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고백
김려령 지음 / 비룡소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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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부터 기온이 오를 거라고 했는데, 아침부터 흐리기만 하고 기온도 오르지 않은 것 같다. 우중충한 날씨 탓에 춥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올 겨울에는 눈도 적어서 심심하다. 아이들은 신발에 모래가 가득 차도록 마른 모래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굴리고 있다.

뜨끈한 칼국수 한 그릇씩 먹여 내보냈으니 추워지면 들어오라지. 나는 김려령의 신작 <가시 고백>을 마저 읽었다.

 

대한민국 고2 교실을 무대로 앞뒤로 짝을 맞춰 앉은 해일, 진오, 지란, 다영이 중심을 이룬다. 학교임을 알게 해주는 담임은 짧은 말에 힘이 있으나 뒤 끝에 힘이 없는 인간적인 선생이다. 이간질과 고자질로 자발적 미운털이 되고도 제 잘못을 모르는 미연도 있음직한 인물이다.

네 명의 아이들은 나쁜 쪽으로 남과 다르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천재적인 도둑 해일과 이혼한 아빠를 미워하는 지란의 가시가 뽑혀가는 과정을 다룬다. 진오와 다영은 이성과 감성을 갖춘 괜찮은 아이로 등장하여 해일과 지란을 돕는다. 넷이 뭉치니 막강한 드림팀이 만들어지고 나는 이 대목에서 그만 감동하고 말았다.

 

완득이 만큼 사랑스러운 인물인 해일이는 어려서 혼자지내야 했던 일이 상처로 남은 아이다. 습득하지 않아도 물건을 귀신 같이 훔치고 돈으로 바꾸지만 쓰지는 못하는데 잘 생긴 얼굴에 미소까지 보기 좋다. 그런 아이가 학교에서는 지란의 전자수첩을 훔치고 집에서는 유정란을 사다가 병아리를 부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같기도’의 대표적 인물이다. 나쁜 놈 같기도 하고 착한 놈 같기도 하고. 그래도 엄마와 머리를 맞대고 앉아 고구마 줄기를 까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워서 아들 키우는 입장에서 해일이 엄마가 부럽기만 하다.

 

해일이 엄마 얘기가 나왔으니 짚고 넘어가는 데, 해일이네 가족 모습은 그간 책에서 보아왔던 가족 모습 가운데 가장 보기 좋은 가족이다. 감정설계를 하겠다는 해일이 형 해철이는담임과 닮았다. 그런 가족이 실재로 있던 없던 나는 이 가족의 모습에서 큰 위안을 받았다. 지란이 해일이네 집에서 느낀 그 따뜻함은 유정란이 병아리로 부화할 만큼 따뜻하고 적당했다.

 

친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지란이는 해일과 진오의 도움으로 친아버지 집에 몰래 들어가 낙서를 하면서 극단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그 와중에 해일이 또다시 지란 아빠의 넷북을 훔친 일이 진오에게 들키면서 해일의 가시가 드러난다.

거울에 비친 해일은 도둑이고, 진오가 해일을 본 것도 거울을 통해서다. 더 짜릿한 것은 반장 다영이는 이미 전자 수첩이 사라졌을 때부터 거울로 해일이를 지켜보았다. 이런 장치로 반전의 묘미를 즐기며 소설은 그만큼 재미있어 진다.

 

고2 아이들이 생각보다 보드랍고 순수한 모습으로 등장해서 따뜻하게 읽힌다. 도둑임이 밝혀진 해일이를 단칼에 잘라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더 단단하게 맺어질 이들의 우정이 나는 고마워서 눈물이 나왔다.

 

학교 현장이 쑥대밭이 되고 살벌한 전쟁터가 되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더 떨어질 간이며 심장이 어디 있다고 그때마다 쿵쿵 떨어지는지. 그래서 이 소설이 더욱 위로가 되었나보다.

사건을 극단으로 몰고 가지 않으면서 등장 인물의 마음을 잘 따라가 주고 그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갈 기회를 준 것 같아 뒷끝도 깔끔하다.

 

현실의 세계로 돌아와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감정을 살펴보는 일이다. 누구에게나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후회스러운 순간이 있다는 말에 공감한다. 원해서 했다기 보다는 내 손이 나도 모르게 물건에 닿는 해일이처럼 판단 이전에 벌어진 행동이다. 원하지 않았던 그 마음을 알아봐주고 믿어주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머리와 행동 사이에 벌어진 그 일을 살펴보고 설계하는 일이 그래서 꼭 필요해 보인다.

 

담임과 아이들이 상담 뒤풀이로 주고 받는 말들이나, 상담의 현장, 해철이가 행동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많다. 담임과 해철에 대해 더 말을 해야하는 이유는 학교 안과 학교 밖 혹은 가정에서 그들과 같은 사람이 있어야 할 필요에 대해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장을 따로 두지 않고 주제 안에서 화자를 눈에 띄지 않게 슬쩍 슬쩍 넘기는 것은 자연스러움을 막지 않으면서 신선했다.

