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통 바슐라르는 묻는다.


우리들이 몸을 담은 적이 있었던 모든 집들의 추억들을 통해, 우리들이 거기서 살아보기를 열망했던 모든 집들 너머로, 그 집들의 내밀하고 구체적인 본질을, 보호받는 내밀함의 모든 이미지들이 각각 가지고 있는 특이한 가치를 타당하게 할 그러한 본질을 추출할 수 있을까?

-114p, 공간의 시학


하재영 작가의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는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작가의 집에 대한 글은 바슐라르의 표현대로 하면- 집 주위에 수많은 이미지를 결집시키고 있다. 그녀는 살았던 집을 통해 개인의 역사를 이야기 하고 있다. 더불어 내밀한 공간에서 관찰되는 사회학, 도시생활자가 경험하는 주거의 경험으로부터 공간점유에 대한 철학으로까지 확장시키고 있다. 쉽게 읽혀지지만 그녀가 던지고 있는 문제를 풀어가는 것은 쉽지 않다.

 

작가는 글을 시작하면서 왜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인 20세기 중반의 풍경에 향수를 느끼는지스스로에게 질문한다. 그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살았던 동네의 풍경에서 비롯된 이미지 때문이다. 유년시절 살았던 집의 모습과 장면을 소묘한다. 방공호로 사용되었던 지하실과 다락으로 이어지는 수직 이미지. 한옥의 형태로부터 개조되고 덧붙여진 평면 이미지. 그리고 일상의 이미지들. 모두가 휴식을 갖는 시간에도 여전히 주방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어머니가 만들어낸 기이한 이미지. 그 집에서 경험한 유년기의 내밀한 사건과 어른들에 대한 기억은 단지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내면에 그들의 삶의 방식, 관념, 정서들을 새겨놓았다.

 

그러나 우리들이 태어난 집은 추억들 너머로, 신체상으로 우리들 내부에 새겨져 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기관들이 가지고 있는 습관들의 모음인 것이다. ……

그 이후 우리들은 여러 집들에 연이어 살아옴으로써 우리들의 몸짓은 아마 범상해져 버렸을 것이다그러나 우리들은 수십 년의 방랑 후에 옛집에 되돌아왔을 때우리들의 가장 미묘한 몸짓들이원초의 몸짓들이 느닷없이변함없이 완벽한 것으로 되살아옴에 아주 놀라게 된다요컨대 우리들이 태어난 집은 우리들 내부에 여러 가지 거주하는 기능들을 서열적으로 새겨놓은 것이다.

-129p 공간의 시학


오래된 옛집의 지하실과 다락방에 대한 기억은 작가에게는 구석이다. 수시로 어른들에게 침범당했던 유년기의 방 대신에 사색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장소이다. 바슐라르가 말하는 어린시절 고독과 안정을 주는 그 자신의 조개껍데기였고, 몽상을 위한 구석진 공간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지난 고독들의 모든 공간들은, 우리들이 고독을 괴로워하고 고독을 즐기고 고독을 바라고 고독을 위태롭게 했던 그 공간들은, 우리들 내부에서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123p 공간의 시학


구석과 관련된 유년의 기억 중 모두가 공감하는 마음 아픈 장면은 어머니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한다. 그것은 그의 유년기의 심상에 새겨져 있는 부조리한 풍경이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독서를 좋아했던 어머니가 고단한 가사일 중간 중간 짧은 휴식시간에 책을 읽던 곳은 주방의 식탁이었다. 책을 읽던 그 순간은 그 주방 식탁이 그녀의 서재였다. 바슐라르의 표현으로 하자면 몽상을 위한 '구석'인 것이다.

 

집안의 제 구석에 들어앉아 평화로움 가운데 있다는 의식은, 부동성을 주위로 전파한다. 우리들은 구석에 몸을 피하고 있을 때, 스스로가 잘 숨겨져 있다고 믿는 우리들의 몸 주위에 하나의 상상적인 방이 건조된다. 그늘은 이미 벽이 되고, 가구는 울타리가, 벽포는 지붕이 된다. 부동성의 공간은 존재의 공간으로서 지적되어야 한다.

