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기록
신상웅 지음 / 소요서가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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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지도를 펼치고 저자의 이동경로를 따라간다. 중국 남서부와 라오스, 태국, 베트남의 도시와 촌락에 표시하고 일본의 교토에서 마친다. 쪽 염색의 역사와 전해지는 경로는 한 민족의 고난과 이주의 역사였다. 푸른 기록은 몽족 여인들의 팔에 물든 지워지지 않는 맵고 시린 시간이다. 반면 푸른 천에 새겨진 무늬들은 그들의 삶을 상징하는 기호들이다. 쪽풀들이 자라는 고장, 쪽물이 들어있는 항아리들이 푸른 숨을 쉬는 마을, 파란 천이 바람에 나부끼고, 화려한 무늬가 피어나는 그런 풍경을 절로 상상한다. 사진들 속 시리도록 푸른빛이 물들어 온다.


중국 서남부의 변방도시 구이저우(貴州) 카이리. 이곳에서부터 저자는 쪽빛 여행을 기록한다. 구이저우 성에는 먀오족 자치현들이 여기저기 있다. 카이리는 먀오족이 모여 사는 지역으로 들어가는 관문 격인 도시이고, 바사마을은 본격적인 먀오족 자치현이다. 그리고 샤오황 마을……. 쪽 염색을 찾아가는 여정은 먀오족(몽족)의 이주역사를 따라가는 것이다. 곳곳에서 만나는 여인들이 입은 푸른색의 옷들은 그의 심장을 뛰게 한다.

 

먀오족의 바사마을 민속관에서 본 쪽 염색과정.

쪽물이 무르익으면 물 표면에 자주색 피막이 떠다닌다. 빛이 나던 금속성의 피막은 천으로 옮겨오지 않는다. 색이 아니라 빛이다. 푸른색이 진해질 때로 진해진 무명은 검은색에 가깝다. 그냥 검은색이 아니라 여름 밤하늘처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좀 아득한 무엇이다. 푸르다 못해 검게 물이 오른 천을 건져내면 표면에 자주색 꽃이 이끼처럼 돋아난다. 작은 폭죽이 터지듯 천을 비집고 피어오른 것들은 쪽물 위에 떠돌던 그 빛이다. 금박처럼 반짝이던 자줏빛은 천이 마르면서 사라진다.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색이고 쪽 염색의 막바지에 잠깐 다녀가는 찰나의 빛이다.(31p)”

그의 묘사는 새벽녘 여명에 별빛이 사라지고 푸른 기운이 도는 하늘빛이 떠오른다.

 

가을걷이를 하는 겨울은 염색의 계절이다. 삼나무 통에 쪽물이 익어간다. 푸른색으로 물들인 무명은 양포, 거기에 납염으로 무늬를 넣은 것은 '화포'라 부른다납염이 시작된 전설-꿀벌이 앉았다 간 자리에 쪽물이 들지 않자, 소녀는 밀납 때문에 염색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은 한편의 그림동화다. 이름난 염장이를 찾아가고, 명장 유 노인의 방염제는 석회와 콩가루, 어디에나 무엇이든지 푸른 색을 위한 재료인 듯 싶다. 윈난성(雲南省) 다리(大理) 저우청 마을의 찰염(紮染)-실로 묶거나 꿰매어 염색하는-과 이로부터 나온 '두화포'는 삶의 터전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와 지혜로 무늬를 만들어가는 인간의 생활사다.

 

태국과 라오스, 베트남 북부 산악지대에서 흩어져 살고 있는 몽족의 조상은 중국 구이저우의 먀오족이다. 그는 태국의 치앙마이, 매살롱을 향한다. 그는 화포의 자취가 사라지고 관광객을 향해 웃음 짓는 사람들에게 지역에서 실망하던 자신에게서 식민주의(colonialism)와 관광주의(tourism)적 시선을 발견하고 반성한다. 어쩌면 온 힘을 다해 살고 있는 그들에게서 전통이 지켜지지 않음을 개탄하지만그 생각은 "문명의 편리를 누리는 자의 몰염치"이다. 오래 남는 깨달음이었다.

