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조작 시대에 농사를 생각한다'
이번 호가 내세운 작은 제목이다. '생명조작'과 '농사'가 한 자리에 있다. 같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낱말이 한 문장에서 보이는 것이 낯설다.
'생명조작'을 '유전자조작식물(품)'로 바꿔 말하면 농사와 '생명조작'은 한 자리에 있을 수 있다. 우리가 흔히 'GMO'라 부르는 유전자조작식물 또는 유전자변형식물들이 이미 우리 식탁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용어에 대해서 한 마디 하면 GMO하면 웬지 중립적인, 그냥 과학적인 성과로 나온 식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을 우리말로 유전자 조작, 또는 유전자 변형이라고 하면 식탁에 올라서는 안 될 식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러니 언론에서도 용어를 쓸 때 GMO라는 말보다는 유전자 조작, 또는 유전자 변형이라는 말을 썼으면 좋겠다. 원자력 발전이 아니라 핵 발전이라고 써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위험성에 대해서는 누구나 인식하고 있지만 그 해로움이 아직은 밝혀지지 않은 그런 식품들. 하지만 단지 유전자조작식물들만 이야기하겠는가.
녹색평론은 유전자조작을 식물만이 아닌 동물, 아니 우리 인간에게도 적용하려는 과학계의 움직임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이들은 생명조작에 대해서 거침없이 나아간다. 과학기술이 인간의 통제 아래 영원히 있을 거라는 생각은 너무도 비현실적이다.
한번 세상에 나온 과학기술은 자기가 무슨 생명체인양 스스로 존재 방식을 찾아나간다.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극한까지 과학기술은 폭주한다.
그리고 인간이 그것을 깨닫고 통제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파국에 이르렀을 때다. 수많은 사람들이 경고를 하지만 쇠 귀에 경 읽기다. 들은 체도 하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자본의 논리가 철저히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윤과 편리...
이익을 남길 수 있는 과학기술이 있는데, 굳이 어렵고 이익도 별로 남지 않는 기술을 쓰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생명조작'은 식물을 넘어 동물, 그리고 인간으로까지 확대된다.
이번 호에서 언급하는 '생명조작'은 바로 우리 인간에 대한 생명조작이다. 유전자편집기술이라고 하는 특이한 기술로 유전자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게 된 지금 많은 과학자들이 윤리와 과학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가끔 윤리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과학자들이 나타나면, 그 과학자들에 의해 한번 과학기술이 실현되면 이상하게도 불가역적 현상이 되어 버린다. 이미 나타난 기술을 없앨 수는 없다. 사용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렇게 인류는 제 손으로 제 무덤을 파게 된다.
'현대의료와 윤리(야마구치 겐이치로), 신경과학과 생명정치(전방욱), 유전자편집기술,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김병수), 생명을 유린하는 생명조작기술(정형철), 생명과학의 딜레마(에르빈 샤르가프)'
이 글들이 바로 우리에게 '생명조작'의 위험성을 알려준다. 그런데, 이런 생명조작이 너무도 쉽게 이루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가 '농사'를 소홀히 해왔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이 인간에게 행하는 '생명조작'을 인간이 지구에게 행하는 온갖 '조작'에 비유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지구의 생명을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듯이 이리 고치고, 저리 고치고 해왔다.
그러면서 지구의 '흙'에 대한 파괴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아무 생각없이. 농사는 이런 흙을 지키는 일이고, 또 지구를 지키는 일임에도 '조작'에 밀려 등한시되어 왔으니...
'생명조작'이 판치는 사회에서 '농사'는 점점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녹색평론이 '농사'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삶이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달의 뒷면을 탐사한다고 호들갑을 떨기 전에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지구가, 이 지구의 흙이 얼마나 사라지고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안 먹고는 살 수 없기 때문에 농사는 중요하다. 그것도 조작된 농사가 아니라 땅을 살리는, 지구를 살리는 농사가. 그래서 이번 호에 실린 김종철의 글은 시사하는 점이 크다. (뿌리를 잃은 삶, 농사를 망각한 정치)
농사를 망각한 정치는 뿌리를 잃은 삶이 되기 쉽다. 그리고 온갖 '조작'에 휘말리기 쉽다. 근본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길이 멀고 험하더라도 기본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 녹색평론 이번 호를 읽으며 다시금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