- 115p 공간의 시학


엄마의 독서, 사색, 휴식은 수시로 멈춰졌다고 한다. 할머니가 집안일을 시키거나 아빠가 출출하다고 말할 때, 또는 아이들이 사소한 것을 요구하는 순간에. 


독서 행위는 그 공간을 서재로 만들고 있다. 그 순간의 행위는 그녀를 독서하는 인간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누구나 침입할 수 있는 식탁이나 소파라는 공동장소는 언제든지 그녀의 존재를 주부로 되돌리고 있는 것이다. 주방은 그녀가 가장 오래 머무는 공간이었다.


 내가 있는 공간, 나는 바로 그것이니

-노엘 아르노 초벌상태에서 인용, 283p 공간의 시학


가부장적인 집에서 어머니의 삶을 일제의 적산가옥과 독재정권을 떠올리게 하는 건물들이 남아있는 북성로의 거리의 기억과 병행시키며 1다크 헤리티지편을 마치고 있다. 그녀가 경험한 집에도 다크 헤리티지, 네거티브 헤리티지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작가는 이 장을 마무리하며  ‘집은 나에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한다.

 

조부모님과 분가해 부모님과 부촌의 빌라로 이사하면서, ‘어디에 사는가가 계층을 나누고 길과 담이 신분제 공간을 만드는 경계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된다. 그러한 분위기에 대해 순진했던 태도는 아이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할 이유를 만들기도 한다. 가세가 기울고 열악한 환경의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경계 반대편의 주거와 배제당하는 타자의 삶을 경험한다.

 

21살에 서울에 올라와 혼자 살면서 어디에 살아?’라는 질문은 여전히 경계와 배제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한다. 서울의 재개발 지역과 산동네 다세대주택을 전전하며, 집과 거주지가 가난을 정의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런 환경의 동네로 흘러들어오는 도시빈민들의 삶을 바라보며 주거환경이 삶의 태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한다. 도시에서 살고 있는 여성들이 경험하는 가장 절실한 감정은 불안일 수밖에 없다. 하루 종일 집에서 작업을 해야 하는 작가인 그녀는 더욱 이 감정에 시달렸을 것이다. 한편 방 한 칸을 안락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벽지를 바르고 가구를 배치하는 노력은 집은 나에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자기만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집이란 세계 안의 우리들의 구석인 것이다. 집이란 흔히들 말했지만우리들의 최초의 세계이다. 그것은 정녕 하나의 우주이다. 우주라는 말의 모든 뜻으로 우주이다. 내밀하게 파악될 때, 더할 수 없이 비천한 거소(居所)라도 아름답지 않겠는가? ……

피난처에 보호되어 있는 존재는 더할 수 없이 끝없는 변증법을 통해 그 피난처의 경계에 민감성을 부여한다그는 생각과 꿈을 통해 집을 그것의 실제태 가운데 사는(體驗것이다.

그리되면 그때부터 모든 피난처들은은신처들은모든 방들은 여러 <살아지는것은 실제적인 측면에서가 아니게 되면 집의 혜택을 깨닫게 되는 것은 단순히 현재에서만은 아니게 된다참된 안락이란 과거를 가지고 있는 법이다.

-116p 공간의 시학


비천한 공간에 사는 작가들은 그 공간에 대한 묘사만 있을 뿐, 그 공간의 내밀함을 파악하려고 하거나, 그 공간에 오래 머물려 하지 않는다고 바슐라르는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에곤 쉴레의 그림을 걸고, 벽지를 바르고 쾌적하게 하려는 노력은 그와 대비되는 행위이다작가는 자기만의 사색의 공간을 찾고 있다는 생각이다. 

