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중고서점에서 구한 시집이다. 가끔 이렇게 중고서점에서 시집을 구하는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시집을 주욱 읽어가다가 수상작보다는 수상작과 더불어 있는 시에 눈길이 멈췄다.

 

'개부처손'

 

  '개'들이 판치는 세상이 됐다. 반려동물인 개가 아니라, 접두사 '개-'다. 도처에 '개-'가 붙은 말들이 난무하는데...

 

  예전 욕 중에 '개만도 못한 놈'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참, 개 처지에서는 억울하겠다. 자신들은 못된 짓도 하지 않고, 속이지도 않고 오로지 살아갈 뿐인데, 자신들에 빗대어 자신보다도 못하다고 욕을 하다니...

 

  아마 개들의 세계에서는 '사람만도 못한 개'라는 욕이 최고의 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전에 '개-'라는 접두사를 찾아보면, 이렇게 나와 있다.

 

「1」 ((일부 명사 앞에 붙어)) ‘야생 상태의’ 또는 ‘질이 떨어지는’, ‘흡사하지만 다른’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예) 개금개꿀개떡.

「2」 ((일부 명사 앞에 붙어)) ‘헛된’, ‘쓸데없는’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예) 개꿈개나발.  개수작.    

「3」 ((부정적 뜻을 가지는 일부 명사 앞에 붙어)) ‘정도가 심한’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예) 개망나니.    개잡놈.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개-'라는 말이 긍정의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 김선우 시를 읽어보지 않았을텐데, 김선우 시에 나오는 개부처손처럼 어떤 의미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해 보지 않았을 텐데, 그렇다고 반려견에 대한 사랑으로 '개-'자의 의미가 바뀌지는 않았을 텐데... 아무튼 '개-'라는 접두사는 이제 부정의 뜻보다는 '정말 좋은, 아주 멋진' 매우, 꽤' 등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개멋져, 개예뻐, 개간지' 등등

 

언어라는 것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 의미가 바뀌기도 하지만, '개-'자처럼 이렇게 정반대로 바뀔 수가 있다니... 역설이다. 역설 속에 오묘한 진리가 숨겨져 있다고 하더니.

 

김선우 시를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개부처손

 

개두릅 개복숭아 개살구 개머루 개꿈 개떡 같은

참 것이나 좋은 것이 아닌 함부로 된 걸 말하는 개, 라는 접두사가

부처님 손바닥처럼 생긴 풀 앞에 그것도 좀 모자란 듯한 잘디잔 손바닥 앞에 이름 붙어

개부처손이라 했다

 

납작한 바위를 감싸며 깊은 그늘 만들고 있는

고작 엄지손톱만한 개부처손들 앞에서 서성거린다

 

저자거리의 좀 덜된 무명씨 같은 이도 부처될 만하다는 것 같기도 하고

막된 인사(人事)보다 개가 부처를 이루는 게 도리라는 것도 같고

개나 소나 팽나무나 바위나 그저 데면데면하게 바라보던 것들 중에

이미 부처를 이룬 것들이 수두룩할 것 같고

 

2004 제49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피어라, 석유! 현대문학 2004년. 김선우, 개부처손. 17쪽.

 

누가 이런 개부처손을 비속하다고, 또 작다가 업신여기겠는가. 이렇게 낮은 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존재, 그 존재가 바로 부처가 아닐까 한다.

 

부처에 등급이 있겠는가. 무슨 해탈에 등급을 매기겠는가. 그러니 자신의 자리에서 제 존재의 의미를 온전히 살아가는 존재라면 그것이 바로 부처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개-'라는 말을 붙인 것은 비하가 아니라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대단한 존재가 아니더라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아니 반대로 부처는 대단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작고 비루한 존재,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결국 시인은 도처에서 부처를 보고 있다. 우리가 그간 '데면데면하게 바라보던 것들 중'에 부처가 있다는 것, 우리 자신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높은 성전 속에서, 남들과 동떨어진 곳에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 눈에 띄지 않더라도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는 존재가 바로 부처라는 것.

 

이것이 '개부처손'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어떻게든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애쓰는 족속들, 그들은 부처가 무엇인지 생각이나 해보았을까. 꼭 부처가 아니더라도 남들을 위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을 해보았는지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한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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