 

라오스에도 몽족의 디아스포라는 이어진다. 몽족은 18세기에 중국을 떠나 라오스로 왔다. 그곳에서 푸른 염색은 바틱이라 불린다. 오래고 고된 시간 동안 여인들은 화포에 무늬를 넣어왔다. 그것이 그녀들의 역사다. 라오스의 몽족은 중국 땅에서 이주해왔고, 베트남 전쟁 동안 미국의 용병이 되고, 전쟁이 끝난 후 흩어져 태국으로 망명하거나,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저자는 베트남의 디엔비엔푸와 박하로 향한다. 지역마다 화포가 담고 있는 그림들은 다르고, 그것들은 시간과 장소의 역사의 기호이고, 삶의 문양이다.

 

저자는 중국의 샤오싱에서 항저우로 이어지는 운하에서 표해록』의 저자 조선의 최부를 떠올리고 그 일행의 난파와 표류 그리고 귀향(歸鄕) 길 되짚는다중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화포는'시보리'가 되고 이것은 다시 '노렌'과 같은 형태로 일상에 스며들어 있다. ‘노렌은 발이나 커튼의 형태다기록으로 남아있는 일본의 쪽 염색은 8세기에 시작되었고, 일본의 방식대로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을 저팬 블루Japan Blue’라 부른다. 교토 왕궁 서쪽에 자리잡은 니시진은 교토의 섬유와 염색의 중심지다.

 

저자 를 이 길로 이끈 것은 박지원이 옷을 해 입었다던 화포에 대한 기록 때문이다. 조선에서 만든 것인지, 중국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이 기록 때문에 길을 떠나, 쪽빛 길(Blue road)을 걷는다. 염색가 신상웅, 그의 쪽빛 탐구는 내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었다. 박제가의 <연평초령의모도>를 추리1790년 베이징이라는 책을 썼다고 하니 찾아 읽어봐야겠다.


* 출판사로부터 책을 무료로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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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10-31 0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쓴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 지도를 찾아서 보기도 하셨군요 몽족은 중국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살았군요 그렇게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 같기도 합니다 옮겨 간 곳에서 언제나 쪽 염색을 했나 보네요 민족과 염색의 역사... 한국에서 하는 쪽 염색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찾아보니 나주가 나오는군요

그레이스 님 시월 마지막 날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2024년 두달 남았다니...


희선

그레이스 2024-10-31 08:18   좋아요 1 | URL

예상치않게 몽족의 역사를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이 지나면 11월이네요
오늘도 행복하세요~~

레삭매냐 2024-11-02 1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디선가 라오스 몽족이
파테트라오 공산반군에게
적대적이어서 라오스가
공산화된 다음에 무척이나
핍박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나네요.

흥미로운 책인 듯 합니다.

그레이스 2024-11-02 14:02   좋아요 1 | URL

저도 쪽염색이 우리나라에만 있는게 아니라는것과,,, 소수민족의 역사, 지리를 알게 되어 좋았습니다
 

‘S/Z’ 딱 봐도 기호학인 듯 보이는 이 책은 롤랑 바르트라는 작가만 보고 사두었었다. 기억에는이미지와 글쓰기라는 책을 읽고 좋아서 책을 몇 권을 구입했는데, 읽어내는 속도는 몇 권 되지도 않은 구매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이 책은 책장에 꽂혀만 있는 신세였었다. 결국 바르트 읽기도 자연스럽게 중단되었다이번에 발자크 읽기를 하면서 다시 이 책을 펼쳐들었다.


S/Z』는 바르트가 발자크의 사라진느를 텍스트로 해서 강의한 내용이다. 제목의 S는 사라진느, Z는 잠비넬라의 첫 알파벳이다. 둘 다 이 소설 속에서 화자가 한 여성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독자는 소설을 읽으며 문장과 서로 상호작용을 한다. 이때 텍스트는 5가지 코드로 읽혀지는데, 해석학 코드(Hermeneutic code, HER.), 행동적 코드(Proairetic code, ACT.), 문화적 코드(Referential code, REF.), 의미론적 코드(Semic code, SEM.), 상징적 코드(Symbolic code, SYM.)이다. 어떤 말과 행동 인물을 표현하는 텍스트에서 독자는 의심하고, 재생하고, 정보를 얻고, 짐작하고, 교감하는 상호작용을 한다. 바르트는 이 소설을 561개의 렉시아(lexia, 독해 단위)나누고 그것을 코드 기호를 달아놓고 분석한다. 이렇게 조각조각 내서 읽는게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데, 가끔은 내가 텍스트와 상호작용하며 얻은 의미들이 일치하는 지점에서는 작은 희열을 맛본다.