 

결혼을 하고 신혼집을 거쳐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 옮겨와 정원에 나무를 심고 벽지를 고르고 가구를 배치하는 모습은 집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보여준다. 아파트가 아닌 빌라, 개인 주택을 선택한 것은 집에 대한 철학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내공간의 배치 방향은 집은 나에게 무엇인가?’에 대한 자신의 답을 찾은 모습이라 생각된다. 거실에 자신의 책상을 놓고 남편과 자신의 작업의 형태와 머무는 시간을 고려해서, 점유하는 공간을 배분하는 모습은 유년기에 새겨진 어머니의 풍경과 관련된 의식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가족이 함께 하는 공간 안에서도 불평등과 소외가 존재한다.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 「이라는 장에서 집은 인간의 사상과 추억과 꿈을 한데 통합하는 가장 큰 힘의 하나라는 것을 말한다.


이 통합에 있어서 연결의 원리는 몽상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집에 각각 다른 역동성을, 때로는 서로를 부추기기도 하며 흔히 서로 겹치는 각각 다른 역동성을 부여한다. 집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우연적인 것들을 제거해 주며, 지속의 조언을 수다히 들려준다. 집이 없다면, 인간의 존재는 산산히 흩어져 버릴 것이다.인간은 성급한 형이상학들이 가르치듯 <세계에 내던져>지기에 앞서, 집이라는 요람에 놓여지는 것이다.

- 118p 공간의 시학


기억을 생생하게 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시간의 기억은 구체적인 지속을 새겨놓지 못한다. 모든 시간의 불연속적인 기억들을 제거하고 나면 거기에는 공간에 대한 기억들이 남게 된다. 우리의 시간과 기억은 그 공간 속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추억을 시간 가운데 위치시킴은 전기 작가의 관심사일 뿐이며, 말하자면 외적인 역사, 외적인 용도를 위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역사에 밖에는 관계되지 않는 일이라고 바슐라르는 말하고 있다.

 

그녀의 집은 추억과 꿈, 그리고 사상이 한데 어우러져, 한 개인의 역사가 아닌 그가 살아 온 시대를 담고 있다. 안타까움과 슬픈 장면들이 있었지만 그녀의 집은 행복으로 수렴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의 집들은 어떠했고 이제 어떤 집을 만들어 갈 것인가를 그려본다. 가족 모두가 행복한 자기만의 구석자리가 있는 집이길...

 

그리하여 글의 첫마디를 읽자마자, 시를 펴들자마자 곧 <방을 읽는 독자>는 독서를 멈추고 어느 옛 거소를 생각하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128p 공간의 시학


 

 

집이여, 초원의 한 부분인, 저녁의 불빛인 집이여

너는 갑작스레 사람의 얼굴을 얻는다

너는 안으며 안기며 우리 곁에 있다

- 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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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5-03 21: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민음사 이데아총서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시학>은 품절상태라 사진만 올렸습니다. 동문선에서 나온 책 번역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mini74 2021-05-04 09:5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내가 있는 공간, 나는 바로 그것이니. 이 구절 읽고 주변을 둘러봤습니다. 왠지 주섬주섬 치우게 됩니다 ㅎㅎ

그레이스 2021-05-04 10:09   좋아요 4 | URL
^^
미니님은 독서하는 존재, 호모 부커스 이시죠!

scott 2021-05-05 00:3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우와! 그레이스님은 이책을 가스통 바슐라르와 연결을!
전 조르주 페렉 작품 떠올렸는데 ㅎㅎ

그레이스 2021-05-05 12:10   좋아요 4 | URL
<공간의 종류들>이군요 scott님 페이퍼 찾다가 실패하고 조르주 페렉 검색했습니다. 읽어봐야겠네요.

저는 여러가지 책을 다시 들춰봤는데요 <인간 장소 심리학>, <모두스비벤디>, <사람,장소,환대> 등이요.
작은 책이라 가볍게 읽으려고 했다가 공간에 갇혔습니다. 리뷰를 쓰기까지 한참 걸렸습니다.ㅋ

scott 2021-06-04 20:2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2관왕 १✌˚◡˚✌५추카

그레이스 2021-06-04 20:37   좋아요 2 | URL
저도 제 글 뭐가 당선됐는지 몰라서 궁금하던 차였는데 이렇게 알려주시니 감사해요 ~♡

mini74 2021-06-04 20: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두 배로 추카추카. 뭐 또 다들 책 사시겠지요. 그리고 또 리뷰 쓰시겠지요 ㅎㅎ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그래이스님 *^^*

