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9세기 한국 미술을 공부하기 전 전통미술의 상징'을 먼저 배우고 있다(옛그림을 보는 법』으로). 서양화로 말하면 도상학인 셈이다. “그림은 소리 없는 시이고, 시는 형태 없는 그림이라고 했던 곽희나 그림가운데 시가 있고 시 가운데 그림이 있다고 했던 소동파의 말 속에 담긴 시화일체사상(詩畫一體思想)과 기원의 상징이 된 생물과 기물들을 담은 그림 감상법에 대해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19세기까지 화가들에 대해서도 익히게 된다


18세기 후반 광통교 일대에는 서화판매점들이 생겼다. 왕실과 사대부들이 향유하던 미술문화가 서민들에게까지 확장되면서 민간에 미술시장이 만들어졌다. 술을 좋아했다는 오원 장승업(1843~1897)이 광통교 주변에서 그림을 그리고 다녔다는 사실은 그만큼 이 지역에서 미술품 거래가 활발했음을 알려주는 일화다.

광통교에 서화 가게가 생기게 된 것은 그 근처에 있던 도화서의 존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19p)”

도화서 화원들이 궁궐 외로 주문을 받았던 양반들은 대부분 북촌에 살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북촌과 광통교를 잇는 인사동이 서화골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우연히 읽게 된 이 경성의 화가들근대를 거닐다』 두 권(북촌편서촌편)은, 전통 미술 계보를 잇고 서양화를 받아들인, 근대 화가들의 이야기를 북촌과 서촌이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풀어낸 책이다.

 

북촌과 서촌은 미술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북촌은 조선시대 명문 집안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고, 서촌 지역은 주로 역관들이 자리를 잡고 있던 곳이고, 일제강점 이후 궁궐이나 총독부와 관련 있는 신흥 부자들이 살고 있어서 경제적 여유가 있던 지역이었다. 이들은 미술계의 고객과 후원자 역할을 했다. 점차 많은 미술가들이 북촌과 서촌에 몰려들었고, 화숙(畵塾)들이 생겨났다.

 

종로구 청진동에서 태어나고 살았던 심전心田 안중식(1861~1919)은 오원의 적통을 잇는 화원이었고 새로운 미술운동의 중심에 있던 동양화단의 좌장(23p 북촌편)”이었다. 그는 그의 집에 경묵당(耕墨堂)’이라 이름을 붙이고 개인 화실을 만든다. 그의 화실에서 3년을 배웠던 고희동(1886~1965)은 도쿄미술학교 서양학과에 입학한 최초의 서양 화가다. 안중식은 1911년 설립된 최초의 근대적 미술교육기관인 서화미술회를 이끈다. 서화미술회출신 이용우(1902~1953), 오일영(1890~1960), 이한복(1897~1944), 김은호(1892~1979), 박승무(1893~1980), 최우석(1899~1964), 노수현(1899~1978), 이상범(1897~1972) 등은 훗날 근대화단의 중심인물들이 된다.

 

저자는 북촌과 서촌을 중심으로 거주하며, 화숙을 열고 창작활동을 했던 동양화가와 서양화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지석영의 형 서화가 지운영, 김정희의 제자 오경석의 아들인 전각의 명인 오세창, 마지막 내시 출신화가 이병직, 임금의 초상을 그린 인물화의 귀재 김은호, 산수화의 거장 배렴, 월북 작가 중 북에서도 명성을 누린 이석호, 김기창, 장우성 등은 북촌편에 소개되고 있는 작가들이다. 그 중에서도 춘곡(春谷) 고희동은 끝까지 하지는 못하고 동양화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한국에서 서양화의 첫발을 내디딘 작가로 이름을 알린다. 이병직의 얌전하고 단정한 그림과 글씨는 시선을 끈다. 스승 김규진의 필치를 벗어나 자신만의 기법을 갖춘 그림들이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미술계도 새로운 구조로 재편되는데 서양화에는 김관호, 이인성, 오지호, 동양화에는 안중식과 조석진의 제자들로 김은호, 이상범, 이한복, 이용우, 등이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이 이름을 내고 있었다. 순종의 어진을 그린 천재화가 이당 김은호는 권농동 낙청헌화숙을 연다. 17세의 김기창이 찾아간 곳이 이 낙청헌이다. 그 후 그는 낙청헌을 떠나 도쿄미술학교에서 유학한다.