 

그나 저나 수정란 검사를 하는 장면. 달을 품은 달걀과 병아리를 품은 달걀의 이미지가 굉장히 인상적이어서 이미 냉장고에 넣은 유정란은 어쩔 수 없고 나도 다음에 한번 하는 욕구가 생겼다. 나의 연약한 인내와 무딘 손끝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라는 게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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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2-02-28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정란을 냉장고에 넣기 전에 어쩌시게요. 설마 품으시게요? 그러다 정말 병아리 되면 그건 도 어쩌시게요. 병아리 되면 왠지 겁날듯.. ㅡ.ㅡ;;;

수수꽃다리 2012-02-29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그러니 망상이지요. 망상이어서 다행이고. 생명있는 것을 거둔다는 것이 저는 굉장히 어렵더라구요. 잘 안되구요. 으, 아이 탓으로 돌리지만 제가 보낸 이러저러한 애완용 생명들이... 화분도 꽃피는 것은 없으니. 그래도 해일이네가 부럽기는 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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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인의 반란자들 -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대화
사비 아옌 지음, 정창 옮김, 킴 만레사 사진 / 스테이지팩토리(테이스트팩토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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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감정의 밑바닥에서 헤매면서 성숙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 본다. 도무지 이 기분 나쁜 질곡에서 나올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이다. 변화 무쌍하다는 것이 이때 만큼은 좋지도 않다. 마음의 평화를 한결같이 유지하고 싶은데 느닷없이 깨지고 만다. 대부분 불행의 씨앗은 내 입에서 떨어진다. 입을 막을 방법을 모른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들과 나눈 대화를 모은 <16인의 반란자들>들을 읽을때만 해도 나는 그들의 성숙한 모습에 감동했다. 노벨 문학상을 받는 것으로 작가로서 최고 반열에 오른 그들이 들려주는 오늘의 얘기는 의외로 특별할 것 없다. 물론 원하지 않게 유명세를 치르느라 곤욕을 치르는 작가도 있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은 노벨상을 수상하기 전과 후과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최고의 순간을 맞보았지만 자신의 논리, 자신의 문학에 영향을 받지 않고 한결같음을 유지하는 그들은 지적이며 성숙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을 만나는 것이 행복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영광의 작품을 읽지 못해 약간의 미안함은 있지만 그것이 이 책을 읽는데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그만큼 이 대화집은 그들의 작품이 아니라 그들의 현재적 삶에 집중한다. 변함없이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작가들의 모습에서 성숙한 사람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작가들이 사는 나라의 정치 사정이다. 작가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실 문제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할 밖에 없는 사정도 이해가 되었다. 작가란 가장 일찍, 가장 오래 깨어있어야 하는 존재이니 당연한 일이다. 한국의 사정이 출구가 막힌 것처럼 최악이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작가들의 나라 사정이 우리보다 나을 것이 없어 보이는 것도 뜻밖이었다.

 

예를 들면 주제 사라마구는 “50년 후에도 포르투갈이라는 나라가 존재할지 난 확신이 서질 않아요..서서히 몰락해가는 중이요.라는 인식은 잠깐이지만 우리 문제라는 지엽적 사고에서 우리 밖으로 시선을 돌리기에 충분하다.

스펙쌓기와 잉여의 생산지로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 나라 대학 현실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학점을 이수하는 장소로서의 학교를 좋아하지 않아요. 내가 원하는 건 학생들이 전문 창작세계와 교류하는 거예요.” 토니 모리슨의 말이다. 그녀는 여성과 흑인, 이중의 억압에 대해 여전히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로 늙어가는 그들의 사고는 막힘이 없이 자유롭다. 도리스 레싱이 종교에 대해 혼합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고 했지만 그것은 진정한 관용의 태도가 아닐까. “구약을, 복음서를, 신약을, 코란을 읽다 보면 우리는 그것들이 똑같은 사람을, 똑같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을 알게 돼요.”라는 말은 성숙한 지성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작가가 삶의 방편으로 직업을 구하는 것은 시장의 원리에 순응한다는 것이지요. 살기 위해서라면 다른 일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자기 일에 있어 (경제적)독립을 요구하는 작가들의 사치를 지적하는 가오싱센의 말은 쟁쟁 소리가 나는 것 같다. 노벨 문학상을 조국에 안기고도 조국에게 버림받은 그는 권력에 맞서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이쯤되면 인터뷰를 진행한 기자가 밝혔듯이 왜 그들 문학인들을 반란자라고 했는지 충분히 알만하다. 월레 소잉카는 작가가 아니라 아프리카의 지도자이며, 오르한 파묵은 자국의 비인간적 테러를 고발하며 경호원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고 있다.

 

그들은 문학이라는 공통의 요소를 갖고 있지만 각기 다른 색깔로 세상의 삶이 나아지는데 기여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두려움 없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힘이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아무것도 아닌 나같은 인물은 알 길이 막막하다.

다만 이 책을 읽는 것은 이 시대 최고 지성의 모습을 근접해서 보는 것의 의미다. 그들의 삶은 개인의 영광에 있지 않았다. 문학이 최종 목적도 아닌 것 같았고 그것이 나의 상식을 뛰어 넘는 그들의 지성이었다고 생각한다.