그레이스 2021-06-04 20:36   좋아요 4 | URL
벌써 마음으로 정해놓았습니다 ㅎㅎ
감사드려요
미니님도 주말 행복하게 보내서요

청아 2021-06-04 20: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2관왕 추카추카드립니당~♥

그레이스 2021-06-04 20:36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

새파랑 2021-06-04 2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늦었지만 축하드려요 ^^

그레이스 2021-06-04 21:1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서니데이 2021-06-04 21: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축하드립니다^^

그레이스 2021-06-04 21:29   좋아요 2 | URL
감사드려요~♡

초딩 2021-06-04 2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앙 그레이스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2.관.왕! 축하드려요 ^^ ㅎㅎㅎㅎ

그레이스 2021-06-04 22:58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
 
페테르부르크의 대가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책세상 / 200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즈음 북플에서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이 많이 올라오는 것을 보며 쿳시의 도스토예프스키를 소재로 한 소설이 기억나서 소개합니다.
저는 재미있게 읽었어요.
작품에 대한 광기와 그로 인한 도덕성의 결여에 집중해서 어떤 분들에게는 조금 불편할 수 있으나, 작가와 글쓰기는 무엇인가?를 질문해볼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또한 그의 발작증세 중에 경험하는 환각상태 또한 의문과 거부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픽션이고, 작가의 욕망과 고통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독보적에 올리면 안보이는군요 ㅋㅋ
아직도 서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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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5-01 14: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도선생님 소재라니 급 관심이 가네요. 별도 다섯개이구~★★★★★

청아 2021-05-01 14:5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추락>넘 재밌게 읽었는데 이 책도 솔깃합니다. 의외의 책들 잘 찾아내시는 그레이스님^^

그레이스 2021-05-01 17:23   좋아요 3 | URL
추락 재미있죠?!
쿳시책 좀 읽었어요
주로 지위나 권위있는 사람들의 부조리?에 대해 쓰는것 같아요.

‘포‘라는 작품은 다니엘 디포를 디스한거고 ‘야만인을 기다리며‘도 추락과 비슷한 주제.
한 인간의 수치에 대하여 썼다는 생각입니다.

mini74 2021-05-01 18: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철의 시대를 읽고 참 좋았어요. 이 책도 욕심나네요 *^^*

그레이스 2021-05-01 19:48   좋아요 2 | URL
철의시대 읽어볼께요
감사합니다 ~
 

요즈음 북플에서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이 많이 올라오는 것을 보며 쿳시의 도스토예프스키를 소재로 한 소설이 기억나서 소개합니다.
저는 재미있게 읽었어요.
작품에 대한 광기와 그로 인한도덕성의 결여에 집중해서 어떤 분들에게는 조금 불편할 수 있으나, 작가와 글쓰기는 무엇인가?를 질문해볼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또한 그의 발작증세 중에 경험하는 환각상태 또한 의문과 거부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픽션이고, 작가의 욕망과 고통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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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따뜻해지니 책 들고 궁궐 한바퀴 돌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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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1-04-27 2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따뜻하고 좋은 밤 되세요.^^

그레이스 2021-04-27 2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도 좋은 꿈 꾸시길...
 
살아있는 갈대
펄 벅 지음, 장왕록.장영희 옮김 / 길산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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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갈대

“만세……만세!”
연춘은 더 이상 외치지 못했다. 즉시 총이 겨누어지고 총성이 울리는 순간 그는 목숨이 끊어진 채로 흙바닥에 나뒹굴게 된 것이다.

