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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누아르 ㅣ 달달북다 3
한정현 지음 / 북다 / 2024년 8월
평점 :
‘러브’와 ‘누아르’가 함께 쓰일 수가 있을까? 누아르라고 하면 우선 폭력이 떠오르니,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 소설은 가장 거리가 멀다고 여겨지는 두 낱말을 하나로 묶어 놓았다.
그런데 잠깐 생각해 보니 폭력을 사랑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랑하니까 때리는 거야 라는 말.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고, 고운 자식 매 하나 더 준다는 속담도 있으니, 폭력과 사랑이 하나로 묶여 사용된 예가 있다.
반대로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이 있다. 폭력은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말에는 폭력에 사랑이 있다는 듯이 말하지만, 폭력은 폭력일 뿐이고, 이러한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를 뿐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러브 누아르’는 무엇일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났던 폭력을 이야기한다고 하면 될까? 이 소설에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기는 힘들지만, 한쪽에서는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모습이 나오기는 나온다. 직위를 이용해 약자의 성을 이용하는 그런 모습.
1980년대, 독재자가 나라를 다스리던 시대다. 권위주의적 시대라고 해도 좋다. 여기에 여성 노동자들의 상황은 어땠을까? 그들은 자신의 직장에서 자아실현을 하고 있었을까? 그때까지만 해도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온갖 차별을 받지 않았던가. 또한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교육을 받게 하지 않고 직업을 갖도록 내모는 일들도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동생들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이유로 공장에 취업한 ‘장녀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딸들에게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주입시켰던 시대. 그것이 ‘누아르’가 아니고 무엇일까? 아들에게는 환한 미래가 보장되는, 적어도 그러한 기회가 주어지는 때에 딸에게는 캄캄한 현재만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사랑,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졌던 그러한 일들이 바로 ‘폭력’이다.
소설의 주인공 ‘선’도 마찬가지다. ‘선’이라는 이름이 있지만 직장에서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는 없다. 그냥 성을 따라서 ‘미쓰 박’이다. 다른 여성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미쓰 윤, 미쓰 최, 미쓰 리’일 뿐이다.
이름을 불리지 못하는 존재, 자신의 정체성이 남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였던 것. 그런 폭력적인 상황에서 ‘러브 누아르’라고 하면 이제는 그것을 벗어날 수 있는 존재로 바뀌는 것이어야 한다.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하는 것. 그런 존재가 있어야 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미쓰 리’가 그런 역할을 한다. 차별이 심한 직장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지내는 존재. 그런 존재감만으로 ‘선’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 그 사람을 ‘선’은 사랑한다. 이때 사랑은 이성애적, 또는 육체적 사랑을 의미하지 않고, 동경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그런 사랑.
‘선’은 미쓰 리가 무엇을 쓰는가를 본다. 그것이 바로 ‘러브 누아르’라는 소설이다. 이렇게 작가는 소설 속에서 또다른 소설을 들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이 소설을 통해서 ‘선’은 비로소 남이 규정한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선’은 독서 모임에 참여하게 된다. 이제는 남이 주입한 대로 살아가는 ‘선’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찾는 ‘선’이 되는 것이다.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찾는 것이다. 소설의 말미에 미쓰 리의 이름이 이성희라고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는 이름이 없는 미쓰 리가 아니라 당당한 작가인 이성희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선’도 마찬가지다. 미쓰 박이 아니라 ‘박 선’이라는 이름으로, 당당한 주체로 살아가려 한다.
이것이 ‘러브 누아르’다. 홍콩 영화에서 보면 주인공이 폭력으로 악당들을 물리치지 않나? 이 소설에서는 ‘사랑’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어둠을 몰아내고 있다. 아직은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를 강타하기 전, 직장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자리를 주장하지 못하던 때, 그때에도 자신들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또 주변의 주입에 넘어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던 사람들이 있었음도 이 짧은 소설에서 보여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여성들에게는 어둠이었던 시대. 그 시대에서 당당한 주체로 서 나가려는 모습을 지닌 사람들도 있었음을, 그러나 그것이 지금 시대에도 어려운 일임을 소설 마지막에 작가 자신을 등장시켜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이젠 사랑으로 자신을 찾아가는 '러브 누아르'라고 할 수 있게 된다.
그냥 주어지는 일은 없음을, 많은 사람들의 좌절을 딛고 한발 한발 나아간 결과가 지금 그나마 여성들이 주체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음을, 그러나 이것이 완결이 아니라 진행형임을 생각하라고,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러브 누아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기억하라고 하는 듯하다.
이 소설은 본래 기획이 ‘칙릿(Chick Lit)’이 주제였다고 한다. 젊은 여성이 자신의 일과 사랑을 당당하게 이뤄나가는 모습을 다룬 작품들을 단순하게 ‘칙릿’이라고 할 수 있다고...
그렇지만 작가는 과연 우리 시대에도 ‘칙릿’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지금도 의문시되는데, 과거에 그런 일이? 물론 있을 수도 있지. 몇몇 뛰어난 인물들에게는. 하지만 그 뛰어남은 보통이 되지 못하고, 개인의 탁월함에 그칠 수밖에 없었으니, ‘칙릿’이 하나의 장르가 되기 위해서는 보통 사람들도 그러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등장시킨 인물이 ‘박 선’이라고... 칙릿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환상소설이라고, 작가가 꿈꿀 수 있는 그런 상황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자신의 꿈 앞에, 좋아하는 사람 앞에 조심스러우면서도 끈질기게 희망하는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다. 그들의 슬픔보다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 (78쪽)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등장인물인 ‘박 선’을 보면 작가의 의도가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고. 이제 굳이 ‘칙릿’이라는 장르가 존재할 필요가 없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누구나 자신의 일에서 당당할 수 있고, 주체성을 지닌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면, 그러한 인물은 이제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을 테니까.
소설에는 현재 없는 인물, 또는 현재와 불화하는 인물이 등장하기 마련이니 그런 세상이 온다면 ‘칙릿’이란 장르는 사라질 것이다. 그러한 날을 기대하면서... 한정현의 다음 작품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