 

16인의 반란자들을 만난 젊은 기자는 어떤 말로 이들의 인터뷰에 성공했을까하는 것도 이 책을 읽는 내내 궁금한 점이었다. 한 사람마다 긴 분량은 아니지만 작가를 만났을 때의 분위기라든가 작가의 작업실 같은 부분도 놓치지 않고 스케치하는 것은 기자로서의 예민함일 것이다.

동행한 사진 작가는 작가의 모습과 함께 작가의 손을 클로즈업해서 찍었다. 손에 대한 인상이 나에게만 특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작가라면 먼저 그의 손부터 살펴보는 나같은 독자에게 그들의 손은 그 습관의 욕구를 채워주었다. 그들의 손에서 그들의 작품이 최초로 형태를 갖추었으니, 노벨상을 보지 못했지만 그들의 손이면 충분했다.

 

이 글을 처음 시작할 때 빠져있던 질곡에서 여전히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 시대 최고 지성을 다시 되새겨 본 후에도 좀처럼 이 나쁜 감정에서 나와지지가 않는다. 사실은 그들의 범접할 수 없는 생활을 다시 들여다 보면서 나는 더 후줄근해져 버렸다. 말 그대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혹은 존재의 아무것도 아님에서 오는 절망이다.

바닥을 박박 긁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시 생각하면, 나한테는 지금까지 산 딱 그만큼의 시간이 남았다는 것. 아무것도 아닌 채 죽거나 삶의 얼굴 하나를 보고 죽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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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자 잡혀간다 실천과 사람들 3
송경동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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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과 송경동을 동시에 알아가면서 느낀 것은 부끄러움과 죄책감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적은 글을 읽으면서 여러번 눈물을 흘렸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그 마음은 진심이었다.

이 나라가 이렇게 컸던가 싶을 만큼 그들과 내가 마주 선 거리는 멀고 멀었다. 그러는 중에 김진숙이 크레인에서 내려 오고 희망버스를 기획했던 송경동 시인이 수감되는 소식을 접했다. 그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수감이 되었을까 미처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그의 책이 출간되었다. 감옥에서 작가의 말을 대신하는 그의 심정을 내가 어찌 알까.

 

구로 노동자문학회원이었다는 말에 부랴 부랴 옛날 시집을 뒤져 보니 문학회 창립 10주년 기념으로 낸 시집 <왜 딸려!>(갈무리, 1998)에 그의 시가 세 편 실려 있다. 오래전 그의 시는 찍 소리도 못한 채 살아온 소년이 노동자가 되어서도 찍 소리도 못한 채 “똥누다 말고 작은 소리로나마 찍, 해본다/누구도 이젠 나를 치지 않는데/마음에 찡하니 젖어오는 슬픔 한줄기”(<찍소리> 중에서)를 품고 살면서, 비 오는 날 아욱국을 끓이기 위해 외상 장부에 외상 일기(<외상 일기>를 쓰는 노동자의 하루치 일기를 쓰고 있다. 힘든 노동의 뒤에 맛보는 삼 사십분의 눈 붙임을 위해 남은 그늘을 찾아 비실 비실 옮겨 다니는 순한 일꾼(<꿀잠>)들이 그의 시에 들어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의 삶은 한결같다. 그게 굉장히 슬픈 일이라는 것은 그의 산문집을 읽어보면 알게 된다.

 

그의 산문집 <꿈꾸는 자 잡혀간다>를 읽어보면 세상은 참 많이 변했지만 또 전혀 변하지 않거나 더 나빠졌다. 오죽하면 다같이 잘 사는 세상을 꿈꾸는 자가 잡혀가는 세상이 되었겠는가.

달라지지 않는 세상을 사는 동안 그는 대추리, 기륭전자, 용산, 콜트 콜텍, 85호 크레인, 희망버스와 함께 살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감옥에 가고 나오는 동안 노동자, 가진 것 없는 자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니 그의 말대로 이 나라는 참으로 ‘이상한 나라’다.

그렇지만 또 그들이 사는 세상은 얼마나 인정 많고 눈물 많고 사연 많고 착한 사람들인지. 그저 순리대로 살자고 그렇게 살면 언젠가는 좀 번듯하게, 혹은 사우나 정도는 남에게 미안해 하지 않고 갈 수 있지 않겠나 하고 사는 사람들인데 시인의 눈으로 대신 가본 그곳에서는 그게 참 어렵고 힘들어 보인다.

 

순간 순간 미안함과 죄스러움으로 눈물이 나오는데 그러다가 그의 글을 거의 다 읽을 무렵에는 내가 한심해져서 눈물이 났다. 그 눈물은 죄스러움도 미안함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나에 대한 연민 때문이다. 깨지고 부러지면서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그와 그들은 얼마나 강한 사람들이란 말인가. 그러니 300일이 넘도록 공중에 매달려 지내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김진숙에게 더 이상 미안함을 가질 수 없었다.