일본이 항복하고 독립운동을 했던 연춘은 조국이 일본에서 미국과 러시아에 이양되고 있는 절차를 조바심 내며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미군이 들어오는 날 아침. 태국기와 성조기를 든 환영 인파를 일본총독은 통제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미군을 환영하며 뛰어나갔던 사람들은 일본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진다. 조선인들을 해산시키고 일본 관리들은 현 직책을 유지하라고 미군으로부터 하달된다. 이것이 일본의 항복이후 한 달이라는 기간이 지난 후 해방정국이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연춘은 만세를 부르며 길 한가운데로 뛰어나가고…… ‘살아 있는 갈대’가 죽은 것이다.
갈대는 꺽여도 죽지 않고 살아난다.

‘살아계신가요?’
살아있다! 큰아버지는 ‘살아 있는 갈대’ 였다. 몸은 비록 무덤에 누워 있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되뇌었고, 어떤 이들은 그가 탈출한 감방의 거친 돌 틈으로 죽순이 솟아나왔다는 오랜 전설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관에서는 탈출하지 못했으며, 사람들은 그것을 슬퍼하였다.…… 귀에 큰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봄이 되면 대나무의 늙은 뿌리에서 푸른 새순이 솟아난다. 늘 그래 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야. 인간이 태어나는 한은.”

이 소설은 조선말 개항 후부터 1945년 광복까지 일한· 그의 아들들 연춘과 연환· 손자 양과 사샤에 이르는 3대에 걸친 일가의 이야기이다. 펄 벅의 작품으로 대지 3부작이 왕룽의 3대를 다루고 있다면, 이것은 구한말을 거쳐 일제강점기의 시대를 거치는 3대의 이야기이다. 작가는 한국에 특별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일한은 임오군란, 갑오개혁, 을미사변, 을사조약에 이르는 기간 조선의 왕가와 친밀한 관계에 있는 상류층 양반으로서 근대사의 격랑 한가운데를 지난다. 위기의 상황에서 민비의 피신을 돕고, 시해사건이 있던 날 왕궁으로 달려가 시신의 한 조각을 수습할 만큼 민비의 신임을 얻고 왕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미국과 한미수호통상조약을 맺고 사절단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 역시 井底之蛙! 당시 세계정세와 제국주의의 거센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의 주저하는 모습들은 당시 조선의 모습을 닮았다.

한일 합방 후 밤에 몰래 아이들을 위해 서당을 여는 일한. 아들 연춘은 조선의 상황에 분노하고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 결사를 하고 독립군이 되어 집을 떠난다. 둘째 연환은 신여성과 결혼을 하고 기독교로 개종을 한다. 3.1 운동을 기점으로 일본의 탄압은 심해지고 연환부부는 교회방화 학살로 죽음을 당하게 된다. 연환은 새로운 사상과 문화에 심취하고 향유하지만 결국 동포들이 겪는 고통에 눈을 뜨게 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전쟁이나 식민지 상황은 사람들을 평범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이편이든 저편이든 서게 한다. 그것은 마치 개인으로 하여금 가만히 서있는 군중 사이에 줄을 들고 와서 선을 긋는 행위처럼 느껴지게 한다. 친일이든 항일이든 좌이든 우이든. 민초들은 바람이 부는대로 이리 저리 휩쓸리고, 그들은 온전히 역사의 상황 한가운데 던져진 것처럼 느껴진다.
연춘은 해방이 된 조국의 아침에 미군을 환영하러 온 군중들 사이에서 미국 장국이 총독에게 칼을 받는 의식을 보며 마침내 자신이 있을 자리를 결정한다. 분노였을까 절망이었을까 때늦은 후회였을까.

무지(無知), 무사유(無思惟) 그것은 책임져야 할 과오인가?
슬프고도 가슴이 무거워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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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4-27 23: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펄벅이 한국사에 관심이 상당히 깊었나보네요?! 바로 찜합니다♡

scott 2021-04-27 23: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국 혼혈아의 일생을 담은‘새해‘라는 작품이 있고 한국 어머니의 모성애를 그린 ‘어머니‘라는 작품이 있는데 한국에서 번역되었는지 모르겠네요

bookholic 2021-04-28 00: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옮긴이들 때문에 ˝읽고 싶어요˝ 눌렀습니다...

mini74 2021-04-28 17: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펄벅이 한국을 배경으로 쓴 소설이군요 찜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