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하면 몸이 가벼워지고 얼굴엔 웃음이 머금어지고 손은 누군가를 향하고 발은 그 쪽으로 가고 있으며 마음은 한없이 비어 채워도 채워도 더 채울 수 있을 것 같은 비움이 곧 충만인 그런 상태가 떠오르는데...

 

  정끝별 시집 '삼천갑자 복사빛'을 읽으며 이와 반대되는 느낌을 받았다. 사랑을 노래하는 시들이 많은데, 읽으면서 마음은 자꾸 가라앉고 만다. 처연한 사랑이라는 느낌만 남아 있다.

 

  첫시부터 그렇다. 분명 사랑인데, 충만이 아니라 비움이다. 살찌는 것이 아니라 말라간다. 제목은 '춘수(春瘦)'다. '봄 여윔' 정도 되려나?

 

  왜 이렇게 처연하다는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생각해보니, 첫시 제목에 나오는 수(瘦) 자에서부터다. 수척하다. 파리하다. 여위다라고 할 수 있는 이 말.

 

시집에 실린 첫시가 시집을 여는 역할을 하는데, 생명이 시작되는 봄에, 충만을 노래하지 않고 여윔을 노래하다니... 그러니 사랑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 이 시집에서 자꾸만 처연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시작하는 봄에서 끝인 겨울을 생각하고, 채움에서 비움을 생각하고, 그렇게 서로 만나지 못하고 한없이 도는 '공전'(72쪽)이라는 시에서처럼 늘 함께 하지만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거리를 좁히지 않고 있는 그런 상태.

 

팔다리를 몸에 묶어놓고 / 몸을 마음에 묶어놓고 / 나로 하여금 당신 곁을 돌게 하는 / 끌어당기고 / 부풀리고 / 무거워져 / 기어코 나를 밀어내는 / 저 사랑의 포만 // 허기가 궤도를 돌게 한다

(정끝별, 공전 2,3연. 72쪽)

 

사랑의 포만이라고 하지만 결국은 허기다. 채움이 아니라 비움이다. 이 비움이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사랑을 갈구하게 한다. 그렇지만 채워졌을 때 다시 밀어내기 때문에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이 채워지지 않는 무한에 가까운 시간, 무한에 가까운 노력들이 사랑을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처연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비움에서 충만을 연상하는 그런 사랑시와는 반대되는 느낌을 받는다.

 

시인은 '자서(自序)' 에서 이렇게 말한다.

 

'삼천갑자, 그러니까 육 삼 십팔, 십팔만 년이, 금세 스러질 내 삶에, 내 몸에, 내 사랑에 숨어 있다고 믿는다'

 

결국 삼천갑자란 무한에 가까운 시간이고, 이 시간이 사랑에 숨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을 이룬다는 것이 무한히 추구해야 할 사람의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결국 사람은 사랑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니 죽어서까지도 사랑을 이루어야 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가지에 가지가 걸릴 때'(18-19쪽)란 시에서 '한 줄기에서 난 / 차마 무너지지 못한 마음과 / 차마 보내지 못한 마음이 / 얼마 동안은 그렇게 엉켜 있으리라' (정끝별. 가지에 가지가 걸릴 때. 4연. 18쪽)라는 표현... 결국 삼천갑자 동안 우리는 사랑의 빛은 복사빛을 지니고 있으리라는 것. 그런 사랑. 이루어진 사랑이든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든 처연하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렇게 비움이 있어야 사랑으로 채울 수 있으므로, 또 순간이 아닌 긴긴 시간을 사랑을 추구해야 인간답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첫시 춘수를 인용한다.

 

  춘수(春瘦)

 

마음에 종일 공테이프 돌아가는 소리

 

질끈 감은 두 눈썹에 남은

 

봄이 마른다

 

허리띠가 남아돈다

 

몸이 마르는 슬픔이다

 

사랑이다

 

길이 더 멀리 보인다

 

정끝별, 삼천갑자 복사빛, 민음사. 2005년.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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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20-02-07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에 종일 공테이프 돌아가는 소리 이 구절이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