 

제 발로 걸어간 경찰서에서 우습게도 수감이 된 송경동 시인은 그 안에서 조차 “내 안에 도사린 어떤 역사와 진보에 대한 패배 의식”을 반성하면서 자신을 질책한다.

“정리 해고와 비정규직화는 어쩔 수 없다는 이 시대의 감옥에서, 모든 억압과 좌절의 감옥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나비처럼 훨훨 날아 오르는 꿈을 꾸”(<작가의 말>에서)는 그에게 죄책감을 갖는 것은 쓸데 없는 일이다. 죄책감이나 미안함은 나는 그렇지 못함에서 오는 것이라기 보다는 나는 그들보다 낫다는 못난 여유와 안도감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나 쉽게 무너지고 좌절하고 비겁해 질 수 있는지 잘 안다.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사람이 없는 사람이다. 감옥 조차 억압하지 못하는 자유로운 영혼과 강한 신념을 가진 그들을 그저 한없이 존경할 뿐이다.

 

책을 덮고 이런 저런 생각으로 나를 못살게 구는 사이, 송경동과 정진우는 보석허가를 받고 석방되었다. 쌍용차로, 콜트 콜텍 현장으로 또 냅다 달려가리라.

 

나는 앞으로도 이런 핑계 저런 이유로 희망 버스를 타는 용기를 내지는 못할 것이다. 또 다시 촛불이 광장을 뒤덮을 때도 맨 나중에나 겨우 몸을 움직일 것이다. 그러다가 때를 놓치고는 비겁하게 안도를 하거나.

 

진저리를 치며 그래도 할 수 없이 나는 나의 논리와 나의 이유로 그들과 함께 이 시간을 살아가야 한다. 다만 그의 현장과 나의 이유가 함께 버스를 타지 못한다고 해도 그가 말했던 것 처럼 그 버스를 타지 않은 사람들을 원망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몸과 마음은 이토록 멀고 같이 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관계임을 그는 알 것 같다. 그는 나보다 백 배는 힘이 쎈 사람이니 말이다. 그의 육체적 고난과 고통은 몹시 아프다. 그렇기는 해도 가진자가 승리하는 역사에 맞서 없는 자도 승리하는 새 역사를 살고자 하는 그가 (미안하지만) 진심으로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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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3-02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 저는 이제 이 책에 관련된 리뷰만 보아도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김진숙 님의, 이소선 어머님의 사진만 보아도 눈물이 나려고 해요.
덕분에 다른일은 하지 못하고 있지만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어요.
에세이 평가단을 하고나서 가장 흡족했던 시간들이었어요 ^_^

수수꽃다리 2012-03-02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믿을까 몰라도 이 책을 받고 나서 나는 소이진씨를 걱정했었어요. 감당할 수있을까 해서. 가장 흡족했던 시간들이었다니 괜한 걱정을 했군요. 다행이예요. 그리고 고마워요. 같이 읽어주어서. 그리고 미안해요. 어른들이 이래서 ^-^ 그래도 훌륭한 어른들이 더 많으니 실망하지마세요.
 
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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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만난 이야기꾼

 

“제게 중요한 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얼마나 그럴싸하게 하느냐 하는 거예요.” (한겨레신문, 2012. 1.8일자 인터뷰 중에서)

그럴싸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 작가는 초고를 쓰고 그 초고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새로이 이야기를 쓴다. 한 장면을 위해 서너 가지의 상황을 만들고 고른다. 철저한 취재는 기본, 부족하면 소설을 쓰다가도 취재를 나가다 보니 보통 2년은 넘게 걸린다. ‘그럴싸하게’라는 말이 좋다.

이 기사를 보면 현재 정유정 작가는 동물과 사람이 같이 전염병에 걸리는 이야기를 쓰고 있고, 내년 쯤이면 그녀의 새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설을 앞뒤로 정유정의 소설 세 편을 읽었다.

<내 심장을 쏴라>를 시작으로,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7년의 밤>을 ‘정말 글을 잘 쓰는 작가’라고 감탄하면서.

작가가 직접 말한 것처럼 일단 그녀의 이야기는 정말 그럴싸하다. 이야기가 그럴싸하다는 것은 재미있다는 것이니, 그녀의 소설은 소설을 잘 못 읽는 내가 읽기에도 무척 재미있었다.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그녀가 소설을 쓸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소설적 진실’(알라딘 작가 취재)이다. 아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소설적 진실’일 것이다.

일단 그녀가 말하는 독서적 즐거움을 주는 소설은 크게 두 유형이다. 독자의 사고에 어필하는 소설, 정서에 호소하는 소설. 정유정은 자신의 소설은 정서에 호소하는 소설이라고 밝혔다.

두 유형이 어디에서 크게 구별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굳이 그녀의 구분에 따르면 나는 독자의 사고에 어필하는 소설 쪽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소설 한 편에 거는 기대가 컸고, 나를 한 번에 눈뜨게 하지 못하는 소설에 안달을 하고, 결국은 소설도 제대로 못읽고, 소설이 주는 재미도 놓치고 말았다. 못난 독자를 소설이 주는 재미가 이런 거거든요. 하면서 알려준 그녀에게 먼저 감사를. 또 모국어의 가치에 다시 한번 찬사를.

