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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당한 유언들 ㅣ 밀란 쿤데라 전집 12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살아 생전에 인정을 받은 작가들도 있지만, 살아 있을 때는 별 주목을 받지 못했거나 또는 엄청난 혹평에 시달린 작가들이 있다. 그들은 예술에 새로움을 불러와 그 시대의 사람들과 불화한다.
이를 쿤데라는 '어떤 예술 작품의 본질적인 것은 그 새로움(새로운 형식, 새로운 문체,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식)에 있으며, 몰이해에 맞닥뜨리는 것은 당연히 바로, 이 새로움인 것이다. (365쪽)'라 하고 있다.
새로움, 그냥 낯섬이 아니라 낯섬 속에서 무언가를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작품들. 이 작품들은 언제든 우리 곁으로 온다. 우리들에게 인정을 받는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품, 작가들도 있고,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작가들도 있다.
잘 알려진 작가로 화가 고흐가 있지 않나, 우리나라에서는 이상이 있다고 하면 될 테고. 유렵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이상과 같은 작가로 카프카를 꼽으면 카프카에 대한 실례가 될까? 그가 이상보다는 먼저 나고 먼저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니까, 이상을 한국의 카프카라고 하면 될 수도 있겠다.
이상이 죽고 김기림은 쥬피터(제우스)에 이상을 빗대어 표현한 시를 썼는데(쥬피타의 추방-이상의 영전에 바침), 이상이 죽은 뒤 우리나라 시단이 반 세기나 뒤로 갔다고 아쉬워하는 김기림. 그런 김기림에 빗댈 수 있는 사람이 카프카의 유언을 배신하고 그가 남긴 글들을 출판한 막스 브로트 아닌가 한다.
카프카를 거의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은 브로트. 하지만 쿤레라는 이 책에서 카프카를 그렇게 규정지은 브로트를 비판하고 있다. 브로트가 처음으로 카프카를 한정지었기 때문에 후속 연구자들도 거기서 벗어나기 힘들었다고.
브로트는 카프카를 세계문학에 위치시키기보다는 아주 작고 협소한 부분으로 후퇴시켰다고 쿤데라는 이 책에서 비판하고 있다. 배신당한 유언으로 카프카를 우리가 알게 되었지만, 카프카가 남긴 유산을 더 추적하고자 하는 욕구를 제한당하고 있다는 비판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쿤데라의 말을 직접 살펴보자.
'헤르만 브로흐는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스베보와 호프만슈탈과 함께 소(小) 맥락 속에 넣는 것에 항의했었다. 가엾은 카프카, 그에게는 이 소맥락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에 대해 얘기할 때 사람들은 호프만슈탈도, 만도, 무질도, 브로흐도 돌이켜 보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에게 남겨 둔 유일한 맥락은 펠리체, 아버지, 밀레나, 도라라는 맥락뿐이다. 그는 소설사와 동떨어진, 예술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자신의 전기라는 소-소-소-맥락 속으로 되돌려 보내진 것이다.' (400쪽)
이게 아니다. 소설은 작가의 자서전이 아니다. 그러니 소설 속에서 작가를 찾으려고 너무 애써선 안 된다.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살아가는 인물을 우리에게 보여줄 뿐이다. 그것이 혹 작가 자신이라 해도, 작가가 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쿤데라가 우려하는 '타인의 사생활을 유포하는 것, 이것이 습관이 되고 규칙이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과연 개인이 생존할 것이냐 멸할 것이냐가 중대 관건이 되는 그런 시대로 들어서게 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387쪽)' 이런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 작가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지금 우리는 이런 위험, 위협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다른 매체들에 의해서. 조심해야 한다.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을 작가의 사생활과 연결시키는 것도 위험한데, 그냥 개인의 사생활을 파헤쳐 까발리려 하는 행위는, 인간이 인간에게 수치심을 주는 가장 지독한 행위일 수 있는 것이다.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의 작품을 남겨 우리에게 물려준 것은 공에 해당하지만, 카프카가 굳이 출판하고 싶지 않았던 글들까지 출판한 것은 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나는 과(잘못)보다는 공이 더 많다고 생각하지만.
