 마음은 아이에게 전달이 되고, 이런 가족은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함께 성장해가는 가족이 되지 못한다.


여기저기서 삐걱거리는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아이는 없어졌으면 하는 존재가 된다. 소설 속 아이 역시 마찬가지다. 


많은 아이를 키우기 힘든 부모가 아이를 맡긴다. 아이는 자신이 있는 곳에서 다른 곳으로 보내진다. 보내진다는 말을 내쳐진다는 말로 바꾼다면 이는 아이가 다른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는 말이 된다.


이곳과 저곳. 아이는 어느 곳이 자신이 있을 자리인지 선택할 수가 없다. 그러니 작가가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아빠가 나를 여기 두고 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지만 내가 아는 세상으로 다시 데려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든다. 이제 나는 평소의 나로 있을 수도 없고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도 없는 곤란한 처지다.' (17쪽)


이런 상황. 아이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실수를 안 할 수가 없다. 당연히 실수한다. 그때 그 실수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것이 아이에게는 자신이 맞닥뜨린 다른 세상을 판단하는 가늠할 기준이 된다. 맡겨진 집에서 첫날 오줌을 싸는 실수를 한다. 하지만 새로운 가족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다. 오히려 아이가 민망해하지 않도록 대응을 한다.


그러면서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한다. 아이는 차츰 이 가족에서 자신의 자리를 잡아간다. 가족에서 자신의 자리가 없다고 느끼는 아이는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겉돌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가족에게는 애물단지가 된다.


그러나 가족에서 자신의 자리가 있는 아이는 당당한 가족 구성원이 된다. 함께하는 가족이 된다. 맡겨진 소녀는 이렇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가족 구성원이 된다. 그러던 어느 때, 다시 원가족이 데리러 온다.


소녀에게 진정한 가족은 어디인가. 다시 다른 세상으로 내쳐지는가? 원가족에서 입양가족으로 갈 때의 소녀와 입양가족에서 원가족으로 갈 때의 소녀는 같은 소녀가 아니다.


이미 소녀는 성장했고, 가족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는 소녀가 되었다. 그렇다고 작가가 명확하게 결론을 내고 있지는 않다. 다만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아빠'라는 말 두 번. 이 두 번의 '아빠'가 큰 울림을 준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98쪽)


경고하고 부르는 아빠가 누구인가? 소녀는 누구를 아빠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짧은 소설이지만 맡겨진 소녀를 서술자로 해서 이 아이에게 어떤 가족이 필요한지, 아이가 성장하기 위해서 가족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단지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가 가족일까? 혈연이 아닌 다른 형태의 가족이 더 가족다운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 때가 있다는 사실. [빨강머리 앤]에 나오는 그런 가족의 모습을 이 소설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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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연예인 이보나
한정현 지음 / 민음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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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편의 소설이 묶여 있다. 다 다른 내용이다. 그런데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겹치고, 사건들도 어느 정도 겹치기도 해서 연작소설이라는 느낌을 주는 소설집이다. 분명 연작소설은 아님에도.


등장인물의 이름이 같지만, 내용은 소설마다 다르다. 그러니 이 소설들은 서로 연결이 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 연결이 된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주는 연결성인지, 각 소설에서 펼쳐지는 내용이 서로 연결을 해주는지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이 둘이 소설과 소설을 이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을 이어주는 이런 요소들은 결국 사랑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랑. 누군가의 편견으로 굴절된 사랑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대대로 행해지는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이면서 나아가는 사랑. 그런 사랑들이 이 소설집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각 소설들은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느슨한 연결망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연결망 속에서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삶의 다른 이름이 사랑이라면, 이 소설집을 통해서 삶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각자의 삶은 각자의 삶이 있다. 함께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절대적인 개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내 삶을 누군가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삶을 온전히 내 삶으로 받아들여 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내가 원하는 삶이기도 하다. 그런 삶이 바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사람을 사람으로 보기보다는 어떤 틀에 맞춰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관점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보는 경우. 그런 경우 그 사람을 그 사람으로 보지 않고 사회라는, 틀이라는 관점에서 비틀어서 보게 된다.


