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조이스를 읽기 시작하다. 물론 많은 책을 읽지 못하고, 그가 쓴 소설 중에 '더불린 사람들'과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었고, 그 여세를 몰아 '율리시즈'를 읽어보기로 하다.
그리고 읽다. 그냥 읽다. 상·중·하 세 권. 예전 판이다. 사다 놓은 지 꽤 오래. 아마도 20년은 넘었나 보다. 책 밑에 써놓은 것을 보니 95년과 96년에 구입했다. 알라딘 상품 넣기에 이 책을 치면 이미지가 없다. 그만큼 오래 된 책이란 소리.
산 시기에 차이가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상권을 읽다가 나머지를 구입한 듯. 분명 헌책방에서 구입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때는 충분히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보다.
물론 상권만 읽고 나머진 읽지 못했다. 어려웠기 때문. 그리고 시간이 흘러 흘러 나이도 먹고, 소설을 읽기도 꽤 읽었다고 했으니, 다시 읽어보자 하고 읽은 것. 오디세우스는 이타카로 돌아오는데 10년이 걸렸는데, 나는 이 책을 다시 잡는데 20년이 넘게 걸렸다. 책이 남아 있는 것이 용하다.
읽었지만 여전히 난해하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은 것이 다행. 하지만 리뷰를 쓸 수 없을 정도다. 내용 이해가 되어야 리뷰를 쓰지.
야, 이런 작품을 세계적인 명작이라고 하는데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을까? 오히려 비평가를 밥벌이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
소설을 읽으면 등장인물에 감정이입을 하던지, 아니면 그 소설에 나타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생각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냥 읽고 만 것일 뿐.
마음이 착잡하기도 하지만, 율리시즈라는 이름,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으로 바꾸면 오디세우스 또는 오딧세이다. 고등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서울시교육청에서 오디세이 학교도 운영하고 있는데, 모험을 통해서 자신을 찾아가는 교육이라고 하는, 그런 학교.
제목에 딸린 각 장들에 오디세우스에 나오는 인물들이나 배경이 함께 나온다. 즉 호머가 쓴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는 10년 동안을 방황하지만, 이 율리시즈에서는 단 하루 방황을 한다.
멸망한 트로이를 떠나 이타카로 돌아오는데 10년. 그동안 엄청난 모험을 겪는 오디세우스. 이 소설에서 그에 해당하는 인물은 블룸이다. 그리고 텔레마코스에 해당하는 인물은 스티븐이고. 스티븐 디덜러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그렇다면 스티븐은 제임스 조이스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블룸은 누구인가? 블룸은 유대계 아일랜드인. 더블린이라는 장소에 고착된 인간이 아니라 세계인이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의 생활이 그랬으니까. 그들은 아일랜드인이자 아니기도 했으니... 스티븐이 블룸과 연결되는 것은 조이스가 아일랜드라는 민족성에 머물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소설은 스티븐과 블룸, 둘을 중심으로 더블린이라는 공간에서 하루 동안 많은 사람들을 등장시켜 소설을 진행하고 있다.
소설과 오디세이에 나오는 내용을 비교하면서 읽으면 좋다고 하는데, 일대일 대응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율리시즈]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는 있다.
마지막 페넬로페 장에서 보면 오디세이에 나오는 페넬로페와 율리시즈에 나오는 몰리 블룸은 정숙한 면에서는 정반대다. 그러나 부부로 지내는데는 일치한다. 호머의 작품에서 핵심적인 면만 주제로 살리고 나머지는 조이스 마음대로 표현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에서는 많은 기법들, 또 표현방식의 다양성이 나타난다는 것. 번역하면서 그 점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는 느낌을 받게 되고... 여기에 다양한 언어들이 나오는데, 가히 언어와 표현기법의 향연이라고 할 수 있다.
영어로 읽을 실력도 안 되지만 영어만으로 읽을 수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만큼 다양한 언어들이 쓰이고 또 너무도 많은 신화적, 역사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여기에 자동기술법이라고 할 수 있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표현기법까지.
따라서 이 책의 주석본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불행히도 나에게는 주석본이 없다. 그때 그 책은 구입하지 않았나 보다.
범우사 옛날 판 해설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내가 갖고 있는 책은 1992년 초판 4쇄다.)
이 작품이 품은 상징적 함축미는 우리들로 하여금 작품을 몇 번이고 거듭 읽게 한다. 어떤 독자가 [율리시즈]를 한 번 읽은 다음 작품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자, 조이스는 여덟 번을 더 읽어 보라고 했다. 그러나 이 독자는 여덟 번 이상을 읽었어도 알 수가 없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405쪽)
이 말에 위안을 얻는다. 한번 읽어서 이 작품을 알면 그건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온갖 파행이 난무하는 이 작품을! 한번 읽고 이해하다니!!
그러나 여러 번 읽을 시간이 없다. 여력도 없다. 다만 머리 속에 율리시즈에 나오는 주인공들 이름을 새겨놓고, 그들이 하루동안 방황한 내용, 그리고 온갖 기법을 기억하기로 한다.
혹 알겠는가. 더 세월이 지나 다시 읽고 싶어질지. 그만큼 오디세이만큼 많은 방황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