 

바르트는 이 강의를 통해사라진느를 세상에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이 책은 텍스트를 읽는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므로 전적으로 그것에만 의존해서 소설을 읽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품 사라진느를 먼저 읽고 감상을 한 후에 참고한다면 확장된 독서경험이 될 것이다. 어쨌든 나는 도움을 받았다.


 사라진느는 문학과 지성사의 책으로 처음 읽었다. 힘들게 읽었던 생각이 난다. S/Z에도 본문은 수록되어 있다. 두 권이나 있는데 민음사 책을 또 산 이유는 전적으로 제목을 오독한 탓이다. 검색하던 중 사라진 샤베르 대령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발자크 읽기를 하던 중이라 망설이지도 않고 구매버튼을 눌렀고 받아보고서야 사라진샤베르 대령사이에 점 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사라진샤베르 대령

! 샤베르 대령은 사라지지 않았다.” (ㅋㅋㅋㅋ)

 

그러면 문지사는 사라진느’, 민음사는 사라진이라고 했을까? 프랑스어에서 SarrasineSarrasin이라는 남성명사에 e를 붙여 여성명사를 만든 것으로 사라진느로 읽는다.(전자사전에서는 사람이름이 아닌 일반명사는 사라진으로 발음이 나온다.) 여기서 또 의문! 왜 남자 주인공에게 여성이름을 붙였을까?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그 의문이 어느 정도 풀렸었다. 거세당한 카스트라토 가수 잠비넬라를 사랑했던 사라진은 나중에서야 그 정체를 알게 된다. 사라진에게서 이중적인 심리를 읽게 된다. 그가 진실을 알고 잠비넬라에게 퍼붓는 분노는 속은 것에 대한 화이기도 하면서, 자신 안에 있는 동성애적 성향을 거부하는 모습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바르트는

사라진(Sarrasine)이라는 낱말은 프랑스인이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여성성이라는 또 다른 함축 의미를 실어 나르고 있다. 특히 프랑스어의 고유명사 연구를 통해 남성(Sarrazin)이 통상적으로 확인되는 고유명사인 경우, 이 여성성은 여성의 특수한 형태소로서 마지막에 e를 일반적으로 받는다. (함축된) 여성성은 텍스트의 여러 장소에서 고정되도록 되어 있는 하나의 기의이다. 그것은 성격 분위기 수사 상징을 형성하기 위해 동일한 종류의 다른 요소들과 결합될 수 있는 이동성 요소이다.(S/Z롤랑 바르트 93p)”

그는 사라진이 보인 난폭한 분노는 잠비넬라로부터 온 거세공포라고 해석한다. 이것은 다시 이야기를 청취하던 여인의 분노로 나타나는데, 그녀 역시 같은 공포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글쎄 여기까지는 내 지식이 짧아서 동의하는 것을 유보하고 싶다. 제목에 대한 비슷한 해석을 하고 있어서 반가웠다. 남성명사는 사라쟁, 여성명사는 사라진사라진느두 가지 발음이 다 검색된다. 그러나 제목이 전하는 의미들을 생각해 본다면 나는 고유명사를 읽는 발음 사라진느로 표기하는 편을 선택하겠다.


민음사 번역 사라진은 너무나 매끄럽게 잘 읽혔다. S/Z에 실려 있는 번역문과 비교했을 때 좀 더 의역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감춰져 있는 의도, 기호, 의미에 대한 호기심을 증폭시키면서 눈과 의식을 이끌어가는 힘은 민음사 번역에 더 있었다. 잠비넬라의 정체가 드러나는 지점까지 빠른 속도로 끌려가게 된다.

