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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기록
신상웅 지음 / 소요서가 / 2024년 10월
평점 :
구글 지도를 펼치고 저자의 이동경로를 따라간다. 중국 남서부와 라오스, 태국, 베트남의 도시와 촌락에 표시하고 일본의 교토에서 마친다. 쪽 염색의 역사와 전해지는 경로는 한 민족의 고난과 이주의 역사였다. 푸른 기록은 몽족 여인들의 팔에 물든 지워지지 않는 맵고 시린 시간이다. 반면 푸른 천에 새겨진 무늬들은 그들의 삶을 상징하는 기호들이다. 쪽풀들이 자라는 고장, 쪽물이 들어있는 항아리들이 푸른 숨을 쉬는 마을, 파란 천이 바람에 나부끼고, 화려한 무늬가 피어나는 그런 풍경을 절로 상상한다. 사진들 속 시리도록 푸른빛이 물들어 온다.
중국 서남부의 변방도시 구이저우(貴州) 카이리. 이곳에서부터 저자는 쪽빛 여행을 기록한다. 구이저우 성에는 먀오족 자치현들이 여기저기 있다. 카이리는 먀오족이 모여 사는 지역으로 들어가는 관문 격인 도시이고, 바사마을은 본격적인 먀오족 자치현이다. 그리고 샤오황 마을……. 쪽 염색을 찾아가는 여정은 먀오족(몽족)의 이주역사를 따라가는 것이다. 곳곳에서 만나는 여인들이 입은 푸른색의 옷들은 그의 심장을 뛰게 한다.
먀오족의 바사마을 민속관에서 본 쪽 염색과정.
“쪽물이 무르익으면 물 표면에 자주색 피막이 떠다닌다. 빛이 나던 금속성의 피막은 천으로 옮겨오지 않는다. 색이 아니라 빛이다. 푸른색이 진해질 때로 진해진 무명은 검은색에 가깝다. 그냥 검은색이 아니라 여름 밤하늘처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좀 아득한 무엇이다. 푸르다 못해 검게 물이 오른 천을 건져내면 표면에 자주색 꽃이 이끼처럼 돋아난다. 작은 폭죽이 터지듯 천을 비집고 피어오른 것들은 쪽물 위에 떠돌던 그 빛이다. 금박처럼 반짝이던 자줏빛은 천이 마르면서 사라진다.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색이고 쪽 염색의 막바지에 잠깐 다녀가는 찰나의 빛이다.(31p)”
그의 묘사는 새벽녘 여명에 별빛이 사라지고 푸른 기운이 도는 하늘빛이 떠오른다.
가을걷이를 하는 겨울은 염색의 계절이다. 삼나무 통에 쪽물이 익어간다. 푸른색으로 물들인 무명은 양포, 거기에 납염으로 무늬를 넣은 것은 '화포'라 부른다. 납염이 시작된 전설-꿀벌이 앉았다 간 자리에 쪽물이 들지 않자, 소녀는 밀납 때문에 염색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은 한편의 그림동화다. 이름난 염장이를 찾아가고, 명장 유 노인의 방염제는 석회와 콩가루, 어디에나 무엇이든지 푸른 색을 위한 재료인 듯 싶다. 윈난성(雲南省) 다리(大理) 저우청 마을의 찰염(紮染)-실로 묶거나 꿰매어 염색하는-과 이로부터 나온 '두화포'는 삶의 터전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와 지혜로 무늬를 만들어가는 인간의 생활사다.
태국과 라오스, 베트남 북부 산악지대에서 흩어져 살고 있는 몽족의 조상은 중국 구이저우의 먀오족이다. 그는 태국의 치앙마이, 매살롱을 향한다. 그는 화포의 자취가 사라지고 관광객을 향해 웃음 짓는 사람들에게 지역에서 실망하던 자신에게서 식민주의(colonialism)와 관광주의(tourism)적 시선을 발견하고 반성한다. 어쩌면 온 힘을 다해 살고 있는 그들에게서 전통이 지켜지지 않음을 개탄하지만그 생각은 "문명의 편리를 누리는 자의 몰염치"이다. 오래 남는 깨달음이었다.
라오스에도 몽족의 디아스포라는 이어진다. 몽족은 18세기에 중국을 떠나 라오스로 왔다. 그곳에서 푸른 염색은 ‘바틱’이라 불린다. 오래고 고된 시간 동안 여인들은 화포에 무늬를 넣어왔다. 그것이 그녀들의 역사다. 라오스의 몽족은 중국 땅에서 이주해왔고, 베트남 전쟁 동안 미국의 용병이 되고, 전쟁이 끝난 후 흩어져 태국으로 망명하거나,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저자는 베트남의 디엔비엔푸와 박하로 향한다. 지역마다 화포가 담고 있는 그림들은 다르고, 그것들은 시간과 장소의 역사의 기호이고, 삶의 문양이다.
저자는 중국의 샤오싱에서 항저우로 이어지는 운하에서 『표해록』의 저자 조선의 최부를 떠올리고 그 일행의 난파와 표류 그리고 귀향(歸鄕) 길을 되짚는다. 중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화포는'시보리'가 되고 이것은 다시 '노렌'과 같은 형태로 일상에 스며들어 있다. ‘노렌’은 발이나 커튼의 형태다. 기록으로 남아있는 일본의 쪽 염색은 8세기에 시작되었고, 일본의 방식대로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을 ‘저팬 블루Japan Blue’라 부른다. 교토 왕궁 서쪽에 자리잡은 니시진은 교토의 섬유와 염색의 중심지다.
저자 를 이 길로 이끈 것은 박지원이 옷을 해 입었다던 화포에 대한 기록 때문이다. 조선에서 만든 것인지, 중국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이 기록 때문에 길을 떠나, 쪽빛 길(Blue road)을 걷는다. 염색가 신상웅, 그의 쪽빛 탐구는 내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었다. 박제가의 <연평초령의모도>를 추리한 『1790년 베이징』이라는 책을 썼다고 하니 찾아 읽어봐야겠다.
* 출판사로부터 책을 무료로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