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흑인이라서, 다른 이유는 없다
제임스 볼드윈 지음, 박다솜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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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흑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온갖 차별을 받아야 한다면? 그게 온당한 일일까? 아니 온당하다는 표현을 넘어서 그것은 범죄에 해당하지 않을까? 혐오 표현, 혐오 행동을 세계적으로 범죄로 취급하고 있는데, 피부색을 이유로 차별을 받는 것 역시 혐오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런 행위를 한 사람들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것도 강하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자유민주주의의 나라라고 하는 미국에서, 걸핏하면 미국을 본받자고 성조기까지 들고 나와 시위하는 이 나라 사람들이 그렇게도 선망하는 미국에서 흑인은 여전히 차별받는, 혐오당하는 존재다.

 

노예해방이 이루어지고, 흑백 분리가 철폐되었지만 현실에서 흑인은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다. 주변부로 밀려날 뿐만 아니라 백인의 폭력에 희생되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유리 천장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대놓고 흑인을 폭행하는 백인 경찰들이 여전히 많은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대다수의 흑인이 사는 동네는 할렘이다. 도시에서 공동화된 곳. 그곳에는 마약과 폭력이 넘쳐난다. 백인들은 감히 그곳에 들어가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게 바로 지금 미국 흑인들이 처한 현실이다. 그들이 그런 삶을 원하겠는가. 원하지 않음에도 어떻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반에 나온 볼드윈의 이 책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이 슬프고, 그가 외친 것들이 실현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 답답하다. 그렇지만 현실을 부정할 수 없으니...

 

이 책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조카에게 보내는 편지 내용과 자신의 체험을 담은 글. 두 편 모두 흑인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런 흑인이기 때문에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주장들이 지금도 실현되지 않고 있어서 씁쓸하지만, 이 주장을 피부색에만 적용하지 말고 우리의 삶에 적용을 하면 '혐오 표현'에 대해서 반성하게 되기도 할 것이다.

 

조카에게 쓴 편지글에 이런 내용이 있다.

 

네가 백인처럼 되려고 애쓸 까닭은 없다. 그들이 너를 수용해야 한다는 주제넘은 가정에는 근거가 없다. 내 오랜 친구야, 정말 끔찍한 사실은 네가 그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다. 아주 진지하게 하는 말이다. 너는 그들을 받아들이되,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저 순진한 사람들에게는 다른 희망이 없으므로. 과연 그들은 아직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역사의 덫에 걸려 있고, 그 역사를 이해하기 전에는 덫에서 풀려날 수 없다. (27쪽)

 

늘 강자로 살아온 사람은 약자의 설움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한다. 자신은 그런 처지에 있지 않았으므로. 그의 주변에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들만이 있을 뿐이므로.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진실이 아님을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니 볼드윈이 조카에게 백인처럼 되려고 애쓰지 말고 오히려 네가 그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것도 사랑으로 받아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모르고 있음으로. 아는 네가 우위에 있는 것이므로. 너는 더 잃을 것도 없으므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 길도 흑인들에게는 험난한 길임을 조카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자(백인이다. 문맥상 보면)들은 네 형제들이다. 네가 잃어버린 어린 형제들이다. 만약 <통합>이라는 단어에 의미가 있다면 이런 뜻일 테다. 우리 형제들이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보고, 현실 도피를 그만두고, 현실을 바꾸기 시작하도록 우리가 사랑으로 강요해야 한다는 것. (28-28쪽)

 

그런데 백인들은 여전히 현실을 보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렇게 그들 주변은 왜곡되어 있다. 진정한 현실을 볼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존재, 그 존재가 바로 흑인이다. 그 짐을 흑인들이 기꺼이 져야 한다고 볼드윈은 말한다.

 

다른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흑인들만의 나라를 미국에서 만드는 것에 반대한다.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흑인들의 권리 향상이 이루어진 것도 흑인들의 노력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상황과 맞물려 이루어진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한다. 또한 흑인들이 증오가 아닌 사랑으로 백인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이 책이 나온 지 60년이 되어가는 지금 미국에서 보여주고 있으니...

 

그가 이 책에서 쓴 글은 지금도 유효하다. 몇몇 내용을 인용한다.