 

떠들썩한 연회장과 추운 겨울 회색빛 정원의 이미지로 시작된 대조법은 한 존재에게서 보여지는 상반된 이미지를 향한다. 랑티 백작 저택의 떠들석한 연회 한 가운데 홀연히 나타난 정체불명의 노인, 노쇠한 육체 위에 입혀진 화려한 의상은 누더기로 보이고, 보석들은 기괴한 존재의 모습을 더 두드러지게 하는 효과를 낸다. 더욱 의미심장한 대조는 이 환상적인 인물에게 강렬하게 느껴지는 여성적 교태다.

이 병약한 육신에 새겨진 노쇠의 흔적에 별수 없이 주목하다 보면 인간에 대한 깊은 혐오가 마음을 죄어 왔다(25p).”

이질적인 요소들은 눈길을 끌고, 호기심을 갖게 하고, 심지어 혐오감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 인물의 등장에 집안이 발칵 뒤집히지만, 그를 감시하고, 부축하고, 그 앞에서 웃음 짓는 랑티가 사람들의 모습은 더욱 수상쩍다. 그는 그들의 행복, 목숨, 재산을 움켜진 마법의 인물 같았다(20p)”라는 말을 통해, 랑티가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부와 사치가 그에게서 오고 있음을 암시한다.

 

아도니스, 엔디미온은 그 노인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등장한다. 벽에 걸려 있는 아도니스는 사라진의 조각을 보고 그린 것이고, 그 모델이 잠비넬라라는 사실이 구술되는 순간, 존재는 베일을 벗기 시작한다. 결국 추기경의 노리개였던 카스트라토 가수 잠비넬라의 정체가 밝혀지고, 피그말리온의 욕망을 갖고 있던 사라진은 분노한다. 잠비넬라를 사랑했던 사라진의 당혹스러움에는 공감할 수 있으나, 분노에는 그럴 수 없다. 그의 분노에 의구심을 갖게 한다. 군중 속에 기괴한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병들고 노쇠한 잠비넬라에게 연민을 갖게 된다.

 

이질적인 요소들은 내러티브를 통해 연민을 일으킨다. 외부로 보여지는 이미지, 그 존재가 갖고 있는 사회 통념적 시선으로는 배척될 수밖에 없는 이미지의 근원에 타인의 욕망에서 비롯된 폭력이 있었음을 알게 될 때, 그에게서 비애를 느낀다. 그리고 그 폭로된 정체 앞에서 공포로 절규하는 사라진느, 그의 분노는 측은하다. 인간은 보여지는 것에 의해 눈이 멀 수 있다.

 

이번에는 발자크에게 묻고 싶다. 글을 쓴 의도가 무엇이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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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10-28 17: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Z
뒤도 돌아보지 않고 통과합니다 ㅎㅎ

그레이스 2024-10-28 17:57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coolcat329 2024-10-29 0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Z라는 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기호학이 뭔지 모르나 독자가 소설을 읽고 문장과 상호작용하는 다섯 가지 코드는 궁금하네요.
제 생각에도 ‘사라진‘보다는 ‘사라진느‘가 더 맞는 거 같아요. 민음사 번역이 읽기 수월하다니 참고하겠습니다.

그레이스 2024-10-29 09:0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기호학은 볼수록 어렵네요
ㅎㅎ

서니데이 2024-10-29 2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라진보다는 사라진느 쪽이 더 여성명사 같은데, 남성명사가 사라쟁이군요.
원서가 외국어인 책은 번역이 잘 되어 있어야 읽고 이해하기 좋은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그레이스님,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4-10-29 21:22   좋아요 1 | URL

그렇죠?
오랜만이고 감사합니다 ~
서니데이님도 평안하세요

레삭매냐 2024-10-30 07: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 쓰는 기계라는 별명으로
불렸다는 발자쿠 선생.

평생 그렇게 많은 작품들을 어
떻게 쓸 수 있었는지 그저 신기
할 따름입니다.

S/Z의 저자는 무려 롤랑 바르트
네요. 책은 처음 알게 되었네요.