 

병적인 것의 경계

 

<내 심장을 쏴라>는 탈출과 감금을 반복하다가 끝내 탈출에 성공하는 수리정신병원입원환자 수명과 승민의 이야기다. 나는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자유로움 혹은 절망, 희망 같은 말을 내내 떠올렸다. 치료의 목적이 아니라 감금의 기능에 갇혀버린 승민, 수명 또한 부모 없이 보호의 목적이라 했지만 버려진 것만 같았다. 상처 받는 자와 상처 주는 자는 동시성을 갖는다. 병원 밖의 우리들은 그렇지 않은가. 병적인 것의 경계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또한 ‘미쳐버리겠다’는 심정으로 남편을, 아이를 대한 적이 있지 않던가.

이 소설은 영상의 시대에 살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이거, 어디서 많이 봐왔던 장면이야 할지 모르겠다. 그만큼 그럴싸하게 이야기가 흘러간다는 뜻이다. 글을 읽으면서 영화의 장면을 떠올린다는 것은 글이 갖고 있는 힘이 그만큼 세다는 것이다. 평면의 글을 입체의 영상으로 금방 전환시킬 수 있는 것, 이것이 정유정의 소설이 갖는 그럴싸함의 힘이다. 특히 정신병원 내부 묘사는 장르소설이라고 할 만큼 집요하고 정밀하다.

물론 웃기고, 슬프고, 끔찍하고, 무섭고, 재미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읽어보면 알 일.

 

길떠남의 의미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는 청소년문학상 당선 작품이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상이기 때문에 성인 독자는 한 발 물러나 있어야 한다.

소설은 시국 사건의 주범으로 쫓기는 친구의 형을 외국으로 탈출시키기 위한 막중한 임무를 전면에 걸었다. 계획은 늘 어긋나고 임무를 수행하는 자는 갖은 고난을 헤치고 끝내 임무를 수행한다. 길에는 예상하지 않았던 동행자가 생기고 이들의 티격태격과 그 강도만큼 가까워지는 여행의 과정을 독자는 함께 한다.

아비의 폭력으로 고통받는 정아, 독자로 애지중지 독불장군으로 큰 승주, 어느날 사라진 아빠를 잊지 못하는 주한은 길고 험난한 여행을 통해 그 어려운 한 고비를 넘기는 것 같다. 이 여행은 남은 인생을 살아야하는 힘을 기르는 스프링캠프, 삶이 180도 바뀌지는 않지만 절망의 끝에서 삶으로 방향을 틀기에는 충분하다. 그 길 또한 힘들고 위험하지만 여전히 재미있다.

 

지옥에서의 탈출

 

<7년의 밤>은 아주 힘들게 읽어야하는 소설이다. 일단 책의 두께가 만만치가 않다. 사건의 얼개는 겹치고 겹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읽어야 한다. 현재와 과거,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과정이 7년에 걸쳐 펼쳐지는데, 그 7년의 시간은 ‘밤’, 막막하고 캄캄하다. 게다가 앞이 안보일 만큼 짙은 안개가 끊임없이 펼쳐지는 댐 주변이 소설의 배경이다.

소설은 세상에 둘도 없을 만큼 잔인한 사람을 보여주기고 하고, 그 잔인한 사람에게 폭행을 당해 죽고 도망치는 딸과 아내를 보여주기도 한다. 추락 직전의 전직 프로야구 포수 출신 남자는 남의 딸을 죽인 살인마가 되고 그 대가로 아내를 잃는다. 열 두 살 아들은 이 폭풍같은 어른들의 세계를 목격하고 결국 희생자가 될 것인지, 이 덫에서 빠져 나갈 것인지 기로에 서있다. 작가의 말처럼 마음 속에 지옥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읽기가 힘이 들었다. 그들이 이 지옥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예감 때문이다.

소설은 독자의 예감을 때로는 받아들이기도 하고 뒤엎기도 하면서 소설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붙든다. 이제 열 아홉이 된 서원이가 과연 악마 이영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면 이영제의 계획대로 같은 날, 죽게 될까?

무엇보다도 서원과 승환이 머무는 등대마을에서 승환과 서원이 스쿠버다이빙을 할 때의 묘사는 마치 함께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글을 다루는 솜씨가 이런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내 심장을 쏴라>의 정신병원 묘사는 더 생생하다.

 

타인을 연민할 줄 아는 인물

 

쓸쓸하고 두렵고 답답하고 안쓰러운 작품 속 인물들을 만나면서 그나마 정서적으로 마음이 놓이는 것은 <내 심장을 쏴라>의 최기훈 간호사, 정신줄을 놓은 줄 알았지만 인간 본성의 선함을 보여주었던 환자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의 할아버지, <7년의 밤>의 승환과 선수로 등장하는 형사 같은 사람들 때문이었다.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 곁에서 제정신을 갖고 그들을 돌보거나 지켜주는 그들을 작가는 ‘타인을 연민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절대악과 절대선, 혹은 절대 약자나 절대 강자만 있다면 그럴싸하지 않거나 재미없었을 것 같다. 세상은 이러저러한 사람들이 얽히고 섥히며 돌아가는 것인데, 우리는 때로는 타인을 연민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끝없이 해꼬지 하는 사람이 되기도 하는 것 아니겠는가.