 

일제강점기에 많은 화가들이 중앙고와 휘문고를 거쳐 도쿄미술학교로 유학을 했다. 그들의 등용문은 조선미술전람회였다. 이 전람회 주최는 총독부였고, 재능 있는 화가지망생들을 지원했다. 이때 설립된 미술가협회와 교육기관 역시 일본의 후원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 전람회에서 요구하는 그림의 주제 역시 식민 통치의 방향에 적합해야만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낙청헌출신 장우성의 <귀목>이란 그림을 들 수 있다. 1935년 제 4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한 작품이다. 식민지 한국의 풍경을 서정적으로 묘사하여 당시 조선총독부가 주창한 향토색을 구현한 전형적인 작품이다. 진취적 기상보다는 원초적 풍습과 소박한 풍경을 담은 그림을 통해 미개함을 주지시키려는 의도를 담았다는 비판을 받는다. 같은 낙청헌출신 백윤문은 일본인을 비하하는 듯한 그림을 출품해서 불려가 조사를 받고 기억상실증에 걸려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서촌편에서는 서양화가들이 많이 소개된다. 아무래도 역관들이 자리 잡았던 동네라는 성격과도 통하는 분위기가 있지 않을까싶다. 이 서촌 편에서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내용은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 동문 나혜석, 천경자 두 사람의 여류작가들과 월북 작가들에 대한 소개다. 북촌편에서 박래현이 김기창 편에서 잠깐 소개된 것이 아쉬웠었다. 많은 지식인들이 사회주의에 경도되어있던 시절 예술계에도 광복 후 자신의 사상을 분명히 드러낸 작가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정현웅, 동양화가 이여성 서양화가 이쾌대 형제 들이 그 예다. 북촌편에서 소개되었던 이석호와 달리 그들은 월북이후 화가로서 공명(功名)을 얻지는 못했던 것 같다.

 

경복고등학교는 많은 서양화가들의 산실이 되었는데, 일제강점기 시절 2고보였던 이 학교에서 가르쳤던 야마다 신이치와 사토 구니오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야마다 신이치는 조선미술협회를 설립한 일본인 3인 중의 한사람이다. 야마다 신이치의 뒤를 이어 부임한 사토 구니오의 지도를 받아 화가로서 성공한 인물들이 유영국, 장욱진, 임완규, 김창억, 이대원, 권옥연 등이다. 서촌을 중심으로 활동한 서양화가로는 미국유학을 다녀온 장발(張勃 1901~2001), 프랑스에 유학한 이종우, 도쿄미술학교 출신 이제창 ·공진형 등 이다. ‘옥동패라 불린 이승만, 김중현도 서촌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누하동, 사직동, 옥인동 등에 살던 그들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이웃하고 교류했다.

 

추사 김정희를 추앙해서 추사체를 구현한 이한복, 김정희의 세한도를 되찾아온 손재형은 오늘날 추사 연구에 큰 기여를 한 동양화가들이다. 이상범이 누하동에 청천화숙을 열고, 많은 제자들과 동양화가들이 서촌으로 모여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근대미술사에도 역시 우리 역사와 함께 걸을 수밖에 없다. 예술가들의 삶도 함께 흔들리고 상처와 불운으로 쓰러지고 잊혀지기도 했다. 그림과 글씨에 탁월했던 이완용의 작품, 총독부의 지원을 받은 많은 화가들의 작품과 삽화들을 보면 예술적 재능에 대한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분단과 전쟁 속에서 북으로 향했던 화가들의 작품에 대한 침묵과 저평가, 봉건적인 가부장제에서 비운의 삶을 마감한 여성 예술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작품을 그려냈던 그들의 운명과도 같은 열정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들이 집들은 허물어지고 자취는 사라져도 작품들이 남았다. 그들의 작품은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평가를 받는다.



한국근현대미술전 관람을 가기 전 읽은 두 권의 책은 작품을 감상하는 다른 시선을 갖게 해주었다. 근현대미술사의 맥을 짚게 해주었고, 이번 전시 5개의 섹션 1.우리 땅, 민족의 노래, 2.디아스포라, 민족사의 여백, 3.여성, 또 하나의 미술사」 「4.추상 세계화의 도전과 성취」 「5.조각, 시대를 빚고 깎고중 앞의 3개의 섹션을 장식하고 있는 화가들(이중섭, 박수근, 장욱진, 이인성, 구본웅, 이쾌대, 나혜석, 천경자, 박래현, 김환기, 유영국 등)의 작품을 감상하는데 깊이를 더하게 해주었다.

이쾌대 <자화상>

이쾌대<군상>

이번 전시에서 오래 머물렀던 작품들은 두 번째 섹션 분단미술사에서 족적을 남긴 변월룡과 이쾌대의 작품이다. 변월룡은 러시아에서 태어나 한때 북한의 미술계를 이끌었던 화가다. 이쾌대는 형과 함께 월북 작가로서 가장 저평가되었고, 언젠가 재평가되어야 할 주요작가라는 인식되더니, 급기야는 가장 중요한 근대작가라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의 대표작 <자화상><군상>이 전시되었는데 그런 평가들을 납득하게 한다. 그가 거제 수용소에서 보낸 편지 글귀를 읽으며, 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들, 그 암울한 현실 속에서 빛나는 그의 작품 속 인간의 모습과 메시지가 안타깝기만 하다.