그레이스 2024-10-30 09:07   좋아요 1 | URL
발자크가 사라진느를 바르트가 사라진느를 텍스트로 S/N을 강의한 동기에 어떤 접점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도시에서 몰려든 관광객을 향해 내키지 않는 웃음도 지을 줄 알았다. 그들은 온 힘을 다해 자신들의 삶을 살아냈던 것이다. 어쩌면 원형 그대로의 화포를 찾고자 하는 내 욕심으로 화포 이외의 것에서 눈을 돌렸을 것이다. 자신은 온몸으로 문명의 편리를 누리며 전통이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는 꼴이었다. 당신들은 언제나 과거의 시간 속에 머물러 있으라고 그래야만 한다며 연신 카메라를 눌러대는 몰염치와 다르지 않았다.
여행은 때로 누군가에게 모독일 수 있었다.
결국 몽족과 그녀들의 화포를 찾아 헤맨 내 발걸음도 내 안의 잣대만으로 다른 것에 눈감아버리는, 순수 혈통에 집착하는 뿌리 깊은 이기심과 닮아 있었는지 모른다. 여기는 내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고난의 시간동안 그네들이 끝끝내 지켜온 삶의 터전이었고 나는 더운 여름날 시원한바람이나 물 한 모금보다 못한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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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 희곡선 을유세계문학전집 53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박현섭 옮김 / 을유문화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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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명동의 극장에서 연극 갈매기를 봤었다. 이 내용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갔던 나는 전하려는 메시지를 대략 짐작만 하고 감동도 공감도 하지 못했었다. 가볍게 던져지는 대화들과 주인공의 자살이 맥락 없이 다가왔다. 연기나 연출의 문제가 아니라 체호프의 작품 자체가 그런 느낌을 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19세기 말 안톤 체호프는 러시아 문학사에 있어 공백 시대에 등장했다. 네크라소프, 도스토옙스키, 투르게네프가 세상을 떠났다. 톨스토이는 절필을 선언했다. 그런 시기에 체호프가 등장했다. 초기에는 코믹하고 가벼운 글들을 썼고, 그레고로비치로부터 칭찬과 격려의 편지를 받고서야 지방의 의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었다. 그의 단편과 희곡들에서 엿보이는 것처럼 체호프는 개인주의자였고 예술가의 시선을 갖고 있다. 그래서 1890년 강제 유형에 처해진 사람들의 삶을 취재하기 위해 사할린으로 여행을 간 것은 아이러니하다. 이 여행 때문에 병을 얻었고 그가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는 이유가 된다. 그는 지방의 의사로 있으면서 관찰한 사람들의 모습을 작품에 담았고, 그의 작품에는 의사가 등장한다.

 

이 희곡집에는 갈매기, 바냐삼촌, 세자매, 벚나무 동산체호프의 4대 희곡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이 담겨있다. 이 희곡들은 러시아 농촌 사회의 전형적인 인물들과 이 농촌을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도시의 귀족 또는 지식인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대화의 전반적인 정서는 우울이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당시 정치적 암흑시대의 러시아인들의 무기력과 자기중심주의를 읽게 된다. 사실 체호프는 정치에 무관했기에 지식인들의 이런 정서와 태도는 농촌소외와 더 관련있는 것으로 보인다. 철도의 발달과 외국 자본의 유입으로 경제는 호황이었다. 이와 더불어 철도건설은, 농노해방으로 시작되었던 사람들의 도시로 유입은 더욱 가속화했다. 19세기 말 러시아의 도시 인구는 급격하게 팽창했다. 반면 농촌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 패배감으로 인해 우울함을 갖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마샤와 메드베덴코의 우울함은 표면적으로 엇갈린 사랑때문인 것처럼 보이나 이들의 대화를 읽어보면 더 근본적인 이유들을 보게 된다왜 항상 검은 옷을 입느냐고 질문하는 메드베덴코에게 마샤는 불행하기 때문에 입는 인생의 상복이라 말한다. 그런 그녀에게 메드베덴코는 가난에 대해 토로한다. 마샤는 트레플레프를 사랑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메드베덴코와 결혼한다. 과연 메드베덴코는 그녀를 사랑해서 구애했을까? 그의 구애가 너무 열의가 없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의심을 하게 된다. 아마도 두 사람에게는  체념이 반복되어 습관이 되어 있는 듯 보인다.

