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해설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자기 미화와 이상화를 온전히 걷어낸 묵묵한 성찰의 심연은, 시의 본질은 시적 관조이며 시인의 투명하고 맑은 조응 없이 시는 쓰일 수 없음을 적시한다. 되돌아보는 자로서의 이러한 '나'의 모습은 시의 성찰이 시인의 성찰과 한 몸이며, 시를 형성하는 시원(始原)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를 말해준다.' (182-183쪽)
'시의 끼어듦과 스밈과 호흡은 시인의 외로움과 눈물과 숨결과 바람이다. 시의 얼굴은 시인의 얼굴이다.' (196쪽)
이처럼 시인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다.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세상을 자신의 잣대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처지에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보고 우리에게 알려주는 능력이 있다. 그러한 사람들이 시인이다. 시인이어야 한다. 그런데, 시인의 시가 시인의 삶과 일치하지 않을 때가 있다.
우리나라 대표 시인으로 꼽히는 서정주만 해도 친일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기에 최근에 불거지고 있는 문단의 성추행, 성폭력 사태는 또 어떤가.
다른 존재들에게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난 시인들이 자신들의 동료 문인, 특히 여성 문인들을 성적인 대상으로만 여기는 경우, 아니면 가벼운 농담이나 행위의 (? 성추행에 '가벼운' 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들은 '아무 생각없이' 또는 '관행적으로'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대상으로만 여기고 행동했다는 폭로들이 잇따르고 있다.
전혀 시인답지 않은 행동. 시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들인데... 남자라는 이유로 그것이 무슨 권력이나 되는 양 하는 행동들은 아무리 시와 시인을 분리해서 생각하자고 해도 문제 삼을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시인들이 한둘이 아닌데, 굳이 행동이 바르지 않은, 시만 번지르한 시인들의 시를 우리가 만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일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폭로와 더욱 조심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옛어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 당시는 가부장제 사회였으니, 남자들은 세 끝을 조심해야 한다고.
세 끝. 혀끝, 손끝, 좆끝이다. 입 함부로 놀리지 말고, 손 함부로 놀리지 말고 (이것은 도박을 하지 말라는 의미가 더 강한데), 좆 함부로 놀리지 말라는 것이다. 요즘은 이 세 끝이 모두 성과 관련이 있다.
혀는 성희롱, 손은 성추행, 좆은 성폭행... 이들을 구분한다는 것이 의미없지만 주를 이루는 것이 이런 요소들이라는 것인데...
따라서 이 세 굳이 남자만이 아니더라도 사람이면 조심해야 할 것들인데... 이것을 잘 지키지 않는 시인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는 상황이 안타깝다.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400호 기념시집 '내 생의 중력'을 읽다가 김민정의 '젖이라는 이름의 좆'이라는 시를 발견했다. 이 시에 나오는 '어머 착해'라는 표현을 들을 수 있는 좆을 지닌 인간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좆은 이럴 때 착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지, 상대의 의사와 반해서 놀리면 절대로 이런 소리를 못 듣는다. 그것은 그냥 썰어도 무방한 고기에 불과하다고 할 것이다.
젖이라는 이름의 좆
네게 좆이 있다면
내겐 젖이 있다
그러니 과시하지 마라
유치하다면
시작은 다 너로부터 비롯함일지니
어쨌거나 우리 쥐면 한 손이라는 공통점
어쨌거나 우리 빨면 한 입이라는 공통점
어쨌거나 우리 썰면 한 접시라는 공통점
(아, 난 유방암으로 한쪽 가슴을 도려냈다고!
이 지극한 공평, 이 아찔한 안도)
섹스를 나눈 뒤
등을 맞대고 잠든 우리
저마다의 심장을 향해 도넛처럼,
완전 도-우-넛처럼 잔뜩 오그라들 때
거기 침대 위에 큼지막하게 던져진
두 짝의 가슴이,
두 쪽의 불알이,
어머 착해
홍정선, 강계숙 엮음, 내 생의 중력, 문학과지성사. 2011년 초판 2쇄. 146-147쪽.
시에서처럼 섹스는 일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 그 나눔 뒤에 오는 착함.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과 추행을 구분 못하는 사람은 시인이 아니다. 아니, 그는 직업인으로서의 시인이라고는 할 수 있겠다. 진정한 시인이라고 할 수 없어서 그렇지.
젖은 생명을 키운다. 마찬가지로 좆도 생명을 잉태하게 한다. 비록 키우지는 못하지만 생명 탄생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축복받아야 할 생명 탄생에 잘못 쓰이는 좆은 젖이 아니다. 젖이 될 수 없다.
젖이라는 이름의 좆이 아니라 총이라는 이름의 좆일 뿐이다. 그런 총은 우리 사회에 필요없다. 그러므로 좆이 총이 아니라 젖이 되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야 한다. 시인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새해에는 이런 '미 투(Me, too)' 운동이 과거의 것으로, 부끄러웠던, 그러나 이제는 없어진 그런 행동을 나타내는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시대가 많이 변했음에도 여전히 좆을 총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제는 좆을 젖으로 인식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은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젖이라는 이름의 좆' 정말 환상적인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