즉 틀에서 벗어난 사람을 배제하고 도외시하게 된다. 틀에서 벗어난 사랑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틀에 맞추려고 한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둔갑되어 행사되기도 한다. 사랑이 아니라 폭력인데도,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가 팽배한 사회에서는 틀에 맞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억압받고 배제된다.


그런 모습들이 이 소설집에서 잘 형상화되어 있다. 따라서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무겁다. 읽어가면서 무거운 압력을 느낀다. 짧은 소설이라 금방 읽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니다, 글자들, 문장들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잡는다.


한걸음 한걸음 소설을 읽어나가는 일이 버겁다. 소설의 무게에 눌려 더 천천히 읽게 된다. 그러면서 과거-현재의 틀을 계속 의식하게 된다. 이 틀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앞으로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이 소설집에 나오는 인물들을 통해서 실감하게 된다.


이 소설집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부분 소수자들이다. 틀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틀에서 벗어나 있다고 틀 속에 갇히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틀에서 벗어나 있기에 편견 없이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다.


"아무렴 어때!" 삶은 삶일 뿐이다. 모두에게 모두의 삶이 있을 뿐이다. 그런 삶은 부끄러운 것도,억압받고 배제되어서도 안 되는 삶이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그런 사랑이 소설에 스며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은 무겁지만, 주저앉게 하지 않는다. 무겁지만 한발 한발 나아가게 한다. '우리의 소원은 과학 소년'이라는 소설 속 인물이 하는 말이 마음에 새겨진다.


"이름을 기억할 것" "낙관할 것" (276쪽)


그렇다. 이들은 모두 이름을 지니고 살아가려 한다. 주어진 이름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이름을 짓기도 한다. 소설집 제목에 나오는 '이보나'라는 이름 역시 인물이 직접 지은 이름이다. 이름을 갖는다는 것, 이것은 배제하려는 사회에 맞서 자신을 지키고, 자신도 있음을 알리는 일이다.


트랜스젠더인 인물이 스스로 이름을 '제인'이라고 짓듯이 (제인은 이 소설집 여러 곳에 등장한다. '소녀 연예인 이보나'에서 제인은 자기 스스로 이 이름을 짓고 그렇게 살아가고자 한다), 또한 '우리의 소원은 과학 소년'에서 죽어가는 엄마가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하고 주인공이 스스로 '안나'라는 이름을 짓듯이, 자신을 같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뚜렷한 한 존재로 인식하려는 의도가 이 이름을 짓고, 기억하는 것에 달려 있다.


누군가가 지어준 이름이 아니라 자신이 지은 이름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인물들의 삶은 무겁다. 무겁지만 희망이 있다. 


이 소설집에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기억해야 할 아픈 사건들이 나온다. 그런 사건을 통해서 약한 사람이 더욱 힘들어지는 현실을 작가는 보여주고 있다. 광주민주화운동과 공권력에 의해서 자행된 성추행(성고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등은 물론이고, 성소수자들에 대한 탄압이 얼마나 그들의 삶을 파괴했는지도,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도 소설을 통해서 잘 드러내고 있다.


무겁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래서 소설을 읽으면서 희망을 버리지 않게 된다. 다만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 많은 장애물이 있음을, 결코 빨리 갈 수는 없음을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보다 나중에 나온 소설인데 읽는 순서가 바뀌었지만, 발표 순서와는 관계 없이 소설 속 현실은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일임을 잊지 않게 한다.


책을 내려놓기 싫은 마음이 드는, 천천히 각 소설들의 인물들을 따라서 자꾸 뒤돌아보면서 그렇지만 앞을 향해 뚜벅뚜벅 나아가는 읽기를 하게 한 소설집이다.


좋은 작품을 쓴 작가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서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읽고 난 후에도 여전히 마음에 묵직하게 남아 있는 무거움을 느끼게 한 소설들이니... 그 무거움이 앞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게 한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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