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평전 - 솥에서 난 성자
김형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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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원불교 대종사 소태산 박중빈. 어렸을 때 이름은 박진섭, 그 다음 이름은 박처화, 그 다음이 박중빈. 오랜 구도 끝에 진리를 발견한 사람. 발견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에게 알린 사람.


하지만 그가 살던 시대는 일제시대. 민족이 억압을 받던 시대. 민중을 구원한다는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민족 구원? 아니다. 민족이라는 한계를 정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원하지만, 독립운동에 투신하지 않는다. 조선인, 일본인, 그리고 세계인을 구원하려는 목표를 세운다. 이것이 종교다. 특정 집단에 국한되지 않는. 지금은 특정 집단에 국한되어 다른 집단을 배제하고 있지만, 종교의 처음이 그랬을까?


배제가 아니라 포용 아니었던가. 누구나 나와 같은 존재라는 인식. 그래서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노력. 나만이 진리를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깨우치는 세상. 그렇다고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 강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도록 이끌어주는 과정. 이것이 종교의 본질이다.


소태산! 한자어로 살필 필요가 없다고 한다. 당시에는 한자를 많이 쓰던 시대였고, 호(號)라든지 자(字)라든지 본명 외에 다른 이름을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주로 한자를 썼으니, 박중빈 역시 자신의 호를 한자로 음차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솥에 산'이라고 부른다. 솥을 생각한다. 솥이 무엇인가. 하나의 존재가 다른 존재로 바뀌는 공간 아닌가. 그렇게 바뀌기 위해서는 그냥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열기와 습기 등을 견뎌내야 한다. 그것을 견뎌내면 다른 존재로 바뀌게 된다. 그것을 하는 존재가 바로 솥이다.


쌀과 물을 넣고 끓이면 밥이 되듯이 솥은 하나의 세상에서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솥에 산'이라는 이름에는 이미 다른 존재로 변한 자신을 말해주고 있으며,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변하게 한다는, 함께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솥에는 어떤 존재들이 들어갈까? 소위 귀하다고 할 수 있는 존재들이 들어갈까? 아니다. 솥에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얻을 수 있는 존재들이 들어간다. 그냥 보통 존재들. 그것들이 솥에 들어가서 우리들을 살게 해주는 존재가 되어 나온다. 그렇다고 솥에 보통 것들, 귀하지 않은 것들만 들어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솥에는 귀한 존재들도 들어간다. 당시 귀하던 고기도 솥에 들어가 삶아지지 않던가. 그러면 다른 음식이 되어 나온다.


즉 '솥에 산'에는 바로 이런 의미가 있다. 약한 하층민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특권층도 포함한 모두를 아우르는 진리. 그것을 설파하고 함께하겠다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 맞게 소태산은 약한 사람들이 더 힘들어지지 않는 삶을 살게 한다. 간척사업을 해서 식량난을 해결하고 자금을 확보하려든지, 당시 가장 약한 층에 속했던 여성들도 동등한 대우를 받고, 동등한 활동을 하게 한다든지, 일제 순사 출신까지도 포용을 하며, 일본인인 경찰 고위 관료조차도 함께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에 다양한 종교를 아우른다. 진리의 길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 사람을 배척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끌어들이려고 하지도 않는다.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도록 할 뿐이다. 그 사람이 스스로 깨치지 못하면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도 강조한다.


지금 자신들의 종교를 강요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를 소태산의 모습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엄혹한 일제시대, 어떤 사람들은 소태산이 더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3.1운동 당시 제자들의 태도에서도 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소태산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때가 오지 않았다는 판단도 있고, 종교를 민족의 한계로 국한시키려 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있다.


이런 소태산의 모습에서 예수나 부처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들 역시 민족적 요구와 진리 추구 사이에서 민족의 입장에 서라는 요청을 받지 않았던가. 하지만 민족의 경계 내에 머무르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적인 종교로 설 수 있지 않았을까.


즉, 종교는 경계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허무는 것이기 때문에, 민족이라는 경계를 나눌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은 핍박을 받고 있지만, 핍박하는 사람들이 다른 민족 전체는 아니니, 다른 민족의 성원들과 함께 그러한 억압을 떨쳐내고 진리의 길에 들어서려고 하지 않았을까.


솥은 자신에게 들어온 존재들을 가리지 않는다. 그 각각 다른 존재들이 솥 안에서 하나가 된다. 여럿이 하나가 되는 일, 내가 어거지로 말한다면 그것이 바로 만법귀일(萬法歸一)이다. 소태산은 그런 일을 하려고 했다. 그렇다면 하나가 된 법은 어디로 갈까? 일귀하처(一歸何處)라고 묻는다고 한다.


어디로 가긴. 다시 만법(萬法)으로 가지. 그 만법은 예전과 같은 만법이 아닌 변한 만법. 즉 만이지만 하나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솥에서 다른 존재로 하나가 된 존재는 다시 여럿에게로 돌아간다. 여럿에게로 돌아가는 하나. 그 만법과 하나가 바로 원이다. 일원이다. 돌고돈다.


하여 원불교의 상징이 원이다. 돌고 돎. 엄혹한 시대를 살았던 소태산 박중빈. 그가 당시 사람들에게 남겼던 진리의 길. 그것은 희망의 길이자 행복의 길이었을 것이다. 솥 속에서 다른 존재로 변한 사람들은 자신이 걸어왔던 길과는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소태산이 우리에게 보여준 진리의 길일 것이다.


참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 평전이었는데,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에서 만법귀일이 아니라 만법이 만법으로, 경계를 허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계를 만들고 더 높고 튼튼하게 쌓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한다.


나와 다른 너는 몰아내야 할 존재가 아니라 함께해야 할 존재라는 것. 솥에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뜨거운 열기를 함께 견뎌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다른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 뜨거움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서로가 서로를 안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것이 소태산의 사상이기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종교를 떠나서 한 사람의 일생을, 고민을, 그가 한 실천을 알아가는 과정 자체로 이 책은 큰 의미를 지닌다. 많은 사람이 읽으면 좋을 책이다.


부처님 오신 날. 소태산 그의 사상과 실천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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