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엮은이는 교사였고, 시인이었으며 지금은 정치인이 된 도종환이다.
시인이 정치를 한다. 플라톤은 공화국에서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고 했는데, 도종환 시인은 공화국을 위해 정치를 하려고 하나 보다.
이 점을 생각하며 이 시집을 생각했다. 공화국에 시집이 필요할까? 시인이 필요없다면 시집은 당연히 필요없다. 그런데,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살아온 이래 시가 없던 적이 있었을까?
시는 어쩌면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하지 않았을까? 비록 우리가 그것을 시라고 하지 않을지라도 시는, 인간의 역사와 더불어 존재했다고 봐야 한다.
단지 직업적인 시인이 없었을 뿐이지. 해가 떠오르는 감탄, 해가 지는 슬픔, 겨울에 겪는 고통, 찬바람을 이기고 새싹이 돋을 때의 환희 이런 것들을 언어로 표현했고, 그 언어의 표현이 바로 시가 아니었을까.
중국에서도 역시 시는 존재했고, 그래서 유교 경전 중에서 "시경"이 아직까지 남아 있지 않은가. 이렇게 시는 우리와 늘 함께 했다. 적어도 근대가 되기 전까지는.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조선시대까지 생각해 보면 전문적인 시인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냥 문자를 아는 사람이라면 시를 창작하고 서로 나누고 했을 뿐이다.
자신의 감정을 시로 써서 표현하는 일이 생활이었다. 이것이 근대에 들어와 전문적인 시인이라는 직업이 생기게 되었고, 전문적인 시인이라는 말과 더불어 시는 사람들의 생활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왠지 전문적인 시인이 아니면 시를 쓰면 안 될 것 같은 생각, 시는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라 쓰는 특정인이 있다는 생각이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학교 교육을 통하여 더. 학교에서는 시는 전문가들이나 쓰는 행위로 결국 학교에서 하는 일은 학생들이 쓴 시는 아마추어에 불과하다고 여겼으니...
그래서 시를 쓰기보다는 읽고 해석하는 쪽에 중점을 둔 교육이 이루어졌다. 시인이라는 직업을 가질 몇몇을 제외하고 시는 자신의 삶과는 관계가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래야만 할까? 아니다. 시는 특정 전문가만이 소유하는 존재가 아니다. 시는 우리들 모두와 함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읽든, 쓰든. 시는 바로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은 공화국에서 추방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공화국에 꼭 필요한 존재다. 특정한 직업인으로서의 시인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그럼에도 현실은 시가 추방당하기 직전이다. 시인이 가장 많은 시대이고, 시가 가장 많이 발표되는 시대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시는 사람들의 삶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다. 멀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가정에 발붙이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어느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가 시를 함께 읽고 이야기하겠는가. 참, 낯선 풍경이다. 상상이 되지 않는.
이런 때 시인은 무엇을 해야 할까? 시는 자신들의 영역이라고 너희들은 건드리지 말라고 해야 할까. 시를 사람들에게서 점점 더 멀게 자신들만 아는 언어로 표현해야 할까. 아니다. 이런 시대 시인은 시를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데려다 주어야 한다.
시는 자신들만의 것이 아니라고, 우리 모두의 것이라고. 우리 함께 읽고 느끼고 쓰자고. 그것이 바로 시인이 할 일이다. 도종환 시인은 그 일을 했다.
가정에서 읽을 수 있는, 특히 가족과 관계 있는 시들을 모아서 엮어 냈다.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시, 2부는 자녀가 부모님께 드리는 시, 3부는 부모와 자녀가 함께 읽는 시다.
상황에 맞게 아무 시나 펼쳐 함께 읽으면 좋을 듯하다. 서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소재로 이 책을 이용해도 괜찮을 듯하고. 먼저 좋은 시를 많이 읽고 마음에 새겨둘 일이다. 그 다음도 나도 쓰고 싶다고 하는 생각이 들면 쓰면 되고. 아니, 읽는 동시에 써도 좋다.
이렇게 시가 우리의 생활이 되었으면 좋겠다. 신동엽의 '산문시1'에서처럼 대통령이 시인을 찾아가는 그런 사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