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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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라는 말로 소설은 시작한다. 삼십오년, 긴 세월이다. 그 세월동안 주인공이 해 온 일은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는 것, 즉, 폐지를 압축하는 일이다.

 

'폐지'라는 말, 못 쓰게 되어 버린 종이라는 뜻이다. 현실에서 더 이상 제 자리를 찾지 못해 버려진 종이. 그렇다면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는 사람은 사람들과 어울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다기보다는,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사는 사람이다.

 

즉, 그는 고독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는 고독하다. 그런데, 고독하면 조용함, 고요함을 연상하는데, 그의 고독에는 시끄러움이 동반한다.

 

폐지들이 지니고 있는 수많은 생각들, 사건들, 말들이 있고, 이 폐지들과 함께 살아가는 쥐들, 파리들이 있다. 게다가 주변을 감싸고 흐르는 폐수들의 소리들, 그런 소리들이 모두 주인공과 함께 하고 있다.

 

그러니 주인공이 '시끄러운 고독'이라고 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가 사는 삶이 '시끄러운 고독'이라면 사람들은 함께 어울려 사는 듯이 보이지만 너무도 조용한, 즉 제 소리를 내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주인공이 자신을 폐지 더미 속에 던져버리는 것은, 너무도 깨끗한 노동자들의 모습에서 자신이 함께 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젊은 노동자들은 현대를 상징하겠지만, 이들의 깨끗함은 오히려 소통 불가를 상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발전을 향해 앞으로만 나아가기만 하는 그런 상태. 여기에 삼십오년 동안 폐지 더미에서 일한 주인공이 설 자리는 없다. 그에게는 이제 물러남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곧 죽음이다.

 

폐지를 압축하는 일, 수많은 다양함을 단 하나로 줄여버리는 일, 다른 것은 생각 못하게 하는 일. 그는 그 일을 하지만 폐지 압축을 하면서 필요한 책을 그곳에서 빼내어 온다.

 

결코 하나로 압축될 수 없는 다양함을 그는 인정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의 삶도 끝나는 것이다.

 

세상을 하나로 만들 수는 없다. 한 곳에서 쓸모가 다한 존재라도 다른 곳에서는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폐지 속에서 온갖 존재들을 만나다. 예수와 노자를 한꺼번에 만나기도 한다.

 

다양함이 존재하는 곳, 그곳이 바로 그가 일하는 공간이다. 결코 화려하지 않고 남들에게 인정받지도 못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삶은 이런 존재가 있어서 더욱 풍요로워진다. 그런 풍요로움을 우리는 낡음, 퇴보, 쓸모없음으로 여기고 없애버리려 하는지도 모른다.

 

더 각박해지고 걍팍해지는 세상으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짧은 소설이다. 주인공이 폐지들을 압축했듯이 작가 역시 내용을 압축해서 우리에게 던져 주었다. 우리는 이 압축된 소설 속에서 다양함을 찾아 내야 한다.

 

내용보다도 그렇게 압축된 것 속에서 수많은 다양함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 그런 다양함이 존재해야 삶이 더 풍성하다는 것을 이 소설이 말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고독도 '시끄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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