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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살 것인가 -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8년 5월
평점 :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라는 작은 제목을 달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건축은 필수 요소다.
의식주든, 식의주든 주는 빠지지 않는다. 집, 거주할 곳, 이곳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건축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지구상에 존재했을 때부터 건축은 우리와 함께 했다.
이런 건축을 토목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건축은 토목과 달리 우리 삶을 결정짓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래서 학교 건축부터 시작한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하는데, 교육을 하는 공간에 대한 이해 없이 지나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학교 건축, 답이 없다. 이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창의성 제로(영)에 가까운 학교 건축에서 무슨 창의 교육을 한다고 하는지, 저자는 답답해 한다.
교도소에 가두어 놓고 너희들은 창의적인 훌륭한 인재야 라고 백날 말해야 아무 소용이 없다. 학교 건축으로 아이들 창의성을 다 죽여놓고 그런 기대를 하는데 얼토당토 않은 소리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양계장에서 닭을 키워놓고 그 닭에게 넌 왜 독수리가 못 되었냐고 야단치는 격이라는 것이다. 학교 건축, 천편일률이라는 말이 맞을 정도로 규격화된 건축. 네모 속에 갇힌, 담장 속에 갇힌, 그리고 자연과 철저하게 격리된 그런 건축물 속에서 어떻게 창의적인 인간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학교 건축에서 시작하여 다른 건축으로 넘어가는데 답답함이 가중된다. 우리나라 건축이 가야 할 길이 아직도 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학교 건축만큼 이 책에서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게 되는 것이 공원에 대한 생각이다. 공원에 대한 접근성이 많이 떨어지는 곳이 바로 우리나라다.
서울만 해도 많은 공원이 있는데 이 공원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용산가족 공원이라고 해도 걸어서 이곳에 가는데는 힘이 많이 든다. 걸어서 갈 수 없는 공원. 이런 공원은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모으지 못한다.
공원이 공원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공원에 담장이 많다. 마치 구획을 짓듯이 담장이 자유로운 접근을 막고 있다. 아파트 단지들도 자신들의 담으로 사람들을 격리시키는데, 이렇게 길과 격리된 공간은 사람들을 끌어모으지 못한다고 한다.
공원이 역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곳, 또 다른 공원으로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곳, 이동하면서 다양한 변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 그런 곳으로 건축을 해야 한다. 이런 건축이 사람들 삶 속에 들어온 건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을 배려하고 사람과 함께 있는 건축과 더불어 자연과 함께 하는 건축을 저자는 주장한다. 건축에서 자연을 내몰면 우리 삶이 피폐해진다. 인류의 탄생부터 우리는 자연과 함께 해왔기 때문이다.
하여 접근하기 어려운 큰 공원보다는 접근하기 쉬운 작은 공원 여럿을 만드는 것이 더 좋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옳은 말이다.
이 책은 건축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는다. 인류 문명의 발달도 건축의 역사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건축물을 통해 권력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다른 학문과 융합한 건축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읽은 재미도 있고, 그동안 놓치고 있던 것을 깨달을 수도 있고, 우리 주변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게도 해준다.
특히 우리와 밀접하게 관련있는 학교와 공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저자가 답답해 하듯이 이렇게 건축을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정책을 펼 수 있는 사람들이 귀를 막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도 하다.
저자가 말하고 있듯이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꿀' 때가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잠시 쉬면서 뒤를 돌아보고 숨을 고르고 우리가 살고 싶은 장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 점을 생각하게 해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