 

5관까지 갔다가 아쉬운 마음에 다시 거슬러 올라가 오래도록 감상한 작가가 박래현이다. 함께 전시되어있는 나혜석이나 천경자의 작품들이야 워낙 자주 만났었고, 그들에 관한 책들도 많이 접했었다. 박래현은 김기창에 가려서 저평가된 작가라고 한다. 부부라 그런지 그림도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로 그들은 작품 변화의 흐름도 함께 했다. 작가의 앵포르멜, 비구상 작품들을 보며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을 납득하게 되었다.

박래현 <이른 아침>


<박래현의 비구상 작품들>


나는 근대사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던 작가들의 작품 앞에서 오래 머물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했다. 여전히 그 역사의 숙제를 유산으로 물려받은, 그 정서를 공유한 자의 인지상정이 아닐까?




보고 있는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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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04-24 20: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분노 ㅋㅋㅋ 잘 읽었습니다~ 화숙이란 단어가 좋게 들립니다...

그레이스 2023-04-24 20:06   좋아요 1 | URL
화숙은 도제식으로 그림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라고 하네요^^

그레이스 2023-04-25 06:26   좋아요 2 | URL
아!
백윤문의 <분노>는 장기판을 뒤엎는 사람이 일본 의상을 입고 있어서, 일본인 비하의도가 있다해서, 고초를 겪고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하네요 ㅠ
오랫동안 작품을 그리지 못하다가 말년에 돌아왔는데 예전 실력으로 회복되지 못했다고 해요.

페넬로페 2023-04-25 22:02   좋아요 2 | URL
저도 ‘화숙‘이란 단어가 좋게 들리네요.
이 단어에 이런 뜻이 있다는 걸 이번에 알았어요^^

그레이스 2023-04-25 22:07   좋아요 2 | URL
~♡
저도 화숙이란 단어 뜻 처음 알았는데, 그곳에 달린 이름도 너무 좋았어요.
~!^

서곡 2023-04-24 2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쯧쯧쯧 설명 감사합니다~~

가필드 2023-04-25 0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한국근대미술전 다녀오셨군요
책 정리도 잘 해주셔서 보기전 읽으면 도움이
많이 될거 같네요 ^^

그레이스 2023-04-25 07:45   좋아요 1 | URL

마침 좋은 책을 읽고 있어서,,, 얼리버드 예매를 해놓긴 했었는데, 다녀오니 읽고 가길 잘했다는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거리의화가 2023-04-25 12: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감상기 잘 읽었어요. 이쾌대나 박래현에 주목이 가네요.
책과 전시까지 한번에... 일석이조의 효과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짬을 내서 다녀오고 싶어졌어요!

그레이스 2023-04-25 13:00   좋아요 2 | URL
전시도 좋았구요
미술관옆 카페에서 몽촌호 바라보면서 커피 한잔 하는것도 넘 기분 좋았어요^^

yamoo 2023-04-25 19: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근대미술 전시....이거 어디서 하나요? 설에서 하면 주말을 이용해 보러가야겠어요!

귀한 후기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3-04-25 19:13   좋아요 1 | URL
소마미술관이예요~~
8월27일까지 합니다^^

yamoo 2023-04-27 13:5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그레이스님~~~

희선 2023-04-26 0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서 북으로 간 사람은 잘 모르기도 하네요 작가도 그렇고 화가는 더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있군요 여성 작가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다니... 박래현 그림 좋네요


희선

그레이스 2023-04-26 07:49   좋아요 1 | URL
예!
저도 박래현 그림 찾아보게 되네요^^

서니데이 2023-04-26 16: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시를 보러 가기 전이 미리 한번 예습하고 가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대충 보고 빨리 지나가게 되더라구요.
옆에서 도슨트 설명을 들으면서 가는 것도 좋지만, 시간 여유있게 보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그레이스님,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3-04-26 16:34   좋아요 1 | URL

오늘 춥네요 ㅠ

페크pek0501 2023-04-27 16: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많은 공부가 되는 페이퍼입니다. 페이퍼를 읽은 저도 공부가 됐는데 여러 책을 읽고 이 페이퍼를 작성하신 그레이스 님은
더 많은 공부가 되었겠습니다. 한 분야를 파는 공부의 매력이 퐁퐁~~ 느껴집니다. 저도 열공하고 싶은 마음이 솟습니다.^^

그레이스 2023-04-27 16:1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파는 것까지는 못하고 몇일 붙들고 있다 쉬었다 다시 하고 그러고 있습니다^^
감사해요 페크님~♡