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 희곡선 을유세계문학전집 53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박현섭 옮김 / 을유문화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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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명동의 극장에서 연극 갈매기를 봤었다. 이 내용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갔던 나는 전하려는 메시지를 대략 짐작만 하고 감동도 공감도 하지 못했었다. 가볍게 던져지는 대화들과 주인공의 자살이 맥락 없이 다가왔다. 연기나 연출의 문제가 아니라 체호프의 작품 자체가 그런 느낌을 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19세기 말 안톤 체호프는 러시아 문학사에 있어 공백 시대에 등장했다. 네크라소프, 도스토옙스키, 투르게네프가 세상을 떠났다. 톨스토이는 절필을 선언했다. 그런 시기에 체호프가 등장했다. 초기에는 코믹하고 가벼운 글들을 썼고, 그레고로비치로부터 칭찬과 격려의 편지를 받고서야 지방의 의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었다. 그의 단편과 희곡들에서 엿보이는 것처럼 체호프는 개인주의자였고 예술가의 시선을 갖고 있다. 그래서 1890년 강제 유형에 처해진 사람들의 삶을 취재하기 위해 사할린으로 여행을 간 것은 아이러니하다. 이 여행 때문에 병을 얻었고 그가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는 이유가 된다. 그는 지방의 의사로 있으면서 관찰한 사람들의 모습을 작품에 담았고, 그의 작품에는 의사가 등장한다.

 

이 희곡집에는 갈매기, 바냐삼촌, 세자매, 벚나무 동산체호프의 4대 희곡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이 담겨있다. 이 희곡들은 러시아 농촌 사회의 전형적인 인물들과 이 농촌을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도시의 귀족 또는 지식인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대화의 전반적인 정서는 우울이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당시 정치적 암흑시대의 러시아인들의 무기력과 자기중심주의를 읽게 된다. 사실 체호프는 정치에 무관했기에 지식인들의 이런 정서와 태도는 농촌소외와 더 관련있는 것으로 보인다. 철도의 발달과 외국 자본의 유입으로 경제는 호황이었다. 이와 더불어 철도건설은, 농노해방으로 시작되었던 사람들의 도시로 유입은 더욱 가속화했다. 19세기 말 러시아의 도시 인구는 급격하게 팽창했다. 반면 농촌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 패배감으로 인해 우울함을 갖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마샤와 메드베덴코의 우울함은 표면적으로 엇갈린 사랑때문인 것처럼 보이나 이들의 대화를 읽어보면 더 근본적인 이유들을 보게 된다왜 항상 검은 옷을 입느냐고 질문하는 메드베덴코에게 마샤는 불행하기 때문에 입는 인생의 상복이라 말한다. 그런 그녀에게 메드베덴코는 가난에 대해 토로한다. 마샤는 트레플레프를 사랑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메드베덴코와 결혼한다. 과연 메드베덴코는 그녀를 사랑해서 구애했을까? 그의 구애가 너무 열의가 없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의심을 하게 된다. 아마도 두 사람에게는  체념이 반복되어 습관이 되어 있는 듯 보인다.

 

트레플레프는 여배우 아르카디나의 아들이다. 그녀는 자기애가 강하고, 그래서 아들은 사랑이 결핍되어 있다. 그는 유명한 여배우의 아들로 항상 사람들의 평가를 의식하고 인정욕구가 강하며 자의식이 강하다. 당시 무대에 올려지는 연극을 구태의연하다고 비판하고 오만하다. 그는 새로운 형식의 희곡을 쓰고 무대를 선보인다. 가정극 공연을 위해 작은 무대가 세워지고 그의 희곡은 올려지지만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의 어머니의 비웃음을 산다.


주목하게 되는 지점은 트레플레프 주변인들이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있고, 이해하려고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연인 니나도, 그의 작품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는 도른조차도 그런 듯 보인다. 그의 고통의 깊이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심지어 죽은 갈매기라는 복선, 광기를 보이는 그의 행동들에서도 그의 자살 시도에 대한 아무런 전조를 읽지 못한다. 죽음을 가져온 두 번째 자살은 더욱 갑작스럽다. 관객조차도 그의 이런 심리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다.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자신의 관심과 문제에 몰두해 있어 누군가의 말을 듣고 들여다볼 여유가 없음을 알게 된다. 그들의 스몰토크, 날씨 이야기, 농담 속에 외로움이 묻어나고 있다. 많지도 않은 사람들이 각자의 고민에 빠져 있으면서 그들 속에서 서로 소외시키고 소외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트레플레프는 왜 그런 무대를 올렸을까? 아르키디나가 어렴풋이 느낀 것처럼 모친인 그녀를 조롱하기 위해 난해한 작품을 올린 것이 아닐까? 모친으로부터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과 증오하는 마음이 뒤섞여 있음을 보게 된다.