정유정의 소설이 다루는 내용은 어둡고 힘들고 무서운 얘기이지만 풀어가는 방식은 그렇게 어둡거나 힘들지 않다.

 

나의 정서적 반응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그동안 내가 독자의 사고에 어필하는 소설에만 의미를 두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야기라는 것이 원래 이렇게 재미있는 것이었다는 것을 잊고 지냈다.

그리고 내가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는 것도 알았다.

작가만이 작품 속 인물과 인연을 맺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만난 서원이 혼자 남은 생을 승환과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느낌이 나쁘지 않다. 글라이더를 타고 탈출한 승민이 행방이 묘연하다고 하지만 어딘가에서 제정신으로 잘 살고 있기를, 수명이 심사를 무사히 마치고 세상 안으로 들어오기를...

정유정의 소설이 독자의 정서에 어떻게 호소하는 지 과학적으로 살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의 바램대로 그녀의 소설은 독자의 정서에 호소하는 힘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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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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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독자는 작품을 사이에 두고 만난다. 작가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다지만 나는 거의 대부분을 작품으로 만나왔다. 열렬히 사랑해서 단 한번 만나기를 소망하는 작가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우연이 아니라면 내 발로 찾아가서 만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 만나기를 어려워하는 나의 성격 탓이다. 그렇다고 해도 작가를 아는 것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준다.

촛불 집회가 막바지로 치닫던 어느 날, 천천히 흘러가는 물처럼 사람들이 흘러가는데 남편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찔러 돌아봤더니 거기에 김훈이 있었다.

때로는 tv로, 거의 대부분은 책으로 만났던 그를 그야말로 스쳐지나 가기만 했을 뿐인데, 나는 갑자기 그를 잘 아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소설이 나에게는 좀더 깊게 다가왔다.

반대로 젊은 시인 김사이는 시로 만나기 전에 먼저 사람을 만났다. 스승을 만나는 자리였는데, ‘사이’라는 필명이 좋았다. 헤어졌을 때는 그녀의 목소리가 전혀 기억이 안날만큼 말 수가 적었던 것이 기억에 남았다.

사람을 알고 나니 그녀의 시들이 그녀의 목소리로 읽혔다. 시 곳곳에 녹아있는 그녀의 여러 감정들이 훨씬 도드라져 내게 다가왔다. 아주 잘 아는 사람의 고백을 듣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일은 아주 드물다. 그래서 나는 어느 책이든 ‘작가의 말’을 굉장히 열심히 들여다본다. 중간 중간에도 다시 작가의 말을 읽는 경우가 많다.

작가와 작품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하는가를 두고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작가와 작품이 한 쌍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렇다보니 작가가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이고 그가 작품 밖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는 꽤 중요한 문제가 된다. 작가의 말은 나에게는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더듬이를 쫙 펴고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소설가가 쓴 산문은 작품을 거둬내고 작가와 독자가 대면하는 시간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을 선택한 단 하나의 이유는 독자로서 작가를 대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색과 경험을 공들여 적은 산문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잡문’ 이어서 밀도 있는 만남이 되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작품을 빼고 난 생활인으로서의 무라카미 하루키를 만날 수는 있었다.

오로지 나의 게으름 탓이지만 우리나라에 알려진 그의 이름에 비해 나는 그의 작품을 성실하게 읽지 못했다. 일본 문학은 오히려 어린이 문학이나 만화가 더 자극적이고 감동적이었다. 내가 아는 일본의 문학은 바쇼의 하이쿠가 전부라고 느낄 만큼 빈약하다. 그러니 내게 일본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대표 선수다. 그런데 내가 그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우리는, 한국의 독자는 그를 잘 알고 있을까?

그러니까 이 책은 알지 못하는 작가를 먼저 만나는 일로써 내게 의미가 있는 책이었다.

<잡문집>을 읽으면서 내가 알게 된 하루키는

① 그가 진지한 소설가라는 것

② 그가 소설보다 음악에 더 깊이 닿아 있다는 것

③ 그가 나이답게 여유와 유머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

④ 그가 한국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것 등이다.

 

그가 진지한 소설가라는 것은 “자기란 무엇인가”에서 찾았다. 이 책에 실린 글 중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좋은 글이었다. 그는 소설, 혹은 이야기가 끝나면 가설은 기본적으로 제 역할을 마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작가도 임무를 다하고, 독자도 그 가설, 이야기를 다 읽고 덮는 순간, 별로 달라진 것 없는 현실로 되돌아온다.

