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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넘어 교육으로 - 누스바움 교수가 전하는 교육의 미래
마사 누스바움 지음, 우석영 옮김 / 궁리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교육의 위기
지금 교육은 위기에 처해 있다.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교육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소리가 들린다. 물론 몇몇 나라에서는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그 중에서 교육이 경제 성장에 이바지하지 못한다고, 이게 문제라고 하는 말들이 심심찮게 들린다. 우리나라도 어떻게 하면 경제성장에 이바지하는 교육을 할까 하는 고민을 많이 하고 있고, 대학에서도 사회에서(사실 말은 사회라고 하지만, 이 사회는 바로 회사를 의미하고, 이는 경제성장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관점이 깔려 있다) 필요한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학부를 개편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말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학생들이 진학하는 모습을 보면 최상위권의 학생들은 의대로, 법대(이제는 로스쿨이라고 해야 하나?)로 빠져나가고 순수과학을 하는 학생들이나 인문학을 하는 학생들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그럼에도 아직도 교육은 사회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교육을 관장하는 기관의 이름을 보라. 교육과학기술부이다. 이 말에는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이 기관의 이름 어디에서도 인문학에 대한 강조는 찾을 수가 없다.
돈이 되지 않는 학문은 학문으로서 존립하기도 힘든 상황이 되었다. 이런 상황을 교육의 위기라고 하지 않으면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위기의 교육을 살리는 법
누스바움의 책은 이러한 문제제기에서 출발한다. 지금 교육은 전부 시장중심주의로 흘러 사람다운 사람을 길러내지 못하고 있다. 이는 이익을 위한 교육일 뿐이다. 이익을 위한 교육에서 인간은 주체적인 인간이 되지 못하고, 수동적인, 시키는대로 하는 인간으로 길러질 뿐이라고 한다. 이 때 필요한 교육이 무엇일까?
바로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이라고 한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토론교육이다. 토론 교육, 이는 바로 시민이 되게 하는 교육이기도 하다.
그러면 토론의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식의 논쟁법을 익히는 일이라고 누스바움은 주장한다. 자신의 주장을 명료하게 펼치되, 남의 주장을 경청할 줄 아는 인간, 주장의 맹점을 살필 줄 아는 사람으로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교육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기검토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길러야 한다고 한다. 자기검토를 하지 못하는 인간, 즉 자기성찰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는 우리가 말을 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인간은 목표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남의 말에 쉽게 휘둘리고, 서로를 공경심 없이 대하기 십상이라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고 한다.
우리 교육에 비춰보자. 우리는 과연 자기검토, 자기성찰을 할 수 있는 학생들을 길러내고 있는가? 오직 주어진 것만을 달달 외우도록, 생각이 거세된, 주어진 것만을 학습하도록 하지 않는가? 수많은 자기주도학습법이 난무하고 있지만, 말만 자기주도학습법이지 사실, 이마저도 주어진 학습방법을 밥을 받아먹듯 그냥 받아들이게끔 하지 않는가?
그래서 소크라테스식 논쟁이 중요하다고 한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식 사색은 그 어떤 종류의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중요하다'(104쪽)고 누스바움은 주장한다.
이런 논쟁 방식에 이어 누스바움은 '세계 시민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한다. 세계 시민 교육은 자기 것을 잊고 세계인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기 것을 익히되, 남의 것도 익히는, 남의 것은 남의 것대로 나름의 특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교육을 하자는 것이다. 이는 어릴수록 좋다고 한다.
우리는 흔히 다름을 틀림으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말 그대로 다름은 다름일 뿐이고, 이 다름들이 바로 다양성을 이루고, 우리들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한다는 사실을 어려서부터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다름을 몸으로 익히기 위해서 필요한 요소가 바로 상상력을 기르는 일이다. 이 상상력은 문학과 예술을 통해서 습득이 될 수 있다. 많은 나라에서, 또 우리나라에서도 문학과 예술을 홀대하며, 기술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미래를 보고 교육을 한다면, 그리고 온전한 인간으로 홀로 설 수 있으며, 남과 공감할 수 있는 인간은 이런 인문학을 통해서 형성된다고 누스바움은 주장하는 것이다.
단지 문학과 예술만이 아니라, 놀이를 통해서도 형성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놀 시간이 없는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놀 시간을 줘야한다는 데 동의하게 된다.
이대로 가면
교육은 희망이 없다. 무언가 방향을 바꿔야 한다. 방향은 명확하게 나와 있다. 단지 우리가 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의 교육과정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전면적인 개편을 해야 한다.
놀 시간이 없는 우리 아이들에게 놀 시간을 마련해줘야 한다. 그리고 평가방식을 바꿔야 한다. 지금과 같은 일제식, 선다식 평가로는 학생들의 토론 능력, 자기성찰 능력, 남과 공감하는 능력을 기를 수 없다.
다들, 위기다, 위기다 한다. 그럼에도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 고쳐야 하는데...
따라서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읽어야 한다. 읽고, 우리 교육을 이런 방향으로 이끌어가자고 압력을 넣을 수 있어야 한다. 단 한 번에 교육이 바뀌기를 바라는 것은, 마치 우연히 잡혔던 토끼를 나무아래서 기다리는 어리석은 나무꾼의 모습과 같다.
우리들 스스로 바람직한 교육의 방향에 대해 토론하고, 토의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은 교육분야에서 영향력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읽어야 한다.
그들이 읽고, 이 책에 나온 내용과 우리나라 교육현실과 비교를 하고, 바람직한 교육이 어떤 것인지 그들은 제시해야 한다. 이렇게 하자가 아니라, 이렇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야 한다.
국민들이 단일한 집단인 국민으로서가 아니라, 모두 자신의 생각을 지니고 있는 개개인으로서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되게 교육해야 한다.
그것이 교육이 살 길이다. 나라가 살 길이다. 지금처럼 가면... 앞날은 어둡다.
덧말
이 책의 옮긴이의 말. 참 읽을 만하다. 여러모로 생각할거리가 많다. 누스바움의 논의를 읽고, 이를 우리나라의 현실에 적용하려고 한, 적용해야 한다고 하는 글이다. 옮긴이의 말을 읽어두면 좋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