 

트레플레프는 왜 죽음을 택했을까? 니나가 그의 곁을 떠나고, 그는 절망감에 자살시도를 한다. 시간이 흐르고 그는 글을 써서 성공한 작가가 된다. 새로운 형식의 글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도른은 그 사람은 이미지를 통해 사고할 줄 알아요. 그 사람 소설은 색감이 풍부하고 선명해요. 나는 그걸 강하게 느낍니다. 다만 안타까운 점은, 분명한 쟁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냥 인상을 던져 줄 뿐, 그 이상이 없어요. 사실 인상 하나만으로는 멀리 나갈 수 없거든요.(체호프 희곡선을유출판사, 96p)”라고 말한다. 그렇듯 트레플레프는 한계를 느낀다.

 “새로운 형식에 대해 그렇게 떠들어 댔지만, 지금 보니 나 스스로 점점 타성에 빠져들고 있어.(체호프 희곡선을유출판사, 98p)”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는 오래 멀리 끌고 갈 수 없다. 그는 작품에서 진부함과 따분함을 지우기 위해 다시쓰고 지우기를 반복한다.

 

트레플레프 뿐 아니라, 그가 라이벌이라 생각하는 트리고린의 말을 통해서도 작가로서의 고통을 전하고 있다. 아마도 체호프의 작가로서 고충이 녹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모친 아르카디나는 데카당하다고 비판하고, 관객의 호감을 사지 못했던 그의 작품이 후에는 사람들의 높은 평가를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모더니즘, 이미지나 상징, 허무의 냄새가 가득한 전위적인 작품을 시간이 지나고서야 대중이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도른의 말처럼 전달하는 메시지와 분명한 쟁점을 던지지 못함으로 그는 한계에 부딪친다. 애초에 그의 글쓰기의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질문하게 된다.

 

또한 도시로 갔다가 트리고린에게 버림받고 배우로도 성공하지 못한 니나가 찾아왔을 때, 그는 니나에게 곁에 있어줄 것을 호소한다.

 “나는 외롭습니다. 내 마음에 온기를 전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나는 마치 지하에 있는 것처럼 추워요. 그래서 무엇을 쓰든 간에, 내 작품은 모두 메마르고, 딱딱하고, 음울해져요. 여기 남아 줘요, 니나, 제발 부탁해요, 아니면 당신과 함께 가도록 해 줘요!(98p)” 

얼마나 외롭고 처절한 부탁인가?

 

그는 작가로서 한계와 상실의 심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 죽음의 갑작스러움에서 체호프에게 감탄하게 된다. 아무 정보 없이 봤던 연극에서 내가 너무 개연성이 없다는 생각을 했던 이유인 듯하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이 체호프의 의도였다.

 

트레플레프의 사랑의 결핍으로 인한 구멍은 작가로서의 성공, 사람들의 인정과 같은 것으로 메꿀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글을 씀으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지만, 그는 그렇지 못했다. 한계를 만나고 더욱 깊은 절망에 빠졌다.

 

갈매기의 트레플레프의 자살(갈매기)도 바냐삼촌의 절규(바냐삼촌)도 모두 갑작스럽다. 겉으로 드러나는 그런 갑작스러움만 본다면 체호프가 그리려는 인물들을 지나친 것이다. 그의 인물들은 지극히 평범하다. 나보코프는 "체호프는 등장인물을 교훈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고, 인물을 미덕의 전형으로 만들지 않고, 살아 숨 쉬는 인간상 그대로를 정치적 메시지나 문학적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그려낸다"고 말한다. 한 인물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가 관찰한 필부 필녀를 그대로 그리고 있다. 이들이 만나 어떤 사유의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체호프의 등장인물들은 진정한 도덕과 정신문화, 물질적 안정과 풍요가 러시아 민중에게 뿌리 내리지 않는 한, 고매한 지식인들께서 선술집 옆에 다리나 학교를 짓느라 아무리 고군분투하더라도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나보코프, 러시아 문학 강의 456p)”

 

사람은 다 자신의 문제에 몰두해 있다. 가까운 사람이라도 타인의 고통에 오랫동안 관심을 두기란 어렵다.- 나의 문제가 가장 크고 당면한 문제이기에.  당연히 트레플레프와 같은 사람은 소외된다. 개인주의가 이제는 삶의 규범처럼 되어서 개인의 사생활은 침해당할 수 없는 영역이 되었다. 그 영역들의 모임에서 트레플레프와 같은 사람들은 원하지 않는 추방을 당하게 된다. 19세기말 러시아 농촌 소도시 체호프가 그려내는 사람들은 다 외로웠다

 

나는 고통받는 타인에게 어느 정도 얼마나 지속적으로 관심을 둘 수 있을까? 그의 요청이 없다면 무관심해도 괜찮을까? 혹시 내가 놓쳤던 사람들은 없을까? 등 이런 질문들이 꼬리를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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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4-10-16 1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통 받는 타인들에 대한 지속적
관심을 유지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내가 가진 백만 한 가지 문제들
때문이라는 이유를 대면서 말이죠.

나는 외롭고 싶지 않지만 또 타
인의 외로움은 잘 모르겠다 -

아, 쉽지 않은 명제입니다, 참말로.

그레이스 2024-10-16 19:09   좋아요 1 | URL
^^ ㅠㅠ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인간의 고통은 변함이 없죠
표면적 이유만 달라졌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