그가 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소설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해답이나 결말이 없어서 허탈한 독자도 있겠지만 소설가는 가설을 보여줄 뿐, 독자의 몫을 남겨두어야 한다. 그리고 독자는 또 다른 해답이나 결말을 얻기 위해 또 다른 가설, 이야기를 찾아 읽어야 하는 것이다. 하루키는 이 부분을 ‘계속성’이라고 말한다. 옴진리교의 폐쇄성을 보면 하나의 가설, 이야기가 하나의 진리 안에 닫혀있을 때 어떤 비극적 상황이 벌어지는 지 알 수 있다.

그는 소설, 이야기가 전부라고 말하지 않고 삶의 계속성과 함께 가는 생활이라고 인식하는 것 같다. 그 이어짐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고 작가와 소설, 독자는 그렇게 오래도록 생활 곳곳에서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할 것이다.

옴진리교 문제를 취재하면서 하루키는 그 날, 그 시간에 그 공간에 있었던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목했다고 했다. 작가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개별적 존재들의 삶을 특별한 삶으로 인정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옴진리교가 개별적 존재들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교리, 하나의 생각에 개별적 존재들을 가두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는 인식에 깊이 공감한다. 소설가는 그야말로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제공한다. “다양한 형태와 다양한 크기의 신발들을 준비하고 거기에 실제로 번갈아 발을 넣어보게 할 뿐이다.” 독자와 작가는 그 “무언가”를 찾아, ‘계속’. 할 뿐이다.

<언더그라운드>에 대해 쓴 글에서도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책장을 덮고, 현실로 돌아와야만 한다. 우리 모두는 픽션이 아닌 다른 곳에서 현실세계와 마주선 우리 자신을, 아마도 픽션과 힘을 상호교환하는 형태로, 완성해나가야만 한다.” 같은 글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소설을 전부라고 말하지 않아서 좋다.

‘굴튀김 이야기’로 자기 이야기를 써보라는 충고는 나로서는 박수로 환영한다. 내가 누구라고 구구절절 쓰느니 이처럼 맛있는 글로 쓰는 것이 훨씬 풍요로운 자기 표현이다. 글에는 그 사람이 알게 모르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모습이 드러나기도 한다.

내가 면접관이라면, 막 튀겨낸 굴튀김에서 지글지글 소리가 나는 것을 듣는 사람의 귀라면 그가 굉장히 민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실수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보겠지. 그 소리를 “작지만 아주 멋진 소리”로 듣는 사람이 회사의 직원이 된다면 그 직원은 자기 존재로 옆 사람까지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으리라 판단하여 점수를 팍팍 줄 것이다. 당신이라면 사람이 좀스럽다고 볼까? 그럴수도!

 

소설보다 음악에 더 깊이 닿아있다고 생각한 것은 ‘째즈’를 비롯한 그의 음악 이야기 때문이다. 소설에 음악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참 난감하다. 그 음악을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서 그 이야기에 공감하고 마음을 싣기가 어려워서 괴롭다. 소리라는 공간성 때문에 그림이라면 어렵게라도 가능할 상상조차 힘들다. 그래서 하루키가 긴 시간에 걸쳐 이야기하고 쓴 그의 음악이야기는 이 막막한 시간이 언제 끝나려나 무릎을 꿇고 법문을 듣는 미욱한 중생이 된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 하루키가 태평양 한 가운데 살면서 우리 쪽, 일본을 기준으로 서쪽이 아니라 동쪽 그러니까 미국을 향해 온 몸을 돌려 세우고 있구나 생각해 보았다. 음악 뿐만이 아니라 문학도!

그를 세계 시민이라고 한다는데, 나는 아주 약간 기분이 상해서 그를 미국 시민이라고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하다가 그건 쫌 심하지 싶어서 꼬리를 내리기로 했다. 그의 글에서 일본적인 냄새가 별로 느껴지지 않고, 그를 편안하게 생각한 것은 이미 우리 사이에도 미국이라는 존재가 다양한 형태로 스며 있기 때문일테니 말이다.

 

읽기에 조금은 편안한 이런 글의 매력은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작가란 말과 언어를 부릴 줄 아는 사람이다. 약간은 풀어져도 되는 이런 글에서 평소 하던 대로 쓰는 말을 글로 읽는 느낌은 색다르다. 각 장마다 그 글을 싣는 이유라던가, 글의 출처, 혹은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글들은 하루키의 육성을 그대로 들을 수 있다. 각 각의 글들에 대해 무척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밝히고 있어서 본문보다 그 말을 읽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나이를 보니 호들갑 떨 것도 없고, 조바심 낼 나이도 아니고 살아온 생의 길이가 깊이로 더해져서 오로지 그 나이가 되어서야 나올 여유가 느껴졌다. 남이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에 연연해 하지 않는! 당연하게도!

 

한 권의 책을 한 자리에 앉아서 다 읽어내는 일이 어렵다 보니 맥이 뚝뚝 끊기는 독서를 할 수 밖에 없다. 방학이니 때 맞춰 아이 밥도 차려야 하고, 빨래도 해야 하고 먼지도 털어야 하고, 돌아서면 저녁해야 하고. 식구들이 돌아오고, 그러다 보니 한 권의 책이 상황의 끝에 따라 또 다양하게 읽힌다. 더욱이 이 책처럼 이러저러한 글들을 모았다고 하는 책은 집중하기가 더 곤란하다.