 

교회에는 진실로 사랑이 없었다. 증오와 자기혐오와 절망을 가리는 가면만이 있을 뿐이었다. 성령의 거룩한 힘은 예배와 함께 끝났고, 구원은 교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나는 모두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 말은 신을 믿는 <우리>에게만 해당되었고, 백인에게는 전연 해당 사항이 없었다. (66쪽)

 

대학을 나와도 버젓한 직장을 가질 수 없었던 미국 흑인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펼칠 수 있는 무대는 교회였다. 이것이 초기 흑인 민권운동에서 목사들이 많았던 이유라고 한다. 볼드윈 역시 교회에 나가 설교를 한다. 그런데, 그는 교회의 한계를 깨닫는다. 그 점을 드러내고 있는 말이다. 지금 교회는 어떤가? 미국 교회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교회도 볼드윈의 이 말에 해당되지 않는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자, 가진 자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글이 있다. 명심해야 할 말이다.

 

예속된 자들에게 잠재되어 있는 미개척의 힘과 마주하기 위하여, 도덕적 무게를 지니고 움직이는 인간으로서 살아남기 위하여 미국과 다른 서구 국가들에게 주어진 과제가 있다. 스스로를 점검하고, 현재 신성시되는 것에서 풀려나고, 너무나 오랫동안 자신들의 삶과 고뇌와 범죄를 합리화하는 데 사용해 온 대부분의 전제를 버리는 것이다. (72쪽)

 

그들의 조상이 자유를 사랑하는 영웅들이었다는 미신, 그들이 최고로 위대한 나라에 태어났다는 미신, 미국인들이 전시에는 무적이고 평시에는 현명했다는 미신, 미국인들이 멕시코인과 인디언과 다른 이웃이나 약자들을 언제나 명예롭게 대했다는 미신, 미국 남성이 세상에서 가장 솔직하고 정력적이며 미국 여성들은 순수하다는 미신. 니그로들은 그런 미신을 믿기에는 백인 미국인들을 너무나 잘 안다. (140쪽)

 

자신을 걸지 않는 한 아무것도 줄 수 없다. 자신을 걸 수 없는 사람은 단순히 줄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자유를 주는 유일한 방법은 그를 자유롭게 풀어 주는 것이다. 미합중국은 니그로에게 자유를 줄 만큼 충분히 성숙한 적이 없었다. (122쪽)  

 

이런 백인에게 흑인들의 처지를 맡길 수만은 없다고 한다. 그렇다.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 그것도 서로를 증오에 빠뜨리는 폭력이 아닌, 서로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포용의 방법으로. 볼드윈의 이 말들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분쟁에도 적용이 될 수 있겠단 생각을 한다.

 

사람은 자존감 없이 살 수 없고,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한다. 그것이 잃을 것 없는 사람이 어떤 사회에서든 제일 위험한 피조물인 이유다. 그런 사람이 열 명이나 필요한 것도 아니다. 한 명이면 족하다. (109쪽)

 

자신의 상태를 견딜 수 없지만 심한 억압에서 자신의 상태를 바꿀 능력도 없는 사람은 항상 부도덕한 권력자들의 손바닥 위에 놓이기 때문이다. (126쪽)

 

백인이 해방되는 대가는 도시와 시골, 법 앞과 정신 속에서 흑인이 완전하게 해방되는 것이다. (134쪽)

 

증오를 쏟아부으며 당신의 목을 짓밟는 자를 마주 증오하지 않으려면 대단한 영적 회복력이 필요하다. 당신의 아이들에게 증오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으려면 그보다 더 큰 기적에 가까운 통찰과 관용이 필요하다. (138쪽)

 

유한한 지구다. 우주 역시 무한하다고 하지만 인간의 한계일 뿐, 우주 역시 유한하다. 그렇다면 유한한 공간에서 유한한 시간 속에 사는 인간들이 서로를 보듬고 살면 좋지 않겠는가. 똑같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내가 다른 존재들이 있음으로 해서 유한한 삶을 무한하게 확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지 않겠는가.

 

피부색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다름도 차별이 되어서는 안 됨을 다시금 생각하는 글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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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8-28 1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으려고
빌려 놓았는데 아직도 민기적거리고
있네요.

최근 위스콘신에서 또다시 총에 맞은
세 아이의 아버지 뉴스에 충격을 받았
습니다...

어떤 종류의 차별에도 반대합니다.

kinye91 2020-08-29 09:50   좋아요 0 | URL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다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동경하는 미국에서 여전히 차별이 존재하고, 차별이 생명을 위태롭게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는 것, 그것이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것이 안타까워요. 어떤 형태든 차별은 사라져야 한다고 저도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