문학, 예술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이 책이지만, 문학과 예술이 무엇인가? 결국 우리 삶에 대한 이야기 아닌가. 그러므로 쿤데라의 이 책에서는 작가를 대하는 태도도 나와 있지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한다.
짧은 글들의 모음. 그러나 연결이 되는 글들. 소설로 치면 연작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글들은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죽은 뒤에 그들의 작품이 어떻게 평가되고 향유되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2023년에 세상을 뜬 쿤데라, 노벨 문학상이 놓친 또 한 명의 작가로 이름을 올리게 된 작가. 이렇게 내가 이야기하는 것도 쿤데라에게는 실례일 수 있겠다. 그는 결코 그런 평가를 바라지 않았을테니.
기억할 만한 구절들도 많아, 아래에 남겨둔다.
~라블레의 책은 전적으로,그리고 근본적으로 소설이 된다.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땅 말이다. - P14
도덕적 판단을 중지한다는 것, 그것은 소설의 부도덕이 아니라 바로 소설의 도덕이다. 즉각적으로, 끊임없이 판단을 하려 드는, 이해하기에 앞서 대뜸 판단해 버리려고 하는 뿌리 뽑을 수 없는 인간 행위에 대립하는 도덕 말이다. 이 맹렬한 판단 성향은 소설의 지혜라는 관점에서 보면 더없이 고약한 어리석음이요 다른 무엇보다 해로운 악이다. - P15
웃음이 소설의 공기 속에 보이지 않게 퍼져 있다는 점에서, 소설적 세속화야말로 다른 무엇보다도 해롭다. 그래서 종교와 유머는 사실 양립할 수 없다. - P18
소설은 ~ 다른 법칙에 토대를 둔 다른 세계다. 유일 진리가 맥을 못 추는 곳, 악마적 모호성이 모든 확실성을 수수께끼로 만들어 버리는 지옥 같은 곳이다. - P 42
유머란 이 세계의 도덕적 모호성을 드러내는,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다른 사람을 심판할 수 없는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신성한 빛이다. 유머란 인간사의 상대성이 대한 도취요, 확실한 건 없다는 확신에서 오는 기이한 즐거움이다. - P50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것이 뭔지도 모르는 채 죽는 것이다. - P190
서정, 서정화, 서정적 담론, 서정적 열정은 흔히 전체주의라 불리는 세계의 구성 요소다. 전체주의 세계는 그냥 굴라그가 아니라 사방의 담이 시로 수놓인, 그리고 사람들이 그 앞에서 춤을 추는 그런 굴라그인 것이다. - P234
곡의 구성(곡 전체의 건축적 편성)을 작곡가가 자신의 창의력으로 채우기 위해 빌리는, 그런 미리부터 존재하는 하나의 틀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구성 자체가 하나의 발명, 작곡가의 독창성 전체가 투영되는 그런 발명이어야 한다. - P256
진정으로 소설적 사유(라블레 이후 소설이 알게 된 사유)는 언제나 체계와 규율에 반한다. - P259
신념이란 게 무엇인가? 정지된 사유, 굳어버린 사유요, ‘신념을 가진 사람‘이란 곧 한정된 사람이다. 실험적 사유는 설득을 하려는 게 아니라 영감을 주고자 한다. 어떤 다른 사유에 영감을 주고, 사유 행위 자체를 자극하고자 한다. 그래서 소설가는 자신의 사유를 철저하게 탈 체계화해야 하고, 그 자신이 자기 아이디어들의 주위에 세운 바리케이드에 발길질을 가해야 한다. - P260
인간은 안개 속을 나아가는 자다. 그러나 과거의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해 뒤돌아볼 때는 그들의 길 위에서 어떤 안개도 보지 못한다. 그들의 먼 미래였던 그의 현재에서는 그들의 길이 아주 선명하게 보이고,펼쳐진 길 전체가 눈에 들어온다. 뒤돌아볼 때, 인간은 길을 보고, 나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의 잘못을 본다. 안개가 더는 거기에 없다.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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