어느 맥락에서 느꼈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어느 순간 나는 하루키가 꽤 차가운 이성(異性)으로 느껴졌다. 도무지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사람처럼 그는 냉정할 만큼 나(한국의 독자, 혹은 한국의 문학)에 대해 말이 없었다. 이 두꺼운 잡문집에는 <도넛을 베어 먹으며>가 유일하다. 그 글을 쓴 계기도 그가 한국에서 만나고 싶은 일본인으로 2위에 뽑혔기 때문이었다.

나의 사랑을 몰라주는 매정한 남자라고 느낀 것은 한국 독자들이 그를 생각하고 좋아하는 것에 대해 그가 흡족한 대꾸를 해 주지 않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리라. 남 앞에 나서는 것을 꺼려하는 자신의 성격 탓이라고 하니 할 말은 없지만 한국어로 번역된 몇 권의 책에도 한국어 서문이라거나 한국의 독자들에게 하는 말이 없다.

급기야 <잭 런던과 틀니>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내 생각은 그가 한국 문학을 어떻게 볼까 하는데 까지 이르고 말았다.

그가 좋아하는 작가 잭 런던의 전기 <<말을 탄 선원>>에서 잭 런던이 러일 전쟁 중에 한반도 북부의 벽촌에 묵었던 적이 있었단다. 마을 사람들이 잭 런던을 보자고 해서 조선의 외딴 시골마을에까지 자기가 알려졌다고 생각, 감격스러웠는데 알고 보니 잭 런던이 아니라 잭 런던의 틀니를 보여주라고 했던 모양이다. 어이쿠! 아버지!

하루키는 어빙 스톤이 쓴 잭 런던의 전기 <<말을 탄 선원>의 이 부분을 읽으면서 잭 런던을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로구나고 생각했다고 고백한다.

틀니를 보여달라는 사람들 앞에서 제 틀니를 삼십분씩이나 뺐다 끼웠다 하면서 잭 런던은 “인간이 제아무리 사력을 다해 뭔가를 추구해도 그 분야에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는 좀처럼 힘들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루키는 그가 교훈을 터득하는 방식에서 감탄을 한다. 누구나 잭 런던처럼 무식한(이건 내 생각이다) 이방의 사람들 앞에서 틀니를 뺐다 끼웠다 하면서 다름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 하루키가 잭 런던을 높이 평가하는 부분이었다.

<도넛> 말고 한국과 관련한 글은 잭 런던과 틀니와 관련한 이글이 전부다. 특별히 이 대목을 언급하며 문제 삼은 그의 생각 속에 한국이라는 나라와 한국의 문학에 대한 생각이 어느 만큼일까 생각하니 자존심이 상한다.

우리가 접한 외국문학은 초기에는 일본 번역물을 다시 번역하면서 시작되었다. 근대화 자체가 많은 부분을 일본에게 빚지고 있는데, 혹시 이런 흐름과 그의 한국문학에 대한 생각이 맞물려 있는 것은 아닐까 아주 편협하고 소심한 생각까지 하고 나서야 생각을 접을 수 있었다. 적어도 그가 그 정도로 편협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다만 한국문학에 별 관심이 없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기로 했다. 그래도 우리가 이토록 그의 문학에 열렬히 환호를 하고 독자를 자처하는데도 한국에 한번 와보지도 않는 것이 조금은 서운하다. 계획이 있거나 올 수도 있지만 지금 막 그의 <잡문집>을 읽고 나서는 이런 생각이 강렬하다.

물론 그가 와야 하는 이유는 전혀 없다. 좋아하는 것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어야 하고, 한국 독자들이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것 또한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임을 안다. 그래야 마땅하다. 그는 세계시민으로 인정받는 소설가이니까!

 

이 책을 통해 그를 다 알았다고 말하지는 못해도 그의 육성과 맨 얼굴을 볼 수는 있었다. 그의 말대로 독자는 책을 덮는 순간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책을 덮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 나의 느낌 혹은 나의 변화가 중요하다. 철저하게 논픽션의 세계였지만 그 또한 특별한 한 개인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존재다. 물론 이미 특별한 존재가 되어 있고 나 또한 특별한 개인이라고 아무리 말해 봐도 그 앞에서는 의미 없는 자기 방어일 뿐이다. 그가 소설가로서 폐쇄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그의 소설이 앞으로 계속되는 한 그의 독자도 계속성을 유지할 것이다. 그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소설가다.

다만 나는 한걸음 다가가기 보다는 반걸음 물러났다. 애초에 준 마음이 없으니 이럴 것 까지 없잖아 할 수도 있건만 그 두꺼운 책을 읽는 내내 등만 바라본 것 같아 아주 약간 상처받았다. 거절당한 친구 대신 내가 뭐라 하는 꼴이다. 괜히 나서지 말라는 소리가 마구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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