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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레옷을 입은 구름 ㅣ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10
이은봉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6월
평점 :
'실천문학사' 하면 무언가 사회변혁을 꿈꾸는 그런 내용의 책들이 많았다. 출판사 이름에도 '실천'이 들어가지 않는가.
그래서 실천문학사 시집하면 왠지 사회 비판이나 사회 변혁의 내용이 많이 담겨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80년대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시집들이 했던 역할, 그 출판사에서 펴냈던 책들이 했던 역할이 이렇게 내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이은봉의 이 시집 '걸레옷을 입은 구름'도 그런 생각에서 구입을 한 시집이다. 제목부터 자극적이지 않은가. '걸레옷을 입은 구름'이라니.
분명 환경, 생태를 다룬 시들이 많을 것이야. 그걸 토대로 우리 삶에 대해서 성찰하게 하는 시들이 많겠지 라는 생각을 지니고 읽었는데... 웬걸, 아니다. 잘못 짚었다.
사회 비판이라기보다는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꽃, 나무들에 대해서 따스한 감성을 지니고 바라본 내용들의 시가 많다.
그야말로 비판을 앞세우지 않고 따스한 시선을 따라가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우리 역시 자연과 하나가 되게 하는 시들이 이 시집 도처에서 보인다.
그래서 제목도 꽃이름들이 많고 나무들도 많이 등장하고 한다. 조금은 실망하다가 좀더 생각해 보니, 70-80년대 운동권이었던 사람들이 나중에 환경주의자, 생태주의자로 바뀌는 모습들, 진보정당이라고 하는 민노당, 정의당 이런 정당들 말고 녹색당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사실.
생태와 운동이 따로 갈 필요는 없지만 생태를 도외시한 운동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그리고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 중에 주변의 작은 것들을 따스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다는 점이 - 예를 들면 황대권의 "야생초 편지"를 보라 - 이 시집을 다시 보게 됐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주변의 '작고 하찮고 쓸쓸한 것들'에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는 일, 그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 자세라면 사회의 부조리한 면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일테니 말이다. 생태에 대한 관심이 사회에 대한 무관심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따스한 관심,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따스한 온기를 퍼뜨림으로 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렇게 작은 것들에 대해서도 따스함을 지니는데, 어떻게 사회의 비리에 눈감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사회의 비리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 비판하는 것보다 자기 자리에서 조금씩 조금씩 바꿔가는 모습, 그것이 조금씩 조금씩이라도 전파되어 가게 하는 모습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게 된 시집이다.
그 정점은 바로 자신의 몸에 사는 미생물들, 세균들까지도 사랑하게 되는 일 아닐까 싶다. 세상에 나와 연관되지 않은 것들은 없고, 그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일, 시인의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
셋집
내 몸에도 세 들어 사는 놈들 있구나
그렇구나 내게도 세 내어줄 집 있구나
발가락에, 사타구니에, 겨드랑이에 빌붙어 마음대로 번식하는 박테리아야 바이러스야 자잘한 세균아
내 몸 이곳저곳을 떠돌며 온갖 질병을 일으키는 녀석아
위장에, 간장에, 허파에 멋대로 터 잡고 불쑥불쑥 증식하는 박테리아야 바이러스야 쪼잔한 병균아
내 몸 이곳저곳을 떠돌며 각종 질병을 일으키는 자식아
내 피는 탁하다 칙칙하다 더럽다
별별 욕망이 다 녹아 있는 공중변소의 변기처럼 역겹다
수도 없이 피 맛을 보아온 너희들도 잘 알리라
너희들 역시 생명이기는 하잖니
셋돈 한 푼 받지 않고 살 집 내어주었으니 주인치고는 인심 한번 좋구나
셋집 주인의 권리쯤은 제발 좀 인정해주거라 행여 집주인까지 쫓아낼 생각은 말거라
내 몸에도 세 들어 사는 놈들 있구나
아싸, 내게도 세 내어줄 집 있구나.
이은봉, 걸레옷을 입은 구름, 실천문학사, 2013년. 86-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