 

트레플레프는 여배우 아르카디나의 아들이다. 그녀는 자기애가 강하고, 그래서 아들은 사랑이 결핍되어 있다. 그는 유명한 여배우의 아들로 항상 사람들의 평가를 의식하고 인정욕구가 강하며 자의식이 강하다. 당시 무대에 올려지는 연극을 구태의연하다고 비판하고 오만하다. 그는 새로운 형식의 희곡을 쓰고 무대를 선보인다. 가정극 공연을 위해 작은 무대가 세워지고 그의 희곡은 올려지지만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의 어머니의 비웃음을 산다.


주목하게 되는 지점은 트레플레프 주변인들이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있고, 이해하려고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연인 니나도, 그의 작품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는 도른조차도 그런 듯 보인다. 그의 고통의 깊이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심지어 죽은 갈매기라는 복선, 광기를 보이는 그의 행동들에서도 그의 자살 시도에 대한 아무런 전조를 읽지 못한다. 죽음을 가져온 두 번째 자살은 더욱 갑작스럽다. 관객조차도 그의 이런 심리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다.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자신의 관심과 문제에 몰두해 있어 누군가의 말을 듣고 들여다볼 여유가 없음을 알게 된다. 그들의 스몰토크, 날씨 이야기, 농담 속에 외로움이 묻어나고 있다. 많지도 않은 사람들이 각자의 고민에 빠져 있으면서 그들 속에서 서로 소외시키고 소외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트레플레프는 왜 그런 무대를 올렸을까? 아르키디나가 어렴풋이 느낀 것처럼 모친인 그녀를 조롱하기 위해 난해한 작품을 올린 것이 아닐까? 모친으로부터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과 증오하는 마음이 뒤섞여 있음을 보게 된다.

 

트레플레프는 왜 죽음을 택했을까? 니나가 그의 곁을 떠나고, 그는 절망감에 자살시도를 한다. 시간이 흐르고 그는 글을 써서 성공한 작가가 된다. 새로운 형식의 글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도른은 그 사람은 이미지를 통해 사고할 줄 알아요. 그 사람 소설은 색감이 풍부하고 선명해요. 나는 그걸 강하게 느낍니다. 다만 안타까운 점은, 분명한 쟁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냥 인상을 던져 줄 뿐, 그 이상이 없어요. 사실 인상 하나만으로는 멀리 나갈 수 없거든요.(체호프 희곡선을유출판사, 96p)”라고 말한다. 그렇듯 트레플레프는 한계를 느낀다.

 “새로운 형식에 대해 그렇게 떠들어 댔지만, 지금 보니 나 스스로 점점 타성에 빠져들고 있어.(체호프 희곡선을유출판사, 98p)”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는 오래 멀리 끌고 갈 수 없다. 그는 작품에서 진부함과 따분함을 지우기 위해 다시쓰고 지우기를 반복한다.

 

트레플레프 뿐 아니라, 그가 라이벌이라 생각하는 트리고린의 말을 통해서도 작가로서의 고통을 전하고 있다. 아마도 체호프의 작가로서 고충이 녹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모친 아르카디나는 데카당하다고 비판하고, 관객의 호감을 사지 못했던 그의 작품이 후에는 사람들의 높은 평가를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모더니즘, 이미지나 상징, 허무의 냄새가 가득한 전위적인 작품을 시간이 지나고서야 대중이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도른의 말처럼 전달하는 메시지와 분명한 쟁점을 던지지 못함으로 그는 한계에 부딪친다. 애초에 그의 글쓰기의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질문하게 된다.

 

또한 도시로 갔다가 트리고린에게 버림받고 배우로도 성공하지 못한 니나가 찾아왔을 때, 그는 니나에게 곁에 있어줄 것을 호소한다.

 “나는 외롭습니다. 내 마음에 온기를 전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나는 마치 지하에 있는 것처럼 추워요. 그래서 무엇을 쓰든 간에, 내 작품은 모두 메마르고, 딱딱하고, 음울해져요. 여기 남아 줘요, 니나, 제발 부탁해요, 아니면 당신과 함께 가도록 해 줘요!(98p)” 

얼마나 외롭고 처절한 부탁인가?

