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 정치인류학 논고
피에르 클라스트르 지음, 홍성흡 옮김 / 이학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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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샀다. 사실 아나키즘과 관련이 될 거라는 생각에 망설이지 않고 산 책이고. 이 책은 정치인류학 논고라는 작은 제목이 붙어 있듯이, 아메리카 인디언 사회를 분석한 책이다.

 

아메리카 인디언 사회를 사람들은 흔히 원시사회라고 말한다. 이들은 국가를 형성하지 않았기에, 원시사회라는 말은 진보가 되지 않은, 무언가 부족한 사회라는 생각을 하기 쉽지만, 이 책의 저자는 인디언 사회를 원시사회라고 하는 것과 뒤쳐진 사회라고 하는 것은 관계가 없다고 한다.

 

원시사회를 뒤쳐진 사회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직선적 사고 방식에 빠져 있기 때문이고, 이런 직선적 사고방식은 서구의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만약 역사가 이렇듯이 단계적으로 직선으로 발전하는 것이라면 1900년대까지 국가 없는 사회가 어떻게 남아 있겠는가라는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즉 우리는 편의상 원시사회라고 하지만, 이는 인류가 구성한 최초의 또는 바람직한 사회 형태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렇게 보면 원시사회라는 말은 곧 아나키 사회라는 말과 통하고, 박홍규가 북아메리카 인디언 사회에서 아나키 사회를 보고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라는 책을 썼지만, 이 책은 그것보다 훨씬 전에 나온 남아메리카 인디언 사회의 아나키 민주주의를 알려준 글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기획하고 쓴 글이 아니라, 여러 매체에 발표했던 글을 모은 책이긴 하지만, 내용은 매 마지막 장인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로 수렴된다.

 

그래서 각 글들은 독립적이지만 서로 연결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아나키적인 생활 아니겠는가. 나는 나대로 살지만 우리로서 살아간다는.

 

인디언 사회에서도 물론 부족이 존재하고, 부족은 부족들끼리 나름대로의 규칙을 지니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들도 추장을 선정한다. 그러나 그 추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지도자가 아니다.

 

추장의 특징을 이 책에서는 세 가지, 아니 하나를 더해 네 가지로 정리해 놓고 있다.

 

1) 추장은 "평화의 중재자"이다. 그는 집단의 조정자로서 그것은 때때로 평화로울 때 와 전쟁할 때의 권력의 분화로 나타난다.

 

2) 추장은 자기의 재화에 대해 집착해서는 안 된다. "피통치자들"의 끊임없는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 거절하는 것은 곧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3) 말을 잘하는 자만이 추장의 지위를 얻을 수 있다. (39쪽)

 

4) 사회-정치적 단위의 형태와 인구 규모를 불문하고 거의 모든 사회가 일부다처제를 인정하나, 또한 이들 사회의 대부분이 그것을 추장의 배타적 특권으로 인정한다는 사실이다. (43쪽)

 

이것은 바로 교환이라는 것이다. 추장에게는 자신의 이러한 역할에 따른 교환으로 여자들이 따라오는 것이고, 이 교환에 실패한 추장은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니 그가 권력을 강화해서 자신의 지배권을 돈독하게 한다는 얘기는 성립할 수가 없다고 한다.

 

여기서 말을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말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말하는 권력을 소유하는 것이다. 또는 권력의 실천은 말하기의 지배를 확실하게 하는 것, 즉 주인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90쪽)

 

라고 하는데, 인디언 사회에서 말하기는 추장의 의무라고 한다. '추장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다.'(193쪽).라고 한다.  추장의 말하기는 '의례화된 행위'(193쪽)에 불과하여 그는 '거의 매일 지도자는 새벽이나 황혼 무렵에 자기 집단에게 말을 걸어야'(193쪽) 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자기가 하던 일을 할 뿐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이 말은 사회를 유지 결속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이 말을 하는 사람이 단지 추장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네 말과 엄청나게 다르다. 우리는 조금 높다 싶은 사람이 말을 하면 그 말은 곧 성문화된 법의 위력을 지니고 사회에 작동하기 시작하는데... 인디언 사회에서 이런 말의 권력은 없다고 한다.

 

그래서 글쓴이는 이러한 인디언 사회는 '고대적 사회, 각인의 사회는 국가 없는 사회,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이다. 모든 신체에 똑같이 새겨진 각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즉 너희들은 권력의 욕망을 지니지 않을 것이고 복종의 욕망을 지니지 않을 것이다.'(232-233쪽)라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들이 추구하는 사회는 지배자가 없는 사회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인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라는 장에서 앞에서 이야기한 모든 내용들을 정리하고 있다.

 

왜 그들은 국가를 만들지 않았는가? 그것은 필요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왜 잉여생산물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노동하지 않았는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왜 그들은 지도자에게 권력을 부여하지 않았는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반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잘 살 수 있었다고 해야 한다.

 

이제야 겨우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한 나라, 선진국이라고 하는 데는 6시간 노동제를 실시하고 있기도 하지만, 인디언 사회에서는 정말로 많이 일해야 4시간 노동이었다고 하니... 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에 최적화된 노동만을 했을 뿐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우리의 환경을 파괴하고,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노동을 인디언 사회보다 두 배 이상 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러면서도 우리는 모두 삶에 허덕대며 노동의 늪에서 권력의 눈치를 보며 허우적 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쩌면 이 책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인디언 사회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그 노동의 늪에서, 권력의 늪에서 벗어나라고 우리가 잡고 나올 막대기를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벌써 40년 전에...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그 막대기를 필요없다고, 이 곳이 바로 우리가 살 곳이라고, 이 곳 아니면 우리는 살 수가 없다고, 권력을 스스로 인정하고, 불필요한 노동을 하면서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아직도 늦지는 않았다. 최근에 아나키즘이 다시 고개를 들고 나오는 이유도 우리가 더이상 늪에서 허우적거리다가는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지 않겠는가.

 

아나키즘은 우리에게 막대기를 다시 던져주고 있다. 잡고 나오라고. 충분히 나올 수 있다고. 그것은 바로 우리 의지 문제라고.

 

내용들이 전문적인 것도 있지만... 맨 마지막 장을 읽으면 다 잘 정리가 된다. 아니, 마지막 장 하나만으로도 충분할지도 모른다. 이 권력과 노동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데는.

 

그래도 '교환과 권력:인디언 추장제의 역할', '활과 바구니', '말하기의 의무', '원시사회에서의 고문',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이렇게 다섯 장은 꼭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고, 우리 삶을 되돌아 볼 수 있고, 이 늪에서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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