 

그는 작가로서 한계와 상실의 심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 죽음의 갑작스러움에서 체호프에게 감탄하게 된다. 아무 정보 없이 봤던 연극에서 내가 너무 개연성이 없다는 생각을 했던 이유인 듯하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이 체호프의 의도였다.

 

트레플레프의 사랑의 결핍으로 인한 구멍은 작가로서의 성공, 사람들의 인정과 같은 것으로 메꿀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글을 씀으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지만, 그는 그렇지 못했다. 한계를 만나고 더욱 깊은 절망에 빠졌다.

 

갈매기의 트레플레프의 자살(갈매기)도 바냐삼촌의 절규(바냐삼촌)도 모두 갑작스럽다. 겉으로 드러나는 그런 갑작스러움만 본다면 체호프가 그리려는 인물들을 지나친 것이다. 그의 인물들은 지극히 평범하다. 나보코프는 "체호프는 등장인물을 교훈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고, 인물을 미덕의 전형으로 만들지 않고, 살아 숨 쉬는 인간상 그대로를 정치적 메시지나 문학적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그려낸다"고 말한다. 한 인물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가 관찰한 필부 필녀를 그대로 그리고 있다. 이들이 만나 어떤 사유의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체호프의 등장인물들은 진정한 도덕과 정신문화, 물질적 안정과 풍요가 러시아 민중에게 뿌리 내리지 않는 한, 고매한 지식인들께서 선술집 옆에 다리나 학교를 짓느라 아무리 고군분투하더라도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나보코프, 러시아 문학 강의 456p)”

 

사람은 다 자신의 문제에 몰두해 있다. 가까운 사람이라도 타인의 고통에 오랫동안 관심을 두기란 어렵다.- 나의 문제가 가장 크고 당면한 문제이기에.  당연히 트레플레프와 같은 사람은 소외된다. 개인주의가 이제는 삶의 규범처럼 되어서 개인의 사생활은 침해당할 수 없는 영역이 되었다. 그 영역들의 모임에서 트레플레프와 같은 사람들은 원하지 않는 추방을 당하게 된다. 19세기말 러시아 농촌 소도시 체호프가 그려내는 사람들은 다 외로웠다

 

나는 고통받는 타인에게 어느 정도 얼마나 지속적으로 관심을 둘 수 있을까? 그의 요청이 없다면 무관심해도 괜찮을까? 혹시 내가 놓쳤던 사람들은 없을까? 등 이런 질문들이 꼬리를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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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4-10-16 1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통 받는 타인들에 대한 지속적
관심을 유지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내가 가진 백만 한 가지 문제들
때문이라는 이유를 대면서 말이죠.

나는 외롭고 싶지 않지만 또 타
인의 외로움은 잘 모르겠다 -

아, 쉽지 않은 명제입니다, 참말로.

그레이스 2024-10-16 19:09   좋아요 1 | URL
^^ ㅠㅠ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인간의 고통은 변함이 없죠
표면적 이유만 달라졌을 뿐!
 
채식주의자 (리마스터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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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축하,,,,
대단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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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4-10-10 2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레이스 2024-10-10 20:37   좋아요 1 | URL
어제 방송에서 후보에 올랐으나 가능성은 낮다고 하더니,,, 항상 틀리는 듯요. ㅎㅎ

독서괭 2024-10-10 2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굉장해요!!

그레이스 2024-10-11 09:10   좋아요 0 | URL
진짜 예상도 못했는데,,,
역시 그 해의 이슈가 될만한 주제가 던져져야 하는듯요
인간의 폭력성!

jenny 2024-10-10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집에 있는데도 이 책을 아직 못 읽었어요
읽어야겠어요

그레이스 2024-10-11 05:13   좋아요 0 | URL
한강 책 찾느라 한참 여기저기 뒤졌네요 ㅎㅎ
애들이 이제서야 달라고 해서!

레삭매냐 2024-10-16 1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